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하 [夏] : 중국 전설상의 가장 오래 된 왕조. 하와 그에 이어지는 은(殷)·주(周)를 합하여 3대라고 병칭하며, 옛 중국에서는 이상적 성대(聖代)로 불려왔으나, 명확한 유적·유물이 남아 있는 것은 은나라 이후이다. 《사기(史記)》〈하본기(夏本記)〉에 의하면, 하왕조(夏王朝)의 시조 우왕(禹王)은 기원전 2070년 왕조를 개국하여, 황허강[黃河]의 홍수를 다스리는 데 헌신적으로 노력하여 그 공으로 순(舜)이 죽은 뒤, 제후의 추대를 받아 천자가 되었다. 우는 제위를 민간의 현자에게 양여하려고 하였으나, 제후는 우의 아들 계(啓)를 추대하였으므로 이때부터 선양제(禪讓制)가 없어지고 상속제(相續制)에 의한 최초의 왕조가 출현하였다고 한다. 17대의 이규(履癸), 즉 걸(桀)에 이르러 정치가 포악을 극하였으므로 민심을 잃어서 은나라 탕왕(湯王)에게 멸망하였다. 주나라 때에는 허난성[河南省] 동부에 있는 기(杞)나라가 하의 후예라고 칭하였으나, 만일 하왕조가 실재해 있었다면 그 위치는 오히려 산시성[山西省] 남서부를 중심으로 한 황토대지(黃土臺地)에 있었을 가능성이 많다. 또, 고대 중국에서는 오랑캐에 대하여 중국의 제후를 중화(中華)·화하(華夏)라고 총칭하였다. 한편, 유목민족인 흉노(匈奴)를 하의 후예라고 하는 설 따위도 《사기》에는 나타나지만, 근거 없는 말이다.
2.은 [殷] : 중국 고대의 왕조(BC1600~BC 1046). 수도의 이름을 따라 상(商)이라고도 한다. 하(夏)·은·주(周) 3대의 왕조가 잇달아 중국 본토를 지배하였다고 하나, 하왕조는 고전(古典)에만 기록되어 있을 뿐, 전설적인 존재에 불과하다. 이에 대하여 은왕조는 20세기에 들어서 그 수도에 해당하는 은허(殷墟)의 발굴이 진행됨에 따라서, 적어도 그 후기에는 당시의 문화세계였던 화북(華北)에 군림하였던 실재의 왕조였음이 판명되었다. 따라서 은나라는 중국 최고(最古)의 역사적 왕조라 할 수 있다. 은나라 전기는 기원전 1600년부터 1300년까지이고, 도읍을 은으로 바꾼 은나라 후기는 1300년부터 1046년까지이다.
3.주 [周] : 중국의 고대 왕조(BC 1046∼BC 771). 은(殷)나라 다음의 왕조이며, 이전의 하(夏)·은과 더불어 삼대(三代)라 한다. 요(堯)·순(舜)의 시대를 이어 받은 이상(理想)의 치세(治世)라 일컬어진다. 【건국】 주왕조(周王朝)의 시조는 후직(后稷:棄)이며, 13대째의 고공단부(古公亶父:太王) 때에, 기산(岐山:陝西省 中部)에 옮겨 정주(定住)하고, 국호를 주(周)라 하였다. 당시 황허강[黃河]의 하류지역에는 은왕조(殷王朝)가 번영하고 있었는데, 주족(周族)은 그 서쪽 변두리의 제후(諸侯)의 하나였다. 태왕의 손자 문왕(文王:昌)에 이르러 태공망(太公望:呂尙) 등의 보좌로 서방의 패자(覇者:西伯)가 되었다. 그 아들 무왕(武王:發)은 제후의 지지를 받아, 당시 민심을 잃고 있던 은의 주왕(紂王)을 멸할 싸움을 일으켰다. 이 출병(出兵)을 하지 말도록 간(諫)한 백이(伯夷)·숙제(叔齊)의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러나 무왕은 마침내 목야(牧野)전투에서 은의 대군을 무찔러 주왕을 죽이고, 은왕조에 갈음하여 주왕조를 창시하였다. 【문화】 주는 종주(宗周:陝西省 渭水 유역의 鎬京)를 도읍으로 하였으나, 동방을 통치하는 중심으로서 낙수(洛水)를 따라서 동도(東都) 성주(成周)를 건설하였다. 그리고 희성(姬姓)의 동족을 노(魯)·위(衛)·진(晉) 등의 요지에 후(侯)로 봉하고, 건국의 공신 태공망 여상도 제(齊)에 봉하였다. 이것을 봉건(封建)이라 부르고, 흔히 무왕의 동생 주공(周公:旦)이 처음으로 실시한 제도라 하나,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이 '봉건'과 유사한 제도는 이미 은대 말기에 행하여진 것 같다. '봉건'뿐만 아니라 주공이 창시했다고 하는 주의 예제(禮制)는 후세에 원망을 산 것이 많으나, 주의 청동기문화(靑銅器文化)나 상형문자(象形文字)는 은에서 발달한 것을 이어받은 것이 명백하다. 대체로 주의 문화는 은의 문화에 힘입은 바가 많다. 은을 멸한 후, 주의 지배자는 그 정치적 변동 등을 하늘의 뜻에 의하는 것으로 보았다. 즉, 일찍이 은에 내린 천명(天命)은 주왕(紂王)이 민심을 잃었기 때문에 은에서 떠나고, 새로이 주(周)에 내려진 것이라 했다. 이렇게 천명을 고친, 즉 혁명(革命)한 주왕조가 영속되기 위해서는 덕(德)을 닦고 쌓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동주시대】 무왕부터 소왕(昭王)·목왕(穆王)에 이르는 동안이 주왕조의 전성기였으나, 마침내 BC 9세기부터 안에서는 제후의 이반(離反), 밖에서는 융적(戎狄)의 침입이 잦아져서 주는 내리막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11대 선왕(宣王:靜)은 융적을 격퇴하여 한때 세력을 회복하였으나, 그의 아들 유왕(幽王)은 포사(褒??)를 총애하여 내정이 문란해져서 견융(犬戎)의 침입을 초래하여 유왕은 살해되었다. 그의 아들 평왕(平王:宜臼)은 마침내 도읍을 성주(成周:河南省 洛陽 부근)에 옮기고 주왕조를 부흥시켰다. 이 평왕의 동천(東遷:BC 771) 이전을 서주(西周)라 하며, 그 이후를 동주(東周)라 불러 구별한다. 동주시대에 들어서서 약 반세기가 지나 춘추시대(春秋時代)가 시작된다(BC 722). 춘추시대에는 제후 등의 이반으로 국내의 정정(政情)이 불안정하였고, 열국 간에 전쟁과 회맹(會盟)이 끊이지 않았으며, 제(齊)의 환공(桓公), 진(晉)의 문공(文公)과 같은 패자(覇者:覇는 伯과 같은 뜻이며, 大諸侯를 의미한다)가 회맹을 주재(主宰)하여, 중원(中原)의 질서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패자는 명목상으로는 주왕실의 권위를 존중하고, 주의 봉건질서를 적극적으로 허물어뜨리고자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BC 5세기에 들어서자, 여러 나라의 내부에서 하극상(下克上)의 풍조가 일어나, 그 기세에 눌려 주의 위열왕(威烈王)은 진의 유력한 귀족 한(韓)·위(魏)·조(趙)의 3씨를 정식으로 제후로 격상하는 것을 인정했다(BC 403). 이 해를 전국시대(戰國時代)가 시작되는 해로 보는 설이 있는 것은 주왕 자신이 '봉건'의 정신을 망각한 점을 중대시하기 때문이다. 전국시대의 주왕은 낙양 부근을 영유하는 한낱 작은 제후에 지나지 않았고, 그것도 마침내 동서(東西)로 분열된 나머지 BC 256년, 난왕(슷王)이 진(秦)에 항복하여 주는 멸망하였다.
