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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눈으로 보는 지리지/ 경상도 예안현(禮安縣)
예안현(禮安縣)
인동 장달수 편
* 예안(禮安) 左道. 서울에서 5백45리. 여정. 6일.
異名: 宣城(선성). 買谷(매곡). 善谷(선곡)
* 예안현감겸 안동진관병마절제도위 문관, 음관 6품
(禮安縣監兼 安東鎭管兵馬節制都尉.)
* 훈도(訓導) 종 9품
좌수 1인. 별감 1인. 군관 15인. 인리 46인. 지인 18인.
사령 15명. 관노 34명. 관비 14구.
0 호구 기묘년 1735년 영조11
호수: 1,782호. 인구: 5,836명. 남자: 3,134명. 여자: 2,702
* 호구(戶口) 무자년
원호(元戶)가 1661호(戶)이고,
인구(人口) 5,492구 가운데 남자 2,949구, 여자 2,542구 이다.
동쪽으로 영해부(寧海府)의 임현(任縣) 영양(英陽) 경계까지가 41리, 남쪽으로 안동부(安東府) 경계까지가 11리,
서쪽으로는 영천군(永川郡) 경계까지가 39리,
북쪽으로 봉화현(奉花縣) 경계까지가 41리이다.
대구감영 : 2백40리. 여정. 2일 반.
울산병영 : 4백50리. 여정. 5일.
동래좌수영: 5백40리. 여정. 6일.
고성통제영: 7백7리. 여정. 7일.
0【건치연혁】
본래 고구려 매곡현(買谷縣)이다. 신라 때에 선곡(善谷)으로 고치고, 내령군(奈靈郡) 영현(領縣)으로 하였다. 고려 태조 때에 성주(城主) 이능선(李能宣)이 거의(擧義)하여 귀순(歸順)하였으므로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군으로 승격하였다. 현종(顯宗) 때에 길주(吉州)에 붙였으며 신우(辛禑)가 그 태(胎)를 현지(縣地)에 간직하였다 하여 다시 군으로 하다가 얼마 후에 주(州)로 승격하였다. 공양왕(恭讓王)이 감무(監務)를 두었고 본조에 와서 현감으로 고쳤다.
0 관청건물(公廨)
객사(客舍) 동헌(東軒) 향사당(鄕射堂: 유향소) 군관청(軍官廳)
장관청(將官廳) 인리청(人吏廳)
0【풍속】
풍속은 절약하고 검소함을 숭상한다 관풍안(觀風案)에 보인다.
지역은 편소(偏小)하고 토질이 박(薄)하다 김효정(金孝貞)의 동루시(東樓詩)에 있다.
『신증』 월명담(月明潭) 현 동쪽 25리에 있다.
【토산】 인삼(人蔘)ㆍ꿀[蜂蜜]ㆍ지치[紫草]ㆍ송이[松蕈]ㆍ은어[銀口魚]ㆍ철(鐵) 현 동쪽 상리(上里)에서 난다. 오미자(五味子)ㆍ석이버섯[石蕈]ㆍ잣[海松子]ㆍ옷[漆]ㆍ백복령(白茯苓)ㆍ설면(雪綿).
【성곽】 북산성(北山城) 돌로 쌓았다. 둘레가 1천 1백 49척, 높이 4척이며, 군창(軍倉)이 있다.
【봉수】 녹전산(祿轉山) 봉수 남으로 안동부 개목산(開目山)봉수에 응하고, 북으로 봉화현 용점산(龍岾山)봉수에 응한다.
【누정】 추흥정(秋興亭) 객관 동쪽에 있다. 홍희(洪熙) 원년에 현감 박결(朴潔)이 세웠고, 관찰사(觀察使) 하연(河演)이 이름 짓고 기(記)를 썼다. ○ 은여림(殷汝霖)의 시에, “비단 펼친 듯 네 창문엔 산빛이 가깝고, 유리 깔아 놓은 듯 한 지역엔 물빛이 깊구나.” 하였다. 동루(東樓) 현 동쪽에 있다. 『신증』 쌍벽루(雙碧樓) 부진 언덕 위에 있다.
【학교】 향교(鄕校) 현 북쪽 1리에 있다.
【역원】 선안역(宣安驛) 현 남쪽 3리에 있다. 대사원(大寺院) 현 서쪽 1리에 있다. 장원(場院) 현 동쪽 28리에 있다.
【불우】 용수사(龍壽寺) 용두산(龍頭山) 남쪽에 있다. 고려 때의 중 성원(誠源)이 처음 지었으며, 의종(毅宗)이 중 석윤(釋胤)을 위하여 고쳐 짓고, 용수사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최선(崔詵)에게 명하여 기를 짓게 하였다. 『신증』 이우(李堣)의 시에, “절 서쪽 10리 못 되는 곳, 소나무ㆍ전나무 빽빽하게 들어섰다. 산과 시내는 온갖 풍파 다 겪은 후, 쓸쓸한 옛 절만 남았구나. 선경(禪扃)엔 구름 연기 자욱하고, 음침한 골짜기에는 도깨비들이 울부짓는데, 문을 나와 나를 맞이하는 것은, 무무(貿貿)한 중 서넛뿐일세. 비바람에 시달리다 남은 긴 집[長齋]은, 반절이나 불에 타 없어지고, 빈 뜰에 섰는 탑은 층계가 희미한데, 금부처[金粟]의 빛깔 초췌(憔悴)하다. 무너진 담장엔 등 갈 엉켰고, 그림 벽엔 거미줄만 늘어졌는데, 소조(蕭條)한 물색(物色) 너무 많아, 일찍이 놀던 곳이 아닌 듯하다. 광려산(匡廬山) 글 읽던 곳에,별안간 광무(廣武)의 눈물을 뿌리네. 상교(象敎 불상 모시는 교) 쇠함을 알 수 있으니, 천 년 만에 성인 다스림 만났다. 우리 도가 하늘 가운데 행하여지니, 사교[陰霾]는 스스로 물러났다. 중의 옷이 갓과 망건이 되고, 징과 바리때는 쟁기로 화하는구나. 마침내 법당[金仙宮]터 변하여, 민간의 전리(田里)로 만들게 하네. 환히 빛나는 주 나라 공자(孔子)의 법, 만고에 사람 기강 붙든다.” 하였다. 성천사(聖泉寺) 요성산(邀聖山)에 있다. 골내사(骨乃寺) 영지산(靈芝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현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현 북쪽 산성 안에 있다. 여단 현 북쪽에 있다.
【고적】 의인폐현(宜仁廢縣) 현 동쪽 9리에 있다. 본래 안덕현(安德縣) 지도보부곡(知道保部曲)이었는데, 고려 공민왕(恭愍王)이 현으로 승격하여 지금 이름으로 고치어 안동에 붙였고, 공양왕(恭讓王) 때에 예안에 예속시켰다. 대왕수(大王藪) 최선(崔詵)의 용수사(龍壽寺) 기에, “용두산의 남쪽에 동네가 있고, 동네 어귀에 숲이 있는데, 그 지역 사람들이 대왕수라고 칭한다. 대개 우리 태조께서 경계를 순시하니 남쪽 지방에 이르러 여기서 군대를 주둔하고 3일 후에 떠났는데, 지금 그 땅에 높은 나무, 뭇 풀들이 많아도 나무꾼 풀베기꾼들이 감히 가까이 들어가지 못하니 용[神物]이 보호하고 있는 것이라 한다.” 하였다.
【명환】 본조 성엄(成揜) 현감이 되었다.
『신증』 김전(金詮) 성종(成宗)이 유신(儒臣)들을 각 도의 피폐한 고을로 나누어 부임하도록 명하였는데, 김전이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으로서 나가 현감이 되어 청렴 간결하게 정치를 하니, 고을 사람들이 그 덕을 사모하여 산 사람의 사당을 세웠다.
【우거】 고려 우탁(禹倬) 옛날 살던 곳이 비암(鼻巖) 남쪽 2리에 있다. 단양군(丹陽郡) 인물조에 자세하다.
【효자】 고려 황재(黃載) 지인(知印)으로서 서울에서 벼슬하는데, 꿈에 그 어머니가 병환이 난 것을 보고 곧 사직하고 하루 만에 이르니, 어머니가 과연 병이 계신지라 목놓아 울면서 시약(侍藥)하였다. 어머니가 죽자 3년을 여묘(廬墓)살이하였다. 홍무(洪武) 신사년에 정문(旌門)을 세우고 부세(賦稅)를 면해 주었다. 본조 우석보(禹錫寶) 어버이를 위하여 3년을 여묘살이하였다. 성종 12년에 정려하였다.
【제영】
연계일로종산전(緣溪一路從山轉) 홍여방(洪汝方)의 시에, “시내 따라 한 길이 산으로 돌고, 골짜기에 가득한 숲에 은은한 안개가 깊구나.” 하였다.
