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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발을 씻은 여인
누가복음 7장36-50절
요한이 보낸 자가 떠난 후에 예수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훌륭한 자니라. 기록된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준비하리라 한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그러자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은 의롭다”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은 그의 세례를 받지 아니함으로 그들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저버렸습니다.
1. 예수님을 초청한 바리새인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7:36)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였습니다(36절). 한 바리새인은 '바리새인 중의 한 사람'이란 뜻입니다. 이러한 표현은 당시 많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적대시하던 터에 그 중의 한 사람이 식사를 초대하였던 이례적(異例的) 성격을 나타내기 위한 표현으로 보입니다. 이 바리새인의 이름은 시몬(40절)이었으나 그의 신상에 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습니다. 유대에서의 '시몬'은 매우 보편적인 이름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초대한 일은 일견 용기있는 태도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바리새인들을 위시한 유대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안식일 규례와 같은 율법을 준수하지 않고 세리나 창기같은 죄인들과 어울리는 죄인으로 정죄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초대는 하였으나 냉랭한 자세로 손님을 맞이하였습니다(44-46절). 이로 보아 아마 이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초청한 이유가 예수님께 대한 사랑이나 존경에서 나온 것은 아닌듯합니다. 그가 예수님을 믿지 않으며 선지자로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는(39절) 이 사실을 뒷받침해 줍니다. 이 바리새인은 병자를 고치기도하며 또 많은 군중들이 예수님께 몰리는 것을 보고 그에게 호기심이 생겼을 수도 있고 또 그에게 '큰 선지자'적인(17절) 능력이 있는가 알아보고도 싶었을 것입니다. 아울러 군중들에게 추앙받는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청함으로 자신도 추앙받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나아가 예수님께 대해 고소할 빙거(憑據)를 찾기 위해 초대했으리라는 추측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누가는 이 구절 외에도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초대한 예를 두 곳에서 들고 있습니다(11:37; 14:1).
2.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씻은 여인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7:37-38)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를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왔습니다(37절). 이 여자를 창기(娼妓)로 보는 견해(Meyer, Bruce)도 있으나 성경에서는 그녀가 어떤 종류의 죄를 범하여 죄인이라는 낙인이 찍히게 되었는지 전혀 언급이 없습니다. 아마도 이 여인은 한 때 나쁜 길에 빠졌었고 그녀의 타락이 공공연히 알려지게 되어 그 이후로 그녀는 죄인 취급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녀는 비록 죄인으로 취급받고 있었지만 이전부터 들어온 예수님의 소문에 희망을 갖고 그를 찾게 되었습니다. 그가 들었던 소문은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과 함께 하시며 죄를 용서하신다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 때문에 그녀는 매우 귀중한 향유를 가지고 나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향유 담은 옥합은 향유를 담기 위해 만들어진 둥근 그릇으로 손잡이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릇 속에 든 기름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목부분을 깨뜨려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옥합은 매우 값진 품목이었다고 하며(Pliney) 그 속에 든 향유도 값진 것이었습니다. 이런 종류의 고급 향유나 값비싼 화장수는 보통 로마의 부유한 여인들이 주로 사용했으며, 구하기도 어렵고 매우 귀했기 때문에 매우 가치있는 재산으로 여겨졌습니다. 따라서 이 향유는 그 여인이 특별한 목적으로 구입하였을 것입니다. 한편 당시의 풍습에 따르면 적선을 구하는 거지들은 초청을 받지 않고도 잔치에 들어가 음식 부스러기들을 얻어갈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여인도 그러한 비천한 무리들 틈에 섞여 있었을 것입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뒤로 와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었습니다(38절). 그녀는 예수님의 발 곁에 서자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이는 그녀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자 과거에 지은 죄에 대한 억제할 수 없는 슬픔을 느꼈고 아울러 예수님의 인격 자체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이 그의 마음을 움직임으로써 그녀는 울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녀는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았습니다. 여인은 자신으로 하여금 영적인 눈을 뜨게 하고 삶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다주신 예수님께 대한 사랑과 감사의 마음이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녀는 예수님께 표현할 수 있는 최대의 경의를 나타내기 위해 머리를 풀어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닦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머리를 풀어 발을 닦았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의 관습에 의하면 여자가 사람들 앞에서 자기 머리를 풀어 내리는 것은 수치스러운 행동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수치를 무릅쓰고 감격과 경의를 표했던 것입니다. 여인의 왕관이라고 할 머리털로써 예수님의 먼지 묻은 발을 닦는 모습에서 그녀의 철저한 겸손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을 초대해 놓고서 발 씻을 물조차 제대로 준비해 주지 않은 바리새인의 뻔뻔함과 대조됩니다.