4.춘추전국시대 [春秋戰國時代] : BC 8세기에서 BC 3세기에 이르는 중국 고대의 변혁시대. 춘추시대의 시초는 BC 770년, 주(周)왕조가 뤄양[洛陽]으로 천도한 후로, 노(魯)나라의 연대기 《춘추》의 최초의 해(BC 722)라고 한다. 전국시대의 시초는 진(晉)의 유력 귀족인 한(韓) ·위(魏) ·조(趙) 3씨가 실권을 잡은 해(BC 453), 또는 이 3씨가 정식 제후(諸侯)로 승격한 해(BC 403)이며, BC 221년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의 통일로 끝이 난다. 【정치】 춘추에서 전국에 걸친 전국시대는 서주시대(西周時代)의 봉건제도(封建制度)가 해체되고, 진(秦) ·한(漢) 황제 아래에서의 중앙집권 체제가 형성되어가는 과도적 시대이다. 춘추시대는 서주 이래의 제후국이 100여 개나 존속하고 있어서 전통적 기풍이 강하였으나, 전국시대에 들어와서는 강국이 약국을 병합하여 진(秦) ·초(楚) ·연(燕) ·제(齊) ·한(韓) ·위(魏) ·조(趙)의 이른바 전국칠웅(戰國七雄)이 성립하였다. 각국의 군주는 스스로 왕을 자칭하고 광대한 영역을 통치할 관료기구를 정비하였으나, 그 중에서도 서방의 진은 적극적인 정치개혁에 의하여 부국강병에 힘써 마침내 천하통일에 성공하였다. 【사회경제】 이 시대의 정치적 변동은 농업생산력의 향상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춘추시대 말에는 철제농구가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전국시대에는 우경(牛耕)이 시작되었으며, 치수관개(治水灌漑) 공사도 각국에서 시행되어 경지면적이 증대하였다. 이렇게 새로 개척된 농지에서의 수확이나 산의 나무, 해변의 소금 ·물고기 등 산물에 대한 과세로써 전국시대의 각국 군주는 권력을 강화하여 나갔다. 한편, 소금이나 철(鐵)의 생산 판매업자도 거리(巨利)를 취했으며, 교환경제의 발달과 더불어 쟁기 모양을 본뜬 포전(布錢), 소도(小刀)의 형을 이룬 도전(刀錢) 등 청동제 화폐가 유통되었다. 이러한 경제적 발전은 사회조직에도 변화를 가져와, 이제까지의 씨족 결합이 무너지고 5인 평균가족이 독립할 수 있는 경제생활을 영위하게 되었다. 그들 중에는 몰락하여 노예가 되는 자도 나왔으나 한편으로는 광대한 토지를 취득하고 유력한 호족(豪族)을 중심으로 동족이 결집하는 호족도 나타났다. 가문의 배경이 없더라도 본인 자신의 재능 ·자각으로 활약할 수 있는 시대이기도 하였다. 몰락한 귀족의 자손을 비롯하여 상공업자나 농민들도 입신출세하기 위하여 군주나 유력 인사에게 접근하여 법률 ·군사 ·외교 등 각자 재질에 따라 그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자가 속출하였다. 군주나 유력관료측에서도 부국강병을 위하여 널리 인재를 구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타국에서 온 망명자도 등용하였다. 【사상】 ‘제자백가(諸子百家)’ 또는 ‘백가쟁명(百家爭鳴)’이라는 말처럼, 이 시대는 중국 사상사상(思想史上) 드물게도 그 활동이 활발했던 시대였다. 정치적 ·사회적 변동을 배경으로 하여, 어떻게 하면 질서를 회복할 수 있는가를 각자가 자기의 소신에 따라 적극적으로 발언하였기 때문이다. 공자 ·맹자 ·순자 등의 유가(儒家)는 효제(孝悌) ·인의(仁義) ·예(禮)를 바탕으로 정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묵자를 비조로 하는 묵가(墨家)는 가족이나 국가의 경제를 초월한 겸애(兼愛)의 정신을 역설하였으며, 상앙(商鷗) ·한비(韓非)와 같은 법가(法家)는 법의 일원적 지배, 군주권력의 절대화에 의하여 부국강병의 실현을 정치의 목표로 삼았다. 그러한 정치에 기대를 거는 제학파에 대하여, 문화생활을 부정하고 개농주의(皆農主義)를 주장하는 농가나, 인위적 정치도덕의 폐기를 주창하는 노자 ·장자 등의 도가(道家)도 있었다. 그러나 이같이 활발하던 사상활동도 진 ·한 제국의 성립을 전후하여 정통사상의 기준이 나타남과 함께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5.진 [秦] : 중국 주(周)나라 때 제후국의 하나로 중국 최초로 통일을 완성한 국가(BC 221∼BC 207). BC 10세기 목축으로 이름이 나 있던 대구(大丘)의 비자(非子)는, 주나라 효왕(孝王)으로부터 진읍(秦邑:甘肅省 淸水縣)에 봉해져 서융(西戎)의 방위를 맡음으로써 진을 일으켰다. 그 후 진은 BC 8세기 초, 주나라가 견융(犬戎)의 공격을 받을 때 유왕(幽王)을 도왔고, BC 771년 평왕(平王)이 동쪽 낙읍(洛邑)으로 천도하였을 때에는 이를 호위한 공으로 산시성[陝西省]의 서부 지역을 맡아 제후(諸侯)로 승격하였다. 이가 양공(襄公)이다. 진나라는 BC 7세기의 무공(武公) 때부터 정복지를 현(縣)으로 만들기 시작했는데, 현이라고 해도 그것은 명목일 뿐 실상은 읍과 다름이 없었다. 진나라는 간쑤성[甘肅省] 동부에서 웨이수이강[渭水] 연안을 따라 이동하다가 무공의 동생인 덕공(德公) 때에 옹성(雍城:陝西省 鳳翔縣)으로 이동하였다. 1. 춘추시대 BC 659년에 이르러 진(秦)나라 목공(穆公)은 백리해(百里奚) ·건숙(蹇叔) 등을 등용해 정치를 혁신하고, 동쪽의 진(晉)나라와 싸워 하서(河西)의 땅을 빼앗았으며, 또한 서융 출신의 유여(由余)를 등용, 서방 이민족의 12국을 통합하고 영토를 1,000리에 이르도록 확장하여 서방의 패자(覇者)가 되자, 주나라 황실에서는 동고(銅鼓)를 하사해 경축하였다 한다. 그 후 하서 땅은 다시 진(晉)나라에 빼앗기는 등 진(秦)나라의 당면한 적은 진(晉)나라 였으므로 초(楚)나라와 손을 잡고 빈번히 진(晉)나라와 싸웠다. 진나라는 무공(武公)에서 목공(穆公) 때에 걸쳐 산시성 내의 작은 나라들을 병합하여 관중(關中)의 땅을 통일하였다. 2. 전국시대 진나라 헌공(獻公) 때에는 순사(殉死)의 습속을 금지하고 BC 383년에는 동녘에 역양성(젝陽城:陝西省 臨潼縣 북동)을 구축하여 동방으로의 진출 의지를 보여주었다. BC 362년 효공(孝公)이 왕위에 오르자 위(衛)나라 사람 상앙(商鷗)을 등용해 내정을 개혁하였다. 즉 종래의 혈연 존중의 인사를 고쳐서 공적에 따른 신분제도를 설정하고, 군사조직과 토지제도를 혁신하여 조세(租稅)를 공평하게 했으며, 병농(兵農)을 일치시켰다. 이때부터 종래의 읍(邑)과는 그 성격이 다른 새로운 현(縣)이 생겼고, 군주권이 현내의 서민과 직결되었다. 이같이 하여 국력이 증강된 진나라는 위(魏)나라를 공략해 하서(河西)의 땅을 빼앗았기 때문에 위나라는 수도 안읍(安邑:山西省 解縣)에 불안을 느껴 대량(大梁:河南省 開封縣)으로 천도하였다. 진나라는 효공 때 수도를 셴양[咸陽]으로 옮겨 셴양은 진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수도로 남았다. 위나라의 대량 천도와 진나라의 국력 증강은 열국(列國)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열국은 연합전선을 펴 진나라를 관중(關中)의 땅에 봉쇄해 두려는 소진(蘇秦)의 이른바 ‘합종책(合縱策)’을 안출하였다. 이를 알게 된 진나라의 혜문왕(惠文王)은 공손 연(公孫衍)으로 하여금 ‘합종책’을 분쇄하도록 명하고, 장의(張儀)로 하여금 각국이 진나라와 단독강화를 맺게 하는 이른바 ‘연횡(連衡)’을 성립하게 하였다. 이와 같은 책동이 진행되고 있는 사이에 진은 파(巴) ·촉(蜀), 즉 쓰촨성[四川省]을 장악하고, 초(楚)나라로부터는 한수이강[漢水]의 상류를 빼앗았다. 이로써 진나라는 어느 때든지 초나라를 공격할 수 있는 위치를 확보하였다. 혜문왕은 BC 325년부터 공(公) 대신 왕호를 사용하였는데, 이로부터 다른 나라들도 모두 왕호를 쓰게 되었다. 소양왕(昭襄王) 때에 이르러 청두[成都] 부근에 운하를 열고 쓰촨의 옥야(沃野)를 개발하는 한편, 진나라 장수 백기(白起)는 BC 278년에 대병력을 이끌고 초나라를 공격하여 수도 영(落)을 함락하고, 초왕 역대의 능역(陵域)이던 이릉(夷陵)을 불태워버렸다. 초나라는 허난[河南]의 진(陳:河南省 淮陽縣)으로 옮겨야 하였고, 뒤에 다시 수춘(壽春:安徽省 壽縣)으로 옮겼다. 진나라 군대는 양쯔강[揚子江]을 건너 다시 구이저우성[貴州省]의 동부와 후난성[湖南省]의 서부도 공격하였다. 백기 장군은 북방의 조(趙)나라도 공격하여, 장평(長平)의 싸움에서는 항복한 조나라의 군사 40만을 구덩이에 생매장하고 수도 한단(邯鄲)에 육박하였으나, 초(楚)나라와 위(魏)나라의 원군이 투입되어 포위망을 풀고 철수하였다. 이즈음 진나라는 서제(西帝), 제(齊)나라는 동제(東帝)라고 높여서 ‘황제’ 칭호를 쓰기도 하였으나 얼마 후 다시 왕호를 썼다. 소양왕이 위나라 사람 범수(范彧)를 등용한 뒤부터는 그의 건의에 따라‘연횡책’을 버리고 ‘원교근공(遠交近攻)’ 정책으로 전환하였다. 이로부터 진나라는 마지막 마무리 작전에 들어갔다. 이와 같은 진나라의 형세를 살핀 주왕(周王) 난(슷)은 열국을 ‘합종’하여 진나라를 칠 계획을 세웠고, 이를 안 진나라는 주나라부터 공격을 시작하자 난왕은 영읍(領邑) 30과 인구 3만을 바치고 항복함으로써 주나라는 멸망하였고, 7년 후에는 동주군(東周君)도 멸망하였다. 3. 통일 BC 247년에 즉위한 진나라 왕 정(政)은 어렸기 때문에 모태후(母太后)가 섭정했는데, 장성해서 친정(親政)을 시작하자 재상 여불위(呂不韋) 등을 제거하고 이사(李斯)와 같은 인재를 등용하였다. 그는 법가(法家)의 학자로서 이후부터 진나라 정치는 그의 의견에 따라 시행된다. 대외적으로는 여전히 ‘원교근공’ 정책을 써서, 진나라의 왕전(王舞) 등 장수들은 여러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어 BC 230년에는 먼저 한(韓)나라를 멸망시키고, 조(趙) ·연(燕) ·초(楚) ·위(魏) ·제(齊)의 순으로 6국을 통일하였다. 한나라가 멸망하고부터 제나라가 멸망하기까지는 불과 10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진왕 정은 황제가 되고, 이로부터 진나라는 황제가 죽은 뒤에 그 이름을 정하는 시호를 사용하지 않게 되어 그는 시황제(始皇帝)가 되고, 그 후의 황제는 이름 없이 2세 ·3세로 부르게 되었다. 중국 역사상 최초의 통일국가가 된 진나라는 군현제(郡縣制)를 실시하여 전국을 36개 군으로 하고 각종 통제정치를 단행, 획일적인 문화를 창조하였다. 이른바 중앙집권적 전제군주제가 완성된 것이다. 시황제는 다시 북쪽의 흉노를 쫓아내어 만리장성을 구축하고 남쪽은 광둥성[廣東省] ·광시성[廣西省]에서 베트남 북부까지 정복하였다. 진나라의 위명은 해외에까지 뻗쳐, 중국의 다른 이름을 ‘支那(지나) ·震旦(진단)’ 등으로 부르게 되었는데, 이는 진(秦)이라는 음이 와전한 것이다. 그러나 시황제의 대외전쟁은 결국 국민의 부담이 되는 것이어서 만년에는 민심이 동요하자 극단적인 탄압정책이 시작되었다. 시황제가 죽은 뒤에는 2세 황제가 위에 올랐는데 환관인 조고(趙高)와 이사(李斯)의 불화로 조고가 이사를 죽이고 궁중의 권력을 장악했으며, 2세 황제도 살해하였다. 유군(幼君) 자영(子拏)이 진왕이 되어 조고를 처단했으나, 자영은 BC 207년 한중(漢中)에 들어온 유방(劉邦)에게 항복함으로써 시황제의 중국 통일 후 불과 3세, 15년 만에 진나라는 멸망하였다.