안전산수불수병(眼前山水不須屛) 김부륜(金富倫)의 시에, “멀리 바라보면 어렴풋하나 가까이선 도리어 밝고, 눈앞에 산과 강 있으니 병풍은 필요하지 않네.” 하였다. 수복산중노굴반(水複山重路屈盤) 서거정의 시에, “물 겹겹 산 첩첩 길은 구불구불 한데, 풀풀 나는 단풍잎은 가는 말을 보내네. 다른 날 예전에 놀던 곳 내가 기억할 건가, 명구(名區)를 지나가면서 자세히 보노라.” 하였다. 협절분천수지진(峽折犇泉隨地盡) 전인(前人)의 시에, “골짜기가 끊어졌으니 급히 흐르는 샘물은 땅에 떨어져 다하고, 산은 여러 봉우리를 벌였으니 하늘을 찌를 듯하네.”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방면】 읍내(邑內) 끝으로 10리이다. 서면(西面) 처음 7리이고, 끝은 40리이다. 북면(北面) 서북쪽으로 처음은 8리이고, 끝은 40리이다. 동상(東上) 처음은 20리이고, 끝은 40리이다. 동하(東下) 처음은 10리이고, 끝은 20리이다. 의서(宜西) 북쪽으로 처음은 10리이고, 끝은 20리이다. 의동(宜東) 동북쪽으로 처음은 10리이고, 끝은 30리이다.
【성지】 의인고현성(宜仁古縣城) 고현의 남쪽에 있으며 흙으로 쌓은 유지(遺址)가 있다.
【누정】 망미루(望美樓)ㆍ관심정(寬心亭)
【사원】 역동서원(易東書院) 선조(宣祖) 무신년에 건립하고, 숙종 갑자년에 사액하였다. 우탁(禹倬) 단양(丹陽) 조에 있다. 박충좌(朴忠佐) 고려 함양부원군(咸陽府院君)이며, 시호는 문제(文齊)이다. ○ 도산서원(陶山書院) 선조 갑술년에 건립하고, 을해년에 사액하였다. 이황 문묘 조에 있다. 조목(趙穆) 예천(醴泉) 조에 있다.
【창고】 고려 신우(辛禑) 8년에 왜적이 예안(禮安)을 노략질하였다. 9년에 부원수(副元帥) 윤가관(尹可觀)이 왜적을 맞아 예안(禮安)에서 싸워 대패하였으며, 전의부령(典儀副令) 우하(禹夏)는 왜적과 예안에서 싸워 적의 머리 여덟을 베었다.
0 밭(旱田)
원장 1,028결95부3속.
元帳付一千二十八結九十八負三束內各樣免稅陳雜頉并四百六十八結四十五負六束己卯時起五百六十結五十二負七束
0 논(水田)
원장 369결84부1속.
元帳付三百六十九結八十四負一束內各樣免稅陳雜頉并三百六十二結四十二負八束己卯時起一百七結四十一負三束
0 진상품(進貢)
人蔘 紫草茸 白苟藥 淸蜜 當歸 栢子仁 白茯苓 麥門冬 甘菊 茯神 五味子 瓜蔞仁 赤茯苓 槐實 柴胡 蓮翹 銀口魚 生雉 乾雉
0 조적(糴糶: 환곡을 꾸어 주거나 거두어들이거나 하던 일).
元會大小米六十石十二斗八升七合三夕雜穀一千七百四十一石六斗六升六合九夕賑色大小米二千三百四十二石十三斗三升七夕雜穀二千六百七十石十四斗五升七合五夕常平廳大小米六百十七石九斗二升二合八夕雜穀三千九百七十石十二斗六合五夕私雜穀一千九百五十六石四斗九升八合七夕別會大小米一千七十石十一斗一升六合雜穀三百三十二石九斗七合六夕十月開倉十二月封倉己卯條爲准
0전세(田稅: 농지에 부과하는 세금)
太一百三十一石八斗一升八合米八十四石七斗二升二合依定式作錢納戶曹位太十七石十四斗位米十四斗四升作木三疋十二尺六寸三月收捧四月日以陸路達于京納于惠廳己卯條爲准
* 전부(田賦)
원장(元帳)에 밭과 논이 1,408결(結) 16부(負) 6속(束)이다.
그 가운데 밭이 1,036결 5부 7속인데 그 가운데 각종 섞인 것이 522결 3부 6속이다. 논은 372결 10부 9속이다. 그 가운데 진잡답(陳雜沓)이 148결 18부이다.
실제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토지는 밭이 516결 12부이고, 논이 124결 10부 1속이다.
정해년을 기준으로 하였다.
0 대동(大同: 공물(貢物)을 쌀로 통일하여 바치게 한 세금)
木十同錢布參半田稅一時收捧工納儲置米三百十九石九斗八升七合四夕儲置本縣一從惠廳區劃多寡無常已卯條爲准
0 균역(均稅: 백성의 세금 부담을 줄이기 위하여 만든 납세 제도. 종래의 군포를 두 필에서 한 필로 줄이고, 부족한 액수는 어업세·염세·선박세·결작 따위를 징수하여 보충하였다.
田稅條米二石六斗三升六合二夕太四石八斗四升二合四夕依定式作錢上納大同條米十六石一斗八升一合二夕仕木三十四疋十九尺一寸錢木參半結錢四百五十三兩四戔三分田稅一時收捧上納選武木四十疋以陸路十月日達于京納于均廳己卯條爲准
0 봉름(俸廩: 관황 官況 . 봉급)
衛祿位四十結米十三石九斗七升六合公須位十五結米五石一斗七升八合五夕官需米一百九十六石十斗民結所出每夫雉二首式柴每戶三舟式春秋分捧鷄與炭則自官給價貿用
0 군병(軍兵: 군사, 의무 병역)
訓鍊都監砲保四十一名御營正軍十三名官保五十六名資保十四名禁衛正軍
十一名官保三十名資保十二名騎兵八十二名步兵七十六名禁保十五名扈輦隊保四名京驛保二名工曹匠人保五十五名水陸軍一百三十八名武學十九名烽燧軍一百名束伍馬步軍一百七十二名馬步保一百七十二名
* 군액(軍額)
경외안부군(京外案付軍)이 916명이다. 어영군(御營軍)이 13명 : 상번(上番)한다. 보(保) 73명 : 상납(上納)한다. 금위군(禁衛軍) 11명 : 상번한다. 보 45명 : 상납한다.
포보(砲保) 41명, 공조장인(工曹匠人) 55명, 금보(禁保) 17명, 호배대(扈輩隊) 4명, 경역보(京驛保) 2명, 여정(余丁) 1명, 보병(步兵) 76명, 기병(騎兵) 82명, 선무군관(選武軍官) 40인 : 모두 상납한다. 방수군(防水軍) 157명 : 하납(下納)한다. 속오군(束五軍) 172명 가운데 마병 5명, 복마군(卜馬軍) 11명이다. 향교수호군(鄕校守護軍) 40명, 역동서원수호군(易東書院守護軍) 35명, 도산서원수호군(陶山書院守護軍) 50명 : 모두 양정(良丁)이다.
0 예안의 형승
동쪽으로 30보 정도에 작은 시내가 흐르는데, 너비가 5척 쯤 된다. 그 물줄기는 영지산에서부터 시작되어 송현(松峴)과 어울려 흘러내려 남쪽의 큰 시내로 들러가니 바로 낙천을 말한다.
그 다음 1리 쯤에는 향사당(鄕射堂)이 있고, 또 2리 쯤에는 미륵당(彌勒堂)이 있는데, 바위에 불상을 세겨 놓았기 때문에 세속에서 ‘고을을 지키는 물줄기를 마르게 한다’라 하나 이것은 요망한 말이다.
그 아래로는 어량탄(魚梁灘)이 놓여 있는데, 육칠월에는 은구어(銀口魚)를 잡아서 관가에 바친다. 어량을 만드는 일은 관속(官屬) 및 대장쟁이들이 담당한다. 그 아래로 5리 쯤 가면 청현(靑峴)이 있는데 동리 어구에 서너명이 둘러앉을 만한 반듯한 바위가 있다.
또 5리 쯤 거리는 진보현(眞寶縣), 영해부(寧海府) 및 그 임현인 영양(英陽), 안동부의 임현인 임하현(臨河縣)과의 지로(指路)가 된다. 또 그 7리에 솔양천(率良川)이 흐르는데 월천 조목 선생께서 이 마을에서 태어났다.그 마을은 주위에 소나무 만여그루를 심어두었는데 나의 고조이신 참판공 겸(謙)께서 유달리 수구(水丘)의 빼어난 경치를 좋아하여 부포(浮浦)로부터 이곳으로 터전을 옮겨 잡으시었다. 그리하여 이미 숲을 이룬 가시나무 넝쿨과 나무들을 베어내고 최초로 큰 집을 지어 살기 시작했는데 그 앞에 소나무를 심어 시를 읊조리는 장소로 삼으셨다. 그 얼마 뒤에 자제인 동지공 수익(受益)이 홍치(弘治) 연간에 문과에 급제하여 인동부사(仁同府使)가 되고, 또다시 나무를 심어서 드디어 온 나라의 명승지가 되었다.
