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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 세대를 그린 작품은 계속 구상 중이신가요.
약속은 못해도 하겠지죠. 이제는 좀 더 삶을 즐기면서 살고 싶어요. 전에는 언제 써주겠다, 물론 그때는 지옥이에요. 그래서 그냥 쓰고 싶을 땐 쓰고 속에서 뭐가 나오면 쓰고, 억지로 짜내거나 이런 고통은 안 하려고 해요. 열심히 살았으니까.
신세한탄은 싫어해, 글 쓰기는 나에게 치유였다
살아오신 시간들은 모두 소설이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전쟁 때 겪은 삶의 기억의 대부분을 소설로 풀어내셨는데요, 성찰의 한 방법이었을까요.
쌓인 게 많은 사람은 이야기를 많이 하잖아요. 개인적으로 난 신세한탄하고 이런 거는 아주 싫어해요. 그런 게 아니라 치유이고, 자유로워지는 방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후에는 비교적 행복하게 살았지만 그 기억에 억눌려 산 적이 많았거든. 자꾸 풀어냄으로서 어느 정도 자유로워졌다고 생각을 해요.
그것이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와 <그 산이 거기 있었을까>였지요. 특히 한국전쟁과 각별했던 오빠의 죽음…을 순전히 기억에 의존해서 쓰셨는데, 그 기억들을 ‘언젠가 토해내지 않으면 치유될 수 없는 체증처럼 내부에 가로놓인 망령’으로 표현하셨지요.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고 생각해요. 우린 동기간에 애정이 유난스러웠어요. 내가 가장 한몸처럼 사랑한 가족이, 살리려고 무척 애를 썼지만 우리 앞에서 처참하게 죽었다 이러면 굉장히 상처가 됩니다. 그런 기억은 어떤 때는 내가 이렇게 살아남아서 미안하기도 하고 어떤 땐 대신 충분히 누려야겠다는 생각도 하게 돼요.
20대 시절에 짐이 된 모든 상황과 어머니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몸부림과 갈등이 있었지만 결국은 다 열심히 겪어내셨잖아요.
내가 20대 때 6.25 겪고, 후에 우리 오빠 때문에 1.4후퇴 때 남쪽으로 내려가지 못하고 서울에 남아서 굉장한 고통을 받았어요. 그때 나 혼자라도 가족을 버리고 피난을 갈까, 다시 남아서 북쪽에서 온 군대를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참 힘들었어요. 그때 오빠가 걸을 수 없는 부상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꼭 필요했어요.
집에 조카가 둘 있고. 그런데 가족을 버리고 차마 도망가지를 못했어요. 엄마가 너만이라도 자유로워져라, 바라셨지만 엄마도 날 놔주지는 않았고요. 그 엄청난 걸 겪었지만 내가 요새 와서 생각할 때 그때 내가 가족을 버리고 갔으면 나를 용서할 수 없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너무나 힘들었지만 내가 가족과 함께 그걸 모두 겪고, 또 집안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 그냥 스스로 대견해지는 거예요.
가족은 어려움을 이겨내는 힘이기도 하지만, 부담으로 여기는 사람도 많은 것 같습니다.
유대가 강한 걸 짐으로 여기는 사람도 많아요. 생각하기 달렸는데. 요새 그러잖아요. 노인세대인 우리 같은 사람 많으니까 얼마가 지나면 새로운 세대에게 짐이 될 거다, 우리가 왜 짐이 되는지 모르겠어. 젊은애들 우리가 보살폈는데 왜 짐이 되나, 우리끼리 말하지만 정말 다음 세대가 우리에게 짐이 되는 일을 더 많이 해요.
우리는 이만큼 살기 위해서 얼마나 애썼는지 몰라요. 짐 안 되려고.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굉장히 검약하고 살았거든요. 그런데 사회적으로 노인들이 부담이 된다, 이런 소리 들으면 화가 나 죽겠어. 우리는 주는 게 습관이 돼서 찾아오면 주려고만 하는데 왜 이렇게 그런 이야기들을 들어야 하나 싶어요.
구호단체도 돕고 있고, 또 탄압받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도 많이 도우셨는데, ‘더 서글픈 건 내가 남을 위해 살은 적이 없다’라고 하신 적이 있어요.
괜히 위선을 떨었겠죠. 내가 관심 가진 분야를 돕는 건 결국 내 맘이 편하고 싶어서 하는 거죠. 혼자 잘 먹고 잘사는 것보다 양심에 가책을 안 느끼려고 하는 최소한의 의무 같은 거죠. 하지만 가톨릭신자로서 그런 건 있어요. 그렇게 큰 죄는 안졌어도 남한테 좀 무심한 편이에요.
