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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성취와 기대
김홍정의 역사소설 “금강” 3부작을 읽고
조 동 길(소설가/공주대명예교수)
김홍정의 역사소설 “금강” 3권을 한 달여 만에 <드디어> 다 읽었다. 여기서 <드디어>라고 표현한 것은 몇 가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소설로서는 드물게 한 권의 분량이 500페이지가 넘는 그 압도적인 양적 중압감과 아울러 그 내용이 다른 소설 읽듯 가볍게 술술 읽을 수 없는 무게감을 갖고 있는 사실이 저절로 이런 표현을 나오게 했다. 저자로부터 직접 서명을 한 책을 받아 단숨에 읽지 못하고 한 달이나 걸려 독파하게 된 것은 우선 다른 소설 대여섯 권 분량의 책을 세 권에 압축하여 담은 물리적 형태에도 있지만 그보다는 작품에서 다루고 있는 치밀하고 꼼꼼한 역사적 사실과 그에 못지않게 작가의 혼이 녹아들어 있는 도도한 상상력이 단 한 줄, 한 페이지도 쉽게 읽어 넘길 수 없게 하기 때문이었다.
작품을 다 읽고 나서 머릿속에 남아 있는 아쉬움과 안타까움, 그리고 연민과 의분이 소용돌이를 일으켜 한 동안 아무 일도, 어떤 생각도 진행시킬 수 없었다. 도대체 많은 사람들을 편안하고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해 수많은 세월을 거치며 고안된 정치 제도의 본질은 무엇이고, 또 아등바등 이 세상을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 삶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선을 지향하고 악을 징계하는 정의는 과연 어디까지 실현 가능한 것인가.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과 권리를 누리고자 하는 상식은 꿈과 상상에 그치고 마는 것인가. 이 책은 이런 본질적 의문들을 불러 일으켜 다시금 내 앞을 거대한 장벽처럼 막아서는 느낌을 아프도록 되새기게 했다.
책에는 이 작품에 대한 전문가들의 해설이 두 편이나 붙어 있다. 거기에서 이 작품이 갖고 있는 특색과 의미, 그리고 가치에 대해 자세하게 다루었기 때문에 굳이 여기서 그 내용을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 글을 쓰는 필자는 거의 평생을 소설을 가르치고 연구하는 일을 하며 살았다. 그리고 미흡하나마 40여 년 동안 쉬지 않고 소설을 써 왔다. 소설을 창작하는 작가로서, 또 소설을 연구하는 학자로서 이 작품에 대해 몇 가지 생각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첫째, 소설의 문장과 서술에 관한 문제다. 상식적인 얘기지만 소설의 조상은 원래 음성 언어로 발화하고 청취하는 형태였고, 그 내용은 선험자들의 압축된 체험이었다. 이를 통해 삶의 지혜를 전승하고 확장했다. 즉 예전의 모든 교육은 이런 형식으로 이루어졌고, 그 교육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재미있는 이야기가 동원되었던 것이다. 이런 서사는 오래 전승되어 오면서 인류 역사를 발전시키고 향상하는 기능을 수행했는데, 근대에 접어들면서 문자 사용의 보편화로 서사 전승 형태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더 큰 흥미와 효과를 위해 문자로 서사를 창작하는 과정에 작가의 상상력이 더해지고, 독자들은 굳이 이야기를 들으러 모이거나 멀리 갈 필요 없이 이런 서사를 혼자 방 안에 앉아 향유할 수 있게 되었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요즘 오직 돈벌이에만 급급한 상업화된 많은 소설들이 소설의 기본이라 할 문장에 소홀한 경우가 쌔고 쌨기 때문이다. 반면 이 소설의 문장은 국어 교사로 오래 근무한 작가의 장점이 한껏 드러난 경우라 할 수 있다. 부분적으로 퇴고가 완벽하지 않은 곳도 더러 있기는 하지만 이 소설의 문장은 모범을 넘어 거의 완전함에 접근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작가가 창조한 인물이거나 실제 인물이거나 그 신분과 지위에 꼭 맞는 언어를 구사하는 것은 모든 작가들이 고민하고 있는 문제인데, 이 작품에서는 그것이 거의 완벽하게 성취되었다. 사대부들의 근엄한 언어와 서민들의 상스러운 일상 언어가 한 치의 모자람도 없이 상황에 부합하게 잘 구사되고 있음은 물론 각 지역 출신 인물들의 방언 역시 현지의 언어를 완전에 가깝게 재현해 냈다.