소나무 숲 아래로 큰 길이 나 있는데 그 길 아래로 기와를 굽고 솥을 만드는 대장간이 있으니 그곳에서 만들어지는 물건의 품질이 제일이었으므로 공사간에 구운 기와는 모두 이곳에서 만든 것이다.
그 다음으로 큰 시내가 있으니 낙동강이라는 것이다. 이 강은 태백으로부터 발원하여 흘러흘러 청량산 북쪽 기슭을 거쳐 우리 고을 경계로 들어와 열네구비를 힘차게 내달려 어탄산(魚呑山)을 무너뜨리며 횡천리(橫川里)로 흘러가니 이곳은 곧 안동과 예안 두 고을이 만나는 지점이다. 물 깊이가 세척이나 되어 겨울철에는 돌다리를 가설하고 여름철에는 맨발로 건너는데, 장마비를 만나면 배로 건너니 그 배는 풍월담(風月潭)에 있고, 다리는 삼차탄(三차灘)에 놓여 있다. 그 아래 9리에 부라원(浮羅院)이 있는데, 문루(門樓)는 부라촌(浮羅村)마을 문이다.
문루는 무척 높고도 크며 그곳에 소나무를 심어 십여리를 둘러쳐 온 마을을 에워쌌다. 이 나무 숲은 마을에 사는 분인 현감 금난수(琴蘭秀)가 사평(司評)으로 물러나 한가롭게 거처할 때에 심은 것이다. 고(故) 월천 선생이 그것을 지칭하여 ‘사평송(司評松)’이라고 이름지었는데 그곳의 주민은 무려 백여 가구나 된다.
그 아래로는 도직봉(盜直峯)이 있고, 그 아래에 또 도직막(盜直幕)이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갈래길이 나오는데 왼쪽은 영해 및 영양으로 가는 길이며 오른쪽은 임하현 및 진보현으로 가는 기로이다. 임하현 지로는 이곳으로부터 남쪽으로 30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소제계(所濟溪)가 있는데 물줄기는 장갈현(長葛峴) 및 단속령(斷俗嶺)으로부터 나와 청파(靑坡) 동쪽 언덕에서 합류하여 낙동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물이 얕기 때문에 다리나 배가 필요하지 않지만 겨울에는 돌다리를 만들어 둔다.
그 아래로는 금곡점(金谷店)이 있는데, 푸주간 일을 하는 사람 열집 정도가 살고 있다. 그 아래로는 탄현(炭峴)이 있으니 현에서 15리 떨어진 곳으로 예안과 안동 두 고을 접경지이기 때문에 두 고을을 표시하는 이정표가 있다. 영해지로는 도직봉으로 아래로부터 동쪽으로 고통(高通)에 이른다. 그 아래로 십삼리 정도에는 종이를 만드는 집들이 있고, 그 아래 14리에는 능운대(凌雲臺)가 있으니 현 동쪽의 명승지이다.
퇴계 선생께서 이곳에 올라 유람하시고 절구(絶句) 두수를 남겼고
진사 이원승(李元承)이 그 위에다 집을 짓고 주인이 되어 시(詩)를 읊조리는 장소로 삼았다. 이 사람이 죽은 뒤로는 주인이 없어 황폐해져서 다만 그 옛터만 남았다. 능운대의 왼쪽 허리에 서실(書室)이 있는데, 군수 김택룡(金澤龍)이 학도들을 불러 모아 이곳에서 지도하여 와운대(臥雲臺)라 부르기도 했다.
그 다음은 한곡(寒谷)인데 목사 김흠조(金欽祖)가 이곳에서 태어났으니 현으로부터 이십리 떨어진 곳이다. 그 다음은 청파(靑坡)가 있으니 안동 무인(武人) 권대의(權大義)가 이곳에 최초로 살았다. 본현의 향소(鄕所)를 경유하여 그 다음은 가동점(柯洞店)이 있는데, 현에서 30리 떨어져 있다. 그 다음은 용동점(鎔洞店)인데 현에서 36리 떨어져 있다. 그 아래는 장갈현이 현에서 41리 떨어져 있으니 영해의 임현과 영양과 경계하고 있는 곳이다. 청파로부터 1리 쯤에 갈림길이 있으니 왼편은 재산현(才山縣) 지로요, 오른편은 장갈현 지로이다.
남쪽으로 4리에 사천(沙川)이 있으니 녹전산(祿轉山), 요성산(邀聖山), 금학산(金鶴山), 골현(餶峴) 네 산에서 발원하여 남명(南溟) 동쪽 언덕에서 합류하여 남쪽 큰 시내로 들어간다. 겨울에는 토교(土橋)를 가설하고 여름에는 맨발로 건너 다닌다. 그 아래에 비암(鼻巖)이 있는데 큰 시냇물을 누르고 있는 듯 하며 그 위에 십여명이 앉을 만하니 또한 하늘이 만들어 놓은 절경이라 하겠다. 그 아래에는 선안역(宣安驛)이 있는데, 현에서 5리 떨어져 있으며 창락도(昌樂道)에 소속된다. 그 아래는 세현(細峴)이 있는데 현에서 9리 떨어졌다. 그 아래는 긴 시내가 있으니 물줄기는 정곡(井谷)에서 시작되어 조천(爪川)으로 흘러내려 가는데 현에서 10리 떨어졌다. 그 아래는 감마촌(甘麻村)이니 현에서 12리 떨어졌는데 예안과 안동 양읍의 경계이기 때문에 두 고을의 이정표가 있다.
서쪽으로 2리 떨어진 곳에 무덤 형상을 한 섬이 있으니 그 둘레가 30척이며 이기도(吏起島)라 부른다. 옛부터 이 섬이 있었기 때문에 죄인을 이곳에 가두었다고 한다. 4리 쯤 떨어진 곳에 큰 절이 있으니 지금은 무학당(武學堂)으로 만들었다. 태수(太守) 안욱(安旭)이 사목(事目)에 의거하여 최초로 설치했다. 그 12리 다음에 이현(梨峴)이 있다. 또 25리 뜸 가면 황장지(黃腸枝)이며, 또 30리를 가면 골현(餶峴)이 있다. 또 한 개울물이 흐르는데 용두(龍頭)와 신라(新羅) 두 산에서 발원하여 낙동강에 도달된다. 또 도마현(刀磨峴)을 넘어 40리를 가면 정자 한채가 있으니 소게정(召憩亭)이다. 이 정자는 농암(聾巖) 이상공(李相公)께서 영천군수(永川郡守)로 재직시에 세운 것으로 그 뒤 공께서 관찰사가 되시어 이곳에 와서 쉬었다. 나뭇가지들이 하늘을 뒤덮고 녹음이 땅에 가득하여 햇빛을 쬐며 다니는 사람들이 이곳에 나가면 마치 부모의 은혜와 같아서 그 정자 이름을 ‘소게정’이라 했다. 이 정자는 곧 예안과 영천 양읍의 경계에 위치한다.
북쪽으로 5리 쯤 떨어진 송현(松峴)이 있고 그 아래로 8리 쯤에 광현(廣峴)이 있다. 그 아래로 12리를 가면 온계(溫溪)가 있는데, 온계의 물줄기는 용두산에서 발원하여 마을 앞에까지 흘러온다. 태조산(太祖山)에서 흘러 내려온 물과 합해져서 한 줄기를 만들어 토계(退溪) 마을 앞으로 들러 들어가서 낙동강에 이른다.
또 13리 쯤 가면 온계라는 마을이 있는데, 퇴도 이선생께서 이곳에서 태어나셨다. 또 25리쯤 가면 태조동(太祖洞)이란 마을이 있는데, 예안과 봉화 양읍이 만나는 곳이다. 그 왼편은 점(店)이 있는데, 도공(陶工)들이 사는 곳으로 도산서원(陶山書院)에 딸려 있다. 옹기 가마에서 시내를 따라 1리쯤 거슬러 오르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청량산으로 가는 길이다.
* 예안의 오악(五岳)
동악은 축융(祝融), 서악은 녹전(祿轉), 북악은 용두(龍頭)
남악은 어탄(魚呑), 중악은 영지(靈芝)이다.
* 예안의 셋 내
동천(東川). 서천(西川). 낙천(洛川).
* 예안의 넷 들
면계(綿溪)들. 의인(宜仁)들. 공수(公需)들. 고통(高通)들.
