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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영화보기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매바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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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맨 처음 음악을 들었을 때는 물론 가요부터 시작하겠지만 가요라는 것은 워낙 어렸을 때부터 듣고 자라왔고 그다지 특별히 기억될만한 추억거리도 없어서 크게 와 닿지는 않았다.
그러나 초등학교 막 고학년으로 올라갈 무렵이였던가 집에 전기가 들어온지 얼마 되지 않아(본인 76년생) 누나가 라디오를 들고 나타났다. 텔레비전은 고사하고 집에 처음으로 생긴 라디오가 신기해 이리저리 만져보면서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음악을 접하게 됐다. 물론 처음부터 무작정 음악만을 찾아다니기보다는 ‘추억따라 길따라’인가 추억 이야기를 하는 방송을 통해서 먼 이야기와 함께 간간히 들려주는 음악에 취해 그때부터 음악에 빠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무렵 동네에서는 팝송 ‘록웰’의 ‘나이프’를 처음부터 끝까지 외워서 다 부를 줄 안다는 동네형의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나보다 3년이나 높은 선배인데 내 귀에까지 들렸으면 얼마나 동네에 소문이 떠돌았는지 짐작하고 남음이다.
Rockwell - Knife
You touched my life Tell myself I'm free Knife, cuts like a knife When I pretend where's my I'm on a stage day and night Knife, cuts like a knife Now all oh oh oh Knife, cuts like a knife You cut away the heart of my lif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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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밤의 포근함으로 난 이제 자유롭고 나 자신을 위해 살을, 살을 에는 것 같아요 가장 친한 친구들이 있는 곳에서 난 밤낮으로 언제나 무대 위에서 살을, 살을 에는 것 같아요 이제 모두... 살을, 살을 에는 것 같아요 당신은 내 삶의 중심을 도려내 버렸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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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록음악을 잘 할 것같은 이름을 가진 Rockwell은 흑인 음악 최고의 레이블인 Motown의 설립자 Barry Gordy의 아들이지만 아버지의 명성을 등에 업고 성공하기 싫어서 이름까지 바꾸고 음악계에 데뷔해서 바로 이 곡을 빅히트 시켰습니다. 마이클 잭슨의 친구이기도 한 Rockwell이 부른 이 발라드는 베이스, 키보드, 신디사이저, 퍼커션 등의 악기는 물론 작곡에도 재주를 보였던 Rockwell이 직접 자작곡한 노래로서 칼로 베는 듯한 사랑의 아픔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
본명이 '케네디 윌리엄 고디(Kennedy William Gordy)'인 미국의 리듬 앤 블루스 가수 '록웰'은 미국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흑인 음악 전문 음반사로 유명한 모타운 음반사(Motown Records)의 창설자인 베리 고디(Berry Gordy)의 아들로 태어났다. 베리 고디는 1964년에 태어난 자신의 아들에게 미국의 35대 대통령이었던 '존 피츠제럴드 케네디(John Fitzgerald Kennedy)'와 우리나라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던 곡인 'Being With You'의 주인공인 미국의 리듬 앤 블루스 가수 '스모키 로빈슨(William "Smokey" Robinson)'의 이름들에서 케네디와 윌리엄을 가져와 아들의 이름을 만들어 주었다.
아들의 이름에 자신이 좋아하던 가수의 이름을 붙여주기는 했으나 베리 고디는 자신의 아들이 가수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어려서 부터 주위에서 수많은 가수들을 보며 성장한 케네디 윌리엄 고디는 1977년에 베벌리 힐스 고등학교(Beverly Hills High School)에 입학하면서 부터 아버지 몰래 밴드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당시 케네디 윌리엄 고디가 활동했던 고등학교 밴드의 이름이 바로 록웰이었다.
케네디 윌리엄 고디는 1983년에 아버지의 회사인 모타운과 아버지 몰래 음반 계약을 하게 되는데 아버지 때문에 본명을 사용할 수 없었던 케네디 윌리엄 고디는 고교 시절 활동했던 밴드의 이름인 록웰을 자신의 예명으로 사용하여 음반 계약을 하게 된다. 음반 제작을 담당한 커티스 앤터니 놀렌(Curtis Anthony Nolen)과 함께 'Somebody's Watching Me'를 만든 록웰은 곡의 녹음을 앞두고 이 곡의 코러스 부분에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과 '저메인 잭슨(Jermaine Jackson)'의 목소리를 삽입하기로 하고 두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록웰의 누나인 헤이즐 고디(Hazel Gordy)와 1973년 12월 15일에 결혼한 저메인 잭슨은 록웰의 요청을 받고 동생인 마이클 잭슨과 함께 흔쾌히 록웰의 데뷔 싱글인 'Somebody's Watching Me'에서 코러스를 담당해 주었다. 마이클 잭슨의 도움만 있다면 싱글을 성공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던 록웰의 장담대로 1984년 1월에 발매된 록웰의 데뷔 싱글 'Somebody's Watching Me'는 백만장이 넘게 팔려 나가며 빌보드 싱글 차트에서 2위 까지 진출했고 영국의 싱글 차트에서도 56위 까지 진출하며 대성공을 거두게 된다.
싱글의 성공에 뒤이어 발표된 록웰의 데뷔 음반 'Somebody's Watching Me'도 빌보드 앨범 차트에서 15위 까지 진출하였고 영국의 앨범 차트에서는 52위 까지 진출하였다. 백만장이 넘는 판매 기록을 남기며 골드 레코드(Gold Record)를 기록한 데뷔 싱글에 이어 록웰의 데뷔 음반도 50만장이 넘게 팔려나가면서 골드 레코드를 기록하는 성공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하지만 데뷔 음반에서 두번째로 발매된 싱글 'Obscene Phone Caller'는 강력했던 데뷔 싱글의 뒤를 따르지 못하고 빌보드 싱글 차트에서 35위에 그치고 말았으며 뒤이어 발매된 싱글 'Foreign Country'와 'Taxman'은 차트 진입에 실패하고 말았다. 데뷔 음반의 활동을 마무리 한 록웰은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를 초빙하여 신곡 'He's a Cobra'를 녹음하여 1985년에 싱글로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 싱글은 차트 진입에 실패하였고 같은 해에 발표된 두번째 음반 'Captured' 마저도 빌보드 앨범 차트에서 120위에 그치며 완연한 하향세를 그리게 된다.
록웰의 데뷔 음반에는외국에서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불후의 팝 발라드로 사랑받는 곡 'Knife'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 곡은 칼에 베인 상처 처럼 너무도 아픈 실연으로 인한 비통한 심정을 록웰이 애잔한 목소리로 들려주고 있다.
출처 : http://wivern.tistory.com/1157
그 사람은 자주 나에게 달다가 쓰다가 하였다.