일찍이 1920년대부터 우리 소설에서 부분적으로 지역의 방언이 활용되기 시작했지만 그것은 특정 지역에 국한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는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함경도, 평안도 등 우리나라 전 지역의 방언은 물론 중국어나 일본어까지 활용되고 있어서 그 인물들의 성격 구현이나 현지의 실감을 배가하고 있다. 이는 우리 소설사에서 어느 작가도 성취해 내지 못한 이 작가만의 독특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작가가 얼마나 많은 공부와 고심에 찬 노력을 기울였을까, 하는 생각에 이르면 절로 감탄이 나오고 경탄을 금치 못하게 한다.
둘째, 역사적 사실과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내용의 중후함과 균형감이다. 이 소설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조선 16세기 80여 년의 시기는 잘 알려져 있듯 여러 차례의 사화와 당쟁으로 점철된 시대였다. 이 시기와 그 내용을 다룬 기존의 작품들도 많이 나와 있는 형편이다. 자칫하면 음모와 술수, 배신과 복수로 일관할 수 있는 제재들이기도 하다. 실제 기존의 많은 작품들이 이런 모습을 하고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작품은 이런 동일한 제재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루고 있다. 즉 사림(士林)이라는 세력을 중심으로 내세워 그들에 의해 어떤 경우에도 변치 않고 또 변해서는 안 되는 새로운 세상을 향한 염원을 고수하게 함으로써 패를 갈라 서로 죽이고 죽는 사화와 당쟁을 차원이 다른 이야기로 변환시켜 놓았다. 얼핏 서사의 흐름을 방해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는 한시와 악부 등을 지루할 정도로 반복하고 있는 것은 작가의 현학적 지식을 과시하는 게 아니라 사림들의 꼿꼿한 자세와 함께 죽음을 불사하는 신념과 포기할 수 없는 이상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 소설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내용이 궁중 비사나 야담 류의 흥미를 갖고 있음에도 그것을 전면에 드러내지 않고 있는 사실이나 기존의 여러 작품에서 취급된 민란의 방식과도 거리를 두고 있는 것은 작가의 역사를 바라보는 균형적 관점을 강력히 시사한다. 이 점은 작품의 성격을 규정하는 데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일견 사대부들의 당파 싸움과 인내심에 한계를 느껴 죽음을 각오하고 봉기한 민중들의 민란 사건을 절충한 듯도 하지만, 그것은 단순한 산술적 절충이 아니라 작가의 정밀한 계산에 의한 균형감의 소산이라고 보아야 한다. 유교의 중용(中庸)이나 불교의 중도(中道)는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그것은 시의(時宜)에 맞는 선택과 과감하게 기존의 것을 버려야 성취될 수 있는 경지다. 이 소설에서 사림이 꿈꾸는 유토피아는 그것을 절묘하게 성취하는 힘으로 작용한다.
셋째, 이미 나와 있는 해설에서도 지적된 바 있지만 여성을 중심에 놓은 서사 구성의 숨겨진 의미다. 이 작품의 부제는 연향, 미급, 부용의 세 여성 이름으로 되어 있다. 앞의 두 여성은 젊은 나이에 억울하게 대의를 위해 목숨을 잃지만 작가가 좀 파격적이라 할 정도로 이 여성들을 작품의 전면에 내세우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다들 알다시피 조선, 특히 16세기만 해도 여성은 사회의 주류가 될 수 없었다. 남성을 중시하는 유교의 억음존양 논리에 따라 수백 년 동안 여성은 실제로는 사회 구성원의 절반을 차지하면서 가정과 사회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엄연히 종속적 존재에 불과했다. 물론 일부 가문에서 여성에게 남성과 동등한 재산 분배를 했다거나 출가한 딸이 친정의 제사를 모시는 경우도 있긴 했으나 그것은 부분적 예외적 사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 작품에서 여성을 중심에 설정한 것은 그 당시나 지금이나 어느 경우에도 여성이 남성의 종속적 존재에 머무는 세상은 완전치 못한 불구적 사회라는 작가의 신념이 작용한 결과로 해석할 수 있다. 소설 속 사림의 신념에 따른다면 신분에 따른 차별이 용납될 수 없듯이 성에 따른 차별은 절대로 허용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의 연장선에서 설정된 채선, 은우, 하현 등 소리꾼 여성들과 발품꾼 장수 패가 이룬 마을의 곱례 등의 수많은 이름 없는 여인들, 도원 마을의 한 별장 부인 등 각계각층의 다수 여인들은 그들이 세상의 주인이고 또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만 함을 강조하려는 작가의 의도적인 노력의 결과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결말 부분에서 부용이 봉기하여 떠나는 아들 창과 작별하며 어머니로서 반드시 돌아올 아들을 기다리겠다는, 그 영혼으로라도 꼭 돌아오라 당부하는 말은 단지 자신의 아들에게만 하는 말이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어머니를 대변하여 새로운 세상을 기다리고 염원하는 발언으로 해석할 수 있다. 무량사라는 이름처럼 아들을 기다리는, 세 세상을 기다리는 어머니 부용의 마음은 그 양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크며 깊을 것이고, 이는 어떤 남성 인물로도 해 내기 어려운 여성만의, 오직 어머니이자 여성 인물로서만 가능한 역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넷째, 이 소설을 통해 궁극적으로 작가가 지향하고 있는 작가의식의 중요성이다. 무릇 어느 시대, 어느 지역의 작가를 막론하고 상업성에 매몰되지 않고 진지한 작품을 창작하는 작가는 동시대의 증언자적 역할과 함께 미래를 예측하는 예언자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이는 프랑스의 작가 스탕달 등이 이미 갈파한 바 있는 상식에 속하는 말이다. 그래서 어떤 사상가는 소설가를 ‘지적 성직자’에 비유하기도 했다.
