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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관이 명출신지생몰년월일운동계열관련 단체포상훈격(연도)
| 경주(慶州) |
| 본명 : 이종순(李鐘淳), 이명 : 이종건(李宗乾·李宗建·李鐘乾), 이극천(李極天), 이동산(李東山) |
| 경남 통영(統營) |
| 1887. 10. 17 ~ 1958. 5. 20 |
| 만주방면 |
| 한족회, 대한통의부, 정의부, 조선혁명당, 국민부, 다물청년당 |
| 독립장(1990) |
[주요활동]
한족회, 대한통의부, 정의부, 조선혁명당, 국민부, 다물청년당에서 활동
[본문]
1887년 10월 17일 경상남도 통영군(統營郡) 한산면(閑山面) 염호리(濂湖里)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이종순(李鐘淳)이다. 이명으로 한자가 다른 이종건(李宗乾·李宗建·李鐘乾)과 이극천(李極天), 이동산(李東山)을 사용하였다. 아버지는 이성백(李成伯)이다. 동생은 이종섭(李鐘燮)과 이종현(李鐘賢)이다.
어린 시절 6년간 서당에서 수학하였다. 26~27세 무렵 가족과 함께 만주로 이주하여 농업에 종사하였다. 이후 사립학교 교원으로 활동하였다. 대종교인(大倧敎人)으로, 1922년 6월 8일 지린성(吉林省) 푸쑹현(撫松縣)에 설치된 서일도본사(西一道本司)에서 활동하였다.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졸업하였으며, 1919년 (음)7월경 남만주 퉁화현(通化縣) 이도구(二道溝)에서 개최된 한족회(韓族會) 민중대회에 참가하였다. 한족회 통남지방(通南地方) 총관소(總管所) 총관장(總管長)에 선임되었다. 퉁화현 합니하(哈呢河)에서 도총장(都總長) 이탁(李沰), 부관장(副管長) 한정규(韓正奎)와 함께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였다.
한족회는 1919년 3월 13일 류하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에서 부민단(扶民團), 교육회(敎育會), 자신계(自新契)가 통합하여 조직된 단체였다. 1910년대 자치를 실행하고 아동과 청년들의 교육과 군사훈련에 힘써왔던 이들 세 단체는 1918년 가을 ‘대동단합’을 논의하였으나 통합에 이르지 못하였다. 이후 1919년 만세운동 소식을 접한 후 세 단체가 한족회로 통합하게 되었다.
1922년 (음)7월 하순 환인현(桓仁縣) 마권자(馬圈子)에서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이하 통의부) 의용군 사령장 김창환(金昌煥)과 만나 통의부에 참가하였다. 같은 해 10월 통의부 산업위원장에 선임되었다. 통의부는 남만주에서 활동하던 여러 독립운동단체가 통합하여 조직된 단체이다.
1923년 (음)2월 통의부 군법과장(軍法課長)에, (음)11월 생계부장(生計部長)에 선임되었다. 그해 7월 퉁화현에서 의용군 제1, 2중대원 30여 명과 함께 중국군과 교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 김창도(金昌道) 외 3명이 사망하였고, 송봉오(宋奉梧)가 중상을 입었다. 12월에는 통의부 산업위원 겸 호위국장에 선임되었고, 군법국장(軍法局長)으로도 활동하였다.
1923년 12월 31일부터 1924년 1월 5일까지 통의부에서는 싱징현(興京縣) 왕청문(旺淸門) 예수교회당에서 제2회 중앙의회를 개최하여 조직을 개편하였다. 군사부, 민사부, 학무부, 재무부를 폐지하고 대의제(代議制)를 채택하였다. 이 회의에서 문병무(文炳武)·현정경(玄正卿)·김창환·이웅해(李雄海)·백남준(白南俊)과 함께 중앙위원에 선임되었다.
1924년 1월 16일 통의부에서는 헌장을 5개장 38개조로 개정하였다. 의결기관으로는 행정최고부(行政最高部)를 두었다. 김동삼·김이대(金履大)·현정경·김소하(金筱厦)·김동석(金東石)·이웅해·강제하(康濟河)·오동진(吳東振)·김병조(金秉祚)와 함께 행정위원에 선임되었다.