예수님의 발을 닦은 여인은 그 발에 입 맞추었습니다. 이는 가장 헌신적인 복종과 존경을 표하는 행동이며 특히 헬라어 원문상 '카테필레이'라는 미완료 시제가 사용되는데('입맞추고') 이것은 반복적인 행동을 강조하는 표현인바, 예수님께서 들어오신 후 계속해서 예수님의 발에 입을 맞췄다는 의미입니다(Robertson).
여인은 예수님의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었습니다. 대체로 존경의 표시로 향유를 부을 때는 머리에 붓는 것이 관례였으나 이 여인은 이례적으로 발에 부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발에 접근하는 것조차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녀가 보여준 것은 바로 눈물의 회개와 벅찬 감격의 봉헌(奉獻)이었습니다.
한편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인이 지녀야할 신앙의 행동을 몇 가지 살필 수가 있습니다. (1) 복음을 듣고 알아야 합니다(37절, 알고). (2)예수께 나아가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여야 합니다(예수의 뒤로...서서 울며). (3)전폭적으로 헌신하여야 합니다(자기 머리털로 씻고). (4) 철저하게 순종하여야 합니다(그발에 입맞추고). (5)최선의 봉사를 해야 합니다(향유를 부으니). 이러한 신앙의 행동이 있을 때 우리는 늘 구원의 감격 속에서 살 수 있습니다.
3. 예수님을 판단한 바리새인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7:39)
예수님을 청한 바리새인은 여인의 행동을 보고 마음에 생각합니다.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줄을 알았으리라”(39절) 시몬은, 여인의 기름 바르는 행동을 보고서 한편으로는 몹시 기분이 상했고 또 한편으로는 회심의 미소를 흘렸던 것 같습니다. 그가 못마땅한 투로 혼자 중얼거린 것은 죄인인 한 여인이 식탁으로 접근한 사실에 대한 불쾌감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은근히 기뻐한 것은 예수님께 대한 그의 의혹을 정당화할 만한 단서를 찾아내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생각에 의하면 예수님이 선지자라면 당연히 발 앞에 무릎 꿇은 여인이 죄인임을 알았을 것이고 또한 그녀를 물리쳤을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죄인의 신분에 있는 사람이 몸에 손대는 것을 허용하신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눈에 똑같이 천박한 사람으로 비쳤던 것입니다. 그 바리새인은, 과연 예수님이 사람들의 칭송을 받을 만한 선지자인가 하는 문제에 골몰하고 있었지만, 예수님께서 죄인을 불러 의롭게 하기 위해 오신 메시야시라는 점에 대해서는 도무지 무지하였습니다(5:32). 한편 원문의 가정법 형식은 사실이 아님을 단정짓는 표현입니다.
4. 바리새인 시몬에게 비유로 말씀하신 예수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그가 이르되 선생님 말씀하소서.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7:40-42)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은 겉으로 표현하지 않고 심중에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나 예수님께서는 이미 그 생각을 알고 계셨습니다. 바리새인은 마음속에 예수님께서는 선지자도 아니며 그 여인이 어떠한 여인인지도 모르는 형편없은 사람이라 생각하였으나, 예수님은 이미 그 여인의 영적 상태를 간파하여 그녀에게 구원을 베푸시고(50절) 바리새인이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는 것조차 알아차리시고 그에게 논박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신적 전지성(全知性)은 그의 메시야되심에 대한 증거의 일례가 됩니다.
예수님은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셨습니다. 여기서 바리새인의 이름이 '시몬'이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교만하고 사악함을 실책하시는 투로 말씀하시지만 그를 적대시하거나 미워하기보다는 그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시면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의 잘못됨을 바로 잡아주려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다”고 말씀하셨습니다(41절). 예수님께서는 종종 하나님께 빚진 자들에 관해서 언급하셨습니다(17:10; 마 6:12; 18:23-35). 그런데 마 6:12의 경우에는 죄가 구체적으로 빚과 동일시됩니다.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그 빚의 탕감 여부가 죄 용서 문제와 동일시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서 빚의 예화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진 인간의 빚은 너무 많기 때문에 아무리 많은 선행을 한다할지라도 그 빚을 상쇄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탕감(蕩減)은 하나님께서 우리게 베푸시는 은총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에게 다른 사람을 용서하라는 상응되는 의무를 부과해 주며 이 일을 행하기를 거부하면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주기도문 내용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됩니다(마 6:12).
