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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레져스쿨 원문보기 글쓴이: 최원락&롤
한반도가 작은 줄만 알았는데 여행을 하면 할수록 크게만 느껴진다. 이제는 경상도의 마지막 코스다. 멋진 드라이브를 위해서 동해안을 향했다. 경북 투어에서 빠진 문무대왕릉이 제일 먼저 나를 반겼다.
문무대왕릉 : 경북 경주시 양북면(陽北面) 봉길리(奉吉里) 앞바다에 있는 신라 문무왕의 수중릉(水中陵).
사적 제158호. 대왕암(大王岩)이라고도 한다. 삼국통일을 완수한 문무왕(文武王)은 통일 후 불안정안 국가의 안위를 위해 죽어서도 국가를 지킬 뜻을 가졌다. 그리하여 지의법사(智義法師)에게 유언으로, 자신의 시신(屍身)을 불식(佛式)에 따라 고문(庫門) 밖에서 화장하여 유골을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국가를 평안하게 지키도록(護國大龍) 하겠다고 하였다. 이에 따라 유해를 육지에서 화장하여 동해의 대왕암 일대에 뿌리고 대석(大石)에 장례를 치렀다. 사람들은 왕의 유언을 믿어 그 대석을 대왕암이라고 불렀다.
죽어서까지 용이 되어 나라를 지켜주시는 분이 있는가하면 아직도 나라를 못팔아먹어서 안달이난 간신배들이 가득한 세상을 돌아보니 눈앞이 캄캄하다. 대왕이시여, 저 간신배들을 몽땅 동해바다에 퐁당 빠트리면 안될까 하옵니다. 다음에 찾아간 곳은 공교롭게 태종무열왕께서 거닐던 태종대다. 통일신라시대로 빽 투 더 퓨쳐라고나 할까......ㅋㅋ 암튼 근처에 있는 감지해변부터....여기도 온통 연인들뿐이다. 도망치듯 다시 태종대로 빠져나와 홀로 밤공기를 마시며 태종대를 한바퀴 돌았다. 밤바다, 부산의 야경, 네온빛의 유람선,,,,,고삐리 1학년 겨울에 처음 왔던 곳, 고삐리 3학년 겨울에 두번째로 오고 지금도 역시 겨울에 왔다. 단지 이번에 밤에 도착하였던 것, 한밤에 자살바위를 걸어본 적이 있는가. 그 길가로 어스므레 한 아낙네가 지나간다.
태종대 : 1972년 6월 26일 부산기념물 제28호로 지정되었다. 영도의 남동쪽 끝에 위치하는 해발고도 200m 이하의 구릉지역으로, 부산 일대에서 보기 드문 울창한 숲과 기암 괴석으로 된 해식절벽 및 푸른 바다 등이 조화를 이룬다. 옛날에 신선이 살던 곳이라 하여 신선대(神仙臺)라고도 부르며, 신라 태종무열왕 사후(射侯)의 장소였다는 속전(俗傳:東萊府誌 所載)에 따라 현재는 태종대라는 호칭이 보편화되었다.
오륙도(五六島)가 가깝게 보이고, 맑은 날씨에는 56km 거리인 일본 쓰시마섬[對馬島]이 해상의 흑점(黑點)처럼 희미하게 보이기도 한다. 60여 년의 역사를 가진 영도등대가 섬 남동부의 가파른 해안절벽 위에 서 있고 부근에 신선대바위 ·망부석(望夫石)이 있으며 순환관광로의 중간지점인 전망대에는 이곳 명물인 모자상(母子像)이 있다. 그 밖에 인공해수(人工海水) 풀장인 ‘곤포(昆布)의 집’을 비롯한 위락시설과 바다낚시터 등이 있으며 너비 10m, 길이 4km 가량의 순환관광로가 섬의 명소들을 누비며 지나간다.
영도교를 넘어 용두산 엘레지~ 용두산공원의 야경을 바라보며 출출한 배를 위로 하기 위하여 자갈치시장이 있는 남포동에 여정을 풀었다.
