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십리가 있는 전라남도 완도군 신지면
신지 명사십리 해수욕장은 국립다도해 해상공원의
가장 유명한 곳 중 하나로, 맑은 물과 완만한 경사로
가족단위 피서지로 최적입니다. 해안 어디서나 바다
낚시가 가능하며, 특히 농어와 돔이 잘 잡힙니다.
고운 모래알들이 한꺼번에 파도에 부딪히면서
내는 울음소리 때문에 `모래가 운다'는 뜻의 `명사'와
백사장 길이가 4km에 달하여 `십리'라는 단어를 합해서
`명사십리'란 이름으로 불리운다고 합니다. 명사십리
해수욕장의 모래찜질은 관절염, 피부질환에 현저한
효험이 있다고 하며, 경사가 완만하고 백사장이
넓은데다 울창한 송림, 식당, 전망대, 주차장 등
다양한 편의시설이 고루 갖추어져 있습니다.
일본군함의 피항지 달해도(達海島)
1941.12.7 하와이 주에 속한 오아후 섬의 진주만에 있던 미국
해군기지에 일본 해군 연합함대가 공중기습공격으로 태평양
전쟁의 도화선이 된 일본의 진주만 공격은 미군의 장기전을
불러일으켜 일본국토가 불바다가 되고 일본이 항복을 않고
끝까지 항전하다가 미국이 만들어 낸 최신무가 원자폭탄으로
두들겨 맞고서 가공할 위력앞에 엄청난 피해를 입고 항복했는데
그 때 일본 군함들이 자국의 군항(軍港)에서는 미군의 폭침을 면할 길이
없어 수심이 깊은 한국의 섬 연안에 정박했는데 명사십리에서 5km
정도의 거리에 있는 달해섬에도 일본군함이 정박했고 그 걸 모를리
없는 미군의 제트전투기 일명 쎅쎄기 수십대가 몰려와서 집중포격을
하는대도 오히려 미군전투기가 군함에서 쏘아올린 포탄을 맞고
추락하는 숫자가 많아서 미군이 공격을 잠시 중단하고 있다가
우기 때 안개낀 날 미공군이 수십개의 편대를 만들어 4대의
전투기가 동시에 날아와서 군함이 있는 지점에 라이트를 비춰
집중포격을 하고 사라지면 다음 편대가 연속으로 날아와서
집중공격을 해대니 일본군함들은 난파되어 잔해만 남게되고
그러다가 일본의 항복으로 태평양전쟁이 끝났는데 달해도
연안의 일본군함 잔해들과 신지도 바닷가에 추락한 전투기
잔해들이 널부러져 나의 소년시절인 1960초까지 방치되어
있었는데 일본이 한국의 허가를 받아 파선된 함선은
인양해가고 비행기 잔해들도 수거해갔다는데
그 때 한국에서 허가를 안해줬다면 한국의 제철소가
큰 이득을 봤을텐데하는 아쉬움이 느껴집니다...
명사십리가 있는 신지도와 지석영
▲신지도 송곡리 지석영 유배지
지석영 선생님의 유배지 신지도 송곡리는
시원스럽게놓여진 멋진 다리 신지대교를 건너면
강독리라는 마을 다음 마을이 송곡리 입니다.
신지도 바다는 시원(始原)의 바다모습을 아직껏
간직하고 있는 듯한 섬, 구석구석에 묵은 조개껍질들이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곳, 그 위를 반쯤 발가벗은
아이들이 달려가 바닷물로 뛰어들고, 저쪽 길가에는
노부부가 다정한 모습으로 앉아 어망을 손질하는 곳,
이 평화로는 섬 신지도가 '천연두'를 퇴치하기
위해 한국 땅에서 종두법을 실시해 전국민적인
공헌을 했던 송촌(松村) 지석영선생의 유배지였
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신지도
항구에서 자동차로 10분쯤 걸리는 거리에 신지면
송곡리 마을이 있습니다. 건너편 바다에 솟아 있는
고금도가 정면으로 바라보이고 망산과 성산이
좌우를 포근하게 감싼 조용한 해변 마을입니다.
이 마을 언덕배기에 자리한 송곡리 404번지, 이곳이
한말 지석영 선생이 유배 생활을 하였던 곳입니다.
선생이 유배됐을 당시는 네 칸짜리 초가집이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지금은 현대식 건물로개축되었고
지붕도 파란색 슬레이트로 바뀐 모습입니다.
이 건물 바로 뒤편이 옛날 해군기지였던
만호진의 동헌 자리였다고 알려진 곳입니다.
