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차시(茶詩) 이야기
여름, 벗, 차, 즐거움
박숙희 / 한문교육학 박사, 우리 협회 충북지부장
만물이 활기찬 여름이다. 무더위 속에서도 여름이 주는 활력은 짙푸른 초목만큼이나 싱그럽다. 한 편의 시로 승화시킨 여름 정경은 한 폭의 수묵화가 되어 투명하게 다가든다.
수차례 귀양살이 후 65세에 고향인 보길도에 돌아와 자연에 안주한 조선 중기의 문신 고산 윤선도. 여름날 노역에 지친 어부의 고단한 삶은 그의 붓끝에서 아름다운 한 폭의 그림이 되었다.
궂은 비 멈춰가고 시냇물이 맑아온다
배 띄워라 배 띄워라
낚싯대를 둘러매고 깊은 흥이 절로난다
찌거덩 찌거덩 어여차
안개 낀 강과 첩첩이 겹친 산봉우리를 그 누가 그려냈나.
<어부사시사> 중 여름을 노래한 한 수이다. 대부분의 삶을 유배지에서 보낸 현실을 자연과 빗대어 시로 승화시킨 소박한 평안이 잔잔하게 다가든다.
해가 뜨고 지는 것에 따라 행해지는 일들은 누구에게나 똑같다. 그러나 그것을 바라보는 가치는 저마다 다르다. 한 잔의 차의 의미도 그러하리라. 한여름 무더운 일상의 소소한 일들에 지친 시간 나무 밑 평상 위에서의 차 한 잔은 茶人에게는 천금보다 귀하다. 이른 봄 차나무 새순을 따서 정성스럽게 만든 한 봉지의 차를 꺼내드는 묘미. 벗의 정성과 따뜻한 마음까지 담겨진 차라면 더할 나위 없다.
진정국사 천책(眞靜國師 天頙)은 문장가로 이름을 떨쳤으나, 무상을 느끼고 강진 만덕산 백련사로 출가하여 천태종장 원묘국사(圓妙國師)의 법을 이어 백련사의 제4세가 되어 천태종풍을 떨쳤다. 그의 <선사가 주신 차에 감사하며>에는 벗과 여유를 나누며 정진하는 모습이 담겨있다.
貴茗承蒙嶺 귀한 차는 몽정차를 이었고
名泉汲惠山 이름난 샘물은 혜산에서 길어온 듯.
掃魔能却𦖋 졸음을 깨끗이 쓸어내니
對客更圖閑 한가로이 손님과 거듭 차를 즐기네.
甘露津毛孔 감로는 털구멍 따라 솟아나고
淸風鼓腋間 맑은 바람은 겨드랑이에서 일렁인다.
何須飮靈藥 어찌 모름지기 영약을 마셔야만
然後駐童顔 아이 같은 젊음 유지할 수 있을까?
귀한 차를 선물 받은 때를 상상해 보라. 가슴은 기쁨과 감사로 벅차오른다. 더구나 국사는 몽산차 같은 좋은 차를 선물받았다. 차와 걸맞게 혜산의 물과 같이 좋은 샘물을 길어다가 차를 달인다. 짐짓 무아(無我)의 경지로 빠져든다. 한가로이 앉아 차를 마시니 아무 생각 없이 감로 같은 맛이 온몸을 감싸며 양 겨드랑이에서 맑은 바람이 나와 신선 세계에 오르는 듯하다. 구태여 신령스러운 약을 구해 동안(童顔)을 꿈꿀 필요가 없으니 한 잔의 차는 저절로 신선이 되게 한다.
몽산차는 약효가 뛰어나고, 육안차는 맛으로 뛰어나다고 했다. 혜산천은 차 달이기에 이름난 샘물이다. 당(唐) 재상 이덕유가 차를 끓일 때 멀리 혜산천 물을 길어다 쓴 데서 그 이름이 전한다.
소중한 벗과 차를 나누는 기쁨은 최고의 삶의 멋이다. 특히 선종 중심의 산사에서는 수행을 위해 차는 빼놓을 수 없는 필수음료였다. 명찰(名刹)에는 명차(名茶)가 있었으며, 사찰 입구에는 차를 재배해서 만들어 바치는 ‘다촌(茶村)’이라는 마을이 있어, 선비들이 차에 대해 무관심할 때도 산사에서는 비교적 다양하게 茶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었다. 이런 까닭으로 선승들은 선비들에게 차를 많이 선물하였고, 이에 대한 답례로 선비들은 감사의 시를 지어 올렸다.