부산하면 자갈치시장, 자갈치시장하면 꼼장어
부산에 와서 꼼장어를 먹어보지 않고서 어찌 부산에 갔다왔다고 말할 수 있나......어느 포장마차에나 반드시 있는 안주, 꼼장어구이. 먹장어가 제 이름이지만 '먹장어구이'라고 쓴 포장마차는 보질 못했다. 이 글에서도 꼼장어란 단어의 현실적 힘을 인정하여 꼼장어라 쓰기로 한다.
포장마차에 가면 우리의 별미 취향을 쉬 알 수 있다. 닭똥집 닭발 돼지껍질 쇠간 처녑 곱창 참새 등등 우리의 '몬도가네' 음식들이 다 있다. 그중 '군계일학'이 꼼장어이다. 벌겋게 핏물이 뚝뚝 듣는 길다란 꼼장어는 처음 그것을 접하는 사람에게는 혹 껍질 벗긴 뱀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하게 만든다. 잡은 지 오래되어 축 쳐져 있는 꼼장어는 그래도 볼 만한 편이다. 막 껍질 벗기우고 머리를 떼내었지만 그 질긴 생명력으로 꿈틀거리는 꼼장어를 석쇠에 올리면 빠닥빠닥 용을 쓰며 최후의 발악을 한다. 어떤 꼼장어는 석쇠 밖으로 탈출을 감행하기도 한다. '우리는 참 별난 것도 먹는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조금의 비위 상함은 곧 충분한 보상을 받게 된다. 꼼장어가 노릇노릇 익어가면서 온 포장마차 안에 고소한 냄새를 피우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매콤한 양념에 버무려져 나오는 꼼장어. 그 징그럽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꼬들꼬들 야들야들 매콤 구수한 맛있는 음식만 있을 뿐이다. 이때쯤 상술 좋은 포장마차 주인장이라면 이런 말로 손님의 비위를 맞출 것이다. "내일 아침 밥상이 달라질 겁니다."
징그러워도 맛은 있다
껍질 벗기기 전의 꼼장어는 어떤 모습일까. 이 역시 별로 맛깔스러워 보이지는 않는다. 갈색 몸통에 눈은 보이질 않고(뻘 속에서 살아 눈이 퇴화됨) 조그만 주둥이에 수염이 몇 가닥 붙었다. 붕장어(아나고)나 뱀장어, 민물장어와는 달리 움직임도 없다. 수족관 바닥에 서로 엉키어 꿈쩍도 않는다. 만지면 미끌미끌 끈적끈적한 점액이 묻어난다. 한마디로 징그럽다.
그 겉모습 때문이었는지 일제시대까지만 해도 꼼장어는 먹지 않는 생선이었다고 한다. 일본 사람들은 꼼장어의 껍질을 가공해 게다(일본식 나막신) 끈이나 모자 테로 쓰고 고기는 버렸다. 부산 토박이들에 의하면 당시 간혹 꼼장어를 구워 먹는 이들도 있었다 하나 꼼장어 파는 가게는 없었다고 한다.
꼼장어구이의 역사는 자갈치 시장의 역사와 함께한다. 자갈치는 원래 자갈이 많던 곳이라 붙은 지명인데 1930~40년대 해안이 매립되면서 자갈이 다 없어졌다. 해방이 되면서 부산은 커다란 변화를 맞게 된다. 일본에서 살던 사람들이 부산으로 대거 몰려든 것. 집도 재산도 없던 그들은 어물저장고, 냉동고 등이 있던 자갈치에다 좌판을 냈다. 자갈치 시장이 열린 시초이다. 6․25는 자갈치 시장을 한층 번창(?)하게 만든다. 피란민들은 너도나도 자갈치에 좌판을 벌였다. 이 즈음에 꼼장어구이가 등장한다. 1958년부터 꼼장어구이 장사를 한 이이순 씨는 50년대 중반 자갈치에 일곱 곳의 꼼장어구이집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지금의 시청 자리에 꼼장어집들이 있었제. 겨우 비 피할 정도로 천막을 쳐놓고 장사를 했는데 송도에서 껍질 벗긴 꼼장어 받아다 구워 팔았어."
