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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왜시대獨立近代化期 스크랩 신한청년당의 조동호,여운형,선우혁,김철,한진교,장덕수
능소화 추천 0 조회 16 09.10.09 20:0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신한청년당의 조동호,여운형,선우혁,김철,한진교,장덕수

 

  2009년 9월 11일(금)오후 3시 30분 서대문 형무소 공원내에<독립관>에서 유정 조동호 선생 55주기 추모제전을 기하여 신한청년당의 창당과 활략을 유정기념사업회 회장인 이현희 박사가 강연을 한다.

다음의 논문은 그 날 발표 할 논문이다.

      

    이 현 희(유정 조동호 선생 기념사업회 회장)

 

1. 서론

급진적 항일독립운동가 유정 조동호(1892~1954)는 충북 옥천 출생으로 1908년 신학문에 포부를 두고 상경하여 경성측량학교에서 수학하고 1910년경 졸업하였다. 나라는 이미 침략자 일제에 피탈당한 뒤였다. 이들이 분개한 최대의 이유인 것이다. 이시기에 몽양 여운형을 알게 되어 평생 동지가 된 것이다. 그와 나라를 되찾겠다는 청운의 큰 뜻을 펴기 위하여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중국으로의 유학을 계획하고 개성을 거쳐 신의주에서 중국으로 건너갔다. 1914년 12월경 중국으로 망명, 상하이를 거쳐 난징에 있는 진링(金陵)대학에 입학하였다. 유정은 동 대학 중국학부에 몽양은 영문학부에 각기 지원하여 전공을 달리하고 1917년 7월 3년간에 소기의 학업을 수료하였다.

이윽고 1918년 국제도시 상하이로 돌아와서 유정은 황자오가 경영하는 구국일보사의 기자로 취직이 되어 반일 독립운동 관련의 주목할 기사를 집필하고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유정이 중국어를 능통하게 구사하였기 때문이었다.

유정은 신규식이 1912년에 조직한 동제사에 가입하여 동지로서 참여하게 되었다. 이는 국권회복을 위한 위장 독립운동 단체였다. 이 때 유정은 여운형 조소앙 선우혁 신석우 등과 동 이사직을 맡아 활동하였다. 다음해 제1차 세계대전이 종료되면서 상하이에는 조국으로부터 망명객이 밀려들어 장차 큰일을 위한 조직체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고안해 낸 것이 마침 터키인들이 토요일마다 그들의 독립운동을 위해 모이는 것을 보고 우리도 토요모임을 갖자고 하며 모인 것이 결국 신한청년당이란 명칭의 독립운동단체가 된 것이다. 여기에는 몽양과 유정을 비롯하여 장덕수 김철 선우혁 한진교 등 6명이 최초로 단체를 발기하였다. 그 명칭은 새로운 한국을 창조하고 발전시킨다는 역사적인 의미와 큰 포부의 신 대한 즉 신한청년당이었다.

유정은 이 당의 설립목적에 관하여

“ 조선의 독립을 도모하기 위하여 상하이에서 청년 학생을 교양하고 그 당원을 독립운동에 이용할 목적이었다.”

라고 일제의 심문조서에서 설명함으로써 그 설립의 참 의도를 알 수 있다. 이 논문에서는 상하이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성립시키고 발전함에 있어서 중심세력이었던 이 신한청년당의 초창기 창당 주역인 6명의 독립지사를 중심으로 유정과의 독립운동을 위한 구체적인 교류 상항을 중점적으로 살펴 볼 것이다.

 

2. 신한청년당의 결성과 유정

유정이 몽양을 채근하여 상하이에서 신한청년당을 결성한 것은 제1차 세계대전이 종료되던 시기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따라서 그 결당 시기는 종래 1918년 8월 하순경으로 잡고 있으나 실은 동년 11월 말경일 가능성이 높다. 세계대전을 종료한 이후 그 선후책을 논의하는 시기가 그해 말경임을 고려할 때 동년 8월 20일 경은 너무나 시기적으로 바쁜 것을 감안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11월 하순 윌슨 미대통령의 특사 찰스 크레인이 중국 상하이에 도착한 것이 동년 11월 20일 경이었다.

