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수의 내용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해체주의 신학의 부분으로 대표적인 해체주의 신학자 마크 테일러의 사상을 소개하는 부분과 이러한 해체주의 신학의 도전에 따라 포스트모던 시대의 윤리적 사유인 대위 윤리학에 관한 내용이다. 먼저 해체주의 신학의 부분에 있어서 본 연구가 집중하고자 하는 마크 테일러는 이 시대의 헤겔(Hegel)로 부름 받기를 원하며 폴 틸리히(Paul Tillich) 이후 최고의 문화 신학자라고 불려진다. 테일러의 사상은 그를 앞선 많은 사상가들의 흔적들로 이루어져 있다. 윌리엄스(Williams) 대학의 인문학부(Humanity)에 재직 중인 그의 백과사전적인 방대한 지식과 예리한 통찰력은 근대철학의 거성 헤겔을 떠올리며, 왕성한 탐구정신을 바탕으로 문화비평, 문학, 영화, 미학, 미술, 건축학, 컴퓨터 공학 등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며 문화읽기를 시도하는 ‘경계를 넘고 간극을 메우는’ 그의 학문적 방식은 포스트모던 학제적 연구의 선구적인 예시로 볼 수 있다. 테일러는 해체주의 철학자 데리다의 해체철학적 통찰력을 신학에 적용하여 80년대 중반 해체주의 신학사상을 주창하였으며 이후 문화 전반에 나타나는 종교의 의미를 파악하려는 테일러는 해체주의를 넘어 사이버스페이스 존재론까지 언급하고 있다. 테일러 사상의 흐름을 한 눈에 파악하여 본다면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테일러의 저작 중, 전기라 할 수 있는 80년대 저서의 주요한 관점은 헤겔과 키에르케고르 연구이며 나아가 데리다를 위시한 해체주의 철학자들의 사상을 통해 포스트모던 무/신학(postmodern A/theology)을 연구한 것이다. 이러한 그의 학문적 성향은 90년대 이후에는 문화의 다양한 영역으로 확장된다. 문화비평, 문학, 영화, 미학, 미술, 건축학, 컴퓨터 공학 등의 영역을 넘나드는데, 그 다양한 문화 속에 감추어진 종교의 의미를 추구하는 것이 중기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2000년대 이후의 글들은 사이버스페이스 존재론과 사이버 영지주의, 복잡성의 과학을 비롯하여 죽음과 신용 사기(confidence games)등에 관한 문제까지 다루고 있다. 이러한 후기 사상은 이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중인 것이다. 따라서 지금 현재 후기의 사상은 어떻게 진행될지 모르는 학자이다. 대위 윤리학은 아래와 같은 내용을 지닌다.
1. ‘자리-이름’ 체계에서 형성된 '주체'의 자기동일성으로서 ‘위의 역사’(history of point)는 서구 존재론의 역사이며, 그 안에 위를 이루려는 주체의 모습은 나르시스즘(Narcissism)에서 지배의 심리학(psychology of mastery)으로, 정복의 경제학(economy of domination)으로 드러난다.
2. 주어(The Subject)는 변하지 않고 술어(The predicate)만 변한다는 주체의 자기 동일성에, 먼저 술어 중심의 탈식민주의적(post-colonialism) 관점을 취하며 동시에 주어의 ‘상주의 오류'(fallacy of eternalism)를 변화와 과정(process)으로 극복한다.
3. 과정으로 파악된 우리의 인식은 부정적으로는 또 다른 삶의 조건, 혹은 삶의 피투로, 긍정적으로는 내적 발화, 혹은 자기 안의 내재적 숙성을 통해 ‘하나의 일리'(one principle)를 취한다.
4. 서로간의 일리의 과정적 ‘머물고 지나감’(stay and go by)은 자기 소리를 냄으로 합생(concrescence)과 길항(counteraction)을 통해 전체적 조화를 혼돈(caos)과 질서(cosmos)의 변증법을 통해 포괄적으로 이루어가는 협화음적/불협화음적 조화이다.
5. 일리의 과정적 머물고 지나감은 합생과 길항을 통해 자기 조직화하며 전지구적 네트?p(network)을 구성하여 윤리적 문제에 있어서 ‘소수화의 복수성’(pluralism of the few/small person)을 지향한다.
이러한 대위 윤리를 해체주의 신학의 도전에 응전하는 사상으로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 본 연구의 핵심이다. 곧 포스트모더니즘의 차이의 윤리학과 레비나스류의 타자의 윤리학을 넘어 주체의 자기 동일성은 확보하면서도 타자성을 부각시키는 것이 대위 윤리학의 목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