꼼장어구이에는 6․25 전후 서민들의 애환이 깃들인 음식이다. 생김새 때문에 가죽만 취하고 고기는 버렸던 생선, 그래서 꼼장어 값은 무척 쌌다. 자본 없는 자갈치 아지매들은 이 생선을 받아다 구워 팔았고, 역시 돈 없는 자갈치 남정네들이 이를 안주삼아 술잔을 기울이며 가난의 시대를 버티며 살아갔다.
아이러니하게도 자갈치 시장에 꼼장어구이집이 급격히 늘어난 것은 우리 경제가 호황을 누리던 1980년대에 들어서이다. 가난한 자의 술안주가 어떻게 호황기에 더욱 번창할 수 있었을까.
한국의 1980년대는 외식산업이 본격적으로 그 부피를 키워 나가던 때이다. 도시 외곽 곳곳에 '가든'식 고깃집이 생기고 캔터키 프라이드 치킨 등 서양식 프랜차이즈가 번창해 나갔다. 돈이 있으니 외식과 별식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와 때를 같이해 외식산업의 한 축을 형성한 것이 향토 음식이다.
향토 음식의 번창은 맛이나 영양보다는 향수나 옛이야기, 지역 이야기 등의 요소에 더 큰 영향을 받는다. 자갈치 시장 포장마차에 앉아 꼼장어를 먹으면서 우리는 무슨 이야기를 하게 될지를 생각해보자. 맛이 좋다거나 정력에 좋다는 이야기도 물론 하겠지만 자갈치 시장에 대한 이야기도 하지 않을까. 부산 사람들은 어떨까. 꼼장어를 먹으며 자갈치 시장에 얽힌 향수를 떠올리거나 어린 시절 부산에 대한 기억을 더듬다가 마침내 부산 출신이라는 지역적 자존심 같은 것을 느끼지 않을까. 생활에 여유가 생기면서 없이 지내던 시절의 안주가 지역 공동체 의식을 부추기는 음식으로 변화하게 되고, 부산 사람이면 누구든 꼼장어구이를 맛있어해야 한다는 집단의식이 생겨나고, 따라서 꼼장어구이집이 문전성시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현재 자갈치 시장에서 꼼장어구이를 파는 가게는 1백여 곳이나 된다. 바다를 등지고 일렬로 쭉 선 30여 포장마차를 비롯해 남포동파출소 옆 골목 포장마차, 그리고 제대로 된 식당 등에서도 꼼장어구이를 먹을 수 있다.
20여년 의리 지키는 '합동 꼼장어' 아지매들
자갈치 시장은 밤과 낮이 다르다. 낮에는 거대한 어물전이지만 밤에는 선술집 골목이라 할 만하다. 해안을 따라 쭉 늘어선 포장마차에서는 자갈치 아지매들의 강인하며 따스한 심성인 듯한 백열등 불빛이 화사하다.
일렬로 번호를 쭉 매겨놓았는데 번호 외 상호를 하나씩 달고 있다. 노랑모자집, 힌모자집(흰 모자의 오기), 파란모자집, 오리지날노랑모자집 등 모자와 관련된 이름이 많다. 그렇다고 아지매들이 모자를 쓰고 있는 것도 아니다. 웬 모잘까. 모자의 원조는 힌모자집의 김여미자 씨. 1960년대 중반부터 꼼장어구이 장사를 했다.
"새마을운동 한창 할 때가 있었잖아. 그때 시청에서 준 새마을모자를 쓰고 장사를 했는데 손님들이 우리 집을 '모자집'이라고 하더라고. 그러다 88올림픽 때 흰 모자에다 '88 올림픽'이라고 글씨를 새겨 썼는데 사람들이 나를 '88 아줌마'라 하고 우리 가게를 '흰모자집'이라 하데. 그래서 이렇게 간판을 붙였지."