크레인은 윌슨의 평화안 14개조를 보이면서 이 14개 조의 평화안의 국제회의가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될 것인데 전승국대표가 그곳에 집합할 것이니 약소국인 조선에서도 그 대표를 이 국제발표회의에 참석시켜 자신들의 억울한 숨은 사실들을 술회하고 호소하여 차제에 독립할 방도를 구해야 할 것이라고 고무적인 연설을 하여 몽양 유정 등은 속히 나라의 상징으로서 단체의 출범이 시급히 필요하다고 믿은 것이다. 그것이 곧 신한청년당인 것이다. 이들은 그 필요에 따라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기로 약속한 것이다. 이리하여 나라를 대표할 정당으로서의 간판이 곧 ‘신한청년당’이란 청년들의 모임을 결성하게 된 것이다. 유정과 몽양 등 6명이 가입하여 당을 조직하였고 이어 파리강화회의에 외교통인 김규식을 국가의 대표로 파견한 이후 당원이 약 50여 명으로 증가하였는데 유정은 임성업 등 다수를 가입시키는데 성공하여 당의 면모가 일신되어 가고 있었다.

몽양은 파리 강화회의의 중국대표인 왕정정과 육징상의 소개로 클레인 특사를 개인적으로 직접 장시간 면담하고 심층적으로 상세히 그 배경과 성과 등을 살피고 독립의 가능성도 타진하였다. 그는 유정에게 이번 기회에 우리의 독립 문제를 국제적으로 달성시켜서 이시기에 국제적인 힘을 이용하여 일제를 제거하고 우리의 독립을 이런 좋은 기회에 성사시키는 것도 하나의 독립을 위한 방법이 아니겠느냐는 것을 강조하였다. 장덕수 신국권 등과 더 광범위하게 협의한 결과 파리 강회회의와 미국 읠슨 대통령에게 독립청원서를 제출하기로 결정하였다.

유정은 장덕수 신국권 등과 협의한 후 영문으로 2통의 독립청원서를 작성하여 미국의 윌슨대통령에게 보내기로 하고 핏취 박사의 교정을 받아 발송을 완료하였다. 그 중 한 통은 동 11월 말 상하이를 떠나는 클레인 특사에게 주어 윌슨대통령에게 전달하게 하였으며 또 한통은 만약에 한국대표가 파리에 당도하지 못할 경우 대신 제출해 달라고 상하이에서 발행되고 있던 밀라드 리뷰의 주필 밀라드에게 위임하였다. 그러나 밀라드가 맡았던 한 통의 독립청원서는 분실되어 성사시키지 못하였다.

독립청원서는 1918년 11월 28일자로 작성되었는데 세계정세에 대한 해박한 견해와 한국독립의 당위성 등이 절실하게 이어지고 있어 읽는 이를 감동시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조동호 등은 파리강화회의에 동 당의 종합된 의견을 수렴하여 동당의 대표로 우사 김규식을 공식적으로 파견하면서 본격적인 독립청원 활동에 열을 올리기 시작하였다. 이 당은 곧 한국을 대표하는 국가 단위였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 첫 번째의 공식 업무가 우사의 관련 활동을 지원하는 일이었다. 여운형은 러시아로 장덕수는 일본으로 선우혁과 서병호는 국내에 파견하여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일으키기 위하여 극비리에 각계 유력 인사와 접촉하게 면밀히 계획을 짜고 간절히 당부하였다. 그 중 장덕수를 파견할 당시

세계의 기운은 점차 우리를 위하는 차원에서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다. 이번 강회회의는 실로 세계를 새 역사로 돌입시키는 것으로 특히 약소민족 및 압박당하고 있는 한민족의 장래에 광명을 갖다 줌이 심대하다. 조선민족도 차제에 무자각에서 자각으로 돌아가 국가의 권리와 정의를 주장하여 세계 공론에 호소해야 할 최초 절호의 시기라고 믿는다. 그리고 우리의 활동 내용은 당략 상 그 상세함을 귀하에게 명언할 수는 없으나 각지에서 우리 동포는 독립을 선언하고 운동을 개시할 예정이다. 연이나 일본 관헌은 반듯이 이 운동의 진상을 해외에 보도하는 것을 금할 것은 명약관화함으로 귀하는 일본인을 가장하고 도쿄와 서울로 들어가 운동정황을 상하이 중화신보 기자인 조동호에게 통신하기 바란다. 또 도쿄에는 조용은(소앙)을 파견하였음으로 도착 후에는 와세다 대학 대기실을 수신지로 삼아 통신하고 일이 잘 성사되도록 상세하게 상의, 밀담하라

이렇게 긴급히 지시하고 있다. 유정은 이 당시 연락책을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장덕수는 도쿄에 유학하는 중국인 유모라고 가장하여 도쿄에 도착한 뒤 조소앙과 회합하고 상하이로 돌아가면 조동호에게 그 동안 모금한 독립운동 자금 800엔을 그에게 전달해 줄 것을 위탁하고 2월 17일 경에 국내로 향발하였다.

