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죽음의 격투장 하벤에서 두 거한의 처참한 죽음과 그들의 육체가 거대한 믹서에 의해 잘게 갈려져 걸쭉한 용액으로 변하는 과정을 지켜보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상상으로만 가능할 것 같은 그런 처참한 도륙현장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은 한동안 넋이 나가 제 정신이 아니었다.
‘이게 꿈인가, 현실인가?’
아무리 궁리해 봐도 그보다 더 잔혹한 살해방법은 없을 듯싶었다. 따라서 빤히 눈을 치뜨고 보았음에도 현실이라기보다는 속임수에 의해 사실처럼 잘 연출된 듀얼시뮬레이션을 체험한 것처럼 느껴졌다.
하벤에 모여든 사람들 모두가 심한 허기를 느꼈으나 그렇다고 식욕이 동하지는 않았다. 모래알을 씹는 듯 입안이 깔깔했고 심한 욕지기가 나오려하기 때문에 음식물을 도저히 씹어 삼킬 수가 없었다. 몇몇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주변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구경거리가 다 끝났음직한 데 누구하나 선뜻 자리를 떠나려는 사람이 없었다.
“이제 구경 다했으니 집으로 돌아가야겠지?”
“글쎄, 뭔가 더 남아 있는 거 같은데…, 그러니까 사람들이 돌아갈 생각을 않는게 아니겠나. 잠시만 더 기다려보자. 또 좋은 구경거리가 있으려나본데….”
“그래?”
어느덧 사람들도 안정을 되찾은 듯 그들 사이에서 잡담이 오가기 시작했고 간혹 웃음소리도 들려왔다.
“나도 그렇지만 여기 모인 사람들 모두가 잔혹함을 꽤나 즐기는가봐. 하긴 이런 잔혹한 구경을 직접 즐길만한 데가 어디 있을라고…”
“그러게… 스페이스넷에서도 더러 이런 불법적인 장면들이 나오긴 하더라만… 진짜라고 믿기엔 어쩐지 실감이 나질 않지. 근데 여기선 직접 눈으로 보고… 또 비린내까지 직접 맡을 수 있으니깐 더욱 실감이 날수밖에….”
“근데 이곳에선 이런 구경거리가 자주 벌어지는 모양이지?”
“듣기로는 전부터 있어왔다는 게야.”
“그래? 그렇담 앞으론 자주 와야 쓰것구먼.”
시간이 어느 정도 경과하자 탱크 안의 내용물은 대략 세 개의 층으로 나뉘어졌다. 제일 위층에는 붉고 푸른 털들과 가벼운 부유물들이 엉켜있고 중간층은 지방성분이 뭉쳐있는 허연 덩어리들로 채워졌으며 전체 내용물의 70%를 차지하는 밑의 층은 붉은빛을 띤 용액이었다.
그때 어디선가 한 무리의 하얀 백의를 입은 미소년들과 미소녀들이 나타났다. 나이는 대략 15세 안팎으로 보이는데다 한결같이 빼어난 미모를 지녔다. 미소년들의 손에는 제법 커다란 크리스털 그릇이 하나씩 들려져있었고 미소녀들의 손에는 보랏빛액체가 담겨있는 작은 크리스털 화병이 하나씩 들려져있었다. 그들은 남녀 한 쌍씩 짝을 이뤄 홀 전면에 줄을 지어섰다. 그들의 얼굴표정엔 전혀 감정이 드러나 있지 않고 움직임 또한 진중하여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이 마치 무슨 의식을 치루고 있는 듯 사뭇 진지해보였다.
미소년들이 줄을 지어 두 거한의 몸체가 녹아있는 탱크 쪽으로 향했다. 탱크 제일 아랫부분에는 작은 수도꼭지가 달려있었고 그 밑에는 둥근 받침대가 놓여있었다. 미소년들은 차례대로 크리스털 그릇을 그 받침대 위에 올려놓고 빨간 버튼을 눌러 걸러져 나오는 육수(肉水)를 그릇에 5분지4정도 차도록 받아냈다. 크리스털 그릇에 담겨진 육수는 약간 탁해 보이는 붉은빛이 도는 액체였다.