또한, 7개장 59개조의 「행정위원회규칙」을 발표하고 각 부서를 정하였다. 법무부장에 선임되었고, 회계검사청(會計檢査廳) 위원장 대리도 겸하였다. 같은 해 3월 법무부장을 해임하고 생계부장에 선임되었다.
1924년 3월 10일 현정경·김동삼 등과 함께 통의부 행정위원의 일원으로서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포고문에는 강령과 절목이 포함되어 있었다. 강령에는 “민권(民權)을 신장하고 민지(民智)를 계발하며 민력(民力)을 증진하고 민심(民心)을 단결”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강령의 실천지침인 절목은 “생계(生計)를 척개(拓開)하고 교육을 발전하며 군실(軍實)을 양성하고 재정을 연구하며 주의(主義)를 선전하고 적세(敵勢)를 방어한다”는 요지였다.
이어서 1924년 5월 20일 현정경·김동삼 등과 함께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포고문은 1923년 1월 17일 부령(府令) 제5호로 발표한 「재정처리조례(財政處理條例)」를 폐지하고, 1924년 4월 3일 제4회 통상회의에서 개정한 「재정조례(財政條例)」를 시행한다는 내용이었다.
1924년 6월 21일 현정경·김동삼 등과 함께 통의부 행정위원회 회의를 개최하고 행정위원회 비상회의 결의안을 발표하였다.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유격대를 폐지하고 중대(中隊)를 본위(本位)로 개편할 것,
②의용군(義勇軍)은 3개 중대를 증설할 것,
③6월 14일 비상회의에서 의결한 「사령부사무임시정지안(司令部事務臨時停止案)」을 취소할 것,
④금후 표훈공상(表勳賞功)을 실시하고 표훈장정기초위원(表勳章程起草委員) 2명을 선정할 것,
⑤군사위원장 보고에 첨부된 장교회의 결의안은 군사부에서 채용하여 실시할 것,
⑦1923~24년 모범학교 교육비는 학무부에서 직접 징수하고 빠른 기간 내에 중학교를 설립할 것,
⑧이전 재무부에서 징수한 구휼비는 민사부에서 직접 미수액(未收額)을 조사하여 수납하고 구휼을 실시할 것,
⑩관동총관소(寬東總管所) 검무원(檢務員) 1명을 추가 배치하고 경비는 임시비에서 지불할 것,
⑪군사위원장 신팔균(申八均)이 의용군사령장(義勇軍司令長)을 대리하도록 할 것,
⑫의용군 소대장 문학빈(文學彬), 이규성(李奎星), 김창룡(金昌龍)을 의용군 중대장에 임명함,
⑬행정위원 이웅해는 행정위원회규칙 제56조에 의해 해직함 등이다.
1924년 7월 10일 지린에서 개최된 전만통일회의주비회(全滿統一會議籌備會) 발기회에 김동삼과 함께 통의부 대표로 참가하였다. 상하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되고 통의부에서 공화주의 계열과 복벽주의 계열 사이의 갈등이 고조되고 있던 상황에서 남만주에서 활동하고 있던 항일운동가들이 독립운동세력을 결집시키기 위해 1924년 3월 하순 전만통일회의주비회를 조직하였다.
전만통일회의주비회 발기회에서 군정서(軍政署) 대표 이진산(李震山)·이광민(李光民), 길림주민회(吉林住民會) 대표 이욱(李旭), 대한광정단(大韓光正團) 대표 윤덕보(尹德甫)·김호(金虎), 대한독립군 대표 이장녕(李章寧), 대한독립군단 대표 윤각(尹覺)·박성우(朴性偶), 노동친목회 대표 최명수(崔明洙)·장상우(張相友), 의성단(義成團) 대표 승진(承震)과 협의하여 전만통일발기문(全滿統一發起文)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1924년 7월 20일 발표한 발기문 수백 장을 인쇄하여 만주 각지 독립운동가에게 발송하였다.
