내란음모로 둔갑된 평화시위
증 언 자 : 이승룡(남)
생년월일 : 1959. 10. 6 (당시 나이 21세)
직 업 : 대학생 (현재 건축사무소)
조사일시 : 198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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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전남대학교는 4월말까지 어용교수 자진퇴진 문제를 일단락짓고 5월이 되면서부터 사회민주화를 달성하기 위해 민족민주화성회를 개최하고 5월 8일에는 시국선언문을 발표했었다.
제1시국선언문 발표 후 5월 13일부터 나는 각 전문대학을 찾아다니며 간부들을 만나 평화적인 가두시위에 동참할 것을 요청하고 다녔다. 14일 단과대학별로 교내에서 진행된 민족민주화대성회가 끝난 후 15일로 예정된 가두시위를 하루 앞당겨 14일 감행하였다. 단과대학별로 진행된 민족민주화성회가 거의 끝나갈 무렵까지 학생수는 점점 늘어갔다. 그때 학생들의 열기는 대단했다. 대회가 끝나자 학생들은 구호를 외치면서 스크럼을 짜고 자연스럽게 교문 쪽으로 나갔다. 그러자 경찰은 일제히 최루탄을 쏘았다. 학생들이 가두시위를 내일 할것이 아니라 오늘 당장 감행하자고 요구하자 총학생회는 즉시 집행위원회를 소집하여 논의한 결과 오늘 가두시위를 실시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하루 앞당긴 것이다.
오후 3시경부터 도착한 시위대는 도청 앞 분수대 주위에서 계속 구호를 외치다 자연대 시위대열이 마지막으로 도청 앞 광장에 도착했을 때 서클연합회장 문석환의 사회로 민족민주화대성회가 시작되었다. 박관현(당시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 형의 개회선언에 이어 제2시국선언문이 발표되었다.
16일 횃불행진을 끝으로 학생시위는 일단락되었다. 학생들은 이제 할만큼 했으니까 앞으로는 정부의 반응을 지켜보면서 그에 따른 대응책을 세우자는 내용의 말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만약 휴교령이나 계엄령이 확대 실시되면 9시에 전남대 정문 앞에서 모이기로 했다.
예비검속에 걸려
17일 아침 관현형과 학생회 간부들과 함께 학교 버스를 타고 도청 앞으로 가서 전날 횃불행진을 할 때 어지럽혀진 거리를 청소했다. 공원 앞에서 국밥 한 그릇을 먹고 헤어진 것이 관현 형과는 마지막이 되었다. 공원에서 헤어진 후 학교로 간 나는 총학생회 사무실을 지키며 유사시에 대비한 연락을 맡기로 했다. 연속 3일 계속된 시위로 피곤하기도 하고 또 토요일인 관계로 학생들이 없는 교정은 무척 한산했다.
이날 서울에서는 앞으로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 갈 것인지 논의하기 위한 전국대학생대표자회의가 있었다. 아마 우리 학교에서는 참가하지 않았을 것이다. 서울에서 저녁 7시경에 전화가 왔다. 연락을 했던 사람이 누구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다급한 여자의 목소리로 '지금 서울에서는 학생회 간부들이 검거되었으니 빨리 피하라'는 내용이었다. 연락을 받고 관현형 등 몇몇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어 이 사실을 알려주었다. 이때 학생회 사무실에는 나와 총학생회 사회부장 오진수, 공대 학생회 총무부장 권창수, 그리고 관현형 후배 1명, 이렇게 4명이 있었다. 얼마 후 서울로부터의 소식을 전해 듣고 총학생회 총무부장이던 양강섭, 섭외부장 이청조 등 두세 명이 사무실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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