육수가 담겨진 그릇들은 홀 전면에 자리한 탁자위에 차례차례 놓여졌다. 그리고 미소녀들이 그릇 앞으로 다가서더니 그녀들이 지닌 보랏빛 액체를 육수에 조금씩 쏟아 부으며 유리대롱으로 원을 그리듯 젓기 시작했다. 그러자 육수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희끄무레하게 부유하던 이물질들이 가라앉고 육수는 투명한 자줏빛 액체로 변해갔다.
그들의 그러한 행동을 지켜보던 사람들 사이엔 호기심이 부쩍 동했다. 사람들은 자줏빛 액체를 유심히 들여다보면서 그 맑고 투명한 색깔의 아름다움에 도취되었고 한편으로는 그 액체를 어디에 쓸 것인지에 대한 궁금증이 일었다.
“정말 희한하네. 저 보라색 액체가 뭐길래 걸쭉한 핏물이 걸러지면서 저렇듯 예쁜 색깔로 바뀔 수 있을까?”
“불순물을 제거하는 무슨 약물이 아닐까?”
“그럼…, 저 걸러진 물은… 무엇에 쓸려고 그럴꼬?”
“글쎄, 혹시… 우리더러… 마시라고 그러지는 않겠지?”
“저걸… 우리더러 먹으라고? 말도 안돼!”
“농담으로 해본 소리야. 사람의 몸을 갈아 만든 국물을 설마 우리더러 마시라고 그러기야 하겠나.”
“어쨌든 색깔은 디게 곱네 그랴.”
미소년들과 미소녀들의 표정이나 반응은 사람들의 호기심어린 눈빛이나 섣부른 질문 따위엔 전혀 아랑곳 않고 시종일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감정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실제인간처럼 정교하게 잘 만들어진 로봇이려니 착각을 불러일으킬만하였으나, 자세히 관찰하다보면 미간이 살포시 찌푸려진다거나 간혹 양 볼에 보조개가 옴폭 파이는 것으로 보아 로봇이 아닌 인간임엔 분명했다.
그들 외에 또다시 100여명으로 추정되는 미소녀들이 커다란 은쟁반에 은컵들을 수북하게 받쳐 들고 나타났다. 그러자 사람들 사이에 잠시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
“설마… 사람을 갈아 만든 육수를…?”
“그래… 우리더러 저 육수를 마시라고 할 게 뻔해.”
“참 희한한 의식이로구먼.”
“우리가 식인종이야, 뭐야?”
“좋은 구경했으니까 구경 값 하라는 얘긴가 보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걸 어찌 마신다냐?”
“난 죽어도 저런 건 못 먹는다.”
수북하게 쌓여있는 은컵들을 보자 사람들 사이에선 때 아닌 걱정으로 볼멘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자~, 여러분! 어떻습니까? 즐겁게 보셨습니까?”
나직하고 조용한 말투였으나 내재된 엄청난 에너지로 인해 고막을 찢을 듯 사람들의 귓속으로 파고드는 음성이 들려왔다. 모두들 화들짝 놀라며 소리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들고 목소리의 진원지, 백발의 머리와 긴 수염을 치렁치렁 드리운 키 큰 중년의 사내를 올려 보았다.
그는 홀 정면에 높게 자리한 낭청(廊廳)에서 좌중을 고압적으로 내려다보며 유령처럼 홀연히 서있었다. 순간 좌중은 얼어붙은 듯 긴장하였다. 말로만 들어왔던, 그래서 더욱이 전설속의 인물처럼 여겨왔던 세르데카성 성주 <하마슐드 디 까르디 바스라시>였다.
‘검은 도포에 유난히 하얗게 빛나는 백발과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기인’으로 묘사되고, ‘신의 경지에까지 오른 초영술(超靈術)로 초인적 능력을 지녔으며, 시공(時空)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인물’로 전해지는 그에 대한 소문은 인류가 스강나하르로 이주해오면서 인류 사이에 이미 떠돌기 시작했다.