그는 주변의 유사 상호에 대해 너그럽다. 같이 장사해 먹고사는데 그런 것 따져가며 팍팍하게 굴 일이 무엇 있냐는 것이다. 자갈치 아지매들의 넉넉한 품성이 느껴졌다. 그는 꼼장어구이 장사로 자식들 다 웬만큼 공부시킨 것만으로도 행복해했다. 큰아들은 개업의라고 했다. "이젠 아들 덕 보며 사시지 않고"라고 말하자 "사람은 일을 해야제" 하며 말을 받는다.
꼼장어구이의 원조는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원조격'이라 할 만한 사람은 있다. 남포동파출소 골목 '합동 꼼장어'의 이이순 씨. 1958년부터 꼼장어구이 장사를 하고 있다. 그의 언니가 그 몇 해 전부터 꼼장어구이 장사를 했다 하므로 원조라 해도 과히 틀리지 않을 듯하다.
'합동 꼼장어'는 꼼장어구이 맛보다는 자갈치 아지매들의 의리와 정에 깊은 '인생의 맛'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일곱 개의 포장마차가 잇달아 붙어 있는데 그 일곱 명의 아지매들이 공동으로 운영한다. 하루 영업이 끝나고 모여 앉아 각자의 매출액을 다 내놓으면 내일 물건 살 돈을 빼고 이익을 똑같이 배분한다. 누가 몸이 아파 나오지 않아도 적당히 그의 몫을 챙겨둔다.
'합동 꼼장어'의 공동 운영 방식은 20여 년이 넘는 역사를 지니고 있다. 어깨를 나란히하고 꼼장어구이를 팔다 보니 서로 손님을 끌기 위해 싸우는 일이 생겼는데 '서로 어려운 처지에 이렇게 싸워가며 살아야 하나'는 생각이 들어 이이순 씨를 중심으로 일곱이 뭉친 것이다. 지금 자리는 바닷가쪽에 비해 손님의 발길이 뜸한 곳이다. 한때는 목 좋은 곳에 있었는데 그 자리에 건물이 들어서 밀려난 것. 그 건물주가 좋은 자리를 제의했지만 다섯 명밖에 들어가지 못해 포기를 했단다. 돈보다는 의리와 정을 따른 것이다.
자갈치 시장에 가서 꼼장어구이 먹을 일이 생기면 옛 동명극장 자리의 '합동 꼼장어'에 꼭 들러보길 권한다. 음식이란 맛만으로 먹는 게 아니다. 음식에 담긴 정도 먹는 것이다. 자갈치 아지매들의 끈끈한 정 맛이 어떤지 궁금하지 않은가.('합동 꼼장어'는 간판이 없다. 남포동파출소 근처에서 물어보면 다 안다.)
꼼장어 가죽과 꼼장어껍질묵
꼼장어는 살 속까지 점액이 있어 회로 먹질 못한다. 국을 끓여도 맛이 없다. 구이만 가능한 생선인 것이다. 그외 꼼장어로 만드는 독특한 음식이 하나 있다. 껍질과 알로 만드는 묵이다. 자갈치에서는 '꼼장어묵'이라 불린다.
꼼장어만큼 점액이 많은 생선은 없을 것이다. 수족관에 넣어두면 흥건하게 점액을 뿜어내어 물 반 점액 반일 정도이다. 이 점액을 고아 굳히면 야들야들해지는 것을 이용해 껍질과 알을 섞은 뒤 묵을 쑤어 팔고 있다. 자갈치 상인들의 말에 의하면 한 1960년대부터 꼼장어묵이 시장에서 팔렸다고 한다. 한 아주머니는 아귀나 붕장어 등의 껍질로도 묵을 만들어 먹을 수 있다고 했다.
한때 이 꼼장어묵이 시장에서 사라진 적이 있었다. 1980년대 후반 꼼장어 껍질을 가공하여 만든 가죽제품이 유럽에서 인기를 끌면서 껍질 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은 것. 그래서 꼼장어 살은 버리고 껍질만 챙기기까지 했단다.
1990년대 말에 들어 꼼장어 가죽 제품 수출이 주춤하면서 꼼장어묵이 다시금 등장하고 있다. 좌판에서 삶은 상어 내장과 섞어 한 접시에 5천 원씩 받는다. 꼬들꼬들하고 쌉싸름한 맛이 별미이다. 꼼장어가 정력에 좋은 것은 점액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 점액이 주성분인 껍질로 묵을 쑤었으니 정력 음식으로 이만한 게 있을까 싶기도 하다.