'데나리온'은 당시 로마의 은화로서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됩니다. 그러므로 오백 데나리온은 노동자 한 명이 오백 일을 벌어야 하는 돈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다”고 말씀하십니다(42절). '탕감하여'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카리사토'는 '무효로 주다', '취소하다'는 뜻의 '카리조마이'의 부정 과거형입니다. 이는 탕감의 행위가 철저하고 완전하게 행해졌음을 시사합니다. 그리고 이 말의 어원은 '은혜'를 나타내는 '카리스'입니다. 따라서 본 비유는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노력과는 전혀 무관하게 값없이 주어졌음을 나타냅니다. 그러므로 그 은혜를 믿음과 감사함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어떠한 노력과 선행으로써 구원에 이르려고 하는 행위는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무가치하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역시 값없이 만드는 것입니다. 성도의 선행은 거저받은 바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로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이른바 성령의 열매이지(엡 2:8,9) 구원의 조건인 것은 아닙니다.
5. 시몬의 대답과 예수님의 판단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이르시되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7:43-46)
시몬이 대답하여 말합니다.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43절). 예수님의 질문은 평범한 식견을 가진 사람이라면 쉽게 답할 수 있는 상식적이고도 자명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시몬은 매우 주의깊게 대답했습니다. 아마 그는 예수님의 놀라운 지혜에 관한 소문을 듣고 있었던 터라 자신이 내뱉은 말 한마디 한마디에 긴장을 늦추지 않았을 것이며 더구나 목전에 일어난 상황으로 말미암은 불쾌감과 흉한 속마음을 표출시키지 않기 위해 조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은 “네 판단이 옳다”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시몬의 악한 마음을 정면으로 꾸짖지 않으시고 그의 판단을 '옳다'고 하십니다. 이는 시몬으로 하여금 자신이 범한 무지를 스스로 깨닫고 부끄러운 상황을 직시하게끔 하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시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다”(44절). 손님이 방문하면 주인은 먼저 그를 상석에 앉게 하고 손님의 손과 발을 씻기 위해 물을 준비하는 것이 통례였습니다(창 18:4; 19:2; 24:32; 삿 19:21). 그러나 시몬은 예수님을 자기 집에 초청해 놓고 그러한 통례적인 예의조차 갖추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으로부터 아무런 대접도 받지 못하셨으나 여인으로부터는 전폭적인 헌신의 예를 받으셨습니다. 엎드려 발에 입을 맞추고는 눈물을 흘려 머리털로 발을 씻는 행위의 헌신과 향유를 붓는 재물의 헌신은 성도가 지녀야 할 신앙 자세를 시사합니다.
예수님은,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45절). 입맞춤은 자연스러운 영접 인사였습니다(창 29:13; 45:15; 삼하 15:5).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몬은 예수님께 대해 이런 예를 갖추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주인으로부터 당연히 받게 되어 있던 환영의 입맞춤도 받지 못한 반면, 여인으로부터 발에 입맞춤을 받으셨습니다. '그치지 아니하였다'는 것은 이 여인이 과거의 어두운 세월을 예수님께 묵언(默言)으로 토로하는 중에 복받치는 감격과 희열을 경험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다”고 말씀하십니다(46절). 머리에 기름을 붓는 행위는 존경하는 손님에게만 특별히 행하는 것은 아닙니다. 뜨거운 태양 밑에서 걸어다닌 사람의 머리에 기름을 붓는 것은 당연한 예의였습니다. '감람유'는 다량 생산되고 값도 싸기 때문에 누구나 손님에게는 머리에 이 기름을 부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몬은 이 일조차도 행치 않았던 것입니다. 반면에 그 여인은 가장 값진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부었습니다. '머리'와 '발' 그리고 '감람유'와 '향유'는 극명한 대조를 더해주며 시몬과 여인의 예수님께 대한 사랑의 대조를 보여줍니다.
