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효행(孝行)·효부(孝婦)·열행(烈行) |
□ 효행(孝行)
⊙ 김 겸(金 謙) : 참봉 방윤(邦潤)의 아들, 벼슬은 영흥교수(永興敎授), 나쁜 병에 걸린 모친에게 손가락을 잘라 태워 그 재를 먹였더니 병이 나았다. 선조11년(1578) 정여문을 세우고 부사 허목이 제사지냈다.
⊙ 김구정(金九鼎) : 근덕면 교가리에 살았으며 모친이 병환으로 누웠을 때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입에 넣어드려 모친의 병을 고쳤다. 숙종 7년(1681)에 정여문이 내렸으며 통정대부로 추존되었다.
⊙ 김옥권(金玉權) : 구미리(九美里)에서 살았으며 사람의 근본은 하늘이라 믿고 신을 감동시키도록 3년 동안 하늘에 기도하였더니 겨울철 백설 속에서 청사(靑蛇)를 얻어 마침내 4년간 고생하시던 아버지의 설사병을 고쳤고 아버님은 90세까지 장수하였다. 헌종(憲宗) 10년(1844)에 포상이 내렸으며 동몽교관(童蒙敎官)의 벼슬을 받았다.
⊙ 김흥일(金興一) : 호는 오정(梧亭), 감찰(監察) 계광(啓光)의 손자로 효가리(孝街里)에 살았다. 부친의 병환에 3년간 약을 닳여 간호하는데 조금도 게으르지 않았으며 장사 때 묘자리를 점장이처럼 쉽게 잡았는데, 그 이유는 꿈에 한 노인이 지팡이로 묘지의 위치를 그어주었기 때문이었다. 그 뒤 어머님을 섬김에 정성을 다했으며 김학조(金學祚)와 더불어 김씨 시조의 재사인 보본단(報本壇)을 지었으며 족보를 간행하였다. 호조참판을 증직받았다.
⊙ 김석조(金錫祚) : 근덕면 교가리(交柯里)에 살았으며, 천성이 효도에 지극하여 어머님 병환에 단을 모아 경건한 기도를 올렸더니 날짐승의 이변이 일어나서 병을 고쳤다. 고종(高宗) 14년(1877)에 효자의 정려를 내리고 승지(承旨) 벼슬을 받았으며 호조판서 정범조(鄭範朝)가 글을 지었다.
⊙ 김응규(金應奎) : 동추(同樞) 종겸(宗謙)의 아들로 성내리(城內里)에서 살았으며 호장(戶長)이었다. 어려서부터 어버이를 섬김에 몸과 마음을 다하여 정성껏 모셨으며 아버지께서 설사병으로 고생하실제 지나칠 정도로 간호하였는데 상을 당하니 매우 슬퍼하였다. 관을 옮기려고 할 때, 관 밖으로 시체 썩은 물이 흘러나오니 관을 핥고 그 물을 빨아 먹으며, 영령이 바로 되기를 호소하며 울었더니 흘러나오던 물이 그쳤다. 이 또한 신의 감응한 바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고종(高宗) 27년(1890) 가을에 효자의 정려를 내렸으며 군수 이구영(李龜榮)이 글을 지었다.
⊙ 김진정(金振鼎) : 옥원리(沃原里)에 살았으며 그의 부친께서 알 수 없는 깊은 병에 걸려 5개월간 약을 닳이고 간호하였으나 낫지 않아, 아버지 대신 자기가 앓겠다고 하늘에 빌었더니, 꿈 속에 신령이 나타나 약을 가르쳐주어서 병이 나아 몇 달을 더 연명하다가 돌아가시니 예에 따라 장사를 치르고 너무 슬퍼한 나머지 뼈만 남았다. 고종(高宗) 29년(1892년) 여름에 동생과 함께 효자의 정려를 받았으며 이조판서 정기회(鄭基會)가 글을 지었다.
⊙ 김진종(金振鍾) : 효자 김진정(金振鼎)의 동생으로 부친상을 당하여 3년동안 시묘살이를 하면서 한번도 집에 돌아가지 않았다. 순조(純祖)왕이 승하하시자 단을 모아 멀리 바라보면서 3년간 곡을 하였다. 고종(高宗) 29년(1892)에 정려문이 내려지고 대사성(大司成) 정구택(鄭九澤)이 글을 지었다.