달콤한 날에는 가슴이 뛰어 잠을 잘 수가 없었고,
쓰디쓴 날에는 가슴이 먹먹해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공지영>
나는 그때부터 팝이라는 장르와 나이프에 대해서 궁금해 했고 또 그렇게 처음으로 팝을 접하게 됐다.
그 형의 소문이 왠지 부럽기도 하고 질투심으로 팝을 적극적으로 듣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 계기가 내가 팝을 알게 됐고 좋아하던 계기였다. 그래서 나 역시 팝 하나쯤은 외우고 부를 줄 알아야 하지 않겠나 싶어 마침 친형이 좋다며 자꾸 듣던 ‘왬’의 노래에 빠지기 시작했다. 그의 노래 장르는 댄스와 발라드를 넘나드는 빠를 때는 너무나도 흥겹고 조용할 때는 그 어떤 것보다 달콤했다. 그것을 복합적으로 갖춘 노래 ‘캐어리스 휘스퍼’에 더욱 마음이 휩쓸리기 시작했다. 잔잔하게 흘러가다 어느 순간에는 숨넘어 갈듯한 빠르기는 나를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
Careless Whisper (경솔한 속삭임)
이 긴 글을 읽는 동안 한 노래만 들려오기 보다는 다양하고 많은 음악을 접해 드리기 위해 뒤늦게 연속 곡으로 바꿨습니다.
라이브
Careless Whisper (경솔한 속삭임)
I feel so unsure 마음이 너무 불안해요
as I take your hand 당신의 손을 잡고
and lead you to the dance floor 무대로 이끌 때
as the music dies, something in your eyes 그리고 음악이 꺼질 때.... 당신 눈에선
calls to mind the silver screen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르고
and all its sad good-byes 슬픈 이별을 생각해요
I'm never gonna dance again 난 다시는 춤을 추지 않을 거예요
guilty feet have got no rhythm 떳떳하지 못한 발걸음은 리듬을 타지 못해요
though it's easy to pretend 그렇지 않은 체 하는 건 쉽지만
I know your not a fool 당신이 바보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어요
Should've known better than to cheat a friend 친구를 속이고 주어진 기회를 잃는
and waste the chance that I've been given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했는데
so I'm never gonna dance again 당신과 추었던 그런 춤을
the way I danced with you 다시는 추지 않을 거예요
Time can never mend 친구의 경솔한 험담은
the careless whispers of a good friend 시간이 지나도 고쳐지지 않아요
To the heart and mind, ignorance is kind 진정 마음속으로, 모르는 게 좋아요
there's no comfort in the truth 진실 속에 위안은 없어요
pain is all you'll find 당신이 알게 되는 건 고통뿐이죠
I'm never gonna dance again 난 다시는 춤을 추지 않을 거예요
guilty feet have got no rhythm 떳떳하지 못한 발걸음은 리듬을 타지 못해요
though it's easy to pretend 그렇지 않은 체 하는 건 쉽지만
I know your not a fool 당신이 바보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어요
Should've known better than to cheat a friend 친구를 속이고 주어진 기회를 잃는
and waste the chance that I've been given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했는데
so I'm never gonna dance again 당신과 추었던 그런 춤을
the way I danced with you 다시는 추지 않을 거예요
Tonight the music seems so loud 오늘밤은 음악이 아주 크게 들리는군요
I wish that we could lose this crowd 이 군중에서 벗어나면 좋겠어요
Maybe it's better this way 아마도 그게 더 좋을 거예요
We'd hurt each other 우리가 하고 싶어하는 말로
with the things we'd want to say 우린 서로에게 상처를 줄 거예요
We could have been so good together 우린 함께 너무나 좋았을 텐데
We could have lived this dance forever우린 영원히 이 춤을 출 수 있었을 텐데
But no one's gonna dance with me 하지만 아무도 나와 함께 춤을 추려하지 않아요
Please stay 제발 머물러줘요
I'm never gonna dance again 난 다시는 춤을 추지 않을 거예요
guilty feet have got no rhythm 떳떳하지 못한 발걸음은 리듬을 타지 못해요
though it's easy to pretend 그렇지 않은 체 하는 건 쉽지만
I know your not a fool 당신이 바보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어요
Should've known better than to cheat a friend 친구를 속이고 주어진 기회를 잃는
and waste the chance that I've been given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했는데
so I'm never gonna dance again 당신과 추었던 그런 춤을
the way I danced with you 다시는 추지 않을 거예요
'우결(=우리결혼했어요)'에서 가수「환희」와 가상부부로 나왔던 『화요비』....
'R&B(리듬 앤 블루스) 가수로서는 박정현과 함께 노래는 실력은 정말 좋아.
화요일에 태어났기 때문에 예명에 ‘화요’라는 글자가 붙었다.
2000년 데뷔 당시에는 『박화요비』라는 이름으로 데뷔했으나 일본 진출시 예명을
화요비로 했다고.
1981년, 왬은 '나이트클럽 광'이었던 조지 마이클과
그의 친구 앤드류 리즐리에 의해 탄생되었다.
조지 마이클이 작곡과 작사, 보컬, 제작 등
음악에 관한 한 모든 걸 담당했고,
앤드류 리즐리는 그룹의 스타일과 이미지, 비주얼 등
외적인 측면에만 힘을 기울였다.
그 때문에 팀 해산할 때까지 자주 앤드류 리즐리의
역할 부재론이 거론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룹의 방향성은 앤드류 리즐리가 결정했던 만큼
역할이 아주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꽝!'이란 의미의 그룹이름과 이미지는
앤디 워홀과 더불어 팝 아트를 대표하는 인물로서,
주로 미국의 대중적인 만화를 주제로
매스미디어를 묘사한 바 있는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그림에서 따왔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우정을 쌓아온 이 둘은
1979년, 이그제큐티브(Executive)라는 스카 밴드활동을 하면서
음악여정을 시작했다.
하지만 곧 밴드가 해산되고
향후 약 2년간 작곡과 홈메이킹 데모 테이프를 녹음하는 등
수련과정에 들어간다.
당시 작곡한 곡 중에는 나중 메가히트를 기록하는
'Careless whisper'와 'Club tropicana'가 있었다.
몇 번의 오디션 끝에 1982년,
댄스 레이블 <이너비전>(Innervision)과 계약을 체결한 왬은
데뷔싱글 'Wham rap!'을 발표했지만
영국차트 100위권에도 못 오르는 실패를 맛봤다.
그러나 그 해 10월에 내놓은
두 번째 싱글 'Young guns(go for it)'은
BBC 방송국의 프로그램 <탑 오브 더 팝스>(TOTP)에서의
인상적인 댄스 공연으로 차트 3위로 도약했다.
1983년 6월 9일, 팝 댄스로 가득 찬
이들의 데뷔앨범 <Fantastic>이 발매되었고,
이 앨범은 곧장 영국차트 1위를 기록했다.