이 소설에는 기백 명의 인물과 수많은 사건들이 중첩되어 있다. 그 많은 인물과 사건들은 단순히 흥미와 분량만을 위해 동원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진정으로 추구하려 했던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사림들이 꿈꾸던 염원과 하등 다르지 않다. 원래는 부처님의 자비광명이 온 세상을 골고루 비치고 있다는 뜻으로 사용되던 말인 ‘월인천강’의 이념은 사림들의 간절한 염원으로 변환되어 집약된다. 여기에 종교적인 차이는 존재할 틈이 없다. 그것은 부처의 가르침과 공자의 가르침이 회통 융합하는 사실을 들지 않더라도 이미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추구해 마지않는 대동 세상을 뜻하기 때문이다.
신분과 지위, 재산과 성별의 차이가 차별이 아니라 각기 제 자리에서의 역할과 책임으로 수행되었을 때, 거기에는 그 어떤 고통과 절망도 자리할 수 없다. 이는 많은 선인들이 목숨을 걸고 지키려 했던 고귀한 가치이자 어떤 경우에도 포기할 수 없는 인류의 희망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의 작가는 이러한 염원을 사림, 여성, 장사꾼, 농부, 승려, 공장이, 소리꾼, 뱃사람 등 다양한 인물들을 통해 구체화하고, 또 수많은 사건과 의로운 죽음을 통해 그 내용을 더욱 강화하고 동시에 심화시켰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이것이 단지 지나간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우리 현실과 직결되는 문제라는 점에서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과학과 정보의 발달로 인간의 이성을 극대화한 현재에도 우리 주변에서는 날마다 차별에 따른 비극과 불행이 그치지 않고 있다. 이를 극복하려는 엄청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완화되지 않고 더욱 고착되고 심화되어 가고 있다. 이 소설의 작가는 바로 여기에 착안하여 수백 년 전의 사건과 인물을 현재화함으로써 이 문제를 환기한다. 이런 점에서 이 소설은 벽초가 비슷한 시기의 백정 출신인 “임꺽정”을 통해 식민지 시대 현실을 우회적으로 수렴하고 비판했던 창작 의도를 계승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은 춘원이나 월탄 류의 낭만주의 역사소설이 아니라 벽초나 빙허가 추구했던 리얼리즘 역사소설 계열이 분명하다 하겠다.
다섯째, 칭찬과 찬사 일색의 이 작품에 대한 평가와 달리 아쉬움을 몇 가지 들고 싶다. 솔직히 이 부분은 공개적 글로 쓰는 것보다는 작가에게 직접 말하는 게 더 적절하겠다는 생각도 없지 않으나 작품을 바라보는 객관적 자세는 작가에게뿐 아니라 독자에게도 필요한 일이기에 엄정한 독서와 작가의 발전을 위한 고언 차원에서 언급하고자 한다. 당연히 작가에 대한 애정이 없다면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우선 말하고 싶은 것은 방대한 작품 진행에 메인 스토리가 미약하다는 점이다. 앞에서 언급되었던 벽초의 “임꺽정”에는 일찍이 각 장마다 주인공이 달리 설정되어 전체로 통합되는 독특한 구성법이 사용된 바 있는데, 그 작품에는 분산된 그런 부분적 이야기들이 의형제 결의라는 제도로 수렴되고, 또 갖바치라는 인물에게 독자들의 시선을 묶어 놓는 역할을 맡겨 놓는 방식으로 그 약점을 보완하였다.
그런데 이 작품에는 전체를 통괄하는 인물이나 중심을 이루는 스토리가 모호하여 부분적으로는 뛰어나게 빛나는 작품이 전체로 통합되는 힘은 상대적으로 미약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여러 인물들이 공통적으로 염원하는 새로운 세상 건설이라는 이념이 그 역할 아니겠느냐는 반론도 있을 수 있고, 또 송사련이라는 관상감 출신의 인물이 시종일관 불편부당한 입장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역할을 갖바치에 빗대어 볼 수는 있겠으나 그 완성도 면에서 평면 비교하기는 어렵다고 판단된다.