⊙ 김복운(金復運) : 나안리(羅雁里)에 살았으며 부친이 다리에 종기가 나서 고생하시니 입으로 고름을 빨아내어 병을 고쳤으며 큰비로 집에 물이 침수하니 아버지를 업고 문을 나서는데 이미 마당에까지 물이 차서 피할 수 없는지라, 기둥을 껴안고 호곡하며 우니 얼마후 물이 줄어서 목숨을 견졌다. 고종(高宗) 22년(1885)에 승지(承旨) 윤상익(尹相翊)이 소문을 듣고 효자로 상신하여 정려문이 세워졌으며 숭록대부 예조참의(禮曹參議) 벼슬을 받았고 보국(輔國) 조병식(趙秉式)이 글을 지었다.
⊙ 김종섭(金宗燮) : 이천리(理川里)에서 살았으며 아버지의 유훈에 따라, 가난한 살림에도 정성으로 할아버지를 섬겼으며 악성질병으로 고생하시니 온갖 정성을 다해 간호하고 하늘에 기도하였는데 돌아가시니 노송을 붙잡고 얼마나 눈물을 흘리고 곡을 하며 울었는지 그 나무가 말라 죽었다. 고종(高宗) 11년(1874)에 효자의 정려가 내리고 동몽교관(童蒙敎官) 벼슬이 증정되었으며 송고(松皐) 김학묵(金學黙)이 글을 지었다.
⊙ 김성성(金聖聲) : 부위(副尉) 근(瑾)의 후손으로 미로리(未老里)에서 살았으며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께 효성을 다하여 모셨다. 어머니 상을 당하여 3년 시묘살이를 마치고 초하루와 보름에 제물을 갖추어 깊은산 묘소에 성묘할 적에 항상 호랑이가 묘옆에서 같이 지켜주었으며 낮에도 항상 집까지 따라오니 이웃 사람들이 붙잡고자 하자, 성성(聖聲)이 말하기를 “짐승도 감동하여 따라다니는데 어찌하여 잔인하게 해치겠느냐, 나는 응할 수 없다”라고 말하였다. 광무 6년(1902)에 효자의 정려를 내리었다.
⊙ 김응위(金應渭) : 훈도(訓導) 성준(聲寯)의 후손으로 송정리(松亭里)에서 살았다. 심동근(沈東瑾)부사가 글을 지어 찬양하기를 “서진(西晋) 시대 효자 왕상(王祥)이 얼음 위에 누워 얼음을 녹인 다음 잉어 두 마리를 구하여 제모에게 효행한 것과 또 오(吳)나라의 효자 맹종(孟宗)이 눈속에서 죽순을 구하여 어머님을 공양한 효행과도 짝지을 수 있다.”고 했다. 상을 당하여 시묘살이를 하였으며 고종(高宗) 19년(1882)에 효자 정려가 내리고 성암(惺菴) 박도향(朴道향)이 글을 지었다.
⊙ 김원태(金源台) : 회은(淮隱) 낙호(洛鎬)의 아들로 동회리(桐淮里)에서 살았다. 아버님이 악성종기로 고생하시니 고름을 입으로 빨아내어 고쳤다. 상을 당하여는 시묘살이를 하였으며 집예의(集禮儀) 6권을 편찬하였다. 장사의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나이 44세로 돌아가시니 사림회(士林會) 장(葬)으로 장사지내고 표창을 상신하였다.
⊙ 김요령(金堯齡) : 시중(侍中) 인궤(仁軌)의 후손으로 교가리(交柯里)에서 살았다. 아버지 병환으로 3년동안 온갖 힘을 다하여 약을 지어 드리고 간호하였으나 낫지 않고 임종에 다다르게 되니 손가락을 잘라 피를 넣어 드려 3일을 더 연명하였으나 돌아가시니 3년 시묘살이를 하였다. 효자 정려를 받았으며 정조(正祖)때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벼슬을 받았다.
⊙ 김귀하(金龜河) : 백대(栢臺) 진관(鎭官)의 아들로 동산리(東山里)에서 살았으며 벼슬은 감찰(監察)이다. 어머님이 악성 종기로 고생하시니 입으로 고름을 빨아내어 병을 고쳤다. 아버님의 병환에 온갖 정성을 다하여 하늘에 빌고 간호하다가 돌아가시니 3년간 소식(소식)을 하며 초하루와 보름에는 비바람을 가리지 않고 성묘하였다. 효자 표창을 받았다.