신한청년당은 거국적인 3.1운동 이후에는 당원들이 모두 유정과 같이 주도적으로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법통성의 현주소로 알려져 있다.

사실상 임시정부를 수립한 주역은 신한청년당원이 주류를 이루었고 이동녕 이시영 등 원로들은 해외에서 3.1운동 이후 상하이로 모셔온 분들이었다. 그러니까 임정의 구성은 2, 30대와 4, 50대의 청장년층이 합작하여 구성한 매우 이상적인 연령층이 망라된 건국이며 정통정부의 최초의 구체적인 구성이었음을 조화롭게 생각한다. 하늘의 큰 은총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3. 여운형과의 교류

유정이 몽양(1886-1947)을 상면하게 된 것은 1910년 우무학교를 수료한 뒤 몽양이 살고 있었던 서울 창신동의 몽양거처를 찾아 인사를 나누면서부터 그가 1947년 7월 19일 서울시내 중심가에서 백주에 불행하게도 암살당할 때까지 교류가 이어지고 있었다. 근 40년을 지근거리에서 두 분은 6세 나이 차이를 의식하지 아니하고 서로 동지로, 때로는 친구로 상호 존대, 우애하고 존칭을 쓰면서 독립운동을 함께 도모한 평생 동지인 것이다. 이 당시 한국청년들이 일본 유학은 상당수가 희망하고 있었으나 중국으로의 유학은 매우 드문 경우였다. 몽양과 유정은 이를 극복하고 수행해 냈다. 그의 용기에 새삼 박수를 친다.

숙고 끝에 이 두 민족 지사들은 중국을 선택하였다. 장차 중국이 우리의 망명지가 되어야 독립운동을 실질적으로 달성할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유정이 앞을 내다보고 중국어를 전공으로 삼은 최대의 이유이기도 한 것이다. 둘의 생각이 이렇게 한 뜻이 되어 나라전체가 피탈당하는 1910년대의 큰 충격 속에 중국으로의 망명을 실현시킨 것이다. 두 지사는 1914년 말 개성을 거쳐 동지 이만규의 안내로 신의주로 해서 기차 편으로 상하이를 지나 난징에 도착하여 그곳 진링(金陵) 대학에 입학하였다. 이 대학은 뒷날 명문 난징대학이 되었다.

한국인 유학생으로서는 몽양과 유정이 처음이었다. 중국인들도 매우 신기하다고 크게 환영하고 각종 편의를 제공해 주었다. 유정은 동 대학 중국 학부를, 몽양은 영문 학부를 선택하여 소정의 학업을 계속하였다. 유정은 중국에 왔으니 중국어에 능통해야 중국인들과 어울려 독립운동을 비롯하여 언어를 통해 크게 활용도가 있으리라는 생각에 중국어를 전공하게 된 것이다. 유정과 몽양은 1917년 동 대학을 수료하고 상하이로 활동무대를 옮겨 잡았다. 아무래도 그곳이 국제도시이고 통신이나 새로운 소식을 접할 수 있는 이점이 있기 때문이었다.