한편 조지 마이클은 이미 이때부터
독자적인 행보를 걷기 시작한다.
같은 해 8월 그는 미국의 머슬 쇼울스(Muscle Shoals) 스튜디오에서
전설적인 프로듀서 제리 웩슬러와 함께
'Careless whisper'를 녹음했다.
(하지만 별로 성공적이지 않았고
나중에 런던에서 재녹음되어 나중에 출시된다)
1984년부터 왬의 센세이션이 일어났고,
동시에 그들의 히트 퍼레이드가 시작된다.
침대 맡에 적어놓았던 앤드류 리즐리의 노트에서
영감을 얻어 조지 마이클이 만든
'Wake me up before you go go'는
영국차트는 물론 미국차트에서도 정상을 차지했다.
수년간 공력을 들인 발라드 'Careless whisper'도
3주간 영국차트 넘버원을 지켰다.
이듬해에는 미국차트에서도 역시 3주간 1위를 기록했다.
조지 마이클이 자신의 부모님께 바친
이 싱글의 미국판 크레딧에는
'조지 마이클이 피처링한 왬의 곡'이라고 명시되어 있었다.
앤드류 리즐리가 두 번째 앨범을 구상하는 동안,
조지 마이클은 다른 음악인들과도 활발한 교류를 했고,
엘튼 존과의 파트너십도 쌓기 시작했다.
12월에는 밴드 에이드의 난민 구호곡
'Do they know it's christmas time?' 녹음에도 참여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곡 때문에
그들의 크리스마스송 'Last christmas'가
차트 2위에 머물렀다는 사실이다.
이듬해인 1985년 3월에는
서포모어 앨범 <Make It Big>이 출시되었고,
그 앨범은 제목대로 미국에서만 5백만 장이 팔리는
'빅 히트'를 기록했다.
당해 4월 왬은 서구 팝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주인공이 되었다.
그들은 1만여명이 운집한
중국 베이징의 인민대회당에서 공연함으로써
'중국에서 공연한 최초의 서방 그룹'으로 기록되었다.
계속해서 조지 마이클은 라이브 에이드 행사에서
엘튼 존과 듀엣으로 'Don't let the sun go down on me'를 불렀고,
또 엘튼 존의 싱글 'Nikita'에서 백업보컬을 담당하는 등
확실하게 솔로활동의 교두보를 마련했다.
결국 조지 마이클과 앤드류 리즐리는 여전히 친한 사이였지만,
서로를 위해 1986년 왬을 해체하기로 결정했다.
1986년 4월 발매된 조지 마이클의
두 번째 솔로 싱글 'A different corner'는
공식적으로 밴드의 종말을 알리는 곡이었다.
같은 해 6월 윔블던 스타디움에 모인
7만2천명의 관객 앞에서 행한 마지막 콘서트
'The Final'을 끝으로 왬은 해산되었다.
왬 이후 조지 마이클은 <Faith>를 시작으로
솔로가수로서 놀랄만한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다.
반면 앤드류 리즐리는 <Son Of Albert>를 발표했지만
'Shake'라는 희미한 히트곡만 남겼을 뿐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왬의 음악을 담당했던 조지 마이클이 성공을 거두고,
음악적으로는 아무런 역할도 못했던 앤드류 리즐리가 실패한 건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다.
그렇지만 추억 속에 남아있던
앤드류 리즐리의 아름다운 매력이
솔로활동의 참담한 실패로
그나마 퇴색해버린 것 같아 아쉽기만 하다.
어쨌거나 왬은 80년대를 살아왔던 음악팬들에게는
아련한 기억으로, 또 아쉬움으로 존재하는 그런 그룹이다.
그의 앨범 목록
01. Wake Me Up Before You Go-Go
02. Last Christmas
03. Careless Whisper
04. Jesus To A Child
05. Kissing a Fool
06. Freedom
07. Everything She Wants
08. Somebody to Love (With Queen)
09. I'm Your Man
10. Look At Your Hands
11. Monkey
12. Bad Boys
13. Heartbeat
14. Wham Rap! (Enjoy What You Do)
01. One More Try
02. Dont Let The Sun Go Down On Me(with EltonJohn)
03. Jesus To A Child
04. Kissing A Fool
05. I'm Never Gonna Dance Again
06. Father Figure
07. Fastlove
08. Freedom
09. I Want Your Sex
10. Outside
그러나 단 하나 있던 테잎이 오랫동안 듣다 그만 라디오에 씹혀서 끊기는 못쓸때는 정말 머리가 지끈 지끈 아파올 정도로 안타까워 했습니다. 수중에 돈이라도 있으면 다시 테잎을 구입하겠지만 그것도 못하니 결국 남는 다른 테잎으로 라디오 음악을 녹음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상해버린 노래를 다시 녹음하기 위해 라디오를 뒤적거리고 여기저기 방송을 기웃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배철수의 음악캠프’를 알게 됐죠. 마침 이 방송에서는 내가 좋아하던 팝을 엄청 틀어주는 것 이였습니다. 굳이 제가 원하는 노래만이 아닌 다른 음악들도 거기서 같이 접하게 됐죠. 그러다 얼마나 기다렸던가 드디여 잃어버린 내(?) 노래가 흘러들기 시작 했습니다. 그런데 웬걸 너무나도 오랜 기다림 때문에 저는 녹음 할 준비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준비라는 것은 지금의 라디오로 생각을 하시면 커다란 오해입니다.
그 당시 집에 있던 라디오는 안타깝게도 사진처럼 플레이 버튼이 위에 있는 것이 아닌 사진 앞면 하단 중앙부분에 흰 사각이 보이는데 바로 그 부분에 있었습니다. 그런 식의 라디오 아마 생각나는 분들도 있으리라 봅니다. 그런데 이런 라디오의 문제점이 앞면 돌출형이라 오랬동안 사용하다보면 버튼이 약하거나 문제가 생겨서 부러지기가 일쑤였습니다. 그런 라디오를 버릴 수도 없어 부러진 부분은 젓가락을 끼워 사용했죠 그런데 젓가락을 끼워도 라디오를 반듯이 놓고 누르는 게 아닌 뒤로 기울여서 바닥에 젓가락이 닿지 않게 하는 것이 누르는 방법입니다. 그런 조건을 갖춘 다음에 녹음을 시작하는데 젓가락으로 구멍에 끼워 누르는 버튼 잘 눌러질 리가 없죠. 게다가 녹음하는 버튼은 다른 버튼보다 더욱 눌러지지가 않으니 말입니다.