스웨덴 귀족출신이자 엄청난 부를 지닌 대부호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신분에 전혀 걸맞지 않는 마법과 심령술 따위에 심취되어 괴이쩍은 돌출행각을 일삼아온지라 일찍이 신귀족층 사이에선‘인류의 이단아(異端兒)’또는 ‘악마의 화신‘으로 불렸던 괴인(怪人) 하마슐드. 일견 <하씰러>로 불리기도 하는 그는 자신의 모습을 전혀 드러내려하지 않았기에 그때까지만 해도 그를 직접 봤다는 사람은 없었다. 뿐만 아니라 홀에 모여 있는 사람들 중 일부는 하벤에 드나든 지 여러 해가 되었으나 그들 또한 하씰러의 실제 모습을 보지 못하기론 마찬가지였다.
특히 세르데카성의 비밀 가운데 일부를 털어놓은 클레멘티나 체리의 머리가 호두알만한 크기로 줄어든 사건이래, 인류는 은연중에 세르데카성과 하씰러를 결부 짓는 경향을 보여 왔으며, 클레멘티나 체리의 머리를 호두알 크기로 줄일 수 있는 능력자로 하씰러를 거론했다. 그리고 그런 권능을 지닌 그를 신으로 섬기려는 사람들도 날로 늘어갔다.
하벤에 모여 있는 관중들은 하씰러가 비록 세르데카성의 성주이고, 그가 죽음의 격투를 주관한다하여 대중 앞에 선뜻 모습을 드러내리라고는 전혀 예상을 못했다. 그에 대해 거역할 수 없는 절대적인 신성(神聖)을 느끼고 그로인해 심한 두려움에 떨면서도 그와 같은 신비로운 인물을 마주대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까지 느꼈다.
그러나 영험한 동물로 인식되어왔던 백수의 왕 호랑이와 맞닥뜨렸을 때의 느낌이랄까, 방금 전에 보았던 그 참혹한 살육과도 무관하지는 않았지만 그로부터 살벌하게 뻗쳐오는 살기와 중압감은 인간의 것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이질적이었고 그 에너지 또한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강력하였다. 따라서 그 누구도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로부터 파장되어 흐르는 강한 에너지는 홀 안을 공명시키고 모든 사람들의 영육(靈肉)이 그 에너지에 의해 강점되었기에 홀 안의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그에 대한 경외감(敬畏感)과 더 나아가 그를 섬기고자하는 충성심이 절로 우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씰러의 음성이 사람들의 뇌리에 박히듯이 울렸다. 어쩌면 그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음성이 아닌 엔레이파시에 의해 전달되는 음성일지도 모르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영적 메시지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오늘, 우리는 ‘피의 의식’을 통해 하나가 될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여러분을 따르듯이 여러분도 나를 따라야 합니다.”
그는 신격 존재로써 모두가 그를 섬겨야 한다는 것을 사람들은 느꼈다.
“나를 따르지 않고 거부한다면 방금 사라진 우리의 형제들처럼‘영원한 죽음’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습니다.”
어느덧 하벤에 자리한 모든 사람들은 하씰러의 음성을 협박이라기보다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따라서 그를 위대한 신으로 인식하고 그를 섬기는 경건함 속에 피의 의식을 받아들였다.
하얀 백의를 입은 미소녀들이 은컵 그득 육수를 담아 하벤에 모인 모든 사람들에게 한잔씩 건네주었다. 그가 어느새 어떤 조화를 부렸는지 모르겠으나 은컵 안에 담겨진 액체는 인간의 피와 살이 범벅된 육수라기보다는 매실주에 가까운 음료로 변해있었다. 비릿한 비린내 대신 향기로운 과일향을 풍겼고 그 맛 또한 새콤달콤했던 것이다.
- 제35회에서 계속 이어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