몽양은 1918년 상하이고려인친목회를 유정과 같이 조직하고 그 총무로 일을 맡아 보고 기관지 ‘우리들 소식’을 발행하면서 조국의 독립달성을 위한 공작을 게을리 하지 않고 국제정세를 예의 분석, 종합하고 독립운동을 일으킬 구심점으로서의 기관을 모색하였다. 유정도 이에 동조하고 물색한 끝에 터키 청년당을 모델로 한 신한청년당의 결성을 구상하고 유정에게 이를 의논하자 그로부터 대 찬성을 얻어 이를 상하이에서 조우한 선우혁 한진교 장덕수 김철 등과 의논하고 제1차 세계대전이 종료되는 1918년 11월 말 경으로 결성시기를 잡고 상하이 시내 프랑스 조계 내에서 처음에는 몽양 유정 등 6명이 조촐하게 결성식을 거행하였다. 이때 몽양은 신한청년당의 결성을 유정에게 일임하고 그로 하여금 인선도 다 처리하게 하였다. 따라서 이 당의 결성은 유정의 주도적인 책무에 의거하여 결성된 단체임을 명백히 인식해야 한다. 유정이 동당의 취지서, 당헌과 당강, 당책 등을 기초하였다는 사실을 보면 그가 주도적으로 결성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원래는 유정을 노령과 연해주에 파견할 예정이었으나 몽양의 일을 대신해야 할 사안이 생겨서 그는 파견되지 못하고 또 신문기자로서 상하이 연락책을 맡은 것이다. 동 이사장에는 우사를 추대하였으며 10인 이내의 이사와 서무 교제 재무의 3개 부서를 설치 운영하였다. 서무이사에 몽양 재무이사에 경재 김인전을 선정하여 출범하기 시작하였다.

임시정부수립 시에 신한청년당원은 의정원의원 29명 중 10여명에 이르고 있음을 보면 신한청년당원이 사실상 임정의 중심세력으로 대거 가담한 것임을 익히 알 수 있다. 임정이 .1919년 4월에 상하이에서 수립 선포되자 몽양은 외무차장 임시의정원 경기도 의원으로 가담하여 입법 활동을 전개하였다. 몽양이 교민사업에도 관여하자 유정도 이에 가담하여 그는 인성학교(교장 여운형)를 비롯하여 상하이 중심의 독립운동을 활발히 전개한바 있다. 1920년 이후 이동휘 총리의 권고로 임정요인들이 고려공산당에 가입하였는데 그 목적은 대한의 독립달성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공산당의 원조를 염두에 둔 다분한 목적의식이 발동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해 유정과 같이 중한호조사를 결성하였으며 1922년에는 김구 등과같이 한국노병회를 유정을 포함하여 결성함에 주도적인 임무를 수행하였다. 유정이 1923년 말에 장덕수 등의 권유로 인촌 고하 등 이 스카웃하여 유정을 동아일보사의 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일하게 할 때 몽양은 그를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귀국을 종용하며 그곳에서 독립운동에 전심전력하였다.

1929년 영국의 식민정책을 비난하다가 영국경찰에 피체, 국내로 압송되어 3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몽양은 1933년 유정이 추천하여 조선중앙일보사의 사장이 되었다. 그 신문은 유정의 인친척이 경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용이하였던 것이다. 1936년 8월 베를린 올림픽대회에 양정 고등 보통학교 생인 신의주 출신의 손기정이 마라톤 부분에서 세계신기록으로 우승하여 시상대에 섰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있는 일장기를 고심 끝에 말소하여 문제가 일어나자 동 신문은 자진 폐간하고 동 사장 몽양은 책임지고 사장직에서 미련 없이 물러났다.

이시기에 유정은 요시찰인으로 지명되어 있었다. 1936년 봄에 독립운동가 남정 박광의 차녀 소동득(작은동득)과 결혼하여 새 가정을 이루고 있을 때였다. 필자도 2년 전 다녀온 바 있는 경북 봉화군 명호면 도천리에 사금광 현장에 은거하면서 자주 서울을 왕래하였다. 건국을 위한 사전준비 작업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몽양은 1940~42년 사이에 일본을 방문하면서 국제정세를 예리하게 분석한 결과 일본의 패망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확신하고 패망이후의 독립 문제를 신중히 검토하였는데 유정도 그의 분석에 동조하고 그럴 경우에 대비하여 1944년 8월 10일 서울 경운동에서 비밀리에 조선건국동맹을 결성하고 광복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들은 몽양의 고향 양평을 오가며 농부로 가장하고 은밀히 건국동맹을 조직하기 위한 위장 전술을 써서 일경의 눈을 피하였던 것이다. 몽양은 일경에 두 번이나 예비 검속되어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던 경력이 있었다.