6.한 [漢] : 진(秦)에 이어지는 중국의 통일왕조(BC 202∼AD 220). 왕망(王莽)이 세운 신(新:8~22)나라에 의하여 잠시의 중단이 있어, 그 이전에 장안(長安)을 수도로 하였던 한을 전한(前漢:西漢), 뤄양[洛陽]에 재건된 한을 후한(後漢:東漢)이라고 한다. 한왕조의 창시자는 진말(秦末)의 반란 지도자의 한 사람인 유방(劉邦:高祖)이다. BC 206년 진이 타도되자 반란의 통일적 지도자 항우(項羽)는 그를 한왕(漢王)으로 봉하였으나, BC 202년에 항우를 타도하여 황제의 자리에 올라 장안을 수도로 하고 중국을 통일하였다. 한왕조는 기본적으로는 진(秦)나라의 국가체제를 계승하여 전국통치의 조직은 군현제를 기본으로 하였다. 그러나 한왕조의 수립은 진말의 난 이래의 여러 집단의 지도자와 유방 직속 부하들의 협력에 의한 것이어서, 유방은 이들 공신(功臣)과 그의 일족을 제후왕·열후(列侯)로서 각지에 봉건하였다. 한(漢)의 군현과 봉건 병치제도를 군국제(郡國制)라고 부르는데, 유방의 치세 중에 공신인 왕들은 모두 멸망하고, 왕은 결국 유씨 일족(劉氏一族) 출신자에 한하는 것이 한왕조의 정제(定制)가 되었다. 한나라의 봉국(封國)은 춘추시대 이전의 제후의 씨족적 결합을 기초로 한 읍(邑)과는 성질이 다르지만, 제후왕은 중앙관제와 유사한 관제를 가지며, 한대(漢代) 초기에는 자립적 경향이 있었다. 유방이 죽은 뒤 황후 여씨(呂氏)와 그 일족에 의한 궁정정치의 일시적 혼란이 있었으나, 문제(文帝) ·경제(景帝)의 시기에 한왕조의 지배체제가 안정을 되찾게 되자 제후왕의 봉토삭감 정책이 취하여져, BC 154년에 일어난 오초 7국(吳楚七國)의 난 후에 경제는 제후왕의 세력을 삭감하였으며, 무제(武帝) 때 제후왕은 봉국에 대한 통치의 실권을 완전히 잃어 군국제는 내용면에서는 군현제와 똑같은 것이 되어, 한왕조의 중앙집권적 전제통치의 체제가 완성되었다. 한편, 무제 시대에 한제국은 대외적으로 크게 영토를 확대하였다. 북방의 흉노에 대하여 초기에는 유화정책을 취했으나, 여러 차례 원정을 실시하여 그 세력을 고비사막 이북으로 물리쳤다. 동방으로는 한반도에까지 진출하여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하고, 또 남방으로도 출병하여 한나라의 영토는 안남에까지 미치어, 일남군(日南郡) 등의 9개군을 설치하였다. 서방에서는 장건(張騫)의 원정을 계기로 서역(西域) 제국을 복속시키고, 중국과 서방과의 교통로인 이른바 ‘실크로드’가 개척되었다. 이와 같이 무제의 치세는 사상 최대의 대제국이 건설된 전성기였으나, 반면에 제국(帝國)의 모순이 표면화하기도 하였다. 특히 대규모의 원정, 토목사업, 궁정의 사치 등으로 국가재정의 파탄을 초래하자 이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증세(增稅), 화폐제도의 개선, 소금 ·철 ·술의 전매제, 균수법(均輸法)·평준법(平準法)에 의한 상업관영(商業官營) 등의 재정정책이 취하여졌다. 이 정책은 재정의 불균형을 구하는 효과는 있었지만, 주로 농민에게 과중한 부담이 되어 사회적 모순이 심화되었다. 따라서 소제(昭帝)·선제(宣帝) 시대에는 지방통치를 중심으로 한 내정의 안정에 힘을 기울이게 되었다. 한편, 무제의 장기에 걸친 독재적 통치기간 중에 3공(公)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정부 기관이 명목화하게 되고, 황제 측근자들이 정치의 실권을 잡는 경향이 생겼다. 특히 원제(元帝) 이후는 외척(外戚)·환관(宦官) 등 근신(近臣)이 항상 국정의 실권을 잡게 되어 궁정정치는 급속히 부패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외척(外戚) 왕망(王莽)이 8년에 평제(平帝)를 독살하고 제위(帝位)에 올라, 국호를 신(新)이라 하고 한왕조는 일단 멸망하였다. 왕망은 《주례(周禮)》에 기록된 이상화된 주나라의 여러 제도를 현실화하려는 공상적이며 졸속한 개혁을 단행하였으므로, 정치적 ·사회적 모순이 폭발하고, ‘적미(赤眉)’ 등의 농민집단과 호족(豪族) 세력의 반란에 의하여 재위 15년 만인 22년에 멸망하였다. 왕망 말기 반란의 지도자층 가운데서, 경제(景帝)의 6대 자손인 유수(劉秀)가 남양(南陽:河南) 호족연합의 지도자로서 두각을 나타내어, 농민 집단이나 호족의 자립세력을 평정하고, 25년 뤄양[洛陽]을 수도로 하여 후한(後漢)을 재건하였다. 그가 곧 광무제(光武帝)이며, 유교를 국교로서 확립시키고 군병(郡兵)을 폐지하는 등의 개혁으로 통일제국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한나라는 명제(明帝)의 치세부터 재차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취하여 북방으로는 북흉노를 압박하고, 화제(和帝) 때에는 한제국(漢帝國)의 지배권이 파미르고원을 넘어, 카스피해(海) 이동에 있는 동서 투르키스탄의 50여 개의 서역국가군(西域國家群)까지 확대되었다. 그러나 화제 이후의 황제는 어려서 즉위하였을 뿐만 아니라 단명하였으므로, 또다시 외척과 환관이 권력을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경향에 대하여 기골 있는 관료나 학자의 일파가 환관의 권력 독점에 대한 비판을 전개하였지만, 두 번에 걸쳐 탄압을 당하였다. 그 사건을 ‘당고(黨錮)의 옥(獄)’이라 하며, 그 후 궁정정치는 혼란을 거듭하고 후한왕조는 소농층(小農層)의 몰락, 호족세력의 발전 등의 사회적·정치적 과제에 대처하는 통치 능력을 상실하였다. 호족은 전한시대부터 사회적 세력을 확대하고, 후한의 재건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으므로 후한은 호족의 정권참가로써 지탱되고 있었다. 유교 국교화의 강화도 호족층이 자체결합의 근거를 유교에 구하였던 것과 관계가 있다. 그들은 효렴(孝廉) 등의 관리임용제도를 통하여 중앙관료에의 길을 확보하였으며, 지방에서는 소유지를 확대하여 소농층을 지배하에 편입하였다. 그 결과 황제통치의 기반인 농민층은 축소되고 호족층에 대한 국가의 통제력이 감퇴되었다. 이와 같은 정치적·사회적 모순의 누적 끝에 일어난 것이 황건(黃巾)의 난으로서, 도교(道敎)의 시초인 태평도(太平道)의 주창자 장각(張角)이 수령이 되어, 184년 빈농을 중심으로 하는 대규모의 농민반란을 일으켰다. 황건의 난 진압과정에서, 각지에 정치적·군사적 자립세력이 호족세력과 결탁하여 급격히 성장하였다. 그 중의 한 사람인 원소(袁紹)가 궁정의 환관을 절멸시켰으나, 그 후로는 원소·동탁(董卓)·손책(孫策)·조조(曹操)·유비(劉備) 등의 군웅이 할거함으로써, 후한 제국은 완전히 분열되었다. 후한 최후의 황제인 헌제(獻帝)를 옹립하여 하북(河北)을 지배하던 조조의 아들 비(丕)는 220년, 헌제를 강박하여 제위를 물려받고, 위(魏)왕조를 창시함으로써 후한은 멸망하고, 3국시대가 시작되었다.