아무튼 난 젓가락도 빈 테잎도 갖추지 못해서 결국 오랬동안 기다리던 노래를 놓치고 말았다. 그 후로 다시 왬의 노래가 흘러 나왔는데 이번엔 다행히 제때 맞춰 녹음을 시작했다. 그런데 난 그때 처음으로 전혀 얼굴도 모르는 ‘배철수’를 이를 갈면서 미워했다. 음악을 틀어 줬으면 조용히 입을 다물어야지 아니면 할 말 다 하고 음악을 틀어주던가 왜 음악이 나오면서 맨트를 날리는지 너무나도 미웠다. 그래도 어쨌건 그 맨트와 함께 녹음을 시작하고 다 끝이 난 후에 너무도 오랜 기다림의 비례해 부푼 가슴으로 재생을 해 봤지만 녹음은 되지 않고 칙칙 끓는 소리만 나는 것이다. 녹음을 하려고 누른 버튼이 중간쯤 내려가다가 만것이다. 오랜 기다린 만큼이나 안타까워 눈물이 핑 돌듯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또 무작정 기다려야만 했다.
그렇게 기다리다 또 다시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수 개월만에 결국 녹음을 할 수 있었다. 녹음한 노래에는 물론 앞부분은 맨트 때문에 음악과 맨트가 쭉~나오다 노래가 흘러 나왔는데 노래 역시 녹음 상태가 좋지 않아 칙칙 끓고 주파수 맞지 않아 칙칙 끓는 상태에서 또 겹쳐 칙칙 끓어 음악은 갱신이 들을 정도였다. 라디오가 좋지 않아 그거라도 만족하며 듣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나는 칙칙 끓는 음악을 들었었는데 나중에 오랜 시간이 흐르다 보니 일부러 녹음 상태를 칙칙 끓게 녹음하는 신해철의 앨범을 듣고는 세상 참 많이 좋아졌다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 나의 초등 생활은 고물 라디오와 한 판 씨름과 같은 전쟁 속에 보내게 되었다. 그때 주로 들었던 나의 음악은 굳이 내가 찾아서 듣기 보다는 친형이 있어서 형이 가끔 가져오는 테잎을 듣게 되었는데 그때 들었던 장르의 음악이 초기 성인이 되기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그 노래중에는 ‘런던 보이즈’노래도 껴 있었다. 그러면서 나는 초등학교를 끝맺을 무렵 런던 보이즈 노래를 알고 그 노래에 빠지게 되었다. (굳이 빠지기 보다는 내가 들을 수 있는 음악이라는 게 지극히 제한 되있어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말이 펼요없는 최고의 히트작
런던 보이즈 - 할렘 디자이어
원판은 8분이 넘는 전축판(?)오리지널 곡입니다.
이 곡은 간주부분은 생략되고 하일라이트부분만 재생 되어 MP3로 변환된 곡입니다.
많은 동영상을 올리면 인터넷 재생 속도가 느려질 듯 해서 원판은 올리지 않았습니다.
이들의 노래는 초등학교때부터 좋아하던 노래였는데 공교롭게도
뮤직비디오는 이 글 올리면서 이제서야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들의 모습은
완전히 초랭이 방정인데요 그렇지만 그런 그들의 모습이 싫지만은 않습니다.
London Boys (런던 보이스)
80년대 중후반 유로댄스 비트를 선보였던 London Boys는 낙천척이고 흥겨운 사운드에, 색채가 다양한 복장과 에너지가 넘치는 대단한 춤을 선보이는 당시 댄스 열풍을 선도했던 그런 그룹이었다. 그 당시에는 전세계적으로 Disoc 열풍이 불었는데 Modern Talking, Bad Boy Blue, Joy, Silent Circle, Radiorama, C.C.Catch 등이 그 중심에 있었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인기있었던 그룹이 바로 London Boys였다.
당시로서는 아주 빠른 비트를 선보였는데 그 빠른 비트를 통하여 그런 비트에 길들여지지 않았던 우리나라의 많은 팬들을 흡수하기에 충분했다.
London Boys는 Edem Ephraim과 그의 친구 Dennis Fuller로 구성된 남성 2인조 듀오 댄스그룹이다.
Edem Ephraim은 1959년 6월 19일 자메이카에서 태어났고 Dennis Fuller는 영국 London에서 태어난 동갑내기이다.
이들은 1981년부터 독일 함부르크에 있는 Glinde라는 중소도시에서 거주하면서 알게되었다.
80년대 중반에 싱글과 편집음반을 포함하여 5개의 앨범이 무더기로 쏟아지는데 이들은 450만장의 레코드를 팔면서 댄스그룹의 선두자로 우뚝서게 된다.
이 당시에 그들은 수 많은 힛트곡을 양산해 내는데 가장 전성기였던 1989년에 London Night이 영국챠트 2위를 기록했고 댄스의 메카 독일에서 26위에 오르는 놀라운 성적을 거둔다.
뒤이어 Requiem, Harlem Desire가 등장하면서 그들의 입지를 확실히 굳힌다.
앨범은 1988년에 발매한 앨범 Twelve Commandments In Dance가 그들의 초기 앨범이면서도 가장 흥겹고 그들의 힛트곡이 가장 많이 수록된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앨범이기도 하며 이 앨범에서 Harlem Desire, I'm Gonna Give My Heart, My Love, Dence Dence Dence, 등은 자국과 유럽에서 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와 일본 등 동남아 시장에서도 크게 힛트한 곡들이다.
1991년에 Sweet Soul Music가 정규앨범으로 발매되는데 대체적으로 London Boys의 특유한 사운드를 유지하는 앨범이지만 전작이 너무 힛트한 탓에 예전의 앨범만큼은 인기를 끌지는 못한다.
뒤이어 1993에 Love 4 Unity를 내놓고 1995년에 실직적으로 마지막 앨범이자 팬들을 당황스럽게 만든 앨범 Hallelujah Hits가 발매되는데 이 앨범은 성경의 이야기를 테마로 다루고 있고 앨범 자켓이 그들의 사진을 싣던 전 앨범들과 달리 그들이 모습이 빠진 아기들의 그림을 싣고 있어 특이하다.
디스코의 열풍이 시들해지고 한풀 꺽여있던 1990년대 중반, 1996년 1월 21일 저녁에 두 멤버인 Edem Ephraim과 Dennis Fuller, 디제이었던 친구들과 오스트리아 알프스 산맥을 자동차로 여행하던 중 음주 운전을 한 스위스 인의 차와 정면 충돌해 앞에 타고 있던 London Boys의 두 멤버가 사망하게 되면서 이 그룹도 끝나게 된다.
모든 노래가 댄스풍으로 이루어진 런던 보이즈의 테잎은 듣고만 있어도 절로 흥이 나고 어깨를 들썩이게 만들었다. 재밌는 것은 중학교를 접어들 무렵 처음으로 영어를 배우기 시작 했는데 나는 이미 영어를 배우기 이전에 왬과 런던 보이즈로 인해 콩글리쉬를 더 먼저 알게 되었다. 최소한 왬의 테잎만 해도 한 두곡쯤은 별로 끌지 않는 음악이 있는 반면에 런던 보이즈 테잎에서의 노래는 전곡 모두가 다 좋았던 것이다. 게다가 전곡 모두를 따라 불렀던 것은 지금까지도 수많은 테잎을 구입하면서 유일무이한 상황이다.