오전에 도착한 곳은 다대포해변이다. 백사장이 너무나 넓고 아름답다. 모래를 밟고 바다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어깨가 저절로 덩실거린다.
흥겨운 맘으로 바지락해물 칼국수를 먹었다. 멋진 바다에서의 맛진 음식, 더 이상 무엇이 부러우랴~ 바지락해물칼국수가 쭈욱 붙어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운데 집이 맘에 든다.
(추천 : 할매바지락칼국수 -전화가 없습니다............)
이어진 해변도로를 달려 을숙도로 향했다. 낙동강하류의 철새 도래지인데 인공적인 것들이 너무 많아졌다. 다리도 새로 건설하고 있고......자연의 모습이 점차 인공적인 것들로 뒤덮혀가는 것을 보니 맘이 조금 씁쓸해진다.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서면에 가보았다. 줄서서먹는 떡볶이가 있는 먹자골목, 일본인들도 꽤 눈에 띈다. 30년 전통의 대성왕만두에서 비빔면을 간식으로 냠냠~~시내구경하다가 조방낙지를 맛보러 갔다.
(추천 : 조방낙지 051-555-7763)
맵지도 않고 식사거리로는 안성맞춤이었다. 에너지가 만땅 충전되었으니 다음 목표는 해동용왕사, 용왕사로 고고씽~
해동용왕사(海東龍宮寺) : 고려시대 1376년(우왕 2)에 공민왕의 왕사였던 나옹(懶翁) 혜근(惠勤)이 창건하였다. 혜근이 경주 분황사(芬皇寺)에서 수도할 때 나라에 큰 가뭄이 들어 인심이 흉흉하였는데, 하루는 꿈에 용왕이 나타나 봉래산 끝자락에 절을 짓고 기도하면 가뭄이나 바람으로 근심하는 일이 없고 나라가 태평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이곳에 절을 짓고 산 이름을 봉래산, 절 이름을 보문사(普門寺)라 하였다.
그후 임진왜란의 병화로 소실되었다가 1930년대 초 통도사의 운강(雲崗)이 중창하였다. 1974년 정암(晸菴)이 부임하여 관음도량으로 복원할 것을 발원하고 백일기도를 하였는데, 꿈에서 흰옷을 입은 관세음보살이 용을 타고 승천하는 것을 보았다 하여 절 이름을 해동용궁사로 바꾸었다.
현존하는 건물은 대웅전을 비롯하여 굴법당·용왕당(용궁단)·범종각·요사채 등이 있다. 대웅전은 주지 정암이 1970년대에 중창하였다. 대웅전 옆에 있는 굴법당은 미륵전이라고 하여 창건 때부터 미륵좌상 석불을 모시고 있는데 자손이 없는 사람이 기도하면 자손을 얻게 된다 하여 득남불이라고 부른다.
대웅전 앞에는 사사자 3층석탑이 있다. 원래 이 자리에는 3m 높이의 바위(미륵바위)가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절이 폐허가 되고 6·25전쟁 때 해안경비망 구축으로 파괴됨에 따라, 1990년에 정암이 파석을 모으고 손상된 암벽을 보축하여 이 석탑을 세우고 스리랑카에서 가져온 불사리 7과를 봉안하였다.
이밖에 단일 석재로는 한국 최대의 석상인 약 10m 높이의 해수관음대불, 동해 갓바위 부처라고도 하는 약사여래불이 있다. 절 입구에는 교통안전기원탑과 108계단이 있고, 계단 초입에 달마상이 있는데 코와 배를 만지면 득남한다는 전설이 전한다.