7.삼국시대 [三國時代] : 중국 후한(後漢)이 멸망한 후 위(魏) ·오(吳) ·촉한(蜀漢) 등 3국이 정립(鼎立)했던 시대. 184년 황건적(黃巾賊)의 난이 일어나자, 후한 왕조의 권위는 붕괴하여 동탁(董卓)이 뤄양[洛陽]으로 입성하여 환관(宦官)을 주멸하고, 황제의 폐위를 감행하려고 하였다. 이 때문에 동탁 토벌의 군이 각지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산둥[山東]에 있던 조조(曹操)도 189년에 군사를 일으켜 황건적을 격파하고 동탁을 토멸하여 후한의 헌제(獻帝)를 옹립해서 기주목사(冀州牧使) 원소(袁紹)와 화북지방을 양분(兩分)하였다. 양자(兩者)는 202년 관도(官渡)에서 자웅을 결하였으나, 이 싸움에서 승리한 조조는 화북지방의 지배권을 거의 확립하였다. 한편, 형주목사(荊州牧使) 유표(劉表)에게 식객(食客)으로 있던 유비(劉備)는, 현신(賢臣) 제갈량(諸葛亮)의 협력을 얻어 형주를 빼앗아 손에 넣고 오(吳)의 손권(孫權)과 동맹하여 조조의 남하를 저지하였으며, 211년에는 익주(益州)를 공략하여 이 지방을 빼앗았다. 그 후 오(吳)의 손권은 유비와 싸워서 형주를 손에 넣었으며, 거의 양쯔강[揚子江]의 중 ·하 유역을 세력하에 두었다. 220년 조조의 아들 조비(曹丕)는 후한의 헌제를 강압하여 제위를 양위케 하고, 뤄양에 도읍하여 위국(魏國)이라 칭했다. 그 전년에 한중왕(漢中王)을 호칭하던 유비는, 한의 정통을 계승한다고 칭하여 성도(成都)에 도읍하고, 한제(漢帝) 또는 촉한제(蜀漢帝)라 칭하였다(221). 손권은 처음에 위의 오왕(吳王)으로 봉해져 있었으나, 222년에는 스스로 연호(年號)를 세우고, 또한 229년 오제(吳帝)의 제위에 올랐기 때문에, 여기에 3국의 분립이 확정되었다. 3국 가운데 화북(華北)에 있던 위는 병호제(兵戶制) ·둔전제(屯田制) ·구품관인법(九品官人法) 등을 실시하여, 군사적 ·경제적 기초를 공고히 함으로써 가장 강력한 국가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촉한은 국토도 좁고 가장 약하였으나, 한의 정통을 계승한 것으로서 중원의 회복을 뜻하여, 수차에 걸쳐 위에 도전하였다. 그 후 위에서는 사마 의(司馬懿)가 중심이 되어 이를 격퇴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사마씨가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으며, 그의 아들 사마 소(司馬昭)는 263년 촉한을 멸망시킨 공적으로 진왕(晉王)에 봉해졌으며, 265년에는 그의 아들 사마 염(司馬炎)이 위제(魏帝)를 강압하여 제위를 양위받고 진(晉)나라를 세웠다. 이 사람이 서진(西晉)의 무제(武帝)이다. 무제는 280년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재차 중국을 통일하였다.
8.위진남북조 [魏晉南北朝] : 중국 역사상 후한(後漢)이 멸망한 다음 해부터 수(隋)의 문제(文帝)가 진(陳)을 멸망시키기까지(221∼589)의 시대. 진(秦)·한(漢)과 수(隋)·당(唐)의 두 통일기를 잇는 정치적 분열시기이고, 문화적으로는 다양하면서도 통일성이 있는 특유한 성격을 지닌 시대이다. 위(魏)는 촉(蜀)·오(吳)와 더불어 삼국이라 하며, 진(晉)은 뤄양[洛陽]에 도읍을 한 서진(西晉)과, 5호16국(五胡十六國)의 난으로 중원(中原)을 잃고 건강(建康:吳의 建業, 지금의 南京)에 도읍을 한 동진(東晉)으로 나뉜다. 그 뒤 송(宋)·남제(南齊)·양(梁)·진(陳) 등 4국의 남조(南朝)가 건강에 도읍했으며, 이들 남조와 오(吳)·동진(東晉)을 합하여 육조(六朝)라 하는데, 이 시대 전체를 지칭하기도 한다. 강북(江北)의 분열을 수습한 서부 선비탁발부(鮮卑拓跋部)의 북위(北魏:後魏·元魏)가 439년 태무제(太武帝) 때 강북을 통일하였다. 6세기 중반 북위는 동위(東魏)·서위(西魏)로 갈리고, 이어 동위는 북제(北齊), 서위는 북주(北周)가 되었으며, 후량(後梁)·진(晉)과 더불어 잠시 이들 4국의 대립이 전개되었다. 그뒤 북주가 북제를 멸망시켜 북조를 통일하였고 북주를 찬탈한 수(隋)에 이르러 남북조시대는 끝이 났다. 이로써 후한 멸망 이후 350여 년 동안 위(魏)와 진(晉)을 정치기반으로 한 남북조의 분열시대는 종지부를 찍고, 수·당·송(宋)·원(元)·명(明)·청(淸)으로 이어지는 통일왕조시대를 맞게 되었다.
9.수 [隋] : 중국의 통일왕조(581∼618). 양견(楊堅:文帝)이 581년 북주(北周)의 정제(靜帝)로부터 양위받아 나라를 개창하고, 589년 남조(南朝)인 진(陳)을 멸망시켜 중국의 통일왕조를 이룩하였다. 문제 ·양제(煬帝:廣) ·공제(恭帝:侑)의 3대 38년이라는 단명 왕조였으나, 남북으로 갈라져 있던 중국을 오랫만에 하나의 판도에 넣어 진(秦) ·한(漢)의 고대 통일국가를 재현하였고, 뒤를 이은 당(唐)이 중국의 판도를 더욱 넓혀 대통일을 이룩하는 데 기반이 되었다는 점에서 존립의의가 크다. 양견은 북주 황실과 인척관계임을 기화로 세력을 확대하였다. 즉 양견의 처는 북주의 주국(柱國:제2勳位)이던 독고 신(獨孤信)의 딸이었고, 그 처의 언니는 북주 명제(明帝)의 황후였으며, 양견 자신의 딸은 북주 선제(宣帝)의 황후임과 동시에 정제(靜帝)의 어머니였다. 양견은 북주에서 그의 전권(專權)에 맞서는 위지형(尉遲鍈) 등 반대세력을 물리치고 상국(相國:首相) ·수왕(隨王)이 되어, 그의 사위인 정제로부터 선양(禪讓)이라는 형식으로 쉽게 북주를 빼앗아 수조(隋朝)를 개창하였다. 양견을 수나라의 고조(高祖)라고도 하는데, ‘隋’란, 원래 양견이 수왕(隨王)이 되었던 데서 연유한 것으로서 ‘隨’자에 ‘착(贊)’이 있으면 뛴다는 뜻으로 왕조가 안정되지 않는다 해서‘隋’로 하였다고 한다. 문제는 587년 그의 보호국으로 강릉(江陵:湖北省)에 도읍을 정하고, 남조(南朝) 양(梁)의 황실 자손이 다스리던 후량(後梁)을 멸망시켰으며, 589년 그의 차남인 진왕(晉王) 광(廣:煬帝)을 행군원수(行軍元帥)로 삼아 남조의 진(陳)을 멸망시켜 통합함으로써, 동진(東晉)의 남천(南遷) 이래 317년에 걸쳤던 중국 분열에 종지부를 찍었다. 문제는 내정에 힘을 쏟아 재정적으로는 긴축정책(緊縮政策)을 취하였으며, 오랫동안 남북으로 갈라져 있던 중국의 통일을 추진하였다. 대외적으로는 장성(長城)을 축조하여 터키계(系) 돌궐(突厥)의 침입에 대비하였으며, 598년(고구려 영양왕 9)에는 요서(遼西)를 침범한 고구려를 정벌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황실에서는 문제의 장남 용(勇)이 황태자가 되었으나, 진(陳)을 토벌하는 데 큰 공을 세운, 간지(奸智)가 넘치는 진왕 광이 형인 용을 대신해 황태자가 되고 뒤에 즉위하여 양제(煬帝)가 되었는데, 문제는 아들 양제에 의하여 살해되었다고 한다. 양제는 문제의 유업(遺業)을 이어 중국의 남북을 잇는 대운하(大運河)를 완성하고, 남북의 통일을 추진하여 동도(東都:東京)를 뤄양[洛陽]에 조성하고, 토욕혼(吐谷渾)과 돌궐을 토벌하였다. 또한 611∼614년 돌궐과 손을 잡을 우려가 있었던 고구려에 3차에 걸쳐 대군을 파견하여 원정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양제는 중국 통일 후 얼마되지 않았음에도 너무 서둘러 대대적인 토목공사와 원정을 속행하였기 때문에, 백성들은 모든 면에서 과중한 부담으로 고통을 받았다. 특히 고구려 원정 기지에 가까웠던 산둥[山東] 지방 백성들은 그 고통이 더욱 심하였고, 게다가 이 지방은 옛 북제(北齊)와 북주(北周)로 이어지는 나라의 영토여서 북주를 멸망케 한 수왕조에 대한 반감도 높아서, 반란사건도 이 지역에서 가장 많이 일어났다. 613년 제2차 고구려 원정 도중에 일어났던 양현감(楊玄感)의 반란은 2개월 만에 진압되었으나, 그 후 수나라는 본격적인 반란기에 들어갔다. 또한 양현감의 반란이 있을 무렵 옛 남조(南朝)의 영토 안에서도 백성들의 불만이 폭발하여 반란은 삽시간에 각 지방으로 확대되어 갔다.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도 양제는 강도(江都:揚州)에 행행(行幸)하는 등 사치스러운 생활에 빠져 있었다. 617년 타이위안[太原:山西省] 유수(留守) 이연(李淵)은 내란이 격화하여 양제가 있던 강도가 고립되자, 타이위안의 호족들을 끌어모아 군사를 일으켜 장안(長安)을 탈취하고 양제의 손자인 유(侑:恭帝)를 옹립하였다. 그러나 618년 양제가 강도에서 우문화급(宇文化及)에 의하여 살해되자, 이연이 공제로부터 양위받아 스스로 즉위, 당조(唐朝)를 창건함으로써 수나라는 멸망하였다. 당나라가 세워진 뒤에도 양제의 총애를 받던 왕세충(王世充)은 공제의 동생인 월왕(越王:愼)을 옹립, 수나라의 대통을 잇게 하였으나, 619년 그를 폐위하고 스스로 즉위, 정국(鄭國)을 세움으로써 수나라의 황실은 그 맥이 완전히 끊겼다.
