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인간 12

[얼음빙수]

/식물인간/ 12/ by. 얼음빙수/

손깍지를 낄 때, 

오른손 엄지를 위로 가게 하느냐

왼손 엄지를 위로 가게 하느냐에 따라

그 느낌은 천차만별이었다.

도경수는 항상 오른손 엄지가 위로 가도록 깍지를 꼈다.

왼손 엄지가 위로 가는 깍지를 더 좋아했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느낌은 아껴야지 익숙해지면 안 됐다.

익숙해지면 많은 부분을 잊게 되고

잊는 게 많아지면 결국 잃게 된다.

도경수는 오랜만에 왼손 엄지가 위로 가도록 깍지를 꼈다.

기분전환이 필요했던 것이다.

도경수는 그마저도 얼른 빼버렸다.

‘아끼면 똥 돼. 나를 보고도 몰라?’

“윤기야, 너 진짜 뭘 모르는구나.

익숙함이란 무엇인지 생각해 놔. 

내가 학교 갔다와서 물어볼 거야.”

2학기가 시작되고, 도경수는 다시 야간 자기주도학습을 신청했다.

여름방학기간 동안 활자 하나 안 들여다보고 놀았으니

별 볼 일 없던 도경수의 성적이 더욱 뒤처졌을 게 뻔했다.

도경수가 하루에 5시간 취침하고 1시간 등교 준비한다 쳤을 때,

도경수와 민윤기가 마주칠 수 있는 시간은 길어야 2시간이었다.

민윤기는 도경수가 없는 도경수의 방에서 16시간을 홀로 보냈다.

도경수는 자꾸만 민윤기에게 미안해졌다.

아무것도 할 게 없는 민윤기를 혼자 남겨둘수록 그랬다.

민윤기도 자꾸만 도경수에게 미안해졌다.

도경수가 민윤기를 의식할수록 그랬다.

‘나 신경 쓰지 마. 너 나까지 신경 쓸 여유 없어.’

“그런 것도 다 들려?”

‘나는 니가 걸어주는 말 아님 못 들어. 

방금은 그냥 눈치껏 얘기한 거야.’

도경수는 민윤기의 말에 안도하는 자신이 싫었다.

도경수가 민윤기를 위해 시를 쓰고 잊지 않기로 다짐하고 이름만 들어도 괜히 울컥했던 게 고작 2달 전이었다.

도경수가 등교를 핑계로 황급히 방을 나갔다.

‘그래. 이제 익숙해질 때도 됐지.’

그러지 않으려고 했지만 민윤기는 자꾸만 서운해진다.

/식물인간/ 12/ by. 얼음빙수/

잘맞는 인터넷 강의 하나는 열 드라마가 안 부러웠다.

사탐은 그나마 재미있었다.

도경수가 <법과 정치> 인터넷 강의를 듣기 위해 스마트폰을 켰다.

도경수는 하고 많은 사회탐구영역 중에 비인기과목인 <법과 정치>를 선택했다.

“경수야, 너는 왜 법정을 선택했냐.

그거 보는 사람도 얼마 없잖아. 외로운 싸움이라고, 인마.

혹시 법조계 생활 좀 하다가 정치판에 뛰어들 요량으로 그런 거야?

우리 반에서 대통령 나오게 생겼네.”

“내가? 정치를? 재미있는 소리 하지 마, 동석아.”

헌법은 도경수의 자존감 지킴이였다.

대한민국헌법 제1조 2항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대한민국헌법 제10조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대한민국헌법 제11조 1항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대한민국헌법 제34조 1항 모든 국민은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가진다.

대한민국헌법 제37조 1항 국민의 자유와 권리는 헌법에 열거되지 아니한 이유로 경시되지 아니한다.

대한민국헌법 제37조 2항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으며, 제한하는 경우에도 자유와 권리의 본질적인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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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경수는 <법과 정치> 강의를 들을 때마다 

자신이 가히 존엄한 존재란 사실을 다시금 깨닫곤 했다.

정치는 2인 이상으로 이루어진 모든 집단의 필수요소다.

법에 입각한 정치는 개인간의 이해관계를 조화롭게 조율하고 사회를 공동적으로 발전시킨다.

사회가 이토록 아름답다.

도경수는 사람 모인 곳이라면 그냥 질색이었다.