목은의 시 <개천사의 행재선사가 차를 보내 왔기에>이다.
同甲老彌親 동갑나기 우리 늙을수록 더욱 친해지니
靈芽味自眞 영아차 음미하며 참된 맛 절로 느끼네
淸風生兩腋 맑은 바람 양 겨드랑이에서 솟으니
直欲訪高人 곧장 도력 높은 신선 찾아보고 싶어지네
목은 이색(1328~1396)은 이제현의 문인으로, 14세에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주위를 놀라게 했고, 원나라 과거에도 뽑혀 벼슬을 지낸 문신이요 대학자이다. 공민왕 10년(1361)에는 홍건적의 난에 왕을 호종한 공으로 1등 공신에 봉해졌다. 여러 차례 우수한 인재들을 천거하여 당시 명사들이 거의 그의 손에 의해 발탁되어 고려 말 신흥하는 성리학이 크게 확장하여 조선으로 이어지는 가교가 되게 했다.
이른 봄 신비롭게 돋아난 새순을 따서 정성스럽게 만든 차. 차를 만드는 일은 참으로 힘들고 고되다. 이슬이 내린 맑은 봄날 이른 새벽 먼동이 틀 때 차밭에 나가 참새의 혀처럼 작은 새순을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따서 모은 한 바구니의 찻잎. 장작불을 지펴 화기를 돋운 뜨거운 돌솥에 넣고 어린잎이 탈 새라 볶고 꺼내어 비벼주기를 반복적으로 한다. 제다방법에 따라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너 댓 시간을 뜨거운 불기운 속에서 작업을 해야 차 몇 줌을 얻게 된다.
이렇듯 귀한 차를 개천사의 동갑 나이 행재선사가 보내왔다. ‘영아차(靈芽茶)’는 이름 그대로 겨울을 이긴 신령스러운 움이 막 터진 새순을 따서 정성스럽게 만든 차이리라. 잘 끓인 물로 달인 영아차의 고아한 색은 절로 기품을 자아내고 한 모금 머금으니 달착지근한 혀에 감기는 맛과 신비로운 향은 뼈 속까지 스며든다. 이런 귀한 차를 부처님 전에 올리기도 넉넉지 않을 텐데 속가의 동갑 친구를 생각하고 따로 마련한 마음. 즉각 달려가 함께 차 한 잔 나누고 싶은 마음을 다독이고 노동(盧仝)의 차시를 읊으며 그 깊은 우의에 감사를 드린다.
목은의 <동갑인 개천사의 담선사가 보낸 서찰과 차를 받고>에도 차를 받은 기쁨이 가득 담겨 있다.
開天渺渺在天涯 하늘 저 편 머나 먼 개천사
南望年來兩鬢華 올해도 그대 기다리다 귀밑머리 다 세었다오.
自訝夢耶非是夢 깜짝 놀라 꿈인가 했으나 분명 꿈은 아니구려
數行書札一封茶 정겨운 서찰과 한 봉의 차가 당도했나니.
세월 가는 것이 꿈과 같건만 세상의 이치가 세월 가는 것보다 쉬운 것은 아니다. 동갑나기인 담선사는 석가가 연꽃을 들자 가섭이 미소로 응답했듯이 마음이 서로 통하는 지인(知人)이다. 세태의 괴로움으로 흰머리만 느는 공허한 그 때, 햇차 한 봉지와 정이 물씬 풍기는 편지는 기쁨이요 재충전의 활력소이다. 목은은 스스로 ‘꿈인가 했더니 꿈은 분명 아니다’라며 차를 받은 기쁨을 일설로 표현한다.
차는 계층과 나이에 구애받지 않은 다양한 인물과의 교유를 통하게 한다. 인간과 신을 연결하는 가교 역할은 물론 인간끼리의 마음을 담기에 충분하다. 솔직 담백한 마음의 우의를 도탑게 하는 정겨운 매개체이다. 시원한 나무 그늘 밑에서 벗과의 차 한 잔의 시간을 마련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