6. 죄사함을 선언하신 예수님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함께 앉아 있는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예수님은 여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7:47-50)
예수님은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47절). 여기서 '많은'(폴라이)이란 강조하기 위한 말인데 '모두'라는 의미를 내포합니다. 이것은 그녀의 죄가 아무리 크고 많다고 해도 모두 사해졌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사하여졌다'(아페온타이)는 완료형 동사로 ‘모든 죄를 사함받아 지금은 온전한 상태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 여인의 죄가 사하여졌는데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입니다. 이 구절은 많은 논쟁을 일으키는 부분입니다. 카톨릭 학자들은 이 구절을 해석함에 있어 사랑, 즉 여인이 행한 사랑의 행위 때문에 용서를 얻게 된 것을 말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사랑이 용서의 원인이 된다고 말하면서 행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마 언뜻 보기에 여기 사용된 접속사 '호티'('이는')는 이러한 해석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것처럼 보이며 그러한 해석으로부터 카톨릭의 공덕설(ontritio caritate formata) 같은 교리가 나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 가지 이유때문에 이러한 해석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첫째, 접속사 '호티'는 그녀의 죄가 사해진 '이유'나 '근거'를 나타내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전체 비유와 50절이 보여주는 바와같이 그녀의 죄가 참으로 용서되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증거'를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이 용서의 이유나 원인이 아니라 사랑을 보여줌으로 죄가 사해졌다는 것을 '입증'합니다(Lenski). 둘째, 성경 전체의 사실을 고려해 볼 때 그러한 해석은 억측일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인간의 행위나 공로로 죄사함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죄사함은 오직 은혜로 내려진 것입니다(엡 2:8,9). 셋째, 그러한 해석은 예수님께서 비유해서 보여주시고자 하는 요점(42절 참조)과 상치됩니다. 비유의 요점은 두 채무자가 그들의 빚을 은혜에 의하여 탕감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서 그녀의 사랑은 용서의 원인이 아니고 결과(Bengel, Meyer, Farrar, Ellicott 등)로 봐야 합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48절). 예수님께서는 여자에게 직접 말씀하시면서 처음에 말씀(47절)하셨던 것처럼 '저의 많은 죄'라고 하지 않으시고 '네 죄'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시몬이나 그녀가 모두 죄를 용서받아야 할 똑같은 처지에 놓여 있으며 또한 그 여인이 사함받은 죄란 어떤 특별한 범죄 행위에만 국한되지 않고 알게 모르게 지은 모든 죄와 근원적인 죄까지도 포함된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죄사함에 대한 공적인 선언을 하신 이유는 이 여인으로 하여금 죄사함의 확신을 갖게 하시기 위함이었음과 아울러 지금까지 사람들이 그녀에 대해서 가진 선입견을 바꾸어 놓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아직까지 그녀를 소문난 죄인으로 간주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함께 앉아 있는 자들이 속으로 말합니다.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49절). 앞서 중풍병자를 고칠 때에도 이와 같은 반발이 있었습니다(5:21). 그때 바리새인들은 죄 사하는 권세로 사함을 선언하신 예수님을 신성 모독자로 정죄하였습니다. 여기서도 이들은 눈물로 회개하며 죄사함을 얻은 여인과는 대조적으로 자신들의 죄악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의 아들이 죄를 사하는 것을 보면서 '참람'하다는 생각을 나타내었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말씀하십니다(50절). 이는 47절의 해석을 둘러싼 논란에 쐐기를 박는 구절로서 구원이 인간의 공로가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구원하였다'(세소켄)는 완료형으로 이미 구원을 받았고 지금도 구원받은 상태로 남은 것을 말합니다. 이 말은 여인이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음으로 이미 구원에 이른 상태였던 것을 보여줍니다. 다만 예수님께서는 이미 확보된 구원을 공공연하게 선언하신 것입니다(8:48).
“평안히 가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하신 작별의 인사입니다. 이러한 유대인의 작별인사는 '하나님의 평화가 그대의 것이다'라는 의미를 지니는 전통적인 표현이나(삿 18:6; 삼상 1:17; 삼하 15:9; 왕상 22:17) 이 구절에서는 더욱 깊은 뜻을 나타냅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이 여인이 예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구원을 확증받은 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멸시받던 죄인인 그녀에게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아 새사람이 되었으니 평안한 마음으로 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명령형은 평안 상태의 항구성(恒久性),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가로막힌 죄의 담이 허물어짐으로써 누리게 되는 영속적인 평안을 시사합니다. 평강의 왕이신 예수님을(사 9:6) 영접하는 모든 사람은 다 이러한 영속적이고도 참된 하늘의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행 2:28; 엡 6:23; 몬 1:20 ; 히 9:22).
적용: 믿음으로 사는 삶
예수님을 찾아왔던 여인은 눈물로 그의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씻은 후 향유를 그 발에 부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메시야(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고백한 행위였습니다. 그녀의 이런 모든 행위는 믿음으로부터 나온 행위로 예수님께 인정받고 죄사함의 선언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믿음으로 구원받은 것이었습니다. 복음서 전체를 보면 예수님은 언제나 믿음을 보인 사람들에게 구원을 선언하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바울도 그의 서신서를 통해 계속 강조하는 것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고 이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엡 2:8).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사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먼저,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되심을 믿고 고백해야합니다. 예수님께 나아와 자신의 죄를 고백하며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던 여인처럼, 우리도 예수님께 나아가 우리의 죄를 고백하며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이시라면 우리의 모든 상황을 예수님께 맡겨야합니다.
또한 우리는 예수님께 우리의 가장 소중한 것을 드려야합니다. 여인은 예수님의 발에 그녀의 소중한 향유를 부었습니다. 여인은 아마도 자신의 결혼을 위해 지니고 있던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은 것입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사랑하였기에 향유를 아낌없이 예수님의 발에 부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우리의 소중한 것을 예수님께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