콩글리쉬로 노래를 부르는 솜씨는 혹 본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TV코미디 프로 ‘세바퀴’에서 김현철이 롤러장을 재연 한다면서 잠깐 콩글리쉬로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잠깐 나오는데 바로 그 정도의 실력이다.
Happy Song...Boney M
아하 - 테이크 온 미
이 뮤직 비디오는 뭐랄까요 발매 당시에도 내가 들었던 중학생때도 그리고 지금도 파격적이지 않을수가 없습니다.
그림속에서 사람이 나오는 모습은 그야말로 최고의 압권이였죠
중학교를 들어가고 친구들과 어울려 광주의 ‘88롤러장’을 갔더니 바로 이 노래가 흘러나오는 것이다. 마침 나 또한 이미 초등생때 부터 좋아하고 즐겨 부르던 노래라 귀 귀울여 듣고 있는데 지금은 롤러장 노래라 부르는 많은 노래들이 흘러나오는 것이다. 마침 런던 보이즈의 댄스 열풍에 빠져 있어서 그들의 노래를 비롯해서 ‘씨 씨 캣츠’라든가 많은 노래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이렇게 중학교까지 쭉 팝으로의 매력에 빠져들어 지금 많은 예를 들지 않지만 당시 수 많은 팝 아티스트들을 알게 되고 또 제목도 가수도 모르는 많은 노래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초등학생때부터 듣기 시작했던 팝은 나에게 있어서 그 범위가 지극히 제한된 곳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여유롭지 못한 생활에 팝을 듣고 싶어서 테잎을 구입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나마도 듣는 음악이라곤 라디오에서 녹음한 음악들로 음질의 상태가 상당히 좋지 않는 상태였다. 그러다 보니 중학교 말기에는 하나의 소원까지 생기게 되었다. 그것은 더블데크 라디오를 갖는 것이다. 그것만 있으면 주위 사람들에게 빌린 테잎을 내 마음대로 녹음 할 수 있다는 그야말로 환상적인 꿈이였다. 그런 꿈을 갖고 나는 전자상가에서 판매하는 전자제품을 소개하는 팜플렛을 보는 게 하나의 커다란 행복으로 여겨 왔다.
넥스트 - 절망에 관하여
그러다 고등학교 졸업할 무렵 3학년 후반기에 갑자기 찾아든 집안의 일로 인해 나의 음악으로 향하는 길은 또 다른 전환점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급작스럽게 찾아든 나의 아픔은 우연히 알게 된 ‘넥스트’의 ‘절망에 관하여’를 목이 터져라 불러대기 시작했다. 이 노래는 목이 터져라 불러도 좋을 만큼 높은 음으로 되어 있으며 그 가사 또한 내 귀를 뚫어 나를 자극 했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그때부터 나는 십여년이 넘도록 귀에 이어폰을 꼽고 다닐때면 볼륨을 항상 가장 크게 듣는데 이후로는 내가 낮은 귀가 어둡다는 소리를 주위에서 듣곤 했다.)
고등학교 3학년 후반기에는 취업을 나와서 그때 다니던 공장이 직물 공장이라 공장 안의 엄청난 소음으로 인해 마침 내가 소리 지르기가 좋은 위치가 되어주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야간에 일을 할라치면 밤새도록 목터지게 노래를 불렀던 것인지 아니면 소리만 그냥 질렀던 것인지 일을 끝내고 나오면 목이 쉬기가 일쑤였다. 그때만큼만은 소리 지르다가 울고 울다가 다시 소리 질러 쉼 없이 우는 통에 지금은 눈물이 메마른 탓인지 아무리 슬픈 영화를 봐도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
까르멜로 자풀라 - 위대한 사랑
06. Sanguzzu Miu
07. Stasera
08. Chitarra Mia
09. Dimmello Tu
10. A Parigina
11. Amami Ancora Una Volta
12. Bidduzza
13. Dillo Ancora
14. Dio Come Ti Amo !!
Carmelo Zappulla
Carmelo Zappulla(까르멜로 자풀라)는 이탈리아의 나폴리 출신으로,
이탈리아에서는 많이 알려진 중견가수입니다.
55년 시칠리아 (이탈리아 남쪽의 섬) Syracus에서 태어난
Carmelo Zappulla의 노래는 대부분 사랑에 관한 애절한 곡으로
가슴속 깊은곳에서 스며나오는열창은 듣는 이로 하여금 더욱 애절하게 만들어 버린다.
우리에게 알려진 Suspiranno란 곡은
완전한 사랑을 받지 못하는 괴로운 마음을 그린 노래로
사랑을 다시 한번 느끼게 하는 슬픈 노래이다
이승희가 주연으로 나온 '물위의 하룻밤'이란 영화에서
이승희가 물에 뛰어 들어 헤엄치다 자살할 때,
이 음악이 연주음악으로 쓰이면서 널리 알려진 노래인데
Raini Version으로 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오르간이면 오르간, 하모니카면 하모니카,
못 다루는 악기가 없을 정도로 재주도 아주 많은 가수라고 합니다.
자풀라의 곡들은 대부분 슬픔과 애절한 사랑을 주제로 하고 있는데,
이 곡 역시 완전한 사랑을 받지 못하는 괴로운 마음을 그린 노래로
Suspiranno(수뿌리안노)..."그들은 후회할 것이다" 라는 뜻의 이 노래는
흔히 빗소리를 음향으로 넣어 "빗속으로" 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비가오는 어둠이 짙은 날 들으면 왠지 모를 슬픔이 마구 묻어날것 같은 음악입니다.
넥스트의 노래를 일할 때 부르고 끝나면 공장 밖이기에 소리를 지를 수가 없어서 끅끅대며 울며 듣던 노래 ‘까르멜로 자풀라’를 알게 됐다. 우연히 라디오에서 들었던 그의 ‘위대한 사랑’이란 노래는 그 노래에 빠져 그의 앨범인 테입까지 구입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듣게 된 그의 모든 곡은 마치 울고 있는 나의 가슴을 쓰다듬기라도 하듯 나에게 다가왔다. 그 당시만 해도 어쩌면 이 노래는 나를 위해 만들어졌을거야 라는 생각까지 불러일으킬 만큼 특별 했으며 내 속에 있는 음악의 장르에서 하나의 커다란 테마가 되었다.