10.당 [唐] : 수(隋)나라에 이은 중국의 왕조. 618년 이연(李淵)이 건국하여 907년 애제(哀帝) 때 후량(後梁) 주전충(朱全忠)에게 멸망하기까지 290년간 20대의 황제에 의하여 통치되었다. 중국의 통일제국(統一帝國)으로는 한(漢)나라에 이어 제2의 최성기(最盛期)를 이루어, 당에서 발달한 문물(文物) 및 정비된 제도는 한국을 비롯하여 동(東)아시아 여러 나라에 많은 영향을 끼쳐 그 주변 민족이 정치 ·문화적으로 성장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한국의 경우 삼국체제(三國體制)가 붕괴되고 정치세력 판도가 크게 바뀌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중기 안녹산(安祿山)의 난(亂) 이후 이민족(異民族)의 흥기(興起)와 국내 지배체제의 모순이 드러나 중앙집권체제의 동요는 물론 사회 및 경제적으로도 불안이 가중되어 쇠퇴의 길을 밟았다. 수나라 말기 내란이 한창이던 617년, 진양(晉陽:太原)에서 반란진압을 하고 있던 태원 방면 사령관 이연은 둘째아들 세민(世民) 등과 더불어 거병(擧兵)하여 장안(長安)을 점령하고, 618년 수(隋)의 양제(煬帝)가 반란군의 우문화급(宇文化及)에게 살해되자 양제의 손자 공제(恭帝)를 협박하여 선위(禪位)받아 즉위하고 국호를 당이라 하였다. 건국 초에는 각지에 군웅(群雄)이 할거하고 있었으나, 차례로 이들을 평정하고 천하를 통일하였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최대의 공로자는 세민이었는데, 형이며 태자(太子)인 건성(建成)과 동생 원길(元吉)이 시기하자, 세민은 이들 형제를 죽이고 626년 제2대 황제에 올랐다. 이를 ‘현무문(玄武門)의 난’이라 하며, 세민이 곧 태종(太宗)이다. 태종은 즉위하자 최대의 외적(外敵)이던 돌궐(突厥)을 평정하였으며, 주변의 여러 종족도 조공(朝貢)하게 되어 국위(國威)를 크게 떨쳐서, 한(漢)나라를 능가하는 대제국(大帝國)이 되었다. 태종은 내치(內治)에도 힘써 치세 20여 년은 ‘정관(貞觀)의 치(治)’라고 하는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태종의 후광(後光)은 뒤를 이은 고종 때까지 미쳤으나, 고종이 말년에 황후를 폐하고 태종의 궁인(宮人)이었던 무씨(武氏:則天武后)를 황후로 세움으로써 이른바 ‘여화(女禍)’의 길을 열게 되었다. 무후는 고종에 이어 즉위한 자기 아들인 중종(中宗)과 예종(睿宗)을 폐하고 즉위하여 국호를 주(周)로 개칭[武周革命]하였으며, 중국 역사상 유일한 여제(女帝)로서, 재위 16년간은 악랄한 책략과 잔혹한 탄압의 공포정치가 계속되었다. 반대파의 쿠데타로 황제에 복위한 중종은 국호를 당으로 복구시켰으나 황후 위씨[韋后] 또한 실권을 쥐고 중종을 독살한 뒤, 권력을 휘두르는 등 무후시대의 정정(政情)이 재현되었다. 위씨 일파를 무력으로 무너뜨리고 예종을 복위시켜 당조(唐朝)를 명실공히 정상적인 궤도에 올려놓은 자가 이융기(李隆基), 즉 현종(玄宗)이다. 그는 정치를 쇄신하고 사회안정에 힘써서 ‘정관의 치세’에 비길 만한 ‘개원(開元)의 치세’를 열어 당의 최성기(最盛期)를 이루었다. 현종의 치세는 선천(先天) 1년, 개원 29년, 천보(天寶) 15년을 합쳐 45년간(712∼756)인데, 이 시기에 문화의 꽃이 만발하여 서울 장안(長安)은 명실공히 정치 ·문화의 중심지로서 태평성대를 누렸다. 그러나 번영은 궁중이나 상류층의 전유물일 뿐, 그 이면에는 균전제(均田制)의 모순이 격심해지고, 농민은 변경(邊境)으로 강제 출병(出兵)되고 중세(重稅)로 시달리는 등 현종 말기의 천보시대에는 당조 와해의 징조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오랜 통치에 권태를 느낀 현종은 양귀비(楊貴妃)를 얻어 연유(宴遊)를 일삼고 양귀비의 일족인 양국충(楊國忠)을 재상(宰相)으로 삼아 국사를 맡겼는데, 755년 평로(平盧) 등 3지구의 절도사(節度使)를 겸하고 있던 안녹산(安祿山)이 양국충의 제거를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켜 뤄양[洛陽]에 이어 장안을 점령하였다. 현종은 쓰촨[四川]에 피란하고 그 도중에 양귀비는 살해되었다. 안녹산의 부장(部將) 사사명(史思明)에 이어진 이 반란은 9년 동안 계속된 끝에 이민족(異民族)의 도움으로 겨우 그 예봉(銳鋒)을 꺾을 수 있었으나, 조정측에서 완전히 평정할 힘은 없었다. 이 반란으로 균전법을 기반으로 하였던 고대(古代) 중국사회는 몰락의 첫발을 내디뎠으며, 반란 후 당조(唐朝)의 정치체제도 일변하였다. 반란에 가담한 부장들은 허베이[河北] ·산둥[山東]을 점거, 조정으로 하여금 절도사의 지위를 승인하게 하였다. 또한 반란 중에 조정에서 전국 곳곳에 절도사를 둠으로써 번진체제(藩鎭體制)가 전국에 미쳐 조정 자체가 하나의 번진으로 격하되는 듯한 경향마저 띠게 되었다. 번진의 절도사란 몇 개의 군진(軍鎭)을 관할하는 지휘관인데, 현종 때 모병제(募兵制)가 실시되자 많은 병사를 마음대로 모집하여 강력한 세력을 가지게 되어 대종(代宗) ·덕종(德宗) 때는 이들의 횡포와 반란에 시달려 덕종은 조명(朝命)을 거역하는 허베이 제진(諸鎭)의 토벌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헌종(憲宗)은 절도사의 권한을 축소함으로써 한동안 중앙집권(中央集權)에 성공하였으나, 중앙집권의 강화책, 특히 재정강화는 일반민중에 가혹한 부담을 주어 숱한 유민(流民)이 생겼다. 또한 조세의 중앙집중은 일반 농민뿐만 아니라 지주호족층(地主豪族層)에게도 고통을 주고 번진병사의 대우를 악화시켜 절도사와 병사 간의 분쟁 및 지주 ·농민 ·유민을 주체로 한 반항은 859년 구보(뿡甫)의 난을 일으켰고, 868∼875년의 방훈(龐勛)의 난에 이어 875∼884년에는 황소(黃巢)의 대란을 겪었다. 물론 이 반란도 실패로 끝났으나, 이 전란으로 강회(江淮)의 곡창지대가 황폐되어 국가재정은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다. 또한 중앙의 통제력도 약화되어 조정 내부는 환관파(宦官派)와 재상파(宰相派)로 갈려져 각기 외부의 번진을 자파 세력으로 끌어들여 싸우던 중 재상파와 내응한 황소의 구장(舊將) 주온(朱溫:朱全忠)이 장안에 들어가 소종(昭宗)을 살해한 다음 애종(哀宗)을 폐위시키고, 907년 스스로 즉위하니 당은 이로써 20대, 약 290년 만에 멸망하였다.
