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필요에 따라 만들어지고 신작로가 출현하면서 사라진다. 그것이 길의 운명이다. 비록 옛길이 됐지만 그 터에는 길손들의 애환과 사연이
‘진주’처럼 숨어 있다. 보부상의 땀과 눈물이, 때로는 민초들의 한(恨)이 서려 있는 옛길. 그래서 옛 고개는 모두 ‘아리랑 고개’다.주간동아는
수천, 수백 년 동안 나그네의 사랑을 받아오다 이제는 등산로, 오솔길, 산책길로 남은 옛길 10곳을 엄선해 답사기를 싣고 각종 정보를 제공했다.
소개된 10곳은 원형이 잘 보존된 길 중 주변 경관이 빼어나고 사연이 있는 옛길로, 때로 산행을 해야 하는 길도 있지만 대부분 가족 단위로
편안하게 걷기에 무리가 없는 길이다. 걷기의 기쁨과 삼림욕, 단풍관광 모두를 누리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옛길에서 큰 만족을 느낄 수 있으리라.
인제 새이령 - 길은 좁고 숲은 우거지고 …원시림이 따로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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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림에 둘러싸인 새이령.
계곡 주변에 흐드러지게 핀 야생화 군락과 진흙집. 산림청이 벌목에 나섰을 만큼 숲이 울창한 새이령길(위부터 시계 반대방향).
강원 인제군 북면 용대리 창암마을과 고성군 토성면 입원리 사이에는 사람들에게 잊혀진 옛길이 원형을 그대로 간직한 채 숨어 있다. 미시령과
진부령 사이의 백두대간을 활 모양으로 가르는 새이령(샛령·대간령) 옛길. 험준한 백두대간의 고개답지 않게 길이 워낙 부드럽게 이어져 1970년대
초반 한계령에 도로가 생기기 이전까지 미시령, 진부령, 구룡령 등 강원 북부의 동서를 연결하는 고개를 통틀어 가장 많이 애용된 길이다. 하지만
지금은 일부 지역주민과 전문 산악인이 아니면 길의 내력을 아는 이가 거의 없다.
길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지 30여년, 이곳은 완벽한 원시림으로 변해 있다. 이깔나무와 전나무, 단풍나무 등 각종 침엽·활엽수림이 숲을
이루고 있어 길을 걷는 동안 햇빛 한 가닥이 그리울 정도. 원시림 속을 파고드는 한 가닥 햇빛이 마치 레이저 광선 같다. 계곡 주변의 양지바른
곳에 지천으로 핀 온갖 야생화와 키높이만큼 자란 억새를 헤치며 나아가는 맛이 일품이다.
길의 들머리는 용대리 창암마을의 신선봉농산물할인점 뒤편 군사훈련장. 할인점 뒤편 개울에 놓인 징검다리를 건너면 사격장 옆으로 폐타이어로
만든 계단이 나오고 이 길을 지나면 세 사람이 나란히 서서 걸을 만한 흙길이 이어진다. 비록 원시림을 방불케 하는 숲길이지만 길을 찾는 데는
전혀 무리가 없다. 산악인들이 곳곳에 리본을 매어둔 데다 길이 끊기면 계곡 자체가 길이 된다. 길은 부드럽다 못해 싱겁다. 등산화를 신고 걷는
게 머쓱할 정도.
새이령 고갯길 답사의 또 하나의 묘미는 개울 나들이다. 새이령 정상까지 가는 3시간여 동안 무려 10차례나 개울을 건넌다. 건너기 좋게
바위를 옮겨다 놓은 옛 길손의 넉넉한 마음에 빙그레 미소부터 짓게 된다. 시리도록 맑은 계곡물에서는 말로만 듣던 산천어와 열목어를 쉽게 만날 수
있다. 소간령을 넘어서면 조선시대 말들이 쉬어 갔다는 마방터가 나오고 거기에는 아직도 귀틀집이 남아 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수도도 없는
이곳에서 뜻밖에 두 명의 남자가 길손을 반긴다(말만 잘하면 돌판에 구운 삼겹살을 얻어먹을 수도 있다). “옛날에는 이곳에 없는 게 없었다”는
정씨 할아버지는 “이 길이 언론에 자꾸 알려지면 안 되는데…”라며 ‘원시의 훼손’을 걱정했다.
■ 글·사진/ 최영철 기자
◈ Tips
- 교통: 인제나 원통에서 진부령 가는 버스를 타고 용대 삼거리(46번 국도)에서 내려 미시령 방향(56번 지방도)으로 1.5km 가량
가면 옛길 입구인 신선봉농산물할인점이 있다.
- 숙박·먹을거리: 선녀와 나무꾼(033-462-3957), 옥미정(033-462-7606)에서는 숙식이 모두 가능하다. 황태찜, 토종닭,
마가목주, 머루주가 일품이다.
- 볼거리: 백담사, 인제장, 양양장, 용대산 자연휴양림, 스키박물관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