이때쯤 부터 '신데렐라'에 광분을 하게 됐고 '스콜피언스'의 음악에 목을 메이게 했다. 그 당시에는 이런류의 노래들을 24시간 단 한 순간도 빠지지 않고 듣게 되었다. 그도 그럴것이 하루 일과를 마치고 잠들기 전에 음악을 틀어 이어폰을 꼽고 잤으며 아침에 일어나면 역시 그 음악을 틀어놓고 아침을 준비하다가 또 이어폰을 꼽고 출근을 해서 공장에서 일 할때는 워낙 공장이 시끄러운 통에 아무도 말을 걸지 않아 이어폰을 꼽고 일 했었다. 일이 끝나고 퇴근을 하면 역시나 TV는 켜지 않고 또 다시 라디오의 음악을 틀었던 것이다.
이렇게라도 들어야지 내 아픈 현실에서 탈출 할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음악들이 나를 달래주거나 아픔을 쓸어주었다는 생각은 잘 모르겠다. 다만 내가 내 현실에서 빠져 나갈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에 만족을 하고 거기에 빠졌을 뿐이다. 아마 내가 무언가에 갈구하면서 빠질 수 있었던 계기가 바로 함몰되어가는 내 의식을 구할 수 있는 하나의 원동력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때는 음악이라는 장르가 개입 됐지만 굳이 음악이 아닌 다른 그 무엇 되었더라도...
이런 내 모든 삶이 온통 희뿌연 아픔으로 점철 될 쯤 나는 내 아픈 삶들을 어느 정도 정리하고 여기 지금 인천으로 23세의 어린 나이에 상경하게 되었다.
그러다 시작되는 공적인 공항 생활과 사적인 ‘방송통신대학교’의 생활로 성격마저 변화 시켜버린 나의 커다란 일들로 변해버린 내 성격을 고치려고 부단히도 노력을 해왔다.
인천으로 막 올라왔을 당시 이삿짐에는 테입이 3백여개가 됐었는데 그중 쓸만한건 대략 절반정도 뿐이였다. 어릴 적부터 워낙 내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습성 때문에 이것저것 모으다 보니 그렇게 쌓이게 되었다. 그런데 그 많은 테잎이 이사를 하면서 모두 분실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렇게 되면서부터 나는 다시 처음부터 음악 테잎을 모으기 위해서 손수레에서 판매하는 비매품인 테잎을 주기적으로 구입하게 되었다. 그때 알게 된 음악 ‘토니 블랙스톤’의 ‘언 블랙 마이 핫’!!!
이 영상은 라이브와 뮤직 비디오가 동시 재생인데 씽크가 살짝 맞지 않네요
Unbreak My Heart / Toni Braxton (토니 브랙스톤)
토니 브랙스톤 (Toni Michelle Braxton) 가수
Toni Braxton (토니 브랙스톤) - The Essential
아티스트 - Toni Braxton(토니 브랙스톤)
발매일 - 2007.02.13
앨범장르 - R&B
아름다운 음악이 주는 불멸의 가치를 증명해보이는 10년의 기록 ‘토니 브랙스턴’ 의 완전한 2CD 베스트 콜렉션
전 세계 3천만장 이상의 앨범 판매고를 기록한 R&B의 매혹적인 디바
'Un-Break My Heart', 'Breathe Again', 'He Wasn't Man Enough', 'I Don't Want To' 그리고 일 디보와의 듀엣곡 'The Time Of Our Lives' (2006 FIFA 월드컵 주제곡). 베이비페이스, 케니 지와의 듀엣 곡, 불멸의 R&B 히트곡, 리믹스 곡 등이 총 망라된 베스트 앨범!
[The Essential Toni Braxton]은 그녀의 전성기를 만들어준 10년 간의 기록이 빼곡하게 담긴 사진첩과 같은 앨범이다. 토니 브랙스턴의 수많은 히트 싱글과 리믹스들을 수록했을 뿐 아니라 전성기 이전의 과거와 현재까지 짚어내고 있다는 것에서 소장 가치를 획득하고 있다.
Un-Break My Heart’ 한 곡으로 그녀의 전부를 판단할 수는 없는 일, [The Essential Toni Braxton] 앨범은 토니 브랙스턴이 가진 다양한 색채의 사운드와 보컬을 한 번에 느껴보고 또한 그녀가 10년 간 쌓아온 내공과 에너지 충만한 변화를 경험할 절호의 기회를 선사한다.
[CD-1]
1. Love Shoulda Brought You Home
2. I Love Me Some Him
3. Tell Me
4. You’re Makin’ Me High
5. He Wasn’t Man Enough
6. Just Be A Man About It
7. How Many Ways (R.Kelly Remix)
8. Breathe Again
9. You Mean The World To Me
10. I Belong To You
11. How Could An Angel Break My Heart
12. Un-Break My Heart
13. Another Sad Love Song
14. Seven Whole Days
15. I Don’t Want To
16. Give U My Heart (Performed by Babyface Featuring Toni Braxton)
[CD-2]
1. The Heat
2. Gimme Some
3. There’s No Me Without You
4. Why Should I Care
5. Spanish Guitar (Royal Garden’s Flamenco Mix)
6. I’m Still Breathing
7. Me & My Boyfriend
8. Give It Back (Featuring The Big Tymers)
9. The Time Of Our Lives (The Official Song of the 2006 FIFA World Cup) (Performed by Il Divo with Toni Braxton)
10. He Wasn’t Man Enough (Junior Vasquez Marathon Mix)
11. Un-Break My Heart (Frankie Knuckles’ Franktidrama Club Mix)
12. Hit The Freeway (Featuring Loon)
13. Come On Over Here
14. Let It Flow
15. The Little Things
16. Good Life (A cappella Single Mix) (Performed by The Braxtons)
Don't leave me in all this pain
Don't leave me out in the rain
Come back and bring back my smile
Come and take these tears away
이 모든 고통을 남겨 두고 떠나지 말아요
날 빗속에 남겨 두고 떠나지 말아요
돌아와서 내 미소를 돌려 주세요
돌아와서 이 눈물을 거두어 주세요
I need your arms to hold me now
The nights are so unkind
Bring back those nights
when I held you beside me
지금 날 안아줄 당신의 품이 필요해요
밤은 정말 잔인하군요
곁에서 당신을 안아 주던
그 밤을 되돌려 주세요
Unbreak my heart
Say you'll love me again
Undo this hurt you caused
when you walked out the door
and walked outta my life
Uncry these tears
I cried so many nights
Unbreak my heart, my heart
(상처난)내 마음을 되돌려 놓아요
날 사랑한다고 다시 말해 주세요
당신이 문밖으로 나가
내 삶에서 사라져 버리고
내게 준 상처를 되돌려 놓으세요
이 눈물을 거두어주세요
수많은 밤을 울며 지샜어요
상처난 내 마음을 치료해 주세요
Take back that sad word goodbye
Bring back the joy to my life
Don't leave me here with these tears
Come and kiss this pain away
그 슬픈 안녕이란 말을 거두어 가고
내 삶의 기쁨을 다시 되돌려 주세요
날 울 게 해놓고 떠나진 마세요
돌아와 키스로 이 고통을 없애 주세요
I can't forget the day you left
Time is so unkind
And life is so cruel
without you here beside me
당신이 떠난 날을 잊을 수가 없어요
여기 내 곁에 당신이 없이는
시간은 너무도 힘들고
인생은 정말 잔인하군요
Don't leave me in all this pain
Don't leave me out in the rain
Bring back the nights
when I held you beside me
이 모든 고통을 남겨 두고 떠나지 말아요
날 빗속에 남겨 두고 떠나지 말아요
곁에서 당신을 안아 주던
그 밤을 되돌려 주세요
Unbreak my heart, oh baby
Come back and say you love me
Unbreak my heart, sweet darling
Without you I just can't go on
Can't go on
상처난 내 마음을 되돌려 놓아요
돌아와서 날 사랑한다고 말해주세요
제 마음의 상처를 고쳐주세요
당신 없이는 살 수가 없어요
살 수 없어요
그동안 팝을 알면서 여성 아티스트의 노래들을 전혀 접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머라이어 캐리’라든가 영화 ‘보디가드’에서 ‘휘트니 휘스턴’(그녀의 노래도 처음 들었을 땐 음악을 길게 뽑는 부분에서는 강한 자극을 주긴 했다.)의 음악들을 비롯해서 많은 아티스트들을 넘나들었다. 그러나 그런 여성들의 음악보다 이번 토니...의 음악은 가장 큰 충격이었고 깊숙이 다가왔다.