11.송 [宋] : 중국 역사상 당(唐) ·오대십국(五代十國)에 이어지는 왕조(960∼1277). 처음 카이펑[開封]에 도읍하였으나 1126년 정강(靖康)의 변(變)으로 강남(江南)으로 옮겨 임안(臨安:杭州)에 천도하였다. 카이펑시대를 북송(北宋), 임안시대를 남송(南宋)이라 한다. 오대(五代) 유일의 명군인 후주(後周)의 세종(世宗)이 죽은 뒤 그의 부장(部將)인 조광윤(趙匡胤:太祖)이 근위병(近衛兵)의 추대를 받고 천자의 자리에 올라 960년 송나라를 건국하였다. 그는 오대 부장들의 횡포에 혐오를 느껴 제위(帝位)에 오르자 군인을 억압하고 문관을 우대하여 문치주의를 채택하였다. 한편, 모든 권한을 중앙정부로 집중시켜 독재권 확립을 도모하고 다음의 태종도 이 정책을 답습하여 송나라의 기초는 이 2대 왕 사이에 이루어져 일단은 독재정치기구가 확립되었다. 이 독재제도는 그 후 청나라 때까지 이어졌다. 독재정치의 기반은 강력한 군대와 치밀한 관료제에 의하여 유지되는 것이나, 당초 군인을 억압한 결과 군대가 약화되었으므로 그 수를 늘려 독재권을 지속시키려 하였다. 군사비가 재정의 80 %를 차지하게 되어 종래의 양세(兩稅) 수입으로는 감당할 수 없어 차(茶) ·소금 ·술 ·백반 등 일용필수품의 전매수입으로 방대한 군사비를 염출하려 하였다. 이 신경제정책이 안으로는 밀매자(密賣者)를 자극하여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반란의 온상을 형성케 하였다. 밖으로는 외부민족을 자극하여 민족의식에 눈뜨게 하고 강력한 국가를 형성하여 송나라에 대항케 하는 결과가 되었다. 송나라 300년의 역사는 이 두 가지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태조시대에 강남(江南) ·쓰촨[四川]에 할거하던 여러 나라는 멸망하여 천하가 거의 평정되었으나 산시[山西]의 북한(北漢)은 거란(契丹)의 원조가 있어 그의 평정은 태종시대로 승계되었다. 때마침 거란의 북한에 대한 태도가 냉각된 것을 안 태종은 일거에 북한을 멸망시키고 그 여세를 몰아 후진(後晉) 때 거란에 넘겨준 연운(燕雲) 16주를 회복하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다음 진종(眞宗) 때, 거란이 대거 침입해 왔으나, 전연(쓱淵)에서 맹약을 맺고 은(銀) ·비단 등의 세폐(歲幣)를 주어 화목하였으므로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 때문에 평화가 계속되어 경제계는 호경기를 맞이했고, 국가 재정은 호전하였다. 진종은 전연에서의 굴욕적인 외교를 거짓 꾸미고, 한편으로는 천자의 위엄을 과시하고자 풍부한 재정을 이용하여 일찍이 시황제나 한나라 무제가 행한 산둥[山東]의 명산인 타이산[泰山]에 제례를 지내 막대한 경비를 소모하였으나 그래도 재력은 아직 여유를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다음 인종(仁宗) 때는 서하(西夏)와 수년간에 걸쳐 전쟁을 치렀다. 서하는 송나라의 소금 전매제의 확립으로 자국산 청백염(靑白鹽)의 수출이 금지되어 이미 태종 때부터 송나라에 반항하다가 인종 때 독립을 선언하고 대대적으로 침입하였다. 이 전쟁으로 서하도 큰 타격을 입었으나 송도 전쟁 뒤 경제공황에 빠져 재정은 적자에 허덕이고 실업자가 속출하여, 경제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동남지방에도 반란이 일어 바야흐로 위기에 직면하였다. 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하여 인종의 뒤를 이은 신종(神宗) 때는 왕안석(王安石)을 등용하여 신법(新法)을 실시하였다. 한편 서하와의 전쟁은 농민의 중산계급을 몰락시켜 부호와 빈민이 대립하는 근세적 사회발전에 박차를 가하였다. 왕안석의 신법의 목적은 국가재정의 재건과 함께 빈농이나 영세상공업자를 구제하여 중산계급을 육성하는 데 있었다. 신법은 왕안석의 재임중 상당한 성과를 올려 최소한 국가재정은 적자에서 흑자로 전환되고 송나라의 위기는 해소되었다. 그런데 이 신법은 지주 ·관료 ·호상(豪商) ·종친 등 기득권을 가진 계급의 이익을 침해하였으므로 그들 계급의 강력한 반대를 받았다. 여기에서 신 ·구 양당의 분쟁이 발생하였고, 신종이 죽자 구법당(舊法黨)의 사마 광(司馬光) 등이 등용되어 신법은 폐기되고 인종시대의 구법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구법당에게는 뚜렷한 정책방향이 없어 정치는 혼란에 빠지고, 신종의 아들 철종(哲宗)이 성장하여 친정(親政)을 행하게 되자 구법당을 물리치고 신법당 관료를 등용하였다. 다음 휘종(徽宗) 때, 중도정치를 행하고자 한때 구법당의 관리를 함께 등용한 일도 있으나 결국 북송 말기까지 신법당이 정국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북송 말의 신법당 관리는 구법당 관리와 별로 다를 것이 없어 당쟁이 끊이지 않다가 마침내 만주에서 일어난 금나라(여진족)에 의하여 1127년 멸망하였다(靖康의 變). 남송시대에는 신법당에 의하여 폐출되었던 철종의 후비(后妃) 맹씨(孟氏)가 고종(高宗)의 즉위를 인정하였던 관계로 구법당계의 관리가 많이 등용되었다. 남송이 강남 땅으로 쫓기자 정치가 ·군인 ·학자 사이에는 주전론(主戰論)이 강하였으나 문약한 송인(宋人)은 도저히 여진족에게 당할 수가 없었다. 싸울 때마다 패하고 군사비는 늘어나 백성은 중세(重稅)에 허덕이고 반란이 그치지 않았다. 그리하여 고종 때, 재상(宰相) 진회(秦檜)는 악비(岳飛) 등 군벌을 누르고 금나라와 화의하였으나 금나라에 정변이 일어나 화평은 영속되지 못하였다. 두 나라의 화평은 자주 깨져, 몇 번이나 평화조약이 체결되었고, 남송 사회는 항상 전시상태에 놓여 있어 군비를 마련하기 위한 지폐가 남발되었다. 이 때문에 물가는 앙등하고 무거운 세금과 함께 백성은 도탄에 빠지고 더구나 북송시대에는 서방에서 유입되던 은(銀)이 남송시대에는 거꾸로 서방으로 유출되어 자금의 결핍으로 산업은 위축 ·침체되고 실업자가 증대하여 여러 곳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한편 원풍(元豊)의 관제개혁(官制改革:1078∼85)으로 재상의 권한이 강화되어 남송시대에는 진회 ·한탁주(韓祗胄) ·사미원(史彌遠) ·가사도(賈似道) 등이 전권(專權)을 휘둘렀고, 이에 반하여 천자의 독재권은 형식화되어 통제력을 상실함으로써 관기(官紀)는 문란해졌다. 정치 ·경제 ·사회 등 모든 것이 붕괴하려고 할 때 몽골군이 침입하였으므로 송나라는 마침내 그 무력 앞에 멸망하였다.
12.원 [元] : 13세기 중반부터 14세기 중반에 이르는 약 1세기 사이, 중국 본토를 중심으로 거의 동(東)아시아 전역을 지배한 몽골족의 왕국(1271∼1368). 13세기 초, 칭기즈칸에 의해 구축된 몽골제국(蒙古帝國)은 유러시아 대륙의 북방초원에 정치적 기지를 두고, 대륙남방의 농경지대를 그 속령(屬領)으로 삼아 지배한 유목국가(遊牧國家)로, 속령으로부터의 가혹한 수탈과 부정기적인 약탈로써 경제적 욕구를 충족하였다. 그러나 유목제왕(遊牧帝王)과 그를 둘러싼 유목봉건영주층(遊牧封建領主層), 또는 유목민 지배층과 농경민 피지배층 사이에 정치적 ·경제적 모순이 발생하여 제국은 끊임없이 동요되었다. 이와 같이 유목제국에 잠재된 근본적인 결함을 극복하려고 유목과 농경이 공존할 수 있는 중간의 아건조지대(亞乾燥地帶)에 새로운 정치적 기지를 찾아서 강대하고 집권적인 제국(帝國)을 영위하려 한 것이 칭기즈칸의 손자인 쿠빌라이칸[世祖]이었다. 그는 형 몽케칸[憲宗]를 계승하려 하였던 막내동생 아리크부카를 제거하고 북방의 초원에 웅거한 유목봉건세력의 진출을 막아, 수도를 몽골 고원의 카라코룸에서 화북(華北)에 가까운 상도(上都)와 화북 안에 있는 대도(大都:北京)로 옮겨 화북의 건조농경지대를 중심으로 한 중국식 집권적(集權的) 관료국가의 확립을 꾀하였다. 그가 시도한 정치적 사업이 거의 완성단계에 이른 1271년 《역경(易經)》의 ‘大哉乾元’을 따서 국호를 대원(大元)이라 하고 중국 역대왕조의 계보를 잇는 정통왕조임을 내외에 선언하였다. 이어 74년에서 79년에 걸쳐 화이허강[淮河] 이남 지역에 있던 남송(南宋)을 평정해서 명실공히 중국전토를 영유하게 되었는데, 이에 멈추지 않고 일본 ·베트남 ·미얀마 ·자바 등지에도 침략군을 보냈다. 원나라는 쿠빌라이칸이 다스리는 동안에 동아시아 전역의 대제국이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쿠빌라이칸은 몽골제국의 종주권(宗主權)도 계승한 것이라며 서방의 한국(汗國)들(킵차크 ·차가타이 ·오고타이 ·일 한국 등) 위에도 군림하려 해서, 유목적 전통을 고집하는 한국들은 그를 마땅치 않게 여겨 원나라의 종주권을 부인하고 대항하였다. 특히 오고타이한국의 왕 카이두는 이웃 차가타이 ·킵차크 한국의 왕들을 설득해서 반(反)쿠빌라이 동맹을 결성하여 원나라 북서변의 요지를 공략하여 쿠빌라이 정권을 위협하였다. 항쟁은 쿠빌라이칸이 죽은 뒤에도 계속되었는데, 1301년 카이두가 사망함으로써 전운(戰雲)이 가셨다. 이로부터 원나라는 한국들과 친교를 맺고 제국(帝國)의 종주권을 회복하였다. 아시아 전역에는 이른바 ‘몽골족 지배하의 평화’가 찾아와 동 ·서의 문물이 자유롭게 교류하게 되어 국제무역이 번창하였다. 그러나 원나라 내부의 국정이 해이해지기 시작하여 사회적 여러 모순들이 심화되어 갔다. 이에 편승해서 여러 지방에서 크고 작은 폭동이 일어났는데도 중앙에서는 권신(權臣)들이 정쟁(政爭)에 여념이 없었다. 폭동은 확대되어 한족(漢族)에 의한 민족적 반란으로까지 발전하여 주원장(朱元璋:洪武帝)에 의한 명조(明朝)정권이 출현하였다. 68년 원나라는 수도 대도를 명나라의 군대에 빼앗겨 순제(順帝:토곤 테무르)가 몽골 본토에 쫓김으로써 원나라의 중국지배는 끝이 났다. 그뒤 몽골본토에 터를 잡은 원군은 얼마 동안 명군과 항쟁을 계속하였으나 쇠퇴하여 내분(內紛)으로 소멸되었다. 이를 북원(北元)이라 한다.