* 예안현의 성씨
김(金), 이(李), 우(禹), 안(安), 권(權), 강(姜), 박(朴), 정(鄭), 최(崔), 가(賈) 김(金), 이(李), 류(柳), 오(吳), 신(申), 구(具), 김(金), 박(朴), 채(蔡), 심(沈), 손(孫), 금(琴), 윤(尹), 권(權), 이(李), 주(朱), 남(南), 임(任), 황(黃), 김(金)
김씨(金氏)의 본은 광주(光州). (光山)
이씨(李氏)의 본은 진보(眞寶). (眞城)
류씨(柳氏)의 본은 풍산(豊山)
오씨(吳氏)의 본은 고창(高敞)
신씨(申氏)의 본은 영해(寧海)
구씨(具氏)의 본은 능성(綾城)
김씨(金氏)의 본은 안동(安東)
박씨(朴氏)의 본은 천령(天嶺)
채씨(蔡氏)의 본은 평강(平康)
심씨(沈氏)의 본은 청송(靑松)
손씨(孫氏)의 본은 월성(月城). (慶州)
금씨(琴氏)의 본은 봉화(奉化)
윤씨(尹氏)의 본은 덕산(德山)
권씨(權氏)의 본은 안동(安東)
이씨(李氏)의 본은 영천(永川) (永陽)
주씨(朱氏)의 본은 웅천(熊川)
남씨(南氏)의 본은 영양(英陽)
임씨(任氏)의 본은 평해(平海)
김씨(金氏)의 본은 영양(英陽)
* 마을(坊里)
읍내면(邑內面)
관저리(官底里)
동부리(東部里)
서부리(西部里)
만촌리(晩村里) : 관문에서 3리 떨어져 있다.
교촌리(校村里) : 관문에서 3리 떨어져 있다.
대사리(大寺里) : 관문에서 3리 떨어져 있다.
선안리(宣安里) : 현의 남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3리 떨어져 있다.
월현리(月峴里) : 현의 남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5리 떨어져 있다.
양장리(羊場里) : 현의 서남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7리 떨어져 있다.
오천리(烏川里) : 현의 남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8리 떨어져 있다.
천전리(川前里) : 현의 남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5리 떨어져 있다.
서면(西面)
신안리(新安里) : 현의 서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10리 떨어져 있다.
가야리(佳野里) : 현의 서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10리 떨어져 있다.
사천리(沙川里) : 현의 서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15리 떨어져 있다.
양사리(讓仕里) : 현의 서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20리 떨어져 있다.
녹전리(綠轉里) : 현의 서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20리 떨어져 있다.
지례리(知禮里) : 현의 서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15리 떨어져 있다.
북면(北面)
신기리(新基里) : 현의 북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20리 떨어져 있다.
둔촌리(遁村里) : 현의 북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20리 떨어져 있다.
원당리(元塘里) : 현의 북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30리 떨어져 있다.
어리안리(於里安里) : 현의 북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35리 떨어져 있다.
굴현리(屈峴里) : 현의 북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25리 떨어져 있다.
의서면(宜西面)
운곡리(雲谷里) : 현의 북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20리 떨어져 있다.
안의리(安義里) : 현의 북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10리 떨어져 있다.
연곡리(鷰谷里) : 현의 북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15리 떨어져 있다.
온계리(溫溪里) : 현의 북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15리 떨어져 있다.
사곡리(斜谷里) : 현의 북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30리 떨어져 있다.
의동면(宜東面)
분천리(汾川里) : 현의 동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10리 떨어져 있다.
도산리(陶山里) : 현의 동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15리 떨어져 있다.
의인리(宜仁里) : 현의 동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10리 떨어져 있다.
상계상리(上溪上里) : 현의 동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15리 떨어져 있다.
하계상리(下溪上里) : 현의 동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15리 떨어져 있다.
천사리(川砂里) : 현의 동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20리 떨어져 있다.
단사리(丹砂里) : 현의 동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25리 떨어져 있다.
원대리(遠臺里) : 현의 동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20리 떨어져 있다.
백운지리(白雲池里) : 현의 동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25리 떨어져 있다.
이곡리(狸谷里) : 현의 동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20리 떨어져 있다.
가사리(佳士里) : 현의 동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35리 떨어져 있다.
고리현리(古里峴里) : 현의 동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30리 떨어져 있다.
광석리(廣石里) : 현의 동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40리 떨어져 있다.
동하면(東下面)
천상리(川上里) : 현의 동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7리 떨어져 있다.
역동리(易東里) : 현의 동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12리 떨어져 있다.
부포리(浮浦里) : 현의 동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10리 떨어져 있다.
대곡리(大谷里) : 현의 동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15리 떨어져 있다.
태동리(台洞里) : 현의 동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20리 떨어져 있다.
동상면(東上面)
성황리(城隍里) : 현의 동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30리 떨어져 있다.
전두리(田頭里) : 현의 동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20리 떨어져 있다.
도동리(陶洞里) : 현의 동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25리 떨어져 있다.
청구리(靑丘里) : 현의 동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20리 떨어져 있다.
말곡리(末谷里) : 현의 동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10리 떨어져 있다.
피박리(皮朴里) : 현의 동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40리 떨어져 있다.
장갈리(長葛里) : 현의 동쪽에 있으며 관문에서 40리 떨어져 있다.
* 풍속(風俗)
풍속은 절약하고 검소함을 숭상한다.(觀風案에 실려 있다). 지역은 편소(偏小)하고 토질은 척박하다(金孝貞)의「東樓誌에 들어 있다). 토질은 척박하고 백성들은 가난하다 (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있다).
* 형승(形勝)
물은 황지(黃池)에서 흘러 모든 구렁을 삼키고 산은 태백에서 빼어나 뭇 봉우리를 모았다. 영지산(靈芝山)은 북쪽의 진산(鎭山)이요, 낙동강은 남쪽에 걸쳐 있다.
* 산천(山川)
0 성황산(城隍山) 객관(客館) 북쪽에 있는데 진산(鎭山)이다.
0 녹전산(祿轉山) 현 서쪽 20리에 있다.
0 요성산(邀聖山) 현 북쪽 18리에 있다.
0 장갈현(長葛峴) 현 동쪽 30리에 있다.
0 영지산(靈芝山) 현 북쪽 5리에 있다.
0 용두산(龍頭山) 현 북쪽 20리에 있다. 고려시대 최선(崔詵)의「용수사기(龍壽寺記)」에 보면 ‘태백산 남쪽으로부터 삼백여리를 기복(起伏)하며 우뚝 빼어난 것이 있으니
바로 용두산 이다. 실로 영가군(永嘉郡)이 이산을 짊어지고 대도호부(大都護府)가되었다.’라 하였다.
0 비암(鼻巖) 현 남쪽 3리에 있는데, 높이가 십여 장(丈)이고 그 위에 5, 60명이 앉을 만하고, 앞으로는 큰 시내를 끼고 있어서 고을 사람들이 풍경을 감상하는 곳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예안현에 살고있는 김명원(金鳴遠)이 시를 짓기를
선성(宣城) 남쪽 오천(烏川) 북쪽에서
완연히 푸른 시내를 베고 있구나
오래토록 풍운애 모습 읾어버리고서
천년 세월 돌머리로 다시 태어났구나. 라 했다.
0 조산수(造山藪) 부진(浮津) 남쪽 언덕에 있다.
나화석천(羅火石川) 현 동쪽 28리에 있는데, 곧 봉화현(奉化縣) 매토천(買吐川) 하류이다.『신증동국여지승람』
『 퇴계선생문집』 속에서 박석(博石)은 청량산 동구(洞口) 밖에 있다고 한다.
0 솔량천(率良川) 현 동쪽 5리에 있는데 지금은 월천(月川)으로 고쳤다.
0 나화석천(羅火石川) 하류인데 현 남쪽 1리에 이르러 부진(浮津)이 되고, 남쪽으로 흘러 안동부(安東府)에 이르러 개목나무(견항진, 犬項津)가 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어떤 곳에서는 ‘손량천(損良川)’이라고도 하고 또 ‘솔내(率乃)’라고도 하는데 옛날에 상고함이 없이 부른 풍속에서 기인한 것이다. 동지(同知) 권수익(權受益)이 안동으로부너 천상(川上)에 시거하면서 월천으로 고쳤고, 그의 외손 월천조목이 그것으로 호로 삼았다.
0 부진(浮津) 현 남쪽 1리에 있는데 곧 나화석천의 하류이다. 남쪽으로는 요촌탄(蓼村灘)으로 흘러 들어가며 안동 남족 언덕에까지 도달한다.『신증동국여지승람』
0 태조봉(太祖峯) 현 북쪽 30리에 있는데 옛 선곡현의 진산이다. 그 위에 평탄한 곳이 있는데 세속에 전해오기를, ‘고려 태조께서 삼한(三韓)을 통합할 당시에 그 위에 올라 각처에 육사(六司)를 설치하였는데, 그것이 지금까지 의연하다’고 한다.