1924년 10월 통의부 선전부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격문과 선포문을 배포하였다. 같은 달 지린성 반석현(盤石縣)에서 개최된 전만통일회의 본회의에 김동삼과 함께 통의부 대표로 참가하였다. 이후 각 단체 대표들은 여러 차례 회의를 진행한 후, 11월 24일 8개 단체 대표 명의로 경제와 산업, 교육에 힘쓰고 광복 사업에 매진하기 위해 대동통일(大同統一)한다는 내용의 선언서를 발표하면서 정의부(正義府)를 성립시켰다.
1924년 12월 5일부터 3일간 통의부 내부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남만독립단통일회의(南滿獨立團統一會議)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김이대(金履大) 외 7명과 함께 통의부 대표로 참가하기 위해 화전현(樺甸縣) 서가(西街)로 출발하였다. 1924년 말부터 1925년 초 사이 통의부 사령부 부사령(副司令)으로 활동하였다.
1925년 4월 7일 현정경·김동삼 등과 함께 통의부 행정위원의 일원으로서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그 내용은 전만통일회의 결과 정의부가 조직되었으므로 이에 통합한다는 것이었다. 7월에는 정의부 선전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11월에는 다물청년당에 참가하여 활동하였다. 다물청년당은 1923년 말에 흥경현에서 결성된 비밀결사로, “전 세계 약소민족의 해방운동과 동일 보조를 취한다”라는 등의 강령을 채택하였다.
1927년 (음)1월 지린성 지린현(吉林縣) 동행하자(東行河子)에서 개최된 정의부 중앙의회에서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음)8월에는 중동철도(中東鐵道) 합장선(哈長線) 삼함하참(三含河站)에서 개최된 정의부 중앙집행위원회 겸 중앙의회에 참석하였다. 외무집행위원으로서 중앙집행위원장 김동삼(金東三)과 만주 각 단체의 통일에 노력하였다. 1928년 4월 문학빈·김탁(金鐸)·최명수(崔命秀)와 함께 정의부 외무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8년 5월 21일부터 5월 26일까지 지린성 반석현 남문(南門) 밖 대동농장(大同農場)에서 전민족유일당조직회 제3차 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 참석한 각 단체 대표들은 유일당 조직 방법을 두고 단체 본위 조직론을 주장한 전민족유일당협의회(全民族唯一黨協議會)와 개인 본위 조직을 주장한 전민족유일당조직촉성회(全民族唯一黨組織促成會)로 나뉘게 되었다.
이청천(李靑天)·이관일(李貫一)·고활신(高豁信)·양세봉(梁世鳳)·김문거(金文擧)·배낙산(裵洛山)·강제하(廉濟河)·김중파(金中波)·이웅(李雄)·이세창(李世昌)·오세진(吳世鎭)과 함께 정의부 대표로 전민족유일당협의회에 참여하였다. 이백산(李白山)·이규동(李圭東)·김상덕(金尙德)·김원식(金元植)·최명수(崔明秀)와 함께 전민족유일당협의회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8년 8월 24일부터 9월 4일까지 정의부에서는 지린에서 제5회 정기 중앙의회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서 이청천·최명수·김동삼 등과 함께 전민족유일당조직촉성회를 지지하며 중앙집행위원을 해직하고 정의부에서 탈퇴하였다.
같은 해 11월 중순 반석현 호란집창자(呼蘭集廠子)에서 개최된 회의에 참석하여 신민부(新民府) 군정파(軍政派)와 협의한 후, 12월 임시기관으로 혁신의회(革新議會)를 조직하였다. 또한, 전민족유일당조직촉성회를 민족유일당재만책진회(民族唯一黨在滿策進會)로 개편하였다.
전민족유일당협의회에서는 민족유일당조직동맹(民族唯一黨組織同盟)을 결성하고 1929년 3월 길림에서 회의를 열었다. 4월에는 정의부, 참의부(參議府), 신민부를 통합하여 국민부(國民府)를 조직하였다. 12월 민족유일당조직동맹은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으로 개편되었고 무장대오인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이 성립되었다.
