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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발 없는 새가 있다더군.
-영화 아비정전(1990) 중에서
마흔여섯의 나이에 생을 마감한 장궈룽 주연 영화 아비장전(1990)
그런데 말이다. 1967년생인 최진실이 세상을 떠난 나이가 마흔이었다. 초등학생이 된 아들 환희의 첫 운동회 전날, 역시 유서는 없었다. 최진실의 동생 최진영이 세상을 버린 때도 사십 줄을 한해 앞둔 서른아홉의 나이였고 최진실의 전 남편 조성민도 올해 마흔이 되자마자 서둘러 떠나버렸다. 서른 즈음에 이미 정상의 무대에 올라선 그들이었다. 이미 가질 만큼 가진 그들이, 그토록 사랑한 이들에게 하직의 인사도 제대로 고하지 않고 황급히 떠나야 할 정도로 그들을 절망의 나락에 빠트린 것은 무엇이었을까. 혹시 돈키호테 마냥 앞만 보고 뛰었던 삼십 대를 막 지나 세상에 대한 아무런 의혹이 없어진다는 불혹의 나이에 접어든 탓은 아니었을까. 사십 줄에 접어든 지금, 인생 한 방은 그냥 이삼십 대에 꾸었던 일장춘몽이고 이젠 내려갈 일만 남았다는 비감(悲感).
사십대. 흥분도, 놀랄 일도 더 이상 없다. 와이프와 아직 어린 자식들, 그리고 내 집 마련까지. 숨가쁘게 무거운 짐을 떠메면서 온 40대 가장의 입장에서 거창한 꿈은 접어야 한다. 고향에 남겨둔 늙은 노모 걱정에 대출 원리금 상환과 아이 학원비 꼬박꼬박 대는 게 우선이다. 수도권에서 서울 회사까지 매일 같은 쳇바퀴를 벗어날 수 없는 이유다. 안사람과 아이가 깰까 봐 새벽녘에 발꿈치를 들고 몰래 빠져 나왔다가 퇴근길에 걸친 한 잔 덕에 전철 칸에서 졸다 문득 깰 때 드는, 숨이 콱 막혀오는 그 느낌. 누군가를 제쳐냈다는 짜릿함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승진이란 바늘구멍을 뚫어야 한다는 강박감이 절실한 나이. 이젠 앞서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에서 쫄딱 미끌어지지 않기 위해 뛰어야 하는 그런 나이가 사십 대가 아닐까. 불혹이란 말의 본래 뜻은 혹시 더 이상 기댈 꿈과 희망이 사라져간다는 것을 알아채기 시작했다는 게 아니었을까.
나이가 인간의 행·불행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라는 주제는 사회학자나 심리학자 뿐만 아니라 인간의 행동을 연구하는 경제학자들에게도 관심 대상이다. 데이비드 블랜치플라워 미국 다트머스대학 경제학과 교수와 앤드류 오스왈드 영국 워윅 비지니스스쿨 교수는 한국을 포함해서 동서양의 72개 국가의 행복에 관한 설문조사 데이터를 조사한 결과 행복 곡선은 평균 46세를 기점으로 U자형 커브를 그린다는 보고서를 지난 2008년 내놓았다.
논문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개인 성격이나 소득수준 등 다른 조건들이 일정하다면 사람의 일평생 동안 사십대 중반으로 갈수록 가장 우울해진다는 얘기다. 청소년기를 지나서 청년기로 접어들고 다시 30대, 40대로 진행하면서 계속 행복 커브는 추락하다가 40대 중 후반 언저리에서 바닥을 찍은 뒤 60대 초반부터 행복한 단계에 접어든다. 한국의 경우에는 평균 47.9세가 바닥이었다. 만약 내 나이가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이라면 앞으로 당분간은 계속 불행해질 일만 남았다는 얘기다. 인생 전반에 걸쳐 볼 때 사실 사십대 중반의 나이에는 많은 스트레스들을 겪어야 한다. 직업적으로는 승진의 문턱에 놓여 있다. 집에는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속 썩이는 아이들이, 그리고 늙어가는 부모를 모셔야 한다. 여우 같은 부인과 토끼 같은 자식이 있다고 해서 무조건 행복하란 법은 없지 않은가.
U자형 행복커브, 자료=미국인의 심리학적 행복지수 변화(Arthur Stone, 2010)
사실 `행복 = 효용(utility)`이라고 간주하는 주류 경제학의 입장에서 볼 때 합리적인 존재인 인간의 행복이란 것은 모름지기 나이와는 상관이 없어야 한다. 경제학자 모딜리아니와 안도가 고안한 생애주기가설(life cycle income theory)에 따르면 사람들은 유년기부터 죽을 때까지 자신의 소비 성향을 굴곡 없이 안정적으로 유지해 나간다고 했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볼 때는 오히려 예산 제약 때문에 기대만큼 소비를 제대로 못하는 학창 시절을 지나 스스로 한창 소득과 자산을 불려나가는 단계로 진입하면서 우리의 행복은 더 커져야 하는 게 정상이 아닐까. 그러다 수입이 점차 줄어들기 시작하는 노년기로 접어들면서 행복감도 함께 줄어들어야 하는 게 상식이 아닐까.
