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동 초.중.고 총동창회 기념문집 원고)
상동은 우리들의 생명줄
상동중 5회 박 양 조
이천한나원교회 원로목사
대한중석 상동광산은 우리나라 국민들과 광산 종업원들은 물론 특히, 우리 가족에게 생명줄이 되었다. 생각해 보니 육신적인 생명의 원동력이었을 뿐만 아니라 나에게는 신앙과 노년의 취미생활에 기초가 되었다.
먼저, 상동광산이 육신적으로 생명줄이 된 것을 생각하려면 1.4후퇴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겠다. 우리 가족의 고향은 황해도 황주이다. 아버지께서 장로님으로 6.25한국전쟁 이전까지 공산주의자들에게 괴롭힘을 당하시다가 1.4후퇴 때에는 더욱 위험을 느끼고 월남하기로 작정하셨다. 먼저 아버지께서 형과 나를 데리고 개성으로 가고, 어머니는 소달구지에 짐을 싣고 여자들과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개성에 가서 만나기로 했다. 그러나 흑교에서 탄 기차가 3일 걸려 사리원에 왔는데, 앞으로 개성까지 가려면 일주일이나 더 걸린다고 하여 그 때가 12월이라 화물칸에 탄 형과 내가 추위에 얼고 굶주려 도중에 사고날 것 같아 부득이 기차에서 내려 해주 옆에 있는 취야로 갔다. 거기에는 외가집이 있었는데 외할아버지께서 “며칠 전에 유엔군이 북진했으니까 며칠 쉬었다가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셔서 3일쯤 놀고 있었는데, 유엔군 전투기가 북한군의 남하를 막기 위하여 다리를 폭격했다. 또한 피난민들에게 물어보니 이미 개성으로 가는 길이 막혀 바닷길을 통해 섬으로 가고 있다고 하여, 우리도 급하게 피난 보따리를 싸들고 육도라는 섬으로 가는 배를 타려고 바닷가로 갔는데, 배는 작은 것 몇 척밖에 없고 피난민은 구름떼처럼 많았다. 우리 가족들은 모두 20명이나 되어 한꺼번에 타기란 불가능했다. 아버지께서 섬에 먼저 가서 배를 주선해 보아야 하겠다면서 혼자 배를 겨우 타고 십리 떨어진 섬으로 가셨다. 나는 이틀이 지나도 소식이 없자 ‘아버지 보고싶다’고 칭얼거렸다. 할아버지께서 ‘너희 먼저 가라’고 우리 형제를 젊은 사람에게 맡겨 간신히 배를 탔다. 그런데 30분 후에 북한군이 들이닥쳐 총을 쏘며 배를 모두 불질러 버렸다. 그야말로 기적적으로 간신히 탈북했다. 반갑게 아버지를 만났다. 아버지는 밤에만 배를 겨우 주선하셨고 우리는 빈집에 가서 먹고 자고 있었던 것이다.
그 후 20일쯤 있다가 육도섬이 육지에서 너무 가까워 북한군이 언제 침투할지 몰라 불안하여, 아버지가 큰 어선의 선주 중에 기독교인을 알아보고 타협하여 기독교인 수십 명과 함께 연평도로 월남했다, 거기에서도 밤에 폭격을 하고 가족들을 만날 수가 없어 인천으로 또 이주했다. 아버지는 부두노동을 하여 인건비로 라디오 방송으로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라는 광고를 내보냈다, 그런데 어느 주일에 아는 사람을 만나 우리 어머니 일행이 김포 산골 교회에 있는 것을 알았다. 즉시 찾아가서 반갑게 만났다. 어머니는 개성에서 우리를 찾지 못하고 생각하다가 밤에 임진강을 건넜다. 다행히 모든 식구가 건강했다. 또한 해방 직후에 월남해서 군인이 된 외삼촌이 찾아와 경북 영주의 기차역에서 헌병대장으로 복무하고 있는 것을 알았다. 서로 상의하여 온 가족이 영주로 가서 고무신 장사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수입이 적어 힘들어 하던 중 외삼촌이 군대에서 피서모임에 다녀 와서 상동광산을 소개해 주었다. “상동은 중석광산인데 수출이 잘 되어 봉급날이면 개들도 돈을 물고 다니고, 명절이면 개들도 선물을 물고 다닌다”라는 소문을 알려 주었다. 아버지는 수입이 좋다는 말에 상동광산에 취직하고 우리 가족은 모두 이사하게 되었다. 우리 가족의 생활이 안정이 되었다. 그야말로 상동광산은 우리의 생명줄이 되었다. 더 나아가서 상동은 우리 국민의 생명줄이며, 모든 종업원들의 생명줄이 되었다. 특히, 명절 때가 되면 생선과 옷감 등은 물론이고, 추석선물로 독일제 재봉틀을 주어서 오랫동안 요긴하게 사용했다고 어머니는 매우 고맙게 생각하셨다.