가족은 잘 챙기는 편인데, 가족도 챙길 일이 너무 많아요. 동네 사람한테도 인사는 하고 지내지만 무관심한 편이구요. 그런 박애 정신 같은 게 부족해요.
‘죽기 전에 한 번은 꼭 정직하게 살고 싶다’,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정직한 삶이란 어떤 것인가요.
괜히 입으로 해본 소린데… 그런 거는 있어요. 어려서 내가 농촌에서 자라서 그런지 가장 정직하게 사는 방법은 농사짓는 거밖에 없는 것 같애. 흙처럼 정직한 게 없고. 정말 내가 힘이 있다면 마지막으로 논농사해서 내가 밥을 지어 먹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한 적도 있어요.
자급자족하는 소박한 삶이랄까요. 뭐 지금은 완전히 꿈이지만요. 어떻게 보면 글 쓰는 것도 어느 정도 사기성이 있습니다. 소설은 허가 받은 거짓말이라고도 하죠. 표현에도 과장도 있고, 글줄이나 써가면서 편안하게 먹고사는 게 미안해서 내가 진짜 이게 정직한 글인가, 그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되요. 그냥 좋고 쉬운 글을 쓰려고 하죠.
서로 아끼는 행복함, 우리 대에서 끝나지 않았으면
산문집 <호미>에 그런 말이 나옵니다. ‘우리가 죽는 날까지 배우는 마음을 놓지 말아야 할 것은 사물과 인간의 일을 자연질서대로 지킬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가 아닐까’라고 말입니다. 어떻게 사는 것을 말하는 걸까요.
우리가 없어지더라도 삶이 지속될 거 아니겠어요. 아차산에 이사 오고 나서 느낀 건데, 여름에 서울 시내에 나가면 아스팔트 열에 탁 숨이 막히면서 지옥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가 좀 더 소박하게 살아야 하지 않나. 다 지금 더 잘살자고만 하지, 어떤 대통령이 나와서 일하는 시간도 조금 줄이고 조금 덜 받고 다 나누면서 우리가 조금 못 살자, 이랬으면 좋겠다, 생각을 해요.
가당키나 하겠어요? 그냥 그런 꿈을 말하는 거예요. 예전처럼 아끼고 사는 걸 지옥같이 생각하지만, 난 그때가 참 행복했던 거 같아서 우리 대에서 끝나지 않았으면 해요. 그때 느끼는 행복감이라는 건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오는 행복감이었구요. 지금의 행복감은 뭘 많이 가졌을 때, 누구한테 이겼을 때 오는 행복감. 뭐 그런 거 아니에요? 갈증이죠.
가져도 가져도 목마른. 지금 무한 경쟁시대로 막 달려가는 것을 우리가 멈추게 할 수는 없지만 조금 느리게 할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 옛날 황진이 시 중에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 마라,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하는 게 있잖아요. 거기에 문학 정신 같은 게 있다고 생각해요. 문학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옳은 삶이다 알려주는 게 아니라, 삶을 음미하면서 살게 하는 것이에요. 근데 속도가 붙으면 음미를 못합니다. 아주 미력하나마 그런 것이 문학의 힘이, 글의 힘이 아닌가 생각해요.
작가는 “열심히 살면서 나이 먹었다면 자기 마음, 엄마나 할아버지, 할머니, 평범한 이웃에게서 진리를 들을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작가의 ‘어질고 따듯하고 위안이 되는 글’도 그런 삶에서 나온다. 우리 삶의 한켠에서 조용히 마음의 거울이 되어준 글, ‘소설가 박완서’가 우리 곁에 있다는 건 축복이다.
소설가 박 완 서 님은 1931년 경기도 개풍에서 태어났습니다. 숙명여고를 졸업하고 1950년 서울대 문리대 국문과 재학 중에 한국전쟁으로 학업을 중단했습니다. 1953년 호영진씨와 결혼하여 이후 1남 4녀를 두었으며, 40세에 ‘여성동아’ 소설공모에 <나목>이 당선되어 등단했습니다.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창밖은 봄> <배반의 여름> <도둑 맞은 가난> <엄마의 말뚝> 등 숱한 작품이 있으며, 1988년 한 해에 남편과 아들을 연이어 잃은 후 ‘참척의 슬픔을 겪으며 기록한 일기’인 <한말씀만 하소서>를 펴냅니다. 장편소설로 <미망>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아주 오래된 농담> <그 남자네 집>이 있으며, 다수의 산문집과 동화책을 출간했습니다. 2007년엔 단편소설집 <친절한 복희씨>가 출간됐고, 그동안 한국문학작가상, 이상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등을 수상했습니다.
마음수련 월간지 2008년 3월호에서 퍼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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