몽양과 유정은 1945년 8월 1f7일 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실질적으로 통일적 건국을 염두에 두었으나 공산주의자들이 끼어들어 민족 계 인물들이 거의 기피하고 말아 순수한 건국준비는 적색사상가 집단이란 인식이 팽배하여 유정도 제1차 조직에는 참가하였으나 그 뒤에는 뒤로 물러나 있었다. 더욱 7년여의 옥고로 인하여 후유증이 재발함으로써 사실상 제2차 조직이후로는 거의 가담하지 못하고 몽양도 1947년 7월 19일 백주에 불행하게도 암살당함으로써 두 독립지사의 합심한 건국은 사실상 실현되지 못하고 말았다. 유정이 낙향한 최대의 이유인 것이다.

 

4. 장덕수와의 교류

설산 장덕수(1895~1947)는 실력가로서 자수성가한 집념의 사나이였다. 황해도 재령 출신이다. 인촌 김성수 고하 송진우 근촌 백관수 등과 각별한 친교를 맺고 있었다. 빈농출신으로 10세 때 부친과 사별하고 진남포의 한 국가기관에서 급사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갔다. 그러나 학업은 게을리 하지 않아 학업성적은 의외로 우수하였다. 도쿄로 가서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를 졸업하였는데 인촌이 각별하게 후원해주어 대학을 졸업한 뒤 상하이로 갔다가 3.1운동 당시 귀국하던 중 체포되어 전남 하의도에 거주제한을 받았다. 유정과는 상하이에서 독립운동 관계로 만나서 서로 의기 투합하여 서로간의 재능을 확인한 셈이 되었다. 둘이는 한집 같은 방에서 생활하다가 장덕수는 일본으로 가고 그날 마침 이광수가 상해로 와서 유정은 이광수와 2년간 그 방을 같이 쓰는 사이가 되었다. 장덕수는 후에 몽양이 도쿄제국호텔에서 일본정객을 상대로 항일 연설할 때 그 통역으로 발탁되어 하의도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설산은 특출한 문재가 있어서 일본에서 웅변대회에 1등을 차지할 정도로 유창한 일본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유정과는 상하이 시절에 독립동지로서 절친한 사이가 되어 그가 초대 동아일보사의 주필로 인촌 김성수에게 발탁되어 귀국하여 부임할 때 인촌에게 유정을 스카웃해서 잘 활용하자고 강력히 권유하여 유정이 마침내 동아일보의 기자 겸 논설위원과 뒷날 베이징 특파원으로 전지 행 등 다수의 명문장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이다.

신의가 두텁고 인간됨이 너그러워 사람들이 그를 좋아하였다. 설산은 그 뒤 영국으로 유학하여 정치학 박사학위도 받고 귀국하여 인촌을 도와 한민당을 창당하고 국제적인 뛰어난 정세분석과 변설로 인촌의 정치적 자문역을 잘 수행한바 있다. 유정이 상하이에 동실친구로 체류하고 있을 때 설산에게 독립운동에 관하여 많은 조언을 해서 그도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한 사실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설산의 동아일보의 창간사 주지를 선언하노라 라는 글은 매우 유명한 명문장으로 인촌도 몇 번이고 반복하여 읽고 감탄사를 연발하였다는 것이다.

유정이 상하이 임정을 떠나 귀국하고자 한 것은 이미 동아일보가 창간된 뒤 인촌 김성수 고하 송진우 등과의 교류 속에서 동사의 기자로 채용이 내락상태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상하이에서 임정 기관지 독립신문에 기사를 쓰면서도 동 민족지 동아일보에 기고하여 인촌이나 고하가 다 잘 알고 있어서 속히 귀국하기를 고대하고 있었던 것임을 일 수 있다. 인촌이나 고하가 유정을 매우 필요한 인물로 지목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한다. 민족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자신도 그런 기회가 오면 직접 나설 생각을 굳히고 있었던 인촌으로서는 유정이 민족의식이 뚜렷한 의식 있는 기자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를 동아일보와 연결함에 있어서 가교적 임무를 수행한 사람은 곧 상하이 시절부터 중국신문의 기자로서 자별하게 지내던 설산 장덕수였다. 서로간의 3년간이란 세월 속에서 매우 친숙하게 지냈을 뿐 아니라 그의 사상적인 투철 성까지 잘 알고 있어서 매우 귀한 인재라고 극력 추천하기에 이른 것이다.