다른 절들은 바다를 내려다보는 곳에 위치해 있는데 반해 용궁사는 바다와 맞다아 있다. 바위에 철썩 부딪히는 파도를 바로 눈앞에서 볼 수 있다. 모래 위에서 만져보는 파도와 달리 바위 위에서 만져보는 파도는 또 다른 쾌감이 나를 즐겁게 해준다. 어둠이 짙어지면서 발길을 해운대로 향했다. 부산에 오면 꼭 들려가는 곳, 여름이면 수백만의 인파가 찾는 곳, 오늘도 역시 그 곳을 찾았다. 몰아치는 밤바람에 파도는 더욱더 세차게 몸부림친다. 나의 열정을 깨워주는 것 같다.
해운대 못지 않게 인기가 많은 광안리도 안가볼 수야 없지. 이 라이벌같은 둘을 이어주는 광안대교를 넘어본다. 광안대교의 특징은 2층다리라는 것이 더 매력적이다. 오고 가는 차가 마주볼 수 없도록 만들어져있다.
광안대교에서 내려다보이는 광안리 해변도 아름답다. 그렇다면 광안대교에서 내려다보는 광안리가 더 아름다울까? 광안리에서 바라보는 광안대교가 더 아름다울까? 둘 다 본 나로써는 비밀이다. 왜냐구 얘기하면 가보고 싶은 마음이 사라질까봐.....ㅎㅎ
광안리해변가를 달리는 기분 상쾌도 하다. 그 기분이 사라지기 전에 달맞이 길로 쌩쌩~~ 연인들의 멋진 드라이브 코스로 손꼽히는 달맞이길이다. 담번에는 진짜 여자친구랑 와야겠다.....꼬옥~~
달맞이길 : 달맞이고개라고도 부른다. 해운대해수욕장에서 송정해수욕장으로 이어지는 와우산(臥牛山) 중턱에 있는 고갯길이다. 굽잇길이 15번 나온다 하여 15곡도(曲道)라고도 한다. 벚나무와 소나무가 늘어선 8km에 이르는 해안도로는 유명한 드라이브 코스이다. 고갯길 꼭대기에 있는 달맞이동산에는 해월정(海月亭)이 있다. 그밖에 청사포(靑沙浦)·달맞이길 어울마당이 해안가에 있으며, 맞은편으로는 카페촌·화랑가·레스토랑들이 있다. ‘달맞이길 월출’은 대한팔경(大韓八景) 중 하나로 꼽힌다.
바닷가의 밤이 지나고나니 배가 밥 달라고 아우성이다. 해운대 근처에 있는 복집을 찾았다 아니. 꼭두새벽부터 왜이리 사람이 많은것이여.....되는 집엔 가지나무에 호박이 열린다는깐...
(추천 : 금수복국 051-742-3600)
누군가 식후연초 불로장생이란 말같지도 않은 말을 했던가, 나는 식후연구경이다. 오륙도 보러 얼른 가자. 렛츠 고우~ 신선대쪽 해변길을 지나 오륙도 선착장으로 갔다. 드넓은 바다와 그 바다 한가운데 떠있는 오륙도를 바라보았다. 5개든 6개든 상관없다. 단지 존재한다는 그 자체가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인간도 어떻게 생기거나 어떤 일을 하거나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살아있는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운 것이다. 태종대의 자살바위에서도 느꼈지만 결단코 자살은 해서도 아니, 추호의 생각도 안된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밀면이 나를 유혹한다. 시원하게 밀면 한그릇을 후다닥 비워버렸다.
(추천 : 가야밀면 051-891-2483)
시내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동래에 있는 향교와 경륜이 있는 스포원까지 이젠 조금 피곤하기도 하고 졸립기까지 한다. 잘땐 자더라도 먹고 자야지. 동래파전을 먹으러 갔다. 사장누나...누님...고모님께서 인터뷰를 하고 계셨는데 그 중 귀에 쏙 들어오는 말 "베트남 쌀국수는 15000원이나 되는데 우리나라 잔치국수는 2~3000원 밖에 못받는다." 남의 것은 비싸야 사먹고 우리 것은 비싸면 사먹지 않는다는 말같지 않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이제라도 우리 것의 소중함을 깨우쳐보자. 나도 우리나라 유람을 하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다. 그 중 하나가 우리 것도 최고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우리 것을 진정으로 사랑할 때 남들도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해줄 것이다.
(추천 : 동래할매파전 051-552-07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