나는 교촌에 있는 구래초등학교 4학년에 편입했다. 시골 학교이지만 산 아래 있는 것이 좋았고, 친구들도 순진해서 좋았다. 나는 공부가 재미있었고, 하칠랑리에 있는 상동중학교에 입학했다. 저자거리에 있는 우리 집에서 좀 멀었지만 잘 걸어다녔다. 한여름에 더울 때는 집에 오다가 치랭이골에 가서 시원하게 물장난을 치기도 하고, 길가에 있는 샘물을 마시기도 했는데 찬물을 머리에 부으면 그야말로 ‘머리가 빠개지는’ 것 같았다.
나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명문고등학교에 다행히 입학했다. 그 당시에 상동중학교에는 실력있는 선생님들이 많이 계셨다. 그들 중에는 건강이 좋지 않아 휴양하시기 위하여 피서지인 상동을 택하신 것이다. 그래서 졸업생들 중에는 서울을 비롯한 다른 지역의 고등학교를 택한 경우가 많이 있었다. 특히, 우리 아버지께서는 젊을 때 만주에 가서 한지 장사를 하셨고, 서울에 구경 오셨다가 한강이 마음에 들어 여비로 흑석동에 있는 적산가옥을 예약한 경험이 있어, 아들들을 서울로 전학시켰던 것이다.
감사하게도 나는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하여 현대그룹에서 15년동안 근무했으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회사를 그만두고, 특별한 신앙적 체험이 있어 직업전환을 하여 신학대학원에 들어가 신학공부를 한 후 목사가 되었다.
상동은 나의 신앙생활에도 생명줄이 된다. 먼저 나의 아버지의 신앙부터 잠시 소개하려고 한다. 아버지께서는 이북의 고향에서 이웃 동네에 미국 선교사가 교회를 개척할 때 적극적으로 협조하여 젊어서 장로가 되셨다. 그 후 월남하여 인천에 잠시 머무를 때 교회에서 기거하였다. 또한 상동에 있을 때 감리교회의 앞에 있는 사택에서 생활했다. 그러나 장로교인이었으므로 생활이 안정되자 지인들과 함께 구래초등학교 앞에 상동중앙교회라는 교회를 짓고 목사님을 청빙하셨다. 나도 부모님을 따라 교회에 열심히 출석하고, 중학교 3학년 때는 중등부 회장으로 봉사하였다. 그 후 서울에 와서는 가정교사를 하며 서울역 앞에 있는 성남교회를 다녔다. 그 때 카나다 여자 선교사가 영어성경반을 지도하여 열심히 배우며 신앙도 성장했다. 대학교 시절에는 영락교회에 출석하며 한경직 목사님으로부터 신앙을 잘 배웠다. 또한 결혼해서는 기아자동차에서 근무하며 시흥교회 차관영 목사님으로부터 신앙의 핵심을 배웠다. 또한 울산 현대중공업에 근무할 때는 전하교회에 다니며 진정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특히, 나의 아버지께서 잘 아시는 정찬준 목사님이 강원도에서 오셔서 교회를 개척하시면서 천막으로 시작하여 작은 블로크 예배당을 지었다가 금방 부흥하여 벽돌집을 짓게 되었는데, 청년들과 함께 토요일 오후부터 세멘트를 반죽하여 바닥을 치며 정성껏 건축하고, 장로장립을 하게 되었는데 내가 장로 3인 중에 피선되어 33세에 장로가 되었다. 회사에서는 직장신우회를 조직하여 성경공부와 기도회를 지도하였다. 