유정이 관계한 독립신문 뿐 아니라 중국의 두 신문사에서 기자로 일한 경력이 있어서 안심하고 그를 인촌이나 고하에게 추천한 것으로 본다.

유정은 동지 설산의 요청으로 경제논설을 동아일보에 송고한 일이 있다. 그것이 곧 동아일보 1923년 9월 13일자부터 연속 3회에 걸쳐 게재되었다. ‘전후세계 상업의 추세‘ 라는 세계경제 질서에 관한 탁견을 그의 경륜에 비추어 심층적으로 연구하고 발표한 뛰어난 명 논설이었다. 인촌이나 고하는 이 논설을 읽고 유정을 동아일보사로 영입할 생각을 굳긴 것이다. 더욱 설산하고는 혁명동지로서 민족의식이 투철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안심하고 모셔올 계획을 확정한 것이다. 임정에서는 그곳에서 종사하던 독립지사가 귀국한다면 변절자라고 낙인을 찍는 일이 비일비재하여 그 점이 인촌에게는 마음이 걸렸던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이미 백범이 그의 명저 ’백범일지‘에서 지적한 바와 같다.

유정은 임정의 원로 석오 몽양 백범 성재 우천 청사 등과 의논하고 귀국의 불가피 성을 알려드려 얼마간의 양해가 이루어졌다. 유정이 서울에 도착하였을 때는 설산이 이미 조국을 떠난 뒤였다. 그의 해외 일정이 잡혀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인촌이나 고하의 주선으로 동아일보에는 그가 해야 할 일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유정은 동지 정태희 몽양의 아우 여운홍과 같이 상인으로 변장하고 귀국하였으나 임정 청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일본총영사관이 있어 즉각적으로 제보가 서울 종로 경찰서에 접수된 것이다. 그는 열차편으로 베이징을 거쳐 신의주를 지나 서울역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복잡한 열차 내에서 일본 형사에게 체포되어 서울역까지 왔다. 연행되어 서울까지 온 것이다. 이미 수배가 된 상태였음을 알게 한다. 장덕수가 이미 손을 써놓았다. 더욱 인촌이나 고하가 일본경찰에 알려주어 조동호 기자는 본사에 부임해오는 것이니 선처해 달라는 간절한 청탁의 말이 이미 경찰에 알려진 것이다. 유정에게 고문이나 악독한 취조가 자심하지 않은 이유인 것이다. 인촌이나 고하가 종로 경찰서에 유정이 상하이로부터 귀임하는 길이라고 자초지종을 상세히 설명하여 그는 10여일 만에 무사히 풀려날 수 있었다. 동아일보와 인촌 고하의 영향력이라고 단정할 수 있다. 언론의 위력이 작용한 것이다.

인촌과 고하가 책임지고 조동호 기자의 신원을 보장한다고 하여 덜 고생하고 풀려나와 잠시 고향에 다녀온 후 동아일보사에 근무하게 된 것이다. 그 당시는 동아일보사가 광화문이 아니고 종로의 화동이었기에 종로일대에서 활동하게 된 것이다.

설산이 없는 동아일보는 쓸쓸하기 한이 없었다. 그러나 그가 출세하러 외국에 갔으니 그의 장도를 축하해주어야 하겠다는 소박한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기다리던 설산이 광복 뒤인 1947년 12월 제기동 자택에서 흉한에게 암살당하였으니 얼마나 기가 막힐 사안인가? 고하 몽양에 이어 3번째의 조난 사건인 것이다. 애석하기 그지없는 해방 정국의 회오리였던 것이다.

 