1930년 10월 초 신빈현성(新賓縣城) 내 합성호정미소(合性號精米所)에서 현익철(玄益哲)과 만나 조선혁명당에 참가하였다. 12월 22일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어 조직부 위원장과 군사위원회 위원을 겸임하였다. 1931년 8월 하순경 신빈현 왕청문(旺淸門) 화흥소학교(化興小學校)에서 개최된 국민부 제3회 중앙의회에서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12월 17일 신빈현 하북(河北)에서 조선혁명당 긴급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서 이호원(李浩源)·양세봉·김학규(金學奎) 등과 함께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어 보안부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1932년 1월 20일 신빈현 하북 서세명(徐世明)의 집에서 개최된 국민부, 조선혁명당, 조선혁명군 회의에 참석하였다. 이때 일본통화영사분관경찰(日本通化領事分館警察)이 회의장을 급습하여 조선혁명당 중앙집행위원장 이호원, 조선혁명군 총사령 김준택(金俊澤), 경호대장 이규성(李奎星), 사령부 부관 박치화(朴致化)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를 신빈사건(新賓事件)이라고 한다.
이 일로 1932년 4월 이호원·김준택·장원제(張元濟)·이규성·홍순정(洪淳鼎)·홍종호(洪宗浩)·김영철(金永哲)과 함께 신의주경찰서로 압송되어 조사를 받았다. 같은 해 6월 21일 신의주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고,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재판에 넘겨졌다. 1932년 11월 21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을 받았다.
평양복심법원에 항소하여 1932년 12월 1일 신의주형무소에서 평양형무소로 압송되었다. 12월 17일 항소를 포기하여 징역 5년이 확정되었다. 1933년 3월 29일 평양형무소에서 신의주형무소로 이감되었다. 1934년 징역 3년 9월로 감형되었다. 1936년 7월 16일 오후 5시 신의주형무소에서 가출옥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글 최병도
[참고문헌]
關東軍參謀部, 「普通報第二二號(鮮人騷擾事件)」, 1919. 12. 19, 『不逞團關係雜件 朝鮮人ノ部 在內地』 9.
關東廳警務局長, 「大韓統義府의 內容」, 1923. 12. 12·關東廳警務局, 「大韓統義府 統一會議 決意事項」, 1924. 1. 22,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 37』.
關東廳警務局, 「臨時報 제75호 大韓統義府 決議事項 公布」, 1924. 2. 18·關東廳警務局, 「臨時報 제86호 大韓統義府 會議 決議事項 公布」, 1924. 2. 25·關東廳警務局, 「臨時報 제170호 大韓統義府 布告文 入手」, 1924. 3. 29·朝鮮總督府警務局, 「大韓統義府의 組織에 관한 件」, 1924. 4. 18,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 38』.
關東廳警務局, 「改正 大韓統義府 財政條例」, 1924. 6. 28·太田爲吉(中國 臨時代理公使), 「大韓統義府 金東三의 書面 및 不穩文書 送付의 건」, 1924. 7. 8·關東廳警務局, 「不逞鮮人 全滿統一에 관한 건」, 1924. 8. 11·西澤義微(安東 領事), 「全滿統一 發起文 入手에 관한 건」, 1924. 8. 13,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 39』.
關東廳 警務局長, 「統義府의 近況」, 1924. 10. 6·深澤暹(吉林 總領事 代理), 「不逞鮮人들의 全滿統一大會에 關한 件」, 1924. 11. 27·阿部又重郞(奉天總領事館 通化分官 主任), 「不逞鮮人 團體의 南滿統一會議 開催에 關한 件」, 1924. 12. 2,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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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出版警察槪況-不許可 差押 및 削除 出版物 記事要旨-(正義府 中央代議員 朴彬 外)聲明書」, 1929. 2. 1, 『朝鮮出版警察月報』 第6號.
조선총독부 경무국,「재만 독립운동가의 상황(1928년 4월)」.
『독립신문』, 1924. 3.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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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독립운동사』제4권,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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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주,『1920년대 재중항일세력의 통일운동』,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채영국,『1920년대 후반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장세윤,『1930년대 만주지역 항일무장투쟁』,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정원옥,「양세봉:조선혁명군 총사령의 연구」,『국사관논총』 8, 국사편찬위원회, 1989.
▲중국 지린성 류허현 한족회 본부 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