이론과 실제는 일치하지 않는다. 게다가 왜 행복 커브가 연령대별로 U자형을 그리는지에 대한 제대로 된 설명은 없다. 좀 더 연구가 진행되어야 한다. 하지만 가슴으로 느낄 수 있지 않은가. 가수 안치환의 노래가사처럼. 마흔 즈음이란 나이는 머리가 가슴을 따라주지 못하고 손발도 가슴을 배신하고, 확고부동한 깃대보다 흔들리는 깃발이 더 살갑고. 모자란 나를 살 뿐인, 어슴푸레한 오후라고.
행복 경제학자의 조심스런 첫 번째 추론은 이렇다. 개인들은 나이가 들면서 자신의 장점과 단점에 대해 적응하게 되고 중년의 나이가 지나면서 실행이 불가능한 욕망을 다스릴 수 있게 된다. 세상은 내 욕심대로 살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달으려면 적어도 마흔 줄은 넘어서야 한다. 그러다가 노년기로 접어들고 나이와 함께 지혜로워지면서 평범한 삶에서 행복을 찾는 능력이 커지는 게 아닐까. 심리학자인 카르텐슨 스탠퍼드대 교수는 중년 이후에 나이가 들어 노년으로 접어들어 가면서 삶에서 감성적인 모티브를 추출해내는 능력이 발달한다고 했다. 그러는 동시에 새로운 한계에 도전하고자 하는 욕망은 줄어든다고. 벼는 익을 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옛 말이 이런 의미를 담고 있었던 게 아닐까.
중년의 위기 이후 찾아오기 시작하는 행복은 그런데 말이다. 소득 증대, 승진, 출세 등과는 외적인 변화와는 별로 관계가 없단다. 오히려 내면의 변화와 관계가 있다. 나이가 들수록 지혜로워진다. 다른 사람들과 다툼을 덜 벌이게 되고 또 갈등에 대해 더 나은 해결책을 찾아낸다. 그리고 느닷없이 닥쳐온 불운을 받아들이고 감정을 조절하는 일에 더 능숙해 진다.
심리학자들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비난하는 이야기를 엿듣도록 하는 심리 실험을 했다. 그 결과에 따르면 나이가 젊으나 늙으나 다같이 슬퍼해지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나이가 든 사람들이 화를 덜 내고 또 쉽게 판단을 내리려 하지 않았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들은 죽음에 더 가까워진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현재의 삶에 더 많은 가치를 둔다. 먼 미래의 목표보다는 지금 당장의 감정에 영향을 미치는 일에 중시했다. 죄의식, 분노, 근심 등에 민감한 신경질적인 사람들은 덜 행복한 경향이 있다.
나이와 함께 행·불행에 영향을 미치는 또 다른 변수는 성격이다. 신경질적인 사람들은 감정지능이 낮은 경우가 많으며 이 경우 다른 사람들과 건강한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기가 힘들어서 더 불행하다고 느낀다. 반면 팀제로 일하는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독립적으로 일하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행복하며 외향적인 사람들이 더 행복해한다. 이 때문에 U자형 행복곡선에 관한 다른 부차적인 설명은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성격의 사람들이 우울한 성격의 사람들보다 어떤 이유에서건 장수하는 경향이 뚜렷하다는 데서 근거를 찾는다. 오래 살아남아 설문조사에 응답하는 사람은 낙천적인 성격의 소유자가 훨씬 더 많다는 통계적인 편향 말이다. 여기에다 어릴 적 친구들이 하나 둘씩 세상을 떠나는 것을 목격하면서 신이 자신에게 내린 축복에 감사하다 보면 절로 행복해지는 게 아니냐는.
오스왈드 교수의 지적처럼 중년의 위기가 결국 나이 탓이라면, 그렇다면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선 늙어갈 때까지 그냥 버티고만 있어야만 한단 말인가.
중년의 위기와 행복을 그린 영화 쉘위댄스(1996)
그럴 때는 말이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 순간을 즐겨라)",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거창한 문구를 굳이 떠올리지 않은들 어떠랴. 수기야마씨처럼 그냥 나둥그러지듯 엎어지면서 교습소 문을 왈칵 열어젖히던지 말이다. 일단은 저지르고 볼 일이다. 그것도 아니라면 "좆또, 세상 뭐 별 꺼 있어!"라며 침대에서 속옷 차림으로 벌떡 일어나 음악에 맞춰 혼자 "퀵, 퀵, 슬로우"하며 맘보춤이나 춰보던지.`아비정전`의 주인공 아비처럼. "댄스와 음악은 인간이 발명한 최초이자 가장 기초페 호적인 쾌락"이라고 경제학자 아담 스미스가 말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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