5.김철과의 교류

일강 김철(1886~1934)은 유정보다 6년이 연상이었다. 다른 이름은 김중청 김영택이라고도 하였다. 유정은 같은 신한청년당의 초창기 발기인이라고 생각되었으나 선배로서의 대접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일강이 유정을 아끼고 잘 보살펴준 이유였던 것이 그런 간절한 인사성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그는 전라도 함평출신으로 1917년 상하이로 건너가 법률학을 전공하였으며 1919년 2월 상하이 신한청년당 대표로 선우혁 서병호 등과 같이 독립운동의 국내봉기를 위하여 국내에 파견되어 영향력을 미치며 맹활약하였다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선우혁 서병호 한진교 몽양 유정 현순 최창식 등 신한청년당원을 중심으로 동지 30여 명과 같이 상하이 프랑스 조계 보창로 329호에 대한독립임시사무소를 개설하고 국내외로부터 망명해 오는 수많은 동지들을 규합하여 장차 임시정부를 수립할 생각을 굳혔다. 이시기에 일강은 유정을 만나게 되어 평생 동지로서 혈맹을 맺게 된 것이다. 일강은 신한청년당의 부주무로서 ‘신한청년’이란 기관지를 발행하는데 유정과 손발을 맞추면서 사업발전을 위한 능률적인 업무를 추진하여 몽양이나 다른 동지들로부터 신망을 한 몸에 지니게 되었다. 일강도 유정을 가장 신임하는 독립동지로서 다정다감한 언사로 낯 서른 이국땅에서의 외로움을 달래면서 친밀한 교류를 계속하여 속히 조국의 독립을 달성하기 위한 열성에 매진하였다. 유정이 임정은 신한청년당을 중심으로 하여 수립해야 한다는 당위론에 일강이 맞장구를 처서 일이 빠르게 성사된 것이다. 유정은 노소장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신한의 멤버가 주동 임무를 구사해야 함에 일강도 그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찬성하여 임정의 29명 초대 제헌의원의 구성이 잘 편성된 것이다. 30, 40, 50대의 국내외의 독립지사가 총망라되어 최초의 성문헌법인 10개조의 헌법이 축조심의 된 것이다.

일강은 1919년 4월 10일 제1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입법 활동을 개시함으로써 의회정치를 시작한 것이다. 그는 유정에게 입법 활동에 관하여 자문을 구하면서 익숙하지 않은 의정활동을 조심스럽게 펼치고 있었다. 동 월 제2회 의정원 회의에서 일강은 임정 재무위원 겸 법무위원이 되었다. 한남수 장병준 등과 함께 임시의정원 전라도 의원이었다. 동 8월 5일에는 임정의 교통차장에 임명되었는데 동 총장 문창범이 부임치 않아 그가 총장을 대리하여 총장으로서의 임무를 충실하게 감당하였다. 여기에는 유정의 설득과 후원이 크게 도움이 되었다. 특히 유정과의 교류는 ‘신한청년’이란 기관지를 발행하면서 의사가 소통되었고 일강도 크게 도움을 받았다. 몽양을 대신하여 일강이 동당의 부주무로서 유정의 신문기자로서의 재능을 원용하여 멋진 편집을 구사하게 된 것이다. 일강은 대한적십자회의의 상임위원으로서 적십자정신을 일제에게 고취하고 평화정신으로서 인류애를 발휘하게 설득하였다.

1920년 1월에는 김구 손정도 등과 같이 의용단을 결성하여 강력한 응징으로서의 독립혈투를 전개할 의욕을 불러일으켰다. 유정도 이 사업에 관여하였는데

1 포고문의 살포인지와 선전으로 국민에게 일제타도의 적개심을 격발하게 한다.2 정부를 협조하여 재정 업무를 용이하게 지원한다. 3 국민에게 개병 개납의식을 고취한다. 4 일본총독부에 소속된 관리는 자진 사퇴하게 한다. 5 적의 관청의 납세를 거절하게 한다. 6 일본의 화폐를 억제한다. 7 군사상의 실제방법을 사용한다. 8 임정의 기관지와 공보를 전달한다. 9 본 단과 주의가 같은 다른 단체를 상호 협조한다. 10 정부의 명령이나 지휘가 있을 때와 독립운동을 위하여 필요할 때는 따라 올 것 등을 결정하였다. 유정도 이를 적극적으로 찬동하고 협찬하였다. 1920년 3월에 선전위원회가 조직되자 유정도 일강을 도와서 선전업무에 종사하였다. 1922년 7월에는 시사 책진회의 회원으로 의정원과 국민대표회의간의 갈등 해소에 기여하여 임정의 업무추진을 원만하게 이끌었다. 그러나 1934년 6월 29일 항저우 소재 광자병원에서 향년 49세를 일기로 서거하여 그 이후에는 교류를 지속할 수 없었다. 최근에 그의 고향에 일강 기념관과 임정청사를 복원하여 빛나는 애국지사 일강 김철의 애국의식을 기리고 있다. 곧 그의 전기가 대학교수에 의하여 출간된다고 하니 크게 기대할 일이다.