⊙ 김형귀(金炯貴) : 소도리(所道里)에서 살았다. 어머님이 병환으로 누워 앓으시니 왼쪽 손가락을 잘라 입에 넣어 드렸으나 효과가 없어 다시 다음 손가락을 잘라 피를 넣어 드리니 차갑던 가슴이 따뜻해지며 회생하였다. 참판(參判) 권익상(權益相)이 비문을 지었다.
⊙ 김재국(金在國) : 강원 홍천 성산에서 조상누대 농사지으며 살고 있다 슬하에 아들 둘 딸 셋을 두고 있다. 농촌에 살면서 자식을 정성스러히 길러 자녀모두 의학박사 교원 사업가로 국가 사회에 공헌하도록 성장시켰다. 본인은 품성이 돈후(敦厚)하고 효성(孝誠)이 지극하다. 선고(先考)는 조졸(早卒0하셨고 선비(先妣)께서는 모든사람이 멀리하는 기동(起動)을 할 수 없는 와병(臥病)이나 지극 정성으로 돌보심으로 백일세 천수(天壽)를 누리시게 한 효행(孝行)의 본을 보였다. 이에 홍천군수(洪川郡守)가 정부(政府)에 효행자(孝行者)로 보고하였다. 정부는 2001년 5월 8일 어버이 날에 즈음하여 효행을 치하 하였다.
□ 효부(孝婦)
⊙ 김 씨(金 氏) : 본관은 삼척(三陟), 경하(敬河)의 딸이며 전주최씨(全州崔氏) 병현(柄顯)의 아내로 상정리(上鼎里)에서 살았다. 시아버지께서 가래가 많이 올라와 고생하셨는데 의원이 산돼지의 열이 좋다 하여 그것을 구하러 산에 들어 갔다. 호랑이를 산돼지인줄 잘못 알고 급히 가보니 호랑이가 산돼지를 잡아놓고 있어 그 열을 드렸더니 병이 나았다. 그리하여 효부 표창을 받았으며 판서(判書) 김종한(金宗漢)이 비문을 지었다.
⊙ 김 씨(金 氏) : 본관은 김해(金海), 학용(學用)의 딸이며, 삼척김씨(三陟金氏) 형동(炯同)의 처로 북평(北坪)에서 살았다. 시아버지가 함경북도 덕원군(德源郡)에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3년후에 시신을 찾아 돌아와서 선산묘 아래 장사 지냈는데, 시체를 이고온 머리 부분은 머리털이다 빠지었고 늙을 때까지도 머리가 나지 않았다. 그후에도 남편을 정성껏 섬겼는데 돌아가시니 예절에 맞게 장사지내고 3년 복을 입었다. 유림에서 추천하여 도지사의 표창을 받았다.
⊙ 이 씨(李 氏) : 본관은 경주(慶州), 감찰(監察) 흥량(興량)의 딸, 증비서승(贈秘書丞) 삼척김씨(三陟金氏) 학영(鶴英)의 처로 성품이 정숙하였다. 시집가서 효도로써 시부모를 섬기고 예의로서 남편을 섬겼는데 불행히도 중도에서 남편이 병을 얻으니 대신 죽기로 하늘에 기도드렸으나 소용없이 임종을 맞이하여, 착하게 부모님을 봉양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돌아가셨다. 입관하는 날 너무도 서럽고 원통하여 남편을 뒤따라 죽으려고 하였으나 시부모에게 효도하고 착하게 봉양하라는 유언 때문에 죽지 못하고 시부모를 남편 못지 않게 예의 바르게 섬기다가 상을 당하여 예절에 맞게 장사 지내고 제사 지냈다. 그리하여 유림에서 표창하였다.
□ 열행(烈行)
⊙ 김 씨(金 氏) : 본관은 삼척(三陟) 통정대부(通政大夫) 이주찬(李周粲)의 처로 교가리(交柯里)에서 살았으며 남편이 병으로 버드나무 밑에서 얼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시체를 구하여 부지런히 집에 돌아오니 때는 엄동설한이라서 시체가 꽁꽁 얼어 녹지않아 14일간 밤낮으로 껴안고 있으니 녹기 시작하였다. 함께 죽어 한무덤에 묻히고자 하였으나 뱃속에 아이가 있으니 그렇게도 못하고 기다렸다가 그 아이를 낳은 뒤에 죽으리라 마음먹고 조용히 장사를 치렀다. 뒤에 뜻을 취할려고 하니 집안에 ‘서리가 내린 이변’이 있었다. 철종(哲宗) 5년(1854)에 열녀 표창이 내리고 증손 한익(漢翊)이 글을 지었다.