13.명 [明] : 한족(漢族)이 몽골족이 세운 원(元)나라를 멸망시키고 세운 통일왕조(1368∼1644). 한족의 지배를 회복한 왕조로, 뒤에 만주족(滿洲族)이 세운 청(淸)나라에 멸망되었다. 명대(明代)는 중국이 근대화하는 시기와 직접 접속되는 시대로서 중요한 성장 ·변혁기였다. 14세기 중엽, 몽골지상주의(至上主義)를 표방하고 약 100년에 걸쳐 압정(壓政)을 펴온 원조에 항거한 한족 중 가장 큰 집단을 이루었던 홍건적(紅巾賊)에 가담하여 두각을 나타낸 주원장(朱元璋)은 백련교도(白蓮敎徒)의 뒷받침으로 세력을 펴 양쯔강[揚子江] 하류의 곡창지대를 점령하여 군웅(群雄)을 정복하고, 1368년 금릉(金陵:南京)에서 즉위하여 국호를 ‘명’, 연호를 ‘홍무(洪武)’라 하였다. 그가 명의 태조(太祖:洪武帝)이며, 처음으로 일세일원제(一世一元制)를 채택하고 시정(施政)의 기본방침을 ‘한족의 부흥’으로 삼았다. 같은 해 가을에는 원나라의 수도인 대도(大都:北京)를 함락하여 원의 세력을 북쪽으로 몰아내고, 71년 쓰촨[四川]을 평정하여 전국토를 정복함으로써 사상(史上) 강남(江南)에서 일어나 전국토를 통일한 최초의 왕조가 되었다. 또한 외몽골로 쫓겨 북원(北元)을 세운 몽골민족의 재기(再起)에 대비하여, 다시 둥베이[東北]의 요동(遼東)을 경략하여 몽골과 고려의 연결을 단절하고, 81년 윈난[雲南]을 평정하여 몽골과 티베트의 제휴를 막았다. 88년 남옥(藍玉)을 파견해 지금의 노몬한 부근에서 몽골군을 대파하였고, 그 뒤에도 거듭 이를 경략하여 북원을 쇠망시켰다. 이와 같은 건국사정으로 그의 행정은 몽골적 요소의 제거와 한족 사회에의 적응을 목표로 하고 권력이 일부 관료에 집중하는 것을 피하여 호유용(胡惟庸) ·남옥 이하 노련한 공신(功臣)들을 대거 숙청(胡藍의 獄)하였다. 또한 중앙행정관청인 이(吏) ·호(戶) ·예(禮) ·병(兵) ·형(刑) ·공(工)의 6부를 각각 독립시켜 이를 황제직속으로 하였고, 군사는 오군도독부(五軍都督府), 감찰은 도찰원(都察院)을 거쳐 황제에 직결되도록 하는 등 3권을 분립시켰다. 지방에 있어서도 행정은 포정사사(布政使司), 군사는 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 감찰은 안찰사사(按察使司)에서 관장하게 하여 3권이 동등한 권한으로 중앙에 직속되었다. 이와 함께 궁중제도도 간소하게 정비하고 특히 환관세력의 팽창을 억제하였다. 이로써 송(宋)나라 이래의 황제 독재권은 더욱 강화되고 율령(律令) ·병제(兵制)도 모두 이러한 방향으로 개정되었다. 당(唐)나라 때 집대성된 율령을 형식 ·내용 등에서 면목을 일신하여 《명률(明律)》 《명회전(明會典)》을 공포, 근대법전의 시행기까지 존속된 법전의 기초를 만들었다. 병제는 당나라 이래의 모병제(募兵制)를 개선하여 징병할 군호(軍戶)를 정하고 위소제(衛所制)를 채택하였다. 이에 따라 도지휘사사 밑에 전국의 요소(要所)에 위(衛) ·소(所)를 설치, 여기에 군호의 장정을 분속시켰는데, 1위의 군인은 5,600명이고, 1위는 5개의 천호소(千戶所), 천호소는 10개의 백호소(百戶所)로 구성되어 이를 지휘사 ·천호 ·백호 등이 관장하였다. 그러나 이 새로운 제도 가운데 특징을 이룬 것은 몽골의 남침에 대비해서 태조의 아들 등 24명을 왕으로 삼아 요지(要地)에 배치하여 이를 봉건제후(封建諸侯)와 같이 대우한 일이다. 태조는 이들을 교묘하게 조정하여 일단 혈연에 따른 정권보전은 달성하였으나, 북변(北邊)의 왕들에게는 병권(兵權)도 부여하였기 때문에 그 세력이 강대해져서, 특히 베이징[北京]에 있던 넷째 왕자인 연왕(燕王)은 병력을 강화하여 그의 기반을 지방정권화하였다. 태조가 죽고 그의 손자 혜제(惠帝)가 16세로 즉위하여 중앙집권 강화책으로 왕들의 세력을 감축하기 시작하자 연왕은 반란(靖難의 變)을 일으켜 4년 뒤 즉위하였는데, 그가 성조(成祖:처음에는 太宗) 영락제(永樂帝)이다. 그는 대(對)몽골 전략상, 또한 전통적 적대세력의 중심지인 난징[南京]을 피해 베이핑[北平]을 베이징[北京]이라 개칭하여 천도하고 경제적 중심지인 강남지방과의 연결을 위해 대운하(大運河)를 개수하여 대규모 조운법(漕運法)을 확립, 재정적 기반을 굳혔다. 그러나 ‘정난의 변’에 대한 논공행상(論功行賞)에 따라 환관을 중용하여 밀정정치(密偵政治)를 시행하였기 때문에 이것이 뒤에 화근이 되었다. 그는 내란으로 동요된 외정(外政)을 바로잡기 위해 몽골 ·만주를 여러 차례 공략하여 헤이룽강[黑龍江]까지 위세를 떨쳤고, 구이저우[貴州]를 내지화(內地化)하였으며, 티베트 ·윈난을 정복하고 안남(安南:越南)을 병합하였으나, 큰 업적은 남해의 원정이었다. 1405∼24년 사이 정화(鄭和) ·왕경홍(王景弘)에게 선박 60척, 선원 3만을 주어 전후 6회에 걸쳐 인도양안(印度洋岸)에서 아프리카 동안(東岸)까지의 여러 나라에 파견하여 국위(國威) 선양과 무역진흥에 힘써 30개국에서 입공(入貢)하고 한인(漢人)들에게 해외를 보는 눈을 뜨게 하였다. 명나라의 기반은 이 2대 사이에 확립되어 15세기 중반 이후는 내정(內政)에 힘을 기울여 왕들의 세력 감축에 성공하였으나 외정에서는 수세(守勢)에 몰렸다. 1449년 몽골의 한 부족인 오이라트부(部)의 남침으로 친정(親征)에 나선 영종(英宗)이 포로가 되고(土木의 變), 수도도 포위되어 명신(名臣) 우겸(于謙)의 책략으로 멸망의 위기는 벗어났으나, 이후 장성(長城)을 수축하고 9변진(邊鎭)을 설치하여 다수의 병력을 배치하는 등 방위에 힘을 기울였다. 16세기에 들어서 즉위한 무종(武宗:正德帝)은 환관 유근(劉瑾)에게 전권(專權)을 맡김으로써 그의 치세는 내란으로 일관하였다. 다음의 세종(世宗:嘉靖帝)은 도교(道敎)를 광신하였기 때문에 여러 대에 걸쳐 축적한 국고를 탕진하여 재정궁핍 속에 30년간 알탄이 이끄는 몽골족에게 수도 근교까지 침탈되었고, 남동해안 지방에는 왜구(倭寇)가 횡행하여 ‘북로남왜환(北虜南倭患)’에 시달렸다. 16세기 말에 이르러 신종(神宗:萬曆帝)은 명조의 퇴세를 만회하기 위해 장거정(張居正)을 등용해 내정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는 전국적으로 토지를 측량 ·검사하고, 이미 지방에서 시행하던 전세(田稅)와 정세(丁稅)를 일원화하여 은납세법(銀納稅法:一條鞭法)을 확립해서 재정을 건전화하고 화이허강[淮河] ·황허강[黃河]의 치수공사를 진행하는 등 치적을 쌓았으나 시정 10년 만에 장거정이 죽자 환관을 중용하여 내정은 다시 문란해졌다. 이와 함께 발배(틋拜) ·양응룡(楊應龍)의 난 및 임진왜란에 따른 조선에의 원병(援兵)으로 국가재정이 악화되어 이를 광산개발에 의한 상세(商稅)의 증수(增收)로 보충하려 했으나 그것은 단지 주구(誅求)의 구실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이 당시 일어난 만주족(淸)의 정토비(征討費)로서 요향(遼餉)이라는 부가세를 두었으며 초향(剿餉) ·연향(練餉) 등 갖은 명목의 부가세를 징수함으로써 민폐는 극에 달했다. 한편 정계에서는 재야의 비판세력인 동림당(東林黨)과 정신(廷臣)과의 당쟁(黨爭)이 태자 책립문제로 첨예화하여 암흑의 권력투쟁 속에 내외정치는 파탄 직전에 이르렀다. 1627년 의종(毅宗:崇禎帝)이 즉위한 후 환관 위충현(魏忠賢) 일파를 제거하여 당쟁을 수습하였으나 기근농민의 반란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특히 산시[陝西]의 이자성(李自成) 등은 명나라의 수도를 함락, 의종이 자살함으로써 명나라는 멸망하였다(1644). 이자성은 급거 귀환한 명장(明將) 오삼계(吳三桂)와 청군에게 토멸되고, 명의 왕들은 청군에 항거하여 화중(華中) ·화남(華南)에서 싸웠으나, 61년 영명왕(永明王)이 버마에서 잡힘으로써 잔존세력의 항쟁도 종식되어 전국토는 완전히 청나라의 세력권이 되었다. 이 44∼61년 명의 잔존세력을 남명(南明)이라고 한다.