0 건지산(搴芝山) 현 동쪽 18리에 있는데 현의 금산(禁山)이다.
0 부용산 (芙蓉山) 현 동쪽 5리에 있는데 월천 조선생께서 정사(精舍)를 짓고 부용 정사(芙蓉精舍)라고 이름지었다. 중5, 6인이 그곳에 살았다.
또 삼대(三臺)가 있는데 왼쪽은 청원대(淸遠臺)요, 오른쪽은 미고대(彌高臺)며 동쪽에는광제대(光霽臺)가 있는데, 모두다 낙동강을 굽어보고 있다 가장 빼어난 곳이 이곳이 아니면 또 어디라 하겠는가.
월천 선생은 각처에 시를 남겼다.
0 어탄산(魚呑山) 현 남쪽 5리에 있는데 읍을 막아주는 문이며 수구이기도 하다. 위에는 운암사(雲巖寺)가 있는데 감사 김연(金緣)이 지은 것이다.
0 고통산(高通山) 현 동쪽 1리에 있는데 보림사(普林寺)가 그 안에 있다.
0 보진산(葆眞山) 현 동쪽 13리에 산은 높이 솟았고, 바위가 외롭게서 있는 것이 구렁틈 사 이로 살짝 보이기 때문에 권동지공(權同知公)께서 ‘보진’이라 이름 붙였다.
0 봉선산(奉先山) 현 동쪽 15리에 있는데 속명은 갈전산(葛田山)이다. 권동지공께서 이 산 속에다 부모를 장사지내고 묘소 아래에다 재사(齋舍)를 짓고 매년 명절제사를 이곳에서 지냈다. 농암(聾巖) 이선생께서 그의 외손으로서 다섯 아들을 거느리고 제사에 참석하니 자손들의 인끈이 재사 현액(懸額)에 걸린 것이 십여개나 될 정도로 많았다. 일시의 좋은 일로서 사람들이 모두 칭찬하였다. 월천선생 역시 외손으로 틈틈이 성묘하고 제사를 올렸는데, 외손들의 융성하고 현달함처럼 외선조(外先祖)를 추념하는 정성 또한 지극했으니 한때의 경사스러움이 어떠하였던가. 어떠하였던가.
그 때 지은 재사는 중이 거처하는 장소로 삼았기 때문에 운수(雲水) 20인이 늘 기거했다. 여주(驪州) 금개(琴愷)가 시를 지었는데.
마을은 검검소와 은둔으로 이름 났고
산천은 보진이라 이름 했네
이곳에 노닐며 깃들어 사노라니
그대의 영모하는 마음 알리라. 라 했다.
0 간음산(澗陰山) 현 동쪽 15리에 있다. 또는 ‘가운산(駕雲山)’이라고도 부른다.
0 지령산(芝嶺山) 현 서쪽 15리에 있다. 생원 윤의정(尹義貞)이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을 가지고 헌호(軒號)로 삼았다. 의산(蟻山) 현 서쪽 20리에 있다.
0 비봉산(飛鳳山) 현 서쪽20리에 있다. 그곳 정상 남쪽에 화림사(花林寺)가 있는데, 지원(智元)이라는 중이 고쳐서 본현 향소(鄕所)에다 복속시켰다고 한다. 절 뒤편 산마루는 평평하고 넓어 향로(鄕老)인 지령(芝嶺) 윤의정(尹義貞), 설월당(雪月堂) 김부륜(金富倫), 첨지(僉知) 이완(李完) 등 일시의 명류(名流)들이 때때로 이곳에서 약속해 모였다. 가까이 사는 이계(李繼)는 부자로서 술을 싣고서 와서 참석하였다.
지령(芝嶺) 윤의정(尹義貞)의 기문(記文)에.
‘병신년 4월 보름 이경장(李景長)이 술을 장만하여 이웃 사람들을 초청하였고, 그 다음날 화림사(花林寺) 뒤 봉우리에서 모두 모였다. 봉우리 정상이 매우 높아 동쪽으로는 청량산과 마주보고, 서쪽으로는 학가산을 껴안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죽령을 바라보며 불쑥 나솟은 모양이 남녘 하늘 저 멀리로 살짝 보인 것은 팔공산(八空山)이다. 서로 차례로 그 위에 앉아 우주를 부앙(俯仰)하고 그윽한 소회를 실컷 펼쳐 혹자는 취하기도 하고 시를 읊조리기도 하며 한때의 즐거움을 다하였다. 붓을 종횡무진 휘둘러 시를 쓰는 사람을 김설월당(金雪月堂)이요, 글을 씀에 다른 사람보다 다른 이는 윤지령(尹芝嶺)이며, 창안(蒼顔) 백발(白髮)을 휘날리며 상좌(上座)에 앉아 말씀하시는 분은 통정대부이신 대존장(大尊丈)이시다. 경장(景長)의 아들 광욱(光郁)이 이름이나마 기록하여 후세에 남겨 잊지 않게 할 것을 청하여 이처럼 기록하였다.
(경장(景長)은 이계(李繼)의 자(字)인데 뒷날 납속(納粟)으로 통정대부가 되었다). 라고 썼다.
김설월당(金雪月堂)이 시를 짓기를,
화림봉(花林峯) 위에서 남은 봄 기운 아쉬워하니
모두가 우리 고을 옛 친구이레라
술 한잔 마시고서 너풀 너풀 춤추다니
막 산을 내려 오는 길 달빛도 청아해라. 라 했다.
0 축융봉(祝融峯) 현 동북쪽 35리에 있는데, 청량산의 남쪽 봉우리이다.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이 이름 지은 것인데 문집 속에 자세하게 나온다.
0 명암(鳴巖) 현 동쪽 2리에 있다.
월천 선생이 시를 지었는데,
바위는 높이 솟아 모운(暮雲)이 비었는데
웃음 지우며 오르니 저무는 해가 붉어라
오늘은 그저 오육인만 올랐지만
다른 해에는 백성들과 함께 하리로다. 라 했다.
* 14곡 경치 좋은 곳
0 박석천(博石川) 이른바 나화석천(羅火石川)을 말하는데,
퇴계 선생께서 ‘박석천’으로 고친 것이다. 현 동쪽 30리 청량산 서쪽 기슭에 있으며, 이곳이 예안현의 제일곡(第一曲)이다.
○ 경암담(景巖潭) 태조산(太祖山) 동쪽 기슭으로 현 동쪽 20리에 있으며, 이곳이 예안현의 제이곡(第二曲)이다.
○ 고산(孤山) 옛부터 전해오기를 본래 두 산이 아니었으나 용(龍)이 그 산을 갈라서 둘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물이 두 산 사이를 뛔고 지나간다. 물 깊이는 잴 수 없는데, 이곳이 예안현의 제삼곡(第三曲)이다.
○ 일동정사(日洞精舍) 현감 금난수(琴蘭秀)가 하늘이 아끼고 땅이 감 추어 둔 별경(別境)인 이곳을 찾아서 정사를 꾸미고 홀로 오가는 장소로 삼았다. 퇴계 선생의 시가 있고 현감의 넷째 아들 금각(琴恪)의「일동록(日洞錄)」(뒤에 게재 됨).이 있다.
○ 월명담(月明潭) 예부터 전해오기를, 용이 깊은 못에 숨어 있기 때문에 가뭄이 심하면 고을 수령이 백성들을 위해 이곳에서 기우제(祈雨祭)를 올렸는데 영험이 있었다고 한다. 예안현의 제사곡(第四曲)이다.
○ 벽력암(霹靂巖) 그 아래에 깊은 연못이 있는데 그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이다. 이곳이 예안현의 제오곡(第五曲)이다.
○ 백운지(白雲地) 대장간이 십여집이 살고 있는데,
역동서원(易東書院)에 소속되었다. 만약 이 대장간이 없다면 역동서원에서 매년 거행하는 춘추(春秋) 제향(祭享)에 볼 모양이 없을 것이니, 크게 유관한 곳이다.
이곳이 예안현의 제육곡(第六曲)인데, 낙천의 왼쪽이다.
○ 단사협(丹砂峽)이 협곡은 곧 이지방의 절경으로 옛부터 신선이 그 안에 살고 있다고 한 다. 단사(丹砂) 역시 그곳에 있어서 신선들의 식량이 되기 때문에 단사협(丹砂峽)이라고 부른다.
이곳이 예안현의 제칠곡(第七曲)이다. 퇴계 선생께서 노래한 것이 있다.
○ 천사(川沙) 교수(敎授) 이현우(李賢佑))가 이곳에 터를 잡고 살기 시작하여 외손 금제수 (琴悌수)가 이어 살았다.
이곳이 예안현의 제팔곡(第八曲)이다.
