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2년 1차 분할. 1793년 2차 분할에 이어 벌어진 3차 분할은 폴란드를 유럽의 지도에서 지워버렸으며 구대륙의 지리 정치적 안정을 뒤흔들었다. 1795년 10월 러시아, 프러시아, 오스트리아는 분할 협정을 조인하였다. 러시아가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였다. 폴란드의 독립은 1918년에 이르러야 되찾게 된다.
8. 1918년 폴란드 독립
123년 동안 러시아, 프러시아, 오스트리아의 지배하에 있었던 폴란드는 독립을 되찾았다. 폴란드 독립이 단계적으로 이루어지긴 하였으나 광복의 상징적인 날짜는 1918년 11월 11일, 프랑스의 꽁피에뉴에서 국제 연맹국과 독일제국과의 휴전으로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나게 된 날이다. 바로 이 날 신탁통치 위원회는 유제프 피우수츠키에게 폴란드 전군 통솔권을 넘겨주었다. 폴란드는 유럽에 2번의 큰 역할을 한 것이다. 첫 번째는 1683년 터키군을 격퇴하여 유럽을 이슬람의 세력
9.1920 년 폴란드와 소련(볼셰비키)간의 전투
1920년 8월 12-25일 사이에 있었던 폴란드와 볼셰비키 사이의 전투에서의 폴란드의 승리는 전 세계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이다. 폴란드의 독립이 확고해졌을 뿐 아니라, 유럽에 공산주의와 소련의 전체주의가 퍼지는 것을 막았다. 이로써는 폴란드는 유럽에 두 번의 큰 역할을 한 것이다. 첫 번째는 1683년 비엔나 전투에서 승리하여, 이슬람의 위협으로부터 유럽을 지켰고, 두 번째는 1920년 소련과의 전투를 통해 유럽에 소련식 공산화가 확대되는 것을 저지한 것이다.
10. 1939 년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
1939년 새벽 4시 45분 독일 함정 슐레스빅-홀스타인이 그다인스크의 베스테르플라테반도의 폴란드 군을 폭격하며 폴란드와 독일 사이의 전쟁이 발발한다. 같은 시간 독일의 폭격기들이 비엘룬을 폭격하였다. 베스테르플라테 전투는 2차대전 기간 동안 총 61개국, 1억 천만 명의 군인들이 참전하는 대전의 시작이었다. 나치의 공격을 처음으로 저항하게 된 폴란드는 약 580만 명에 이르는 국민의 목숨과 국부의 38퍼센트에 달하는 손실, 반세기가 넘는 자유의 상실로 이 대가를 치르게 된다. 폴란드는 전쟁 후 소련의 영향력에 놓이게 되었기 때문이다. 1945년 5월 8일까지 계속된 전쟁은, 독일이 조건 없는 항복에 서명하며 끝나게 된다.
11.1940 년 카틴 숲 대학살
스몰렌스크 인근의 카틴 숲에서는 소련의 비밀경찰이 뒤통수에 총을 쏘는 방식으로 폴란드 시민 2만 2천 명을 학살하였다. 그중 1만 명은 폴란드 군 장교와 경찰뿐만 아니라, 학자, 교수, 종교지도자 등 폴란드의 지식인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 전쟁 포로들을 처형하는 결정은 소련 지도부 최고위층에 의해 내려졌고 볼셰비키 중앙 위원회 정치협의 1940년 3월 5일 자 서류 (카틴 결정)에 남아있다. 소비에트 연방은 1990년에 와서야 공식적으로 이 학살이 저질러졌다고 시인하였다 (이전에는 이 학살에 대한 책임을 부정하고 독일군이 했다가 주장하였다).