14.청 [淸] : 명(明)나라 이후 만주족(滿洲族) 누르하치[奴兒哈赤]가 세운 정복왕조(征服王朝)로서, 중국 최후의 통일왕조(1636∼1912). 만주인은 수렵 ·어로를 주된 생업으로 하는 퉁구스족의 일파로서 본래 여진(女眞) 또는 여직(女直)이라 불리었다. 그 일부는 12세기에 화베이[華北]로 진출하여 금(金)왕조를 세웠으나, 만주에 잔류한 대부분은 점차 정착농업을 영위하였으며, 명조 말기에는 해서(海西) ·건주(建州) ·야인(野人)의 3부로 나누어져 명나라의 간접통치를 받고 있었다. 명나라는 여진족의 여러 부족에 대하여 시종 분열정책을 취하였으나, 조선의 임진왜란(1592∼98)을 전후하여 만주에 대한 명나라의 통제력이 이완된 틈을 타서 건주좌위(建州佐衛)의 수장(首長) 누르하치가 여진의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 1616년 스스로 한(汗)의 위(位)에 올라 국호를 후금(後金)이라 하고, 선양[瀋陽]에 도읍하였다. 이 사람이 청의 태조이다. 명나라는 이를 제압하려 하였으나 오히려 사르후의 싸움에 대패하여(1619) 랴오허강[遼河] 동쪽을 잃었다. 이어 일어난 황타이지[皇太極:太宗]는 먼저 명과 조선의 연합을 막기 위해 두 번에 걸쳐 조선에 침입하였다(1627 ·1636). 또 내몽골로 진출하여 차하르부(部)를 정복하여 대원전국(大元傳國)의 새(璽)를 얻음으로써 1636년 새삼스레 황제의 위에 올라 국호도 대청(大淸)으로 고쳤다. 이 시기에 명왕조의 사회적 모순은 궁정의 당쟁과 농민반란으로 집중되어 나타났는데, 1644년 이자성(李自成)을 지도자로 하는 농민군은 드디어 베이징[北京]에 진입, 명나라를 멸망시켰다. 이때 농민군을 두려워한 지배계급은 청군과 강화(講和), 산하이관[山海關]을 지키고 있던 오삼계(吳三桂)는 자진하여 청군을 관내로 안내하여 베이징을 회복시켰다. 태종의 아들 순치제(順治帝)는 재빨리 이자성 토벌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그를 후베이[湖北]로 몰아내 궁사(窮死)시킴과 동시에 중국 본토 지배의 대의명분을 획득하였다. 이민족 지배에 대한 저항은 그 후 복왕(福王) ·노왕(魯王) ·당왕(唐王) ·계왕(桂王) 등 구왕족 소위 남명(南明)의 움직임으로 나타났는데, 농민군을 적대시하여 제휴하지 않았으므로 그 명운이 짧아 대세를 회복시키지는 못하였다. 오히려 청조의 중국 통일에 있어서의 적은, 중국 정복에 협력한 평서왕(平西王) 오삼계, 평남왕(平南王) 상가희(尙可喜), 정남왕(靖南王) 경중명(耿仲明)의 삼번(三藩)이었으며, 수 년에 걸친 삼번의 난의 진압과, 거의 때를 같이하여 명나라 최후의 유신(遺臣) 정성공(鄭成功)의 자손이 귀순함으로써 청나라는 제4대 황제 강희제(康熙帝)에 이르러 비로소 전 중국을 통일하였다. 더구나 강희제는 1689년 러시아제국과 네르친스크조약을 맺음으로써 19세기 중엽까지, 러시아제국이 동진(東進), 남하하는 것을 억제하였다. 또 간간이 분쟁이 일던 조선과의 경계도 정하여 백두산에 정계비(定界碑)를 세웠다(1712). 또 계속되는 옹정(雍正) ·건륭(乾隆)의 3대에 걸쳐 중앙아시아의 중가르부(準部)를 토벌하고 이에 따라 칭하이[靑海]의 속령화(屬領化)와 티베트 보호와 평화를 촉진시키면서 1759년에는 중가르부 ·위구르(回紇:후의 新疆省)의 지배를 확립하였다. 이리하여 이 3대에 걸쳐 청왕조는 오늘날의 중국 영토의 조형(祖型)이 되는 중국 사상 최대의 판도를 확립함과 아울러, 동아시아 거의 전역을 그 위령(威領)하에 두었고, 내정의 충실에도 힘입어 그 극성기(極盛期)를 가져왔다. 그러나 건륭 말년, 이미 변경에서 조짐을 보이고 있던 이슬람교도 ·먀오족[苗族] 등의 여러 반란은, 얼마 안되어 가경(嘉慶) 연간에 이르자 백련교(白蓮敎)의 후베이[湖北] 등 5개 성에서 대반란으로 폭발하였다. 백련교의 난은 10년(1796~1804)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이를 통하여 국가권력의 지주인 8기(八旗:軍隊)의 무력함이 폭로되었으며, 거기다 권신(權臣) 화신(和筌)의 미증유의 수회사건이 상징하듯, 관료정치의 부패로 인하여 청왕조의 지배는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더욱이 유럽 자본주의의 세계 지배의 파두(波頭)가 중국에 들이닥침으로써 결정적인 청왕조의 쇠퇴를 가져왔다. 이미 건륭 연간의 매카트니, 가경 연간에 애머스트 등 두 차례의 특사(特使)를 통해 산업자본의 판로 개척을 기도하다가 거절당한 영국은, 1840년 아편문제로 발단된 분쟁을 계기로 무력에 의해 중국을 개국시켰으며(아편전쟁), 프랑스 ·러시아 ·미국도 그 뒤를 따랐다. 이후 열강의 청조 지배는 중국에 대한 반식민지적 지배의 매체로서의 성격을 짙게 하였고, 따라서 열강의 자본주의(제국주의)에 대한 직접 ·간접의 저항이 중국사 전개의 원동력이 되기에 이르렀다. 아편전쟁을 발화제로 발발한 중국 사상 최대의 농민전쟁인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에서, 홍수전(洪秀全) 등이 봉건적 제관계의 폐기를 지향하여 싸우면서, 궁극적으로는 청왕조를 예속시킨 외국 세력과 대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이미 그러한 상황을 뜻하는 것이다. ‘태평천국의 난’은 청왕조의 정규군이 아닌, 사실상 증국번(曾國藩) ·이홍장(李鴻章) 등 지방의 한인(漢人) 관료가 조직한 개인집단, 즉 향용(鄕勇:湘軍 ·淮軍)의 힘에 의존하여 진압되었는데, 이 때문에 지방분권적 경향이 강화되고 후의 군벌(軍閥) 할거의 소지를 만듦과 동시에 관계(官界)에서의 한인의 지위를 높이는 결과를 낳아, 그들이 주체가 되어 위로부터의 중국 근대화의 최초의 시도인 ‘양무운동(洋務運動)’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전통적 체제를 옹호하고 보수(保守)하기 위한 군사공업의 이식을 주안으로 하였을 뿐만 아니라 양무파 관료가 기업을 사물화(私物化)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 오히려 민족자본주의의 발전을 저해하였다. 청 ·일전쟁에서의 패배는 이같은 양무파 노선의 파산을 결정적으로 만들었다. 한편, 제국주의시대로 이행(移行)해 가는 심각한 위기감은, 단순히 유럽 선진국의 기술 이식뿐 아니라, 전통체제 그 자체를 변혁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캉유웨이[康有爲] 등의 변법자강운동(變法自强運動)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광서제(光緖帝)까지 동조한 변법자강운동도 서태후(西太后) 등 수구파의 반대로 겨우 100일 유신(維新)으로 막을 내렸고, 의화단(義和團)운동을 계기로 한 외국 군대의 베이징 진주로 수구파가 최종적으로 몰락하였을 때는 입헌안(立憲案)을 비롯한 여러 개혁안이 처음으로 채용되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서 중국 민중의 동향은 혁명의 기운으로 향해 달려가고 있었으며 멸만흥한(滅滿興漢)의 민족주의는 화교 ·유학생 ·민족자본가의 반(反)봉건주의와 합류, 쑨원[孫文]이 주도하는 중국혁명동맹회(中國革命同盟會)에 결집되어 신해혁명(辛亥革命:1911)을 성공으로 이끌었으므로 1912년 선통제(宣統帝) 푸이[溥儀]의 퇴위와 함께 청왕조는 종말을 고하였다. 그것은 또한 중국 민중의 전제군주제와의 결별이기도 하였다. 중국의 근대사는 청왕조 말기부터 시작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