○ 월란대(月瀾臺) 이곳은 퇴계 선생께서 이름을 붙인 곳으로 가는 곳 마다 읊조린 시가 있다. 낙천(洛川) 남쪽으로 제구곡(第九曲)이다. 근처에 절이 있다.
○ 분양(汾陽) 낙천 서쪽으로 제십곡(第十曲)이다.
농암 이상공께서 이곳에 태어났다.
○ 대라(帶羅) 낙천 서쪽 언덕 위로서 현에서 십리이다.
월천선생께서 이곳에서 태어났다. 이곳이 예안현의 제십일곡이다.
○ 비암(鼻巖) 낙천 위 현의 남쪽 2리쯤에 있다.
그 아래로 깊은 못이 있다. 이곳이 현의 제십이곡(第十二曲)이다.
○ 오천(烏川) 낙천 서쪽이다. 이곳이 현의 제십삼곡(第十三曲)이다.
○ 어탄(魚呑)낙천 동쪽에 낙천을 배경으로 우뚝하게 서 있다.
이곳이 예안현의 제십사곡(第十四曲)이다.
* 토산(土産)
인삼(人蔘), 봉밀(蜂蜜), 자초(紫草), 은구어(銀口魚). 철물(鐵物) 동쪽 上里에서 생산된다.『신증동국여지승람』서쪽 沙川에서 만들어 진 것이 좋다. 오미자(五味子), 석점(石簟)『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본래부터 없어졌다고 한다.
해송자(海松子) 칠(漆), 백복령(白茯苓), 설면자(雪綿子)
* 누정(樓亭)
0 추흥정(秋興亭) 객관(客館)에 있다. 홍희 원년에 현감 박결(朴潔)이 세웠고, 관찰사 하연(河演)이 이름을 지었다.
홍여림(洪汝霖)의 시에,
비단을 펼친 듯
네 창문엔 山色이 가깝고
유리를 깔아 둔 듯
온통 수색(水色)이 깊구나. 라 하였다.
○ 동루(東樓) 현 동쪽에 있다.
○ 쌍벽정(雙碧亭) 현 남쪽 1리 부진(浮津) 위에 있어 청산(靑山)을 등지고, 벽수(碧水)를 마주보고 있어 이런 이름을 얻었다. 현감 임내 신(任鼐臣)이 처음 세웠으며, 시가 있다.
쌍벽류는 벽수 가에 서 있는데
청량한 정취는 새벽녘에 더욱 새로워라.
자고로 선성(宣城)땅 경치 좋기로는
중국의 사조(謝眺)도 유람치 못한 곳이라네
시냇물은 천 길에 흰 실을 드리운 듯
고기 흩어지는 곳은 온통 은빛일세
실컷 노닐며 한가로운 흥취를 가지니
돌아갈때는 가지 못하게 수레 잡지는 않으리.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작은 고을 예안의 적막한 곳에
몇 번이나 원님을 보내고 새로 맞았던고
백성은 쇠잔하고 고을은 피폐하였는데
잘 다스리고 걱정 나눌 사람 없었도다
좋은 관사는 칠을 하여 빛이 나고
강 루는 푸른 대에 잠겨 은빛 물결일레
백년의 홍패가 풍속과 교화에 관계되니
저 후미진 곳의 백성들까지 즐거워 하는구나.
퇴계(退溪) 이황(李滉)
병부(病夫)로 한가롭게 시냇가에 누워서
읍정(邑政)이 새로워 졌다는 소식 즐겨 들었도다
객사를 곱게 단장했으니 축하할 일이요
강정까지 지었다니 더욱 놀랍다네
풍류 즐긴 사강락(謝康樂)은 얼굴이 옥과 같은데
글하는 사람 적어서 공연히 수염만 희구나
꿈 속에서 시를 초해보니 나를 기억해주니
어느 때 나막신 신고 산 속에 있는 내게 물어주리.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
띠집 추녀 그림자 강가에 어리니
천고의 아름다운 이름 다시 새로워졌네
그림 같은 강가의 고을엔 물색이 남았고
옛 시인은 바람 앞에 옥수가를 불렀다네
욕심을 잊고 날마다 눈같은 모래를 밟고
그물 던져 때때로 물고기 회도 맛 본다네
푸른 대와 솔들은 늙은이 시흥(詩興) 돋우는데
고을 원께서 도리어 갈천씨(葛天氏)) 백성 되었구려.
감사(監司) 이중량(李仲樑)
누추한 예안 고을에 정자가 서 있는데
노는 곳 그윽한 멋은 이곳에서 새로워라.
하필 양주(楊洲)에가서 학(鶴)을 타는 것을 구하리요.
원래 사람을 피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네
산에는 홀연히 꽃은 피어 비단을 펼친 듯
굽어 보니 강에 비친 달 흡사 은(銀)을 담은 듯
단청 입힌 정자에 다시 번화한 땅이 더해지니
뉘라서 함께 즐겁게 노닐까 모두 일민(逸民)이로세.
장응선(張應旋)
쓸쓸한 옛 고을은 조용히 강가에 서 있는데
정자 규모 새로운 것 오히려 놀랍다네
일부러 이 경관을 나그네에게 남겨서
비로소 정자가 주인을 만났음을 알리라
숲에서는 꽃잎이 또 얼마나 나부꼈던가
술 두루미 열고 안반 가득 회를 썰었네
그 중에 더러 마음 맞는 이를 물으니
반은 벗님네요 나머지는 백성이라네
이 정자는 강 위에 우뚝 서서 지나는 나그네들이 올라 보지 않는 이가 없었다. 감사(監司) 곽회근(郭懷瑾)이 중수하여 옻칠까지 마쳤는데 임진왜란을 만나고서도 불타는 화를 면하여 사람들은 모두 다행스럽게 여겼다. 을사년 대홍수 시에 떠내려가서 형체도 남지 않아 옛사람들이 남긴 시편들은 모두 묵은 발자취가 되고 말았으니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 척금당(擲金堂) 현 동쪽 1리에 있으니 옛 아문의 동헌이다. 높은 산을 등지고 큰 강을 끼고 드넓은 들판을 바라보는 위치에 있는데 고을 수령이 항상 이곳에서 공무를 처리하였다. 을사년 대홍수시에 떠내려가 형체도 없다. 척금당(擲金堂)이라 하기도 한다.
○ 사청(射廳) 동문에 있다. 현감 신지제(申之悌)가 객사(客舍) 동쪽 산성(山城) 바로 밑에 창건여 그곳에서 활쏘기를 익히게 했다. 후임 현감 김정룡(金廷龍)이 동문으로 옮겨 지어서 무예를 익히고 활을 쏘는 장소로 삼았다. 을사년 대홍수를 만나 역시 떠내려가 자취도 없었다.
* 향조(約條)
0 부모에게 불순한 자(불효한 자는 나라에서 정한 형이 있으므로 아직 그 다음 죄만 들었다.)
0 형제가 서로 싸우는 자(형이 잘못 되고 아우가 옳으면 균등하게 벌 하고, 형은 옳고 아우가 잘못이면 아우만 벌하고, 옳고 그름이 서로 반반이면 형은 가볍고 아우는 그 죄가 무겁다.)
0 가도(家道)를 패란(悖亂)하게 한 자(부부가 치고 싸움)
0 정처(正妻)를 내쫓은 자(처가 패려한 경우는 감등시킴)
0 남녀의 분별이 없는 자
0 적첩(嫡妾)을 뒤바꾼 자
0 첩으로 처를 삼은 자
0 서자로 적자를 삼은 자
0 적자가 서얼을 아끼지 않는 자
0 서얼이 도리어 적자를 능멸하는 자
0 일이 관부(官府)에 간섭되고 향풍에 관계된 자
0 망령되게 위례를 지어 관을 흔들며 사사를 행하는 자
0 향장(鄕長)을 능멸하는 자
0 수절하는 과부를 유산하여 더럽힌 자
이상은 극벌(極罰) 상(上) 중(中) 하(下)
0 친척간에 화목하지 않는 자
0 본처를 박대하는자. 처가 죄가 있는 경우는 감등한다.
0 이웃과 화목하지 않는 자
0 친구들과 서로 싸우는 자
0 염치를 돌보지 않고 사풍(士風)을 허물고 더럽힌 자
0 힘을 믿고 약한 사람을 능멸하고 침탈하여 다투는 자
0 무뢰배와 당을 만들어 횡포한 일을 많이 행하는 자
0 공사의 모임에서 관정(官政)을 시비하는 자.
0 말을 만들고 거짓으로 사람을 죄에 빠뜨리는 자
0 환란을 보고 힘이 있는 데도 앉아서 보고 구하지 않는 자
0 관가(官家)의 책임을 받고 공(公)을 빙자하여 폐해를 만드는 자.