인천으로 올라와서도 시골에 있을 때의 아픔을 잊지 못하고 틈만 나면 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곤 했는데 그럴때면 늘 이어폰을 꼽고 동행했던 그녀의 노래. 90분짜리 짝퉁 테잎에 그녀의 노래 한 곡만 앞뒤로 들었던 노래가 지겹지도 않고 그렇게 많이 들었음에도 매번 들을 때 마다 새로운 충격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조용히 물 흐르는 듯 하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세찬 풍랑과도 같은 그녀의 노래는 지금까지도 나에게 작은 충격을 선사 해주고 있다. 십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그녀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같이 여행을 했던 순간순간이 떠오르곤 한다.
그러다 20대 중반에 한 여인과의 사랑을 알면서 사랑에 서툴렀던 나는 그저 맹목적으로 외사랑을 하게 되었다.
이 여성이야 말로 바로 내 이상형에 딱 맞는 여성이라고 생각을 했다. 물론 그 전에는 딱히 사랑이라는 거에 생각지도 않았다. 그러다 보니 특별히 나의 이상형은 이런 사람이면 좋겠다라는 생각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를 만나고부터 그녀 자체가 내 이상형으로 자리 매김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럴즈음 나의 음악은 그동안 ‘신데렐라’와 같은 격한 음악에서 조용하고 잔잔한 일명 ‘흘러간 팝송’을 뒤적이게 됐고 그런 팝송에 조금씩 눈을 뜨기 시작 했다.
‘사이먼&가펑클’과 같은 마음을 잔잔히 울려주는 음악이라든가 ‘제시카’의 조용함 속에 작은 요동을 일으키는 음악들은 그동안 잊고 지냈던 발라드풍의 되찾게 해주었다. 뭐 그렇다고 해서 오직 신데렐라만 추구한 게 아닌 주로 강한 음악에서 잔잔한 음악적 성향으로 바뀐것이다.
그렇게 초등학생때부터 좋아하게 된 팝은 20대 중반을 접어들면서 다시 역행을 하는 올드팝의 매력에 취해 있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30대까지 틈이 나는데로 이어폰을 귀에 꼽는 일을 늦추지 않았다.
30대를 넘어서면서부터 거리에는 MP3가 유행을 타기 시작했고 이제는 라디오를 들고 녹음 기능으로 음악을 녹음하는 시절은 역사의 뒤편으로 물러나게 되버렸다. 재밌는 것은 테이프에서 MP3까지 가기까지는 그 중간에 ‘시디플레이어’가 있는데 늘 음악과 함께 한 내 삶 속에서 응당 시디플레이어를 이용 했을법도 한데 주머니 사정을 고려해서 늘상 테잎만을 고집하고 있던 내게 잠깐 번쩍 하더니 시디플레이어는 어느새 저 멀리 뒤편으로 사라져 버려 내 음악의 삶속에는 시디플레이어를 이용 할 시간조차 허락 해 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아직까지 음악은 항시 테잎으로만 듣고 있다. 그것은 그동안 다시 모아온 300개가 넘는 테잎을 그대로 방치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01. Cold Day In Hell
02. Walking By Myself
03. Story Of The Blues
04. Oh Pretty Woman
05. Separate Ways
06. Too Tired
07. Still Got The Blues
08. Since I Met You Baby
09. The Sky Is Crying
10. Further On Up The Road
11. King Of The Blues
12. Parisienne Walkways
13. Jumpin′ At Shadows
세계적인 기타리스트 게리 무어(Gary Moore)가 향년58세로 사망했다.
매니저 애덤 파슨스는 2월7일(한국 시간) BBC 방송을 통해 “게리 무어가 휴가차 방문한 스페인 코스타 호텔에서 사망한 채로 발견됐다. 사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고 밝혔다.
Skid Row멤버로 데뷔한 게리 무어는 Thin Lizzy, Colosseum에서 활동하며 still got the blues와 같은 수많은 명곡을 남겼다.
2010년 4월 30일 첫 내한 공연에서 천안함 사건 희생자들을 추모해 한국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기도 했다.
유례가 없을 만큼 강력한 왼손과 오른손으로 정통 록기타의 진수를 들려주는 게리 무어는 기성 기타리스트 모두가 부러워하는 살아있는 록기타의 화신이다.
1954년 6월 4일 아일랜드에서 태어난 게리 무어는 일렉트릭 기타를 10살 때부터 치기 시작했다.
게리 무어의 연주는 강력하고 어태키한 피킹과 지판을 짓눌러 버릴 것만 같은 정력적인 핑거링을 주축으로 초강력 에너지를 발산하는 프레이즈를 들려준다.
한때 게리무어는 라이트핸드를 사용하지 않고 라이트핸드적인 프레이즈를 치며, 풀링 오프나 해머링을 멋지게 사용해
스피디한 애드립을 전개하기도 했다. 이러한 형태의 프레이즈가 너무도 강렬해 때론 난폭하다는 인상을 줄 정도이다.
게리무어는 헤비메틀 기타리스트이기 이전에 블루스 뮤지션이다. 그 때문에 그의 연주에선 고감도의 뜨거운 블루지함이 배어있다.
펜타토닉과 블루노트 스케일에 기반하여 마이너적인 느낌으로 음을 진행시킨다.