이 지역은 청.일 전쟁 당시 장진포 포구로서 수십
척의 일본군함이 기항할 만큼 규모가 큰 항구였다고
합니다. 특히 신지도가 예전에는 강진군에 속해 있었고
수군 만호진이 들어섰던 큰 포구였던 사실로 미루어
지석영 선생이 유배될 때만 해도 현재 강진군 마량진
에서 이곳 송곡리 포구까지 곧바로 배가 들어왔을
것으로 추측됩니다.개화파로 몰려 신지도로 유배를
당했던 지석영 선생은 1855년(철종6) 5월 15일 서울 교동
(현 낙원동)에서 한의원을 운영하는 지익용의 막내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지석영의 자는 공윤이고, 호는 송촌입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전문적인 의학교육을 받은 일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일찍부터 서학을 동경하여 나름대로 중국에서
번역된 서양의학책을 구하여 탐독했습니다. 그때부터 그가
가장 큰 관심을 가진 것은 소로부터 채집한 우두를
인체에 접종시켜 천연두를 예방한 영국인 제너의
종두법에 관한 책이었습니다.
1876년(고종13)에 불평등조약인 강화도조약이
조선과 일본사이에 체결되었습니다. 그리고 그해 조선은
일본에 수신사를 파견했습니다. 이때 지석영은 자신이
오랫동안 품어왔던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하여
수신사일행에 포함되어 있던 자신의 스승 박영선에게
일본에서 실시되고 있는 종두법에 대해 알아다주도록
간청하였습니다. 이에 박영선은 일본인 오다키에게 종두법을
배우고, 귀국하는 길에 친히 구가의 <종두귀감>이라는책까지
얻어서 지석영에게 전해주었습니다. 그즈음 지석영 선생은
자신의 전생애를 종두 연구에 바치게 될사건을 겪게 됩니다.
선생의 나이 24세 되던 해 그의 어린 조카가 천연두를 앓다가
끝내 목숨을 잃었습니다 조카의 죽음을 계기로 그는 자신의
가족이나 일가친척의 차원을 뛰어넘어 전체 동포들을 천연두
에서 구할 결심을 했습니다.1879년 일본 해군이 부산에 제생의원을
설립했습니다.
이때 지석영은 몸소원장 마쓰마에와 군의관 도즈카를 찾아가
그들에게 약 2개월 동안 종두법을 배웠습니다.교육을 마친 그는
종두약인 두묘와 종두침 2개를 얻어 서울로 돌아오던 중 처가가
있는 충주에 들러 40여명에게 종두를 놓아주었습니다.
바야흐로 우리나라 사람에 의한 최초의 종두법이 실시되는
순간이었습니다. 1880년 서울로 돌아온 지석영은 종두를 실시하여
주위로부터 호평을 받았지만 우두의 기본재료인 두묘의 공급
부족으로 뜻한 만큼의 성과를 거둘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해 조정은 일본으로 제2차 수신사를 파견했습니다.이때 다행히도
지석영은 신사 김흥집의 수행원 자격으로 참여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일본으로 건너간 지석영은 일본의 위생국 우두종계소장인
기쿠치에게서 종두기술을 익혔습니다. 또한 두묘의 제조,
저장법을 비롯하여 송아지 사육법과 채장법을 두루 배운뒤
두묘 50병까지 얻어 귀국했습니다. 그런데 2년 뒤인
1882년 지석영에게 뜻하지 않은 시련이 닥쳤습니다.
그해 임오군란이 발발하자 조정은 지석영에게 일본에서
종두법을 배워왔다는 죄목으로 체포령을 내린 것입니다.
다행히 재빨리 몸을 숨겨 체포는 면했지만이 일은
뒷날 그가 유배를 당하게 된 사건의 전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해 9월, 다시 상황이 바뀌자 그는 당시 전라도 어사로 있던
박영교의 부탁으로 전주성안에 '우두국'을 설치하기에
이르렀습니다.
▼ 내가 유년시절에 자주 오르던 상산
청산도가 희미하게 보입니다↓
작게 보이는 섬이 일본군함 피항지입니다↓
완도 아가씨 / 박가연 노래
목단꽃 치마폭에 애달픈 사연 실고
미역따는 아리따운 완도 아가씨
오늘도 갈매기떼 쌍쌍이 날으면
떠나간 님생각에 눈물짓는 완도 아가씨
♥
등대불 깜빡이는 날저문 바닷가에
비에 젖은 해당화꽃 완도 아가씨
이 밤도 파도소리 꿈속을 더듬어
가신 님 그 모습에 울고 있는 완도 아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