0 혼인(婚姻)과 상제(喪祭)에 이유없이 시기를 지나치는 자
0 집강(執綱)을 업신 여기고 향령(響令)을 따르지 않은 자
0 향론에 따르지 않고 도리어 원망을 품는자.
0 집강(執綱)이 사(私) 따라 향안(鄕案)에 들어간 자.
0 구관(舊官)을 전송함에 있어 이유없이 참여하지 않은 자
이상은 중벌(中罰) 상(上) 중(中) 하(下)
0 공식 모임에 늦게 도착한 자
0 문란하게 앉아 예의를 잃은 자
0 좌중에서 떠들썩하게 다투는 자
0 앉을 자리를 비워놓고 편리한 대로 하는 자.
0 이유없이 먼저 나가는 자
이상은 하벌(下罰) 상(上) 중(中) 하(下)
0 가장 나쁜 짓을 일삼는 향리(鄕吏)로서 인가와 민가의 폐를 끼치는 자.
0 공물(貢物) 값을 비싸게 정하여 징수하는 자.
0 서인(庶人)의 신분으로 사족(士族)을 능멸하는 자.
* 불우(佛宇)
0 용수사(龍壽寺)
현 북쪽 22리 용두산(龍頭山) 아래에 있다. 고려시대에 성원(誠源)이라는 중이 창건했다. 의종(毅宗)이 석윤(釋胤) 이라는 중에게 용수사로 사액하고 최선(崔詵)에게 기문을 쓰게 하여 절 안에 비석을 세우게 했다. 이 절은 큰 거대한 사찰로서 옛날에는 진(鎭)이 있었기 때문에 수승(首僧) 삼보(三寶) 등을 임명했다. 법당의 명칭은 원통보전(圓通寶殿)이며, 동편은 별실(別室)이라 불렀다. 또 조금 동편에는 지장전(地藏殿)이 있고, 서편에는 조전(祖殿)이, 왼편에는 선당(禪堂)이 오른편에는 내승당(內僧堂)과 외승당(外僧堂)이 있다. 앞쪽에는 누각이 있으니 종루(鐘樓)요, 서편의 누각은 수월루(水月樓)이며 또한 층계 방이 있으니, 원통장사(圓通藏師)와 객실(客室)이다. 동편의 누각은 삼보방(三寶房)이다. 법당 위의 두 전은 극락(極樂)과 나한(羅漢)으로 각처에 크고 작은 탱화들이 걸려있다.
○ 성천사(聖泉寺)
요성산(邀聖山) 아래에 있다. 역시 거대한 사찰로서 규모는 용수사와 동일하다.
○ 골내사(骨乃寺)
영지산(靈芝山) 서쪽에 있었으나 지금은 이미 없어진지 오래나 아직 남아 있다.
○보림사(普林寺)
현 동쪽 10리 고통산(高通山) 속에 있다. 앞쪽으로는 묵봉(墨峯)이 우뚝하게 솟아 있다. 수도승들이 육로로 걸어와 고림사(高臨寺)에 기거하기도 하고 이곳 보림사에 기거하기도 했다. 두 암자에는 세 고승들이 서로 왕래하며 마침내 도를 터득하여 부처가 되었기에 지금의 부촌(浮村)이 되었다. 금씨(琴氏)들이 이곳에 옮겨 재궁(齋宮)을 이루었다. 옛터가 잇다.
○운암사(雲巖寺)
현 남쪽 7리 어탄산(魚呑山) 위에 있다. 감사 김연(金緣)이 중에게 명하여 암자를 지어 유식하는 장소로 삼았다. 임진왜란 중에 사람들에 의해 방화되었는데, 병오년에 이르러 그의 증손자 김광계(金光繼)가 선세의 발자취를 느꺼워 하여 중 德安에게 명하여 중창하니 우뚝하게 옛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 낙천을 굽어보며 항상 수양하는 장소로 삼아 중 서너명이 그곳을 지키며 살았다. 조상의 뜻을 이어받은 ‘긍구당(肯構堂)’이라 할 만하다.
○화림사(花林寺)
비송산(飛鳳山)속에 있다. 중 지원(智元)이 중수하여 우리 예안고을 향소(鄕所)에 소속시키고 종이를 만들어 바친다.
○월란사(月瀾寺)
현 동쪽 15리에 있으니 계촌(溪村)의 남산(南山)이다. 퇴계 선생께서 유식하던 장소이기 때문에 곳곳마다 시가 남아 있다.
* 동하리(東下里)
한곡(寒谷). 금곡(金谷). 부라(浮羅). 대라(帶羅). 면계(綿溪). 분천(汾川)
* 읍내(邑內)
남명(南溟). 지삼(知三). 만리(萬里). 천남(川南). 가락동(加樂洞).
오천(烏川).
* 서면(西面)
조곡(條谷). 지례(知禮). 가야(檟野). 서현(鋤峴). 봉산(鳳山). 녹전(祿轉) 사천(沙川). 의현(蟻峴). 능곡(陵谷).
* 북면(北面)
원당(元堂) 골매((골)梅) 오천((烏川) 둔벌(屯伐)
* 의동(宜東)
대리방(大里方). 박석(搏石). 담릉(潭陵). 일동(日洞). 백운지(百雲池). 항곡(項谷). 천사(川沙). 단사(丹砂). 토빈계(吐(빈)界). 의인(宜仁)
* 의서(宜西)
온계(溫溪). 사곡(斜谷). 귀래곡(貴來谷)
* 장점(匠店)
금곡(金谷)(갓바치 대그릇 버들) 말곡(末谷) 사리곡(沙里谷) 원흑(元黑) 용동(鎔洞) 피박(皮朴) 물매(勿每) 사곡(沙谷) 항곡(項谷) 백운지(白雲池) 박석(博石) 소두들(所頭들) 능동(陵洞) 녹전(祿轉) 골매(㐔梅)
* 영현(嶺峴) 고개
0 안령(鞍嶺) 현 서쪽 20리에 있다.
○ 성고개(城古介) 현 서북쪽 2리에 있다.
길 빽빽이 소나무가 심겨 있다.
○ 송현(松峴) 현 동북쪽 5리에 있다.
○ 광현(廣峴) 현 북쪽 10리에 있다.
○ 대현(大峴) 현 북쪽 29리에 있다. 용두산(龍頭山)이 바로 이곳이다. ○ 도마현(道磨峴) 현 북쪽 30리에 있는데 영천(榮川)과 봉화(奉化)의 경계가 된다.
○ 탄현(炭峴) 현 동쪽 15리 예안 현의 경계이다.
○ 의령(蟻嶺) 현 서쪽 29리에 있으며 영천(榮川)과의 경계이다.
○ 불현(佛峴) 현 동북쪽 25리에 있다.
○ 골현(鶻峴) 현 북쪽 25리 황장산(黃腸山) 아래에 있다.
○ 이현(梨峴) 현 북쪽 15리에 있다.
○ 세고개(細古介) 현 남쪽 15리에 있다.
○ 방잠고개(方岑古介) 현 남쪽 7리에 있다.
○ 홍현(洪峴) 현 서쪽 16리에 있다.
○ 장갈현(長葛峴) 현 동쪽 40리에 있다. 영해와 경계가 된다.
○ 탄현(炭峴) 현 서쪽 20리에 있다.
○ 청고현(聽敲峴) 현 동쪽 5리에 있다.
* 승처(勝處) 경치 좋은 곳
0 비암(鼻巖) 위에 보임.
○ 월명담(月明潭) 옛부터 용추(龍湫)라고 전해온다. 퇴계 선생께서 지금 명칭으로 고쳤다. 가뭄이 들면 관가에서는 이곳에서 가우제를 지낸다.
○ 고산(尻山) 현 동북쪽 25리에 있다.
그곳의 주인은 현감 금난수(琴蘭秀)이다. 퇴게 선생의 시가 있다.
○ 단사협(丹砂峽) 현 동쪽 20리에 있다. 퇴계 선생이「팔영(八詠)」을 남겼다.
○ 천연대(天淵臺) 현 동쪽 12리 도산서원 앞 낙강 위에 있다.
퇴계 께서 은거하며 시를 읊조리던 장소이다.
○ 탁영담(濯纓潭) 천연대(天淵臺) 아래에 있다.
○ 농암(聾巖) 현 동북쪽 10리에 있다.
효절공(孝節公) 이현보(李賢輔) 선생께서 호로 삼았다.
○ 풍월암(風月巖) 현 동쪽 8리에 있다.
생원 윤의정(尹義貞)이「설(說)」을 지어 주인인 권시중(權是中)
에게 주었다.
○ 풍월담(風月潭) 풍월암 아래에 있으니 곧 낙천이다.
퇴계선생께서 그 연못 이름을 ‘풍월담’이라 했다.
○오담(鰲潭) 역동서원 앞 관수대(觀水臺) 아래에 있다.
물이 깊어 그 깊이를 잴 수 없을 정도이다.