그외 디미니쉬와 도리안 등도 사용해 독자적인 멜로디라인을 창출한다.
거기에 그 특유의 다양한 초킹들이 얽혀 록의 정통성을 더욱 짙게 하고있다.
게리무어는 언제나 최고의 음색을 추구하였다.
게리무어의 기타 톤은 앰프자체의 게인을 최대한 활용한다는 점에선 가히 당대 최고중의 하나라 할만한 것이다.
공격적인 위협감과 우수어린 정서를 모두 뛰어나게 표현하는 그의 연주야말로 록기타 바로 그 자체인 것이다.
게리 무어의 대표곡 Still Got The Blues
1983년 9월 1일 뉴욕에서 서울로 돌아던 대한한공 007편 보잉 747 여객기가
소련 전투기 미사일 공격으로 피격되었던 사건을..
약소국이었던, 우리나라를 향해 무자비하게 잔행되었던 폭력을..
게리 무어는 "Murder in the Skies"라는 노래에 담아, 소련을 비판 합니다.
이 노래의 가사만 잠깐 짚고 넘어가자면,
이 영상은 "One Night In Dublin" 공연에서
자신과 함께 활동했던 Phil Lynott(A Tribute to Phil Lynott)를 추모하며 연주했던 장면입니다.
몇 년 전엔가 회사에서 점심을 먹고 의례히 늘 그렇듯 작은 행사처럼이나 나는 낮잠을 자기 시작했다. 낮잠을 자면서 라디오를 틀어놓고 잤는데 그 속에서 흘러나오는 소리 ‘게리 무어’의 ‘스틸 갓 더 블루’였다.
점심때 약간의 반주를 해서 이미 잠에 혼곤히 취해 있을법도 한데 나는 그 음악을 처음 듣다가 그만 잠에서 깨어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세상에 이렇게 멋진 음악이 또 있을까 했던 것이다. 잠시 앞부분은 잠에 취해 못 들었지만 중반부부터 들려오는 그의 기타음은 가슴을 쿵쾅거리게 하며 그의 쭉~ 늘어지는 음 속에 같이 빠져들게 만들었다. 이미 나는 ‘프랭크 시나트라’의 잔잔한 음과 ‘김수철’의 신들린 듯한 그들 둘의 기타음을 알고 있음에도 ‘게리 무어’의 음은 그들과는 또 다른 장르의 기타음으로 내게 충격을 선사 해 주었다.
나는 그동안 20여년이 넘도록 팝을 들어 왔음에도 게리 무어의 음은 그 때 처음 들었던 것이다. 왜 여태 이렇게 좋은 음악을 몰랐을까 하면서도 내 자신 스스로에게 놀라기까지 했다. 왠만한 팝송은 한번쯤은 들었을법하고 가물가물한 기억을 더듬으면 누구의 무슨 노래라는 것까지 알 법도 할텐데, 이 노래만큼은 전혀 생소 했던 것이다. 더구나 혼곤한 잠속에서 조차 나를 깨울 만큼의 멋진 음악은 한번 들으면 바로 기억 될텐데...
그렇게 나는 게리 무어의 음악을 알게 되고 이제는 고물 라디오로 젓가락을 끼워 녹음을 하는 게 아닌 인터넷을 통해서 그의 노래들을 찾아 들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비통하게도 게리 무어는 2011년 2월 6일 향년58세의 일기로 쓸쓸한 이슬이 되어 생을 마감하게 된다. 83년에는 대한항공 보잉 747을 폭파했던 당시 소련을 비판하는 노래까지 발표한 그의 행보를 기대 했건만 아직 젊은 나이에 사라져간 그의 생에 가슴을 치며 안타까워했다. 내가 비록 저 멀리 대한민국이라는 작은 나라에서 그것도 인천의 한 귀퉁이에 작고 볼잘것 없는 작은 존재라 그와 나는 까마득하게 먼 관계이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오랫동안 팝을 좋아했던 한 일인으로서 팝의 거성의 죽음을 애도 했던 것이다.
그가 죽음으로서 이제는 그의 이야기도 영국의 전설로 남게 되버린 것이다. 그동안에는 현존하는 천재적인 기타리스트였건만...
지금 이 순간 글을 올리면서 다시 한 번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의 대표곡 ‘스틸 갓 더 블루’를 감상 해본다.
나는 지금까지 고물 라디오에서 듣는 ‘왬’의 노래를 시작해서 ‘까르멜로 자풀라’에 이여 ‘게리 무어’까지 들었던 팝을 왜 그렇게도 좋아 했었는지 그 원인은 영화처럼이나 뭔가 다른 세계로의 동경과 현실과의 동떨어진 또 다른 세계로의 출입문을 열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유치할진 모르겠지만 전혀 모르는 낯선 타국의 언어로 노래를 한다는 의미 자체가 내 세계와는 전혀 다른 의미의 동경 이였던 것이다.
지금은 인터넷이라든가 여러 언론의 발달로 그런 일이 없지만 내가 처음 팝을 접할때는 단지 그들의 음악만 들었을 뿐 그들이 누구이고 더 나아가 이 목소리가 도데체 여자인지 남자인지 조차 구분을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을 몰랐음으로 인해서 오히려 나의 동경은 더욱 크게 자라났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 모르고 지냈던 아티스트들의 모습이 하나 둘씩 내 앞에 나타나고 나 또한 그들의 행보를 ‘팝 아티스트 소사전’이라는 책자를 구입하면서 조금씩 알게 됐다. 그러자 지금에 와서는 과거의 동경의 대상이 자리매김을 하긴 했으나 이제는 팝 그 자체를 좋아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긴 글로 저의 음악여행을 쭉 나열 했습니다.
글을 올리면서 못 쓰는 글 어거지로 머리를 긁어가며 생각하고 그리고 자료를 여기저기 찾아가면서 올리다 보니 거기에 따른 시간은 굳이 얼마나 많이 걸렸다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하나 소 되새김질 하듯 다시 조목조목 찾아가면서 저의 과거 역시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글을 쓰다가 때로는 고물 라디오 사건으로 피식 피식 웃기도 하고 또 때로는 내 아픔으로 인해 슬퍼하기도 하고 그러다가 감동에 북받쳐 올라 잠시 손을 놓고 음악 감상을 하기도 했습니다.
결국은 이 작업을 하는 동안 힘겨운 작업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저를 되돌아보게 했던 좋은 시간이였습니다.
여기 올린 음악들은 제가 20여년간 음악을 들으면서 무수히도 많은 음악들이 있겠지만 그래도 그중에서 각별히 선별하고 올린 음악들입니다. 그런 저에게 어찌 보면 가장 소중한 음악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긴 글을 여기까지 세세하게 읽을 분들은 없겠지만 그래도 이 긴 글 읽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2011년 05월 12일 인천 한 귀퉁이에서 매바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