실제 인물인 송사련을 신비화하기에는 무리가 있겠으나 그에게 좀 더 탁월한 능력을 부여하여 더 많은 사건에 관여하게 하고, 전체 사건들을 조망하면서 일관성을 담당하게 했더라면 하는 생각은 필자만의 일방적 욕심일까. 요컨대 그에게는 서림의 역할이 아니라 갖바치 양주팔의 역할이 필요했다는 말이다. 그랬더라면 메인 스토리의 모호를 넘어설 수도 있었을 거란 생각이다.
다음으로는 작품 미학의 완성도에 관한 아쉬움이다. 역사소설도 엄연히 소설인 이상 소설로서의 미학이 성취되어야 함은 불문가지다. 소설 미학의 평가 기준으로 흔히 문장의 정확성과 완성도, 작가의 현실의식, 그리고 구조의 완성도 등 세 가지를 꼽는다. 이 작품의 문장이나 작가의 현실의식은 이미 앞에서 말한 대로 거의 완벽의 수준에 도달해 있다.
다만 아쉬운 것은 구조적 완성도다. 방대한 내용에 더해 대여섯 권 분량의 작품에 작은 분량의 작품에나 요구되는 조금치도 더하거나 뺄 수 없는 탄탄한 구조를 요구하는 것은 애초 이상적 욕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작품은 집필 착수 이전 작가의 선결적 요건에 의해 이미 정해진 길만을 고수하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이 짙다. 더불어 설정된 인물들도 자신의 성격에 따른 독자적 생존이 미흡하게 처리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심하게 말하면 많은 인물들이 그 스스로의 힘에 의해 사고하고 행동하는 게 아니라 작가의 의도를 구현하기 위해 동원된 수단적 지위로 격하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서술된 수많은 에피소드들 중에 일부는 필연성 있게 전체 구조에 작용하고 있지 못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는 것도 작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한 가지만 더 말한다면, 루카치가 말했듯 진정한 역사소설은 역사를 단순한 과거의 사실로 다루지 말고 현재의 전사로서의 역사로 다루어야 한다는 말처럼 16세기 사림과 이름 없는 백성들의 염원을 현재의 것으로서 의미화 하는 데 좀 더 신경을 썼더라면 하는 아쉬움이다.
물론 이는 쉽게 성취하기 어려운 일에 속한다. 그러나 세계적 문호들의 작품에서 과거의 역사를 당대의 것으로 묶어 두지 않고 현재화함으로써 영원성과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사실 명작이라고 하는 게 특별한 게 아니다. 우리 주변의 사소하고 일상적인 것들에서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원리를 찾아내 작품화하는 과정이 바로 세계적인 명작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이 작품은 아직 부분적으로 16세기 이야기에 머물러 있다는 혐의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한 것 같다는 아쉬움이 약간은 남아 있다.
두말할 필요 없이 이런 아쉬움은 작품 전체가 이룩한 큰 성과에 비하면 옥에 티 정도도 되지 않는다. 전문가의 눈이 아니라면 얼마든지 넘어갈 수 있는 사소한 것들이기도 하다. 다만 혹시 개작을 하거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수정 작업 수행에 작은 도움이라도 되라는 격려와 욕심의 차원에서 거론한 것들이니, 이는 괘념할 필요조차 없는 노파심으로 치부해도 아무 상관없는 얘기이기도 하다.
이 작품의 작가는 필자와 개인적으로 여러 인연이 겹쳐 있는 사람이다. 공주라는 같은 지역에 살면서 소설을 쓰고 있다는 사실은 물론 사적으로는 고등학교 대학의 직속 후배이기도 하다. 직접 수업을 받지는 않았지만 작가가 고3 학생일 때 그 학교에 교사로 근무했던 인연도 있다. 당시 필자는 소설 쓰기에 몰두했던 시절이니 만약 이 작가가 소설을 쓴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 인연의 모습이 달라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런 인연 때문에 이 작품이 나왔을 때 누구보다도 반가웠고, 또 이런 능력을 갖춘 작가가 같은 국어 교육 종사자이자 후배라는 사실이 너무도 자랑스러웠다. 작품을 읽으면서 필자가 오래 전부터 계획만 가지고 있을 뿐 아직도 실행하지 못하고 있는 공주 지역 배경의 부분을 읽으면서는 선수를 빼앗겼다는 후회와 더불어 1920년대 김동인이 염상섭의 ‘표본실의 청개구리’ 출현을 두고 ‘강적이 나타났다’고 했던 심정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어떤 선배나 스승도 능력이 출중한 후배의 출현에 축하의 박수를 보내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부디 강건한 가운데 건필을 지속하여 더 훌륭한 작품으로 우리 소설사를 빛낼 작가가 되기 바라는 마음 그 누구보다도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