○ 월천정(月川亭) 낙천 위에 있다.
생원 채승선(蔡承先)이 지은 정자였으나 작고한 뒤 비바람에 허물어져 그 후손 채간(蔡衎) 이 3칸으로 고쳐 지었으나 지금은 자손으로 지키는 사람이 없다. 정자는 진작 퇴락하여 겨우 옛 터만 남아 있다.
○ 산수정(山水亭) 현 남쪽 3리에 있다.
○ 명암(鳴巖) 현 동쪽 1리에 있다. 월천 선생의 시가 있다.
○ 침류정(枕流亭) 현 남쪽 5리의 낙천 위에 있다.
주인인 병마절도사 김부인(金富仁)이 정자를 짓고 침류라고 이름을 지었다. 지금은 없어지고 옛 터만 남아 있다.
○ 능운대(凌雲臺) 현 동쪽 12리에 있다.
진사 이원승(李元承)이 지었다.
* 사묘(祠廟)
0 사직단(社稷壇) 현 서쪽 5리 쯤 되는 산 위에 있다.
○ 문묘(文廟) 현 서쪽 4리에 있다.
○ 성황사(城隍祠) 현 뒷산 성 안에 있다.
신증(新增) 매년 단오날에 관리들이 술과 고기를 정갈하게 장만하여 무녀나 광대로 하여금 크게 풍악을 잡히고 그곳에 제사 지낸다. 다 음날은 의인(宜人) 폐현(廢縣)의 성황사(城隍祠)에 제사지내는데, 그 곳 사람들이 역시 술과 음식을 장만하여 고을 사람들과 함께 모여 하루 종일 춤추고 노래불러서 취하여 토할지경에 이르러 마친다.
○ 상현사(尙賢祠) 역동서원에 있다.
○ 상덕사(尙德祠) 도산서원에 있다.
○ 향현사(鄕賢祠) 향사당(鄕射堂)에 있다.
○ 여제단(厲祭檀) 현 북쪽 시동(柴洞) 산 속에 있다.
* 일동록(日洞錄)
선성(宣城) 북쪽에 산이 있으니 청량(淸凉)이요, 청량산 남쪽에 봉이 있으니 축융(祝融)이다. 축융봉 아래는 바로 일동(日洞)이다. ‘일(日)’이라고 하는 것은 동리에 월담(月潭)이라는 연못이 있어서 그 병처럼 좁은 골에 일월(日月)을 어느 하나만 들어 쓸수 없었기 때문이다.
동부(洞府)가 그윽하고 멀며 묏뿌리들이 높이 솟아 마치 조물주가 도와준 것 같다. 봉우리는 축융봉(祝融峯)으로 세 번 구비쳐서 동리 오른편으로 솟아 오른 것이 자운봉(紫雲峯)이다. 다시 솟아 동리의 왼쪽에서 높게 서 있는 것이 월출봉이다. 일출봉과 서로 바라보며 자운봉 오른편에서 불쑥 나솟은 것은 송휘봉(送暉峯)이다. 산은 송휘봉으로부터 동쪽으로 구비쳐서 북쪽으로 동리 앞을 싸안은 것이 내병산(內屛山)이요, 일출봉으로부터 남쪽 꺾어져 내려가 다시 서쪽으로 내병산 밖으로 달려가는 것이 외병산(外屛山)이다. 내병산을 등지고 자운봉을 바라보며 불쑥 깎아지른 듯 그 가운데 서 있는 것이 고산(孤山)이며, 냇물이 산 북쪽에 흘러 내려가는 것이 낙천(洛川)이다. 낙천 북쪽에는 절벽이 있으니 취벽(翠壁)인데, 그것은 높이가 천길이나 되며 수백보를 구비쳐 내려와 자운봉 서쪽 기슭에서 강을 바라보며 갑자기 끊어진 것이다. 세속에서는 취벽과 고산은 본래부터 두 개의 산이 아니었는데, 용이 절벽을 쳐서 두동강 나 물에 떠내려 왔다고들 한다. 그들의 말을 들으면 믿을 수 없지만 그 모양을 보면 그런 것도 같다. 시냇물은 송휘봉으로부터 아래로 내려와 취벽과 만나서 동쪽으로 산 절벽에 부딪혀 잠깐 머물러서 깊은 연못을 만드니 아주 물이 깨끗하고 파초에 그림자가 져서 푸르른 기운을 띠고 있는데 그곳이 바로 도영담(倒影潭)이다.
남쪽으로 내병산 기슭으로부터 외병산에 이르러 아래로 흘러 흰 물결을 치며 몇 리쯤 가면 그 깊이가 족히 백척이나 되며 금빛 모래가 깨끗하게 빛나고 옥과 같은 자갈이 펼쳐져 있으니, 곧 두 봉우리가 합세하는 곳으로서 그이름이 일동과 짝이 되는 곳이다. 동리는 그윽하지만 조용하지는 않고 산은 높지만 지나치게 좁지 아니하여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함’을 겸하였으니 참으로 이른바 ‘고반(考槃)의 낙지(樂地)’로서 서른 여섯곳 가운데 한군데이다. 비록 그러한 좋은 땅이 있지만 아직 그곳을 즐기는 사람이 없으니 별천지의 경계가 황폐한 나무떨기 속에 버려져 있어 얼마나 세월이 흘렀는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 선조 군자가 있은 뒤로부터 비로서 들어났으니 이곳은 곧 하늘이 만들어서 땅이 간직하였다가 그것을 내어준 것이리라. 백성들이 그곳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는데 돈을 주고 사서 드디어 띳집을 지었으나 얼마 가지 못하여 무너져버렸다. 부친께서는 다시 취벽 근처로 옮겨서 바위에다가 돌을 쌓고 띳집 대신 기와로 지붕을 덮어서 ‘일동정사(日洞精舍)’라고 하였다.
정사의 서쪽 암록(巖麓)에는 두 층의 대(臺)가 있으니 아래에 있는 것은 선학대(仙鶴臺)요 위에 있는 것은 소요대(逍遙臺)이다. 곧바로 도영담(倒影潭) 위에서 굽어보면 푸른 물이 드넓게 펼쳐졌고, 푸른 숲들은 굽어보면 강산의 경치가 한 번 봄에 모두다 얻어질 수 있었다. 고산(孤山) 위에 또한 두 대가 있으니 동쪽의 것은 수운대(水雲臺)요 서쪽은 것은 망선대(望仙臺)로서 그곳에다 매화나무와 소나무, 회나무를 심어서 정자를 지으려 하였다. 이러한 계획은 도리어 시간만 흘러 그렇게 되지 못했다.
산 허리 부분에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솟아 있으니 담수(潭水)와 만나 그곳에서 낚시질할 수 있는 곳으로 조대(釣臺)이다. 조대 아래에 바위가 둥글게 강 한복판에 펼쳐져 있어서 그곳에다 배를 맬 수 있는데 바로 계주암(繫舟巖)이다. 교암(橋巖)은 두 연못 사이에 돌이 서로 연결되어 어지럽게 흘러가는 것이 있으니 마치 교량과 같다. 와룡암(臥龍巖)은 월명담(月明潭)에 있는데 그 기절한 모양이 계주암과 꼭 형제처럼 닮았다.
대는 갈매기를 짝말한 하니 반구대(伴鷗臺)이며, 바위를 고기를 잡을만 하니 어기(漁磯)라 하였다. 또 아기랭이 낀 숲 사이 구름이 흐르는 들판에 주막과 시골집들이 있는 곳에 용단(龍壇), 열정(迾井), 유저(柳渚), 사포(沙蒲) 등도 모두다 자기의 마음에 맞아 이리저리거닐며 스스로를 즐길만한 곳이다.
이로부터 부친께서는 그곳에 가시지 않는 달이 없고 한 번 가시면 문득 여러날을 계시면서 돌아오실 줄 몰랐다. 퇴도(退陶) 선생께서 매양 이곳에 유람 오시어서는 이름을 바위틈새에다 남겨 두셨는데, 직접 쓰신 글씨가 아직 남아 있다. 항상 기문(記文)을 쓰고자 하고 가는 곳마다 시를 지으려 했으나 뜻을 이루기도 전에 선생께서 갑자기 돌아가셨으니 참으로 애석하도다. 그뒤 십수년만에 내가 허하곡(許荷谷)에게 배웠는데, 하곡은 곧 시를 잘 짓는 사람이었다. 또 일찍이 그는 퇴계 선생에게 직접 글을 배웠으니 퇴계 선생께서 우리지 못하신 것을 하곡이 아니면 누구에게 맡길 수 있겠는가. 이에 부친께서는 시와 기문을 그에게 청하였는데, 일동(日洞)의 산수(山水)는 이로부터 더욱더 고매하고 더욱더 깨끗하게 될 것이다. 이것을 기록하여 하고게서 보내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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