특히, 하루는 주일 아침에 사택에서 걸어가며 출근하면서 나도 모르게 기도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은 거룩한 주일인데 장로가 교회에 가는 것이 아니라 직장으로 출근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즉시 말씀으로 응답해 주셨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 6:33)인데, 이 말씀 중에서 “먼저”가 ‘직장이 우선이 아니고 신앙이 우선’이라고 즉시 해석이 되었다. 그 후 나는 직장을 옮겨 창원에 있는 현대정공에 갔다가 거기서도 신앙생활에 저촉되는 문제가 발생하여 결국은 사퇴하고 신학대학원에 입학한 후 목사가 되어, 결국은 직업전환을 하게 된 것이다.
나는 중매결혼을 했다. 나의 아버지와 함께 신앙생활을 잘 하시던 장로님이 서울로 이사하셨는데 서울의 교회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잘 하시는 장로님의 딸을 중매했다. 중매자가 양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특히, 나는 재학 중에 입대하여 마침 카투사에서 복무한 후 제대하여 아르바이트가 필요하던 때에 중학교 친구가 기독교 서적 번역을 소개해 주어 열심히 번역을 하고 있었다. 마침 장인의 직업은 기독교 서적 출판과 판매였다. 나는 결혼하는 즉시 “선다 싱의 생애”를 번역하게 되었다. 그 후에 계속 번역하여 “할레이 성서 핸드북” 등 수십 권을 번역했다. 특히, 내가 신학대학원에 입학하는 해에 사회복지법인 이천한나원을 설립하면서 나를 설립이사로 등록했다. 나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즉시 이천한나원교회를 담임하고, 노인복지시설 이천한나원의 원감이 되었다가 원장인 한영제 장로님이 교단의 중책을 맡게 되어 내가 원장이 되었다. 나는 시설에서 숙식을 하며 애착심을 가지고 헌신봉사했다. 그 후 70세가 되어 교회에서 28년만에 은퇴하고 원로목사가 되었고, 시설에서는 원장을 은퇴한 후 대표이사로 5년동안 봉사했다.
내가 수필가로 등단하여 노후에 취미생활을 잘 하고 있는 것도 상동중학교에서 시작되었다. 중1 때 방과 후에 글짓기 대회가 있었다. 분야는 시, 수필, 단편소설이었고, 제목은 몇 개 지정되었다. 나는 수필로 “구름”을 썼다. 설명은 부족했지만 끝부분에 “흰 구름은 민주주의와 같고, 검은 구름은 공산주의와 같다”로 썼더니 의외로 입상이 되었다. 그 후 수필에 관심을 가지고 책을 읽었고, 특히 직장을 은퇴하기 3년 전에 은퇴교수님이 지도하시는 부악문학회에 가입하여 매주 숙제로 글을 썼다. 어느 수준에 오르자 잡지사에 추천하여 수필가로 등단하게 되었다. 그 후에 어느 기독교 주간신문사를 우연히 방문하였다가 사장님에게 등단 이야기를 하였더니, 마침 칼럼을 쓸 자리가 있다고 하여 용감하게 집필을 시작하게 되었다. 감사하게도 8년이 넘었지만 지금도 원고를 매주 계속해서 보내고 있다.
상동은 나에게 그야말로 여러 분야에서 “생명줄”이 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기적’같은 일이고, 신앙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께서 은혜로 인도해 주셨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