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싱선수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누구나 다 링에 오르기 전에 상대선수에 대한 공포심을 느낍니다. 상대가 형편없이 약한 복서라면 그 정도는 덜하겠지만, 만약 상대가 엄청난 주먹의 파괴력을 가진 괴물같은 복서라면 그 공포심은 극에 달하겠지요.
미국의 권투 전문잡지 'KO'지는 매달 한명의 복서를 선정해 간단한 인터뷰를 하는데 거기에 항상 등장하는 질문이 '링위에 오르기 직전의 심정'입니다. 재미있는건, 자신이 상대방에게 위압감을 줄 만큼 강한 펀치의 소유자들도 다들 링위에 오르기 전에는 '떨린다'라고 표현 한다는 겁니다. 그 공포심이 가장 극에 달하는 시기는 경기 시작 몇 분 전 락커룸에서 밖의 관중들의 함성 소리를 들으며 대기하는 동안이라고 하는데, 어떤 선수들은 공포심을 잊기 위해 혼자서 주먹을 허공에 날리며 경기에 온 정신을 집중할려고 노력하기도 하고, 또 어떤 선수들은 편안히 누워서 명상음악 같은것을 들으며 링에 대한 공포를 잊을려고 노력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링 공포증은 실제 경기에 적잖게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가 흔히들 '슬로우 스타터'라고 부르는 선수들 중엔 유달리 링 공포증에 시달리는 선수들이 많습니다. 상대에 대한 두려움으로 잔뜩 몸이 굳어 초반 몇회동안은 제 실력 만큼 발휘 해보지도 못하고 날려버리는 경우입니다.
70년대 후반 '안토니오 세르반테스'라는 강한 챔피언이 있었습니다. 이 선수에게 당시 어떤 한국선수가 도전 한 적이 있는데, 경기전 부터 벌써 두려움으로 의욕상실, 허무하게 KO로 무너지고 맙니다. 이때 그 선수가 경기 후 한 이야기를 보면, "세르반테스 선수 자체가 벌써 무섭게 생긴데다가 경기 초반 그 선수 펀치를 몇 대 맞아보니 너무 강해 더이상 맞다간 죽을 것 같아서 적당히 쓰러져서 일어나지 않았다."라고 고백 한적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전 세계 챔피언 류제두 선수도 링 공포증으로 유명한 선수인데, 이 선수는 체육관 안에서 훈련 할 적에는 어느 누가 와도 다 한방에 날려버릴 만큼 강한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정작 링에 오르면 몸이 굳어 제 기량의 반도 발휘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오죽 했으면 당시 류제두 선수를 지도하던 관장이, "류제두 선수가 만약 정식 시합이 아닌 도장안에서 스파링만 한다면 무하마드 알리가 와도 KO 시킬 수 있다" 라고 말 할 정도였습니다.
이런 링 공포증은 반드시 나쁜 영향만을 주는건 아닙니다. 오히려 미국의 복싱 트레이너들은, 어느정도의 링 공포증은 경기에 집중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요소라고 말합니다. 미국의 테리 노리스 선수는 80년대 후반 한창 잘나가던 유망주 였습니다. 이 선수가 처음 세계 타이틀에 도전 했을 때 당시 챔피언 줄리안 잭슨에게 2회에 허무하게 KO로 무너집니다. 여기서 이 선수는 적잖게 충격을 받습니다.
다음해인 1990년 노리스 선수에게 다시한번 세계도전의 기회가 주어집니다. 이번의 상대는 아프리카 우간다 출신의 존 무가비 선수. 무가비 선수는 당시까지 두번의 패배를 제외하곤, 자신이 상대한 복서 전원을 주로 경기 초반에 KO시킬만큼 펀치 파괴력이 강한 선수였습니다. 상대를 KO시키는 모습이 너무 동물적이고 잔혹해 '야수'라는 링네임을 가지고 있을 정도의 무시무시한 선수였습니다.
노리스 선수가 이 선수와 대전을 위해 링에 올랐을때, 상대에 대한 극심한 공포심으로 제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미 일년전 KO패로 세계 도전에 실패한 경험이 있는 노리스 선수에게 이번에는 더욱 괴물같은 무가비 선수는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노리스 선수는 경기시작 직전, 링중앙에서 무가비 선수와 마주 서서 주심의 간단한 주의를 들을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털어놓았습니다.
노리스 선수에게 극도의 공포심을 유발한 아프리카의 괴물 존 무가비 선수
"내가 무가비랑 붙는다. 내가 이 괴물같은 녀석이랑 싸워야 한다. 저녀석 펀치는 한방만 맞으면 다들 견디지 못하고 쓰러진다고 하는데, 도대체 내가 어떻게 이런 괴물이랑 싸워야 하나. 정말 도망치고 싶다."
극심한 공포증에 사로잡힌 노리스 선수는 경기가 시작하자 마자 무가비 선수에게 달려들어 사정없이 펀치를 날립니다. 갑자기 노리스선수가 용감해진게 아닙니다. 본능적으로 공포심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 공포심의 대상인 상대 선수를 아무 정신이 없는 상태로 '죽기 아니면 까무라 치기'로 달려 든 것입니다.
노리스 선수 표현에 의해 '경기시작하자 마자 정신없이 펀치를 날리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 괴물이라던 무가비 선수가 링바닥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노리스 선수의 경기 시작하자 마자의 KO승 이었습니다. 당시 노리스 선수의 트레이너는 노리스 선수의 이러한 링 공포증이 노리스 선수를 오히려 경기에 완전히 몰입하게 하여 예상밖의 1회 KO승을 거두게 됏다고 말합니다. 반면 오히려 노리스 선수에게 아무런 공포심을 느끼지 않고있던 무가비 선수는 그만큼 경기에 임하는 자세가 느슨해져서 노리스 선수의 역습에 쓰러져 버리고 만겁니다.
아무튼 노리스 선수는 이 경기를 계기로 이후 그 유명한 슈거 레이 레너드 선수도 꺾고, 챔피언 타이틀도 3번이나 거뭐지는등 수퍼 챔피언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권투선수에게 있어 링 공포증이 반드시 나쁜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이 링 공포증을 어떻게 자신이 이용하는가 하는데 달렸다고 봅니다. 그저 상대에 대한 두려움으로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도망갈 궁리를 할지, 아니면 그 공포증이 경기에 실력이상으로 몰입하게 되는 촉진제 역할을 할지, 그것은 선수 스스로에게 달려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