⊙ 김 씨(金 氏) : 본관은 삼척(三陟) 우계이씨(羽溪李氏) 구연(九淵)의 처로 이천리(理川里)에서 살았으며 나이 20세에 남편이 죽으니 끝까지 봉양하지 못하고 땅에 묻어야 했다. 슬하에 자식도 없는 것이 지극한 한이 되어 남편을 뒤좇아 같이 죽으려고 여러날 밥도 먹지 않으니 시부모님이 보고 매우 슬퍼하고 회심이 컸다. 식사 때는 남편 묘에 올라가 피눈물을 흘리니 제주와 눈물로 잔디가 말라 죽었다. 그러다 시아버님께서 병으로 눕자 대신 죽기를 원하며 빌었더니 꿈속에 노파 신이 나타나 침술을 가르쳐 주어 은으로 크고 작은 침을 만들어 치료하여 병이 나았으며 시어머님이 늙어 이가 다 빠지니, 엿과 사탕을 항시 준비하여 드리고 병환중에 강물의 생선을 잡숫고 싶어하시니 얼음을 깨고 붕어를 잡아다 드려 병이 나았다. 자식이 없어 조카를 양자로 데려다 키워 후사를 잇게 하였으며 나이 59세에 돌아가셨는데, 고종(高宗) 6년(1869)에 열녀 표창이 내리고 이태규(李泰奎)가 글을 지었다.
⊙ 김 씨(金 氏) : 본관은 삼척(三陟), 통정대부(通政大夫) 기복(起福)의 딸이며, 천곡리(泉谷里)에 살았다. 나이 18세에 진덕귀(陣德貴)에게 시집갔다. 집안이 가난하고 시부모가 연로하여 부부가 칡부리를 캐고 도토리를 주어다가 부모님을 잘 공양하였다. 헌종(憲宗) 10년(1844)에 남편이 죽으니 예절에 맞게 장사지내고 그 좋은 금슬 때문에 조용히 바다에 투신 자살하였다. 철종(哲宗) 2년(1851)에 열녀 표창을 받았다.
⊙ 강 씨(姜 氏) : 본관은 진주(晉州), 시학(時鶴)의 딸이며 삼척김씨(三陟金氏) 봉국(鳳國)의 처로 이천리(理川里)에서 살았는데 순조(純祖)조에 열녀 표창을 받았다.
⊙ 김 씨(金 氏) : 본관은 삼척(三陟), 흥벽(興璧)의 딸이며 영일정씨(迎日鄭氏) 원영(源永)의 처로 송정리(松亭里)에서 살았다. 나이 25세에 남편이 출타하였다가 미친 사람을 만나 피해를 입고 돌아오니 비명으로 맞아 죽은 것을 통탄한 나머지 보복하였다. 고종(高宗) 24년(1877)에 부사 박헌양(朴憲陽)이 조세와 부역을 면제시켜주고, 진사(進士) 정채화(鄭寀和)가 글을 지었다.
⊙ 이소사(李召史) : 본관은 우계(羽溪), 삼척김씨(三陟金氏) 정교(政敎)의 처로 평릉리(平陵里)에서 살았다. 남편이 고치기 어려운 고질병으로 10여년이나 고생하고 임종에 다다르니 단지하여 수혈하였더니 3일간 회생하였으나 마침내는 한모금의 물도 입에 들어가지 않으니 구할 수 없었다. 성복 후에 자식에게 타일러 말하기를 만약 내가 죽거든 같은 구덩이에 같이 묻어 달라고 부탁하고 음독 자살하여 남편을 따랐다.고종(高宗) 28년(1891) 가을에 유림에서 상신하니 승지(承旨) 한인호(韓麟鎬)가 임금에게 복명하여 열녀 표창이 내렸으며 공조판서(工曹判書) 정준화(鄭俊和)가 글을 지었다.
