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구 ㅣ 동방의 등불 대한민국]
헤이그의 이준 열사┃그의 최후는 어땠을까?
2007 / 06 / 25 01:36
어제 동경전보를 접한 즉 이준씨가 분기를 이기지 못해 자결하여 만국사신 앞에 열혈(熱血)을 뿌려 만국을 경동하였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08년 7월18일 호외)
이준씨는 분기를 이기지못하여 자기의 복부를 할부(割剖)하였다는 전보가 동우회중(同友會中)으로 도래하였다는 설이 유(有)하더라(황성신문 1907년 7월19일)
헤이그 특사 이준은 1907년 7월 15일 네덜란드 현지에서 사망했다.
그의 죽음을 처음 보도한 일본의 진서신문(鎭西新聞)은 이준은 안면에 종기가 나와서 절개했는데 절개한 곳에 단독(丹毒)이 침입하여 이틀 전에 사망하고 어제 장의를 집행이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대한매일신보는 이준이 자결해 만국 사신 앞에서 피를 뿌렸다고 보도했으며, 황성신문은 이준이 복부를 갈라 자살했다고 전했다.
대한매일신보ㆍ황성신문이나 진서신문 중 한 쪽은 오보를 낸 셈이다. 양쪽의 보도 가운데 어느 쪽이 진실이었을까?
이명화 한국독립운동연구소 책임연구원은 22일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가 프레스센터에서 개최한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헤이그 특사가 국외 독립운동에 미친 영향을 통해, 이준의 사인에 대한 언론의 보도를 자세하게 분석했다.
사실 이준의 사인은 이미 50년 전에 결론이 났다. 1956년 이준의 사인을 둘러싸고 논란이 분분하자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1개월 간에 결쳐 각종 문헌자료의 기록과 각계인사의 증언을 검토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할복자살은 민족의 공분을 이끌어내기 위한 허구였다. 조사결과 당시 대한매일신보 주필이었던 양기탁이 단재 신채호, 배델과 협의해 이준의 분사를 할복자살로 만들어 신문에 쓰게 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또 이위종이 만국평화회의보(the Courrier de la Conference de la paix)와 가진 인터뷰에도 할복에 관한 언급은 보이지 않는다.
"이준 선생은 뺨에 종기를 앓기는 하였으나 매우 건강했다.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아무 것도 먹지 않았으며, 세상을 떠나기 전날 의식을 잃은 것처럼 잠들어 있었다. 저녁 때 의식을 되찾아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이 나라를 구해주소서~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탈하려 합니다~하면서 가슴을 쥐어뜯다 숨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준의 할복자살 소식은 이미 조선 전토로 번진 뒤였다. 1910년대 독립운동 진영의 대표적인 독립군가인 용진가의 가사에는 배를 갈라 만국회에 피를 뿌리고 육혈포로 만군 중에 원수 쏴 죽인 이준공과 안중근의 용진법대로 우리들도 그와같이 원수 쳐보세~라는 부분이 포함돼 있다.
또 민족주의 진영의 학교에서 교과서로 가장 많이 이용한 동국사략(東國史略)과 초등대한역사(初等大韓歷史)는 충분을 이기지 못하고 자결하여 만국 사신 앞에 피를 뿌렸다고 서술했다. 이후에도 이준의 순국은 할복자살로 전해졌다. 최근에도 여당의 한 유력인사가 이준열사가 배를 갈라~라고 발언했을 정도다.
이 연구원은 국사편찬위원회가 1956년과 1962년 이준의 죽음을 분사(憤死)로 정리한 이상 사인에 대한 논란은 종식할 때라면서 중요한 것은 그의 죽음이 애국정신의 상징적 교재가 됐으며 국외 한인사회 공동의 정신적 흐름을 형성했다는 점이라고 강조했다.