12.1943년 유대인 수용소 봉기와 1944년 바르샤바 봉기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공격할 때 폴란드에는 약 250만 명의 유대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1940년부터 주요 도시에 게토(유대인집단수용소)를 설치하고 폴란드를 포함하여 유럽 전지역에서 유대인들이 체포하여 집단 수용하면서 유대인들을 청소하기 시작하였다. 초기에는 비공개로 처형이 진행되었으나, 이후 수용소에서 직결 처분되기 시작하여 크라쿠프 인근 오시비엥침(독일명; 아우슈비츠)를 포함하여 대규모 수용소에서 약 330만 명이 이상이 힉살된것으로 추정된다(2차대전 이전 유럽에는 약 450만 명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유대인들이 1943년 바르샤바 수용소에서 대규모 봉기를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 이어 1944년 폴란드 국민군에 의해 조직된 봉기 군은 8월 1일부터 63일이나 계속되어 1944년 10월 3일까지 지속되었다. 이 두 번의 봉기 실패로 바르샤바시는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인구 100만 명이 이상이 거주하던 바르샤바시는 거의 2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집계되었다. 그리고 독일 측의 체계적인 파괴 공작으로 역사적, 문화적 유산이 85% 이상 철저하게 파되되었다. 그러나 바르샤바 봉기는 독립을 위한 폴란드인들의 용기의 증명이었으며(지금도 매년 8월 1일, 오후 5시에 1분간 사이렌 소리와 함께 묵념을 한다), 서방의 국가들로 하여금 폴란드의 비극적인 운명을 잊지 않도록 하였다.
13. 1978 년 폴란드인 교황 선출
카롤 보이티와를 1978년 10월 요한 바오로 2세로 선출한 사건은 전 세계에 큰 화제가 되었다. 콘클라바(교황 선출 위원회)는 가톨릭교회의 수장은 이탈리아인이어야 한다는 규칙을 깨고 철의 장막 너머의 인물을 뽑았던 것이다. 카롤 보이티와 추기경은 455년만에 비 이탈리아인으로 처음 교황이 되었으며 요한 바오로 II세라는 이름을 택하였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요한 바오로 II세가 공산주의의 몰락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의견이다.
14.1980년 자유노조의 설립
발트해 연안에서 일어난 시위의 물결은 1980년 8월 31일 그단스크에서 정부의 위원회와 시위 위원회 사이의 합정서를 이끌어내었다. 그 결과 독립 자치 노조인 ‘연대 „Solidarność”’가 생겨나게 되었는데,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처음으로 합법적이며 정권과 독립적으로 자치적인 기관이었다. 전국적으로 1000만 명의 회원을 가지게 되었고 정부에 대항하는 실질적 야당 역할을 하였다. 1981년 12월 계엄령으로 불법화되었으나 계속되는 경제 위기와 더불어 마침내 공산정권과 1989년 2월 5일부터 4월 5일간 "원탁회의"를 통해 폴란드에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국회의 일원을 국민들이 직접 뽑는 국민투표의 거행이 결정되었다. 이 대화에는 - 관전자 입장으로- 가톨릭교회와 개신교 교회의 대표자들도 참석하였다.
15. 1999년 폴란드의 북대서양 조약 기구 NATO 가입
3월 12일 미국의 미주리 주 인디펜던스에서 폴란드의 외무장관인 브로니스와프 게레멕이 미 국무부 장관인 매들린 올브라이트에게 폴란드가 북대서양 조약기구에 가입한다는 서류를 건네었다. 폴란드는 체코와 헝가리와 함께 북대서양 조약 기구에 가입한 것이다. 나토 가입은 1990년대 폴란드 외무 정책과 안보의 첫 번째 목표 중 하나였다.
16. 2004년 유럽연합 가입
2004년 5월 1일 폴란드는 2003년 7월 16일 아테네에서 서명한 가입 조약에 따라 유럽 연합에 가입한다. 폴란드와 함께 9개의 새 회원국들이 들어가게 되는데, 체코, 슬로바키아, 헝가리,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슬로베니아, 키프로스와 말타 공화국이었다. 폴란드를 서유럽 통합에 포함시키는 아이디어는 타데우쉬 마조비에츠키 정부에서 처음 제시한 것이다. 이미 1990년대 초에 폴란드 외무 정책의 전략적 목적은 유럽 연합의 회원국이 되는 것이라고 인정된 바 있다. 2003년 6월에 있었던 유럽 연합 가입에 대한 전 국민투표에서 77.45퍼센트의 폴란드인들이 폴란드가 유럽 연합에 가입하는 것에 대해 찬성을 표했다 (투표에는 58.85 퍼센트의 유권자들이 참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