⊙ 심 씨(沈 氏) : 본관은 진주(眞珠) 삼척김씨(三陟金氏) 인섭(仁燮)의 처로 지흥리(智興里)에서 살았다. 남편 병환에 단지 수혈하였고 돌아가시자 하루종일 곡을 하다가 남편을 따라 죽으려고 하였으나 시부모님이 눈물을 흘리며 강력히 말리는 바람에 참았다. 시아버지께서 창병을 앓아 명산에 찾아가 기도를 드렸더니 호랑이가 특효약을 가르쳐 주어 구해다 드렸더니 병이 나았다. 남편의 상을 당해서는 시묘살이를 하고 남편 제삿날에 같이 죽었다. 도백(道伯) 민영위(閔泳緯)가 열녀 표창하고 찬양하기를 “남편이 죽어 같이 목을 매달아 죽었으니 열녀가 아니겠느냐? 시아버지의 가르침을 쫓고 정성을 다하여 받드니 또한 효부가 아니겠느냐? 그 인격을 종중하며 감탄하여 마지 않는다” 하였다. 고종(高宗) 6년(1869) 봄에 열녀각과 비를 세우고 찬정(贊政) 이재현(李載現)이 글을 지었다.
⊙ 김 씨(金 氏) : 본관은 강릉(江陵), 형록(亨祿)의 딸이며 삼척김씨(三陟金氏) 시학(始學)의 처로 송정리(松亭里)에서 살았다. 나이 25세에 약혼을 하였는데 흉년이 들어 굶어 죽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하여 그의 남편이 양곡을 받으러 읍에 갔다가 실종이 되었다. 부모들은 다른 곳에 개가시키려 하였으나 이에 답하여 말하기를 “이미 폐백을 받고 약혼한 이상 마땅히 그의 처로서 죽어 그 귀신이 가마를 타고 김씨문중으로 들어가야 마땅하다”고 하여 홀로 수절하여 64세에 돌아가셨다. 손자 대영(大榮)이 작은 비를 세웠는데 이재현(李載現)이 글을 지어 찬양하기를 “옛날을 우러러 보고 현재를 굽어보아도 이런분은 정말 보기 드물다. 뜻은 비록 칭찬할 만하지만 그 운명은 정말 가련하다. 부부의 위치는 정하여져서 덕으로 합쳐진 귀신이니 누가 능히 빼앗으리오, 송죽 같은 굳은 절개를.....”
⊙ 강 씨(姜 氏) : 본관은 진주(晋州), 규환(奎煥)의 딸이며 삼척김씨(三陟金氏) 진헌(鎭憲)의 처로 이천리(理川里)에서 살았다. 남편의 병환에 단지 수혈하였으며 장사 후 6년간이나 소복과 소행으로 시부모를 착하게 봉양하였다. 대성원의 표창문이 있다.
⊙ 김 씨(김 씨) : 이 정려각은 조선시대 병조참파(국방부차관)을 지낸 조옥립 장군의 처 삼척 김씨의 효부심을 기리는 열녀문 정려각이다.조선인조 14년(1636년 병조호란)에 청나라 청태종이 조선을 침입하였다 이때 조옥립 장군은 경기도 중부 지역에서 관군을 통솔하며 싸우고 있었다. 강원도 관찰사 조정호 까지 조 장군을 지원하지만 조선은 이미 전세가 기울어 지고 조 장군은 강원도 인제에 까지 후퇴하기에 이르렀다. 가족도 경기도 양주군 풍양현 (남양주시 진건면)에서 지리적으로 안전한 인제군 원대리 인삼재 현 장소로 피신 하였다.
이때 청나라 군은 조옥립장군 가족 은신처로 찾아 와 부인 삼척김씨의 양손을 쇠로 구멍을 뚥는 등 온갖 고문을 해도 끝내 굴하지 않고 남편의 은신처를 말하지 않자 김씨를 장작더미에 눞혀 불을 질럿다.
이때 갑자기 하늘에서 먹구름이 몰려오며 천둥 번개가 천지를 진동하며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적들은 항급히 도망을 치기 시작했고 김씨는 불 속에서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심한 고문과 화상으로 인하여 한 여름 고생하다 1637년10월28일에 사망 하였다. 조정에서는 이 소식을 왕에게 올리자 인조 왕은 감탄하면서 김씨를 남편에대한 절개심과 나라에 충성심을 높이 평가하여 즉시 열녀라 명하고 정려각을 세우라고 지시 하였다.이로써 정려각이 1638년10월에 건립 되었으며, 지금까지 풍양 조씨 후손들이 잘 보존 관리하고 해마다 제례를 정성것 올리며 충효사상의 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정려각은 1638년도 건축양식 문화재로서 우리나라의 오래된 역사적 보물가치로 인정을 받고 있다.
소 재 지: 인제군 인제읍 원대리 3반 213번지 안삼재
건립년도: 1638년 10월(강원도내에서 가장 오래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