<박노자>의 冊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에서
헤이그 밀사이자 대표적 항일지식인 이준 열사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애국자였을까. 박노자에 따르면 이준 열사는 후견인 노릇을 하던 민영환·이용익과의 친분 때문에 자연스럽게 친일에서 반일로 돌아섰고, 헤이그에서 자결한 게 아니라 고질병이었던 뺨의 종기가 악화돼 숨을 거뒀다.
우리 사회에 도발적 질문을 던져온 박노자가 이번엔 동아시아 근대역사를 뒤집어 봤다. 잘못된 역사인식을 바로잡고, 근대화 과정에서 권력세력이 묻어버린 역사적 인물을 꺼내 바로 세운다. 애국심, 민족주의, 숭미주의, 남성 우월주의 등을 추궁한다.
美 헐버트, 헤이그 제4의 밀사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100주년 국내외 의미 재조명 붐.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열린지 꼭 100년이 됐다.
독립에 대한 최후의 희망이었던 만국평화회의 참가가 좌절되면서 조선은 3년 뒤 일본에 병합되고 말았다.
만국평화회의 100주년을 맞아 학계에서 그 의미를 재조명하는 연구 결과들이 속속 발표되고 있다. 15일 고려대에서 열리는 학술대회 1907년 헤이그 평화회의와 대한제국 그리고 열강은 조선이 회의에 참가하지 못한 국제적 배경을 조명하는 자리다.
평화회의를 주관했던 당시 열강들이 참가를 불허한 데 일본의 방해 공작이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 그러나 최신 연구 결과들은 일본의 방해가 아니더라도 이미 열강들 사이에서 조선의 불참은 확정적이었음을 보여 준다.
최정수 한양대 교수에 따르면 고종과 대표단이 기대를 걸었던 미국은 되레 조선의 불참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만국평화회의의 제안자였던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문명화된 유럽과 아시아로 하여금 약하고 무질서한 나라들에 대하여 일종의 경찰 시스템(police system)을 행하도록 해야 한다며 국제집단안보체제를 지향했다는 것. 최 교수는 조선이 미국의 의도를 완전히 오판했다고 분석했다. | 헤이그 제2회 만국평화회의시 3밀사가 휴대한 광무황제의 위임장(委任狀)과 광무황제(光武皇帝) 및 정사 이상설 |
러-일전쟁으로 일본과 앙숙이었던 러시아 역시 힘이 되지 못했다.
최덕규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원에 따르면 이즈볼스키 외교장관은 러-일전쟁 패전 후 국내 개혁을 위해서는 안정적 대외환경 조성이 필수적이라고 판단해 대일 접근 카드로 헤이그 회의에 조선을 초청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중립국인 네덜란드도 마찬가지. 쿤 키스테르 네덜란드 레이던대 교수가 공개한 당시 헤이그 회의 부총재 드 보포트의 일기에는 일본 정부가 조선 및 만주 지배에 곤란을 겪으면 우리의 동인도제도(인도네시아)에 눈길을 돌릴 것이라며 일본을 지원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8일 열린 이준 열사 순국 100주년 기념 학술대회는 개인에게 초점을 맞췄다. 정숭교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 연구원은 헤이그에서 순국한 이준이 친일개화파로 활동하다가 항일파로 거듭난 변화상을 분석했다.
자유민권론자로 대한제국정부의 강력한 비판자이자 일본에 우호적이던 그는 을사늑약을 계기로 반정부투사에서 반일투사로 변화했다는 것이다. 정 연구원은 이 같은 변화에 대해 지식인의 아집 없이 시대적 요구에 온몸을 던졌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김동진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회장은 미국인 헐버트가 고종에게서 받은 특사증을 공개하고 헤이그 특사는 이준 이상설 이위종 외에 헐버트까지 추가해 4인조라고 밝혔다.
김 회장은 또한 평화회의가 열리기 직전인 1907년 5월 일본 외무대신이 사이토 주네덜란드 일본공사에게 헐버트의 감시를 지시한 기밀문서를 공개하며 그동안 숨겨 왔던 헐버트의 역할에 대해 이준 등 세 명의 열사로부터 일본의 감시망을 따돌리는 것이었을 것으로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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