/식물인간/ 12/ by. 얼음빙수/

도경수가 점심 급식을 먹기 위해 급식실에 갔다.

도경수는 존속된 무리 같은 것을 두지 않았으나

밥 친구가 없어 눈치 볼 필요는 없었다.

고삼은 늘 우르르 몰려가 밥을 먹기 때문이다.

도경수는 오늘 급식의 메인메뉴가 수육이란 사실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도경수는 친히 쌈을 싸진 않고 밥 숟가락에 고기와 상추를 얹어 마구잡이로 먹었다.

우지호는 수육을 아껴먹다가 김준호에게 도난당했다.

순식간에 우지호의 식판이 텅텅 비고 김준호의 입안이 가득 찼다.

빼앗긴 수육에도 봄은 오는가.

수육을 빼앗긴 식판에는 봄이 오지 않는다.

‘아끼면 똥 되는 게 맞구나.’

도경수는 어두운 방에 혼자 있을 민윤기가 생각났다.

‘오늘은 이 비극적 사건에 대해 말해줘야겠군.’

/식물인간/ 12/ by. 얼음빙수/

화장실은 이미 만원이었다.

세면대를 둘러싼 인파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점심시간마다 시작되는 서바이벌

먼저 먹고 먼저 양치질 한 자만이 황금 같은 자유시간을 지킬 수 있다.

<양치 서바이벌의 법칙>

1. 눈대중 좋은 자가 유리하다.

일일이 세어보지 않고도 단숨에 사람이 더 적은 줄을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2. 화장실 구린내를 참지 못해 입으로 숨 쉬는 자는 불리하다.

양칫물을 가득 문 채, 입으로 숨 쉬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3. 양치컵을 가진 자의 뒷자리는 피해야 한다.

혹시라도 형광물질이 남을까 봐서 입안을 천년만년 헹구는 녀석들이기 때문이다.

4. 무법자가 나타나기도 한다.

도덕 시간에 질서 있게 행동하는 법을 배웠지만 결코 실천하지 않는 자.

성질 급한 놈이 다짜고짜 자리를 비집고 들어오려다 저지당하기도 하고,

능구렁이 같은 놈이 친한 친구 사이에 섞여 은근슬쩍 양치를 끝마치기도 한다.

새치기 시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 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하지 않는 이상 혼란은 계속된다.

너무나 매운 치약을 쓰는 친구들이 아린 혓바닥을 참지 못하고

변기통에 양칫물을 토해냈다.

  이딴 아수라 정치가 지겨운 도경수는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와 수돗가로 향했다.

수돗가에는 이미 김준호와 김준현이 와있었다.

“도경수, 늦었군. 어떻게든 화장실에서 해결해보려 했겠지.”

“맞아. 내가 어리석었어. 너희는 항상 여기?”

“응. 이제 경수 너도 여기!”

김준현의 얼굴은 정말이지 복주머니 같았다.

“여기있었구나. 이 쥐새끼 같은 놈.”

급식 시간에 원통하게 봄을 빼앗겼던 우지호가 나타났다.

“아니!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다! 불청객!”

“뿐만 아니야. 나는 불한당! 복수를 하러왔다!!!!!!!!!!!!!!!!!!”

김준호와 우지호의 물싸움이 시작됐다.

우지호가 양치컵에 물을 담아 김준호에게 날렸다.

도경수를 놀래키기 위해 달려오던 박명수가

 정통으로 물싸대기를 맞았다.

가만히 있던 도경수도 크게 당했다.

진짜 전쟁이다.

도경수가 안개분사 미스트처럼 물을 뿜었다.

사랑비가 내려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김준호는 수도꼭지 입구를 손으로 막아 물이 사방으로 튀게 만들었다.

지금 이곳은 한여름 날의 분수대 같았다.

모두가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됐다.

“야, 여름도 다 지났는데 이게 무슨 신나는 물놀이야.”

“여름이 다 지나긴.”

“입추가 지난 지 오래다.”

“지랄. 박명수, 잊었어? 춘추복 입기 전까진 무조건 여름이야.”

“맞어. 우리 지금 하복 입고 있잖어.”

무릇 학생이란 교복과,

교복에 닿는 온도로 계절을 가늠하는 것이다.

“그렇네.”

“아직 치열해.”

“뭐야, 김준현. 이열~”

“이열? 치열~”

이제 곧 구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