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0. 02. 23
고려 제2대왕 혜종[왕무] 사망원인
▲고려 혜종 어진
秋九月 王疾篤 群臣不得入見 小常侍側。
가을 9월 왕의 병환이 위독했지만 신하들은 들어가 볼 수 없었고 간사한 아첨배들이 항상 곁에서 시중들고 있었다.
- 《고려사》 혜종 2년의 기사
조선의 정종과 비슷한 예다.
그는 선왕의 창업에 전공을 세웠던 무인임에도 불구하고 재위기간이 짧았고 실권이 약했기 때문에 나약한 왕이었다는 오해를 샀다
그는 늘 상 주름살을 펼 겨를이 없었던 듯한데, 결국 그는 왕의 자리에 머무른지 두해만에 사망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조선 문종의 경우처럼 매우 병약했던 왕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 그는 태조의 후삼국통일에 공을 세웠던 만큼 강인한 무골이었다.
그는 자객을 맨주먹으로 때려잡기까지 하였다.
왕규가 혜종을 암살하기 위해 자객을 보냈는데, 자객은 왕의 침실에 구멍을 내어 침입하였고, 시위하고 있던 내시를 칼등으로 내려쳐 기절시켰다. 자객은 혜종이 덮고 있던 이불을 찔렀는데 그것은 지푸라기였다.
이러한 사태를 예상하였던 혜종은 앞서 피해있었는데, 목표를 상실하여 당황해하던자객에게 무엇을 찾느냐며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정신을 차린 자객은 칼을 들고 혜종을 시해하려했으나, 혜종은 칼끝을 날렵하게 피하며 맨주먹으로 자객의 인중을 가격했다.
왕을 시해하려는 자객이었던 만큼 무예가 특출했을 터인데, 혜종은 무장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객을 맨손으로 때려잡은 것이다.
이렇듯 그는 선왕의 창업에 전공을 세웠고 자신을 시해하려던 자객까지 맨손으로 잡은 무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재위기간이 짧았고 실권이 약했기 때문에 후대에 들어 나약한 왕이었다는 오해를 샀다.
그러나 그는 이 사건에 대한 조사를 하지 않은 채 묻어 두었는데, 이는 그의 왕권이 매우 불안정했음을 반증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왕이 시해당할 뻔 했는데, 이를 그냥 넘기는 나라가 어디에 있었는가?
이는 즉, 조사를 시작하면 시해를 노렸던 호족들이 불안해져 반란을 일으킬 공산이 컸고, 이를 알고 있던 혜종은 호족들의 반란을 제압할 힘을 지니지 못했던 셈이다. 결국 그에 대한 암살시도가 두번에 걸쳐 행해지자, 극히 불안해진 혜종은 조울증 증세를 보였다고 한다.
이와 더불어 그가 후백제와의 전투 중에 그만 정신을 놓아버렸는데, 이로 인해 공황장애를 앓은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 있다.
또한 후백제에 나주가 함락되면서 그의 외가의 힘이 더욱 약화되었다는 점도 혜종이 불안감을 느꼈던 원인으로 추측된다.
나주오씨 집안은 탈출하여 전 집안이 몰살되는 끔찍한 일은 피했다는 기록이 있고 실제로 나주오씨 가문은 아직까지 존속되고 있다.
교과서에 나오다시피 왕건은 각지의 호족들과 정략결혼을 하였는데, 외가가 몰락한 혜종은 상대적으로 동생들에 비하여 외척 세력이 강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신체는 강건했지만 심성이 약하였고, 선해 정적들을 제거하지 못하였으며, 공신이자 외척인 왕규의 음모에 휘둘렸고, 동생들의 권력다툼을 외면하고 방치 한 채 공포와 불안에 떨다가 병사하고 말았다.
하지만 앞서 설명하였듯, 그는 두 번에 걸쳐 암살될 번한 전력이 있었으며 또한 건강하였던 그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기에 그의 죽음을 암살로 여기기도 한다. 사후 왕위는 이복아우 정종과 광종에게 각각 돌아갔다.
그의 아들 흥화군은 광종 연간에 죽었고 딸 경화군부인은 광종의 후궁이 되었다.
하지만 다른 후손들은 모두 요절했는지 뚜렷한 기록이 없고 경화군부인은 광종과의 사이에서 후손이 없는 관계로 혜종의 후대는 여기서 단절되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