 

6. 선우혁과의 교류

선우혁(1882~?)은 정주출신으로 일명 혁 이라고도 불렸다. 테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조선총독 암살모의사건으로 체포되어 고문 등을 받았으나 1913년 3월 증거불충분으로 경성복심법원에서 무죄 방면되었다. 원래 이 사건은 근거가 없는 날조된 사건이었다.

출옥 후 즉시 상하이로 망명하여 난징에서 온 유정과 몽양을 만나 의기 상통하여 신한청년당을 조직할 때 선우혁은 앞장서서 일을 마무리하였다. 그는 서병호 등과 같이 귀국하여 평안도 일대에서 양전백 이승훈 김병조 길선주 등 기독교계 지도자와 천도교의 중진들을 차례로 만나 3. 1운동의 기틀을 마련하는 한편 군자금도 모집하여 상하이로 돌아왔다. 몽양과 유정을 만난 선우혁은 국내의 독립운동의 반응을 설명하고 곧 33인의 민족대표가 선정될 것이라고 설명하고 우리도 그에 대처하여 임시독립사무소의 개설을 권유하여 프랑스 조계 보창로에 연락사무소를 설치하고 각처에서 상하이로 집결하는 독립지사들을 영입하여 임시정부를 수립하자고 하면서 직접적으로 나서서 유정이나 몽양 등이 앞장서서 의정원 의원을 선발하자고 제의하여 원로 석오 이동녕 등 29명을 선임하고 동 4월 10일 동 조계 내 김 신부로에서 제1회 의정원 회의를 개회하였다. 이것이 임정의 첫 출범이었다. 이 때 우리나라 대한민국은 사실상 이때 건국된 것이다. 군주국에서 민주공화국으로 새롭게 탄생한 것이다. 3권 분립이라는 다소 생소한 의미가 주어졌으나 90여 년 전부터 우리는 민주공화국을 새롭게 만든 것이다. 단지 보통선거를 거치지 아니하고 건국하였다는 것이 못내 취약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특히 선우혁은 유정과는 10년이라는 나이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친숙하게 대하고 친절함을 나타내서 서로간의 호감 속에 교류가 활발하였던 것이다. 인간적으로 친숙해진 것이다. 유정이 충청도 의원으로 활약할 당시 선우혁은 평안도 의원 임정의 교통차장 교통위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선우혁은 유정에게 ‘유정동지 같이 중국유학생하고 교류하니 더욱 새로운 독립의 열망이 일어나는 것을 감지할 수 있소이다.’ 하고 친근미를 은근히 나타내면서 독립동지로서 조국을 찾을 때 까지 손잡고 일하자고 다짐하였다. 무엇보다 임정이 신한청년당원 중심으로 구성되었음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면서 연하의 독립동지를 극진히 사랑해 주었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유정이 동아일보사의 권유로 서울에 간다고 하니 선우혁은 못내 슬픔을 참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회자정리라고는 하나 이렇게 빠르게 이별이라니 애석하기 그지 없구료, 어디에 있던지 몸 건강하고 맡은바 임무에 충실해 주기를 간절히 축원하오.’ 하고 눈물의 악수로 동아일보사로의 전근을 축하하고 축복해 주었다.

유정으로서는 처음으로 느껴보는 이별의 아쉬움이었다. 형제보다 더 친밀하게 지낸 독립동지 선우혁선배가 아니었던가.남 달은 석별의 정을 그는 서울에 당도도착 할 때까지도 잊혀 지지 않았다. 그것이 독립동지의 우정의 깊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유정은 서울에 와서 경찰에 체포된 뒤 인촌이나 고하의 특별 청원으로 풀려날 때 까지도 오랫동안 기억되는 소중한 만남과 이별의 큰 고통인 것이었다. 신한청년당이 맺어준 소중한 독립동지의 값진 인연을 유정은 오랫동안 가슴깊이 간직하고 동아일보의 논설이나 기타의 기사를 쓰곤 하였다.

 

7. 한진교와의 교류

송계 한진교(1887~1973)는 평안남도 중화군 출신이다. 1914년 베이징에서 상하이로 이주하여 해송양행을 설립운영하고 그의 수익금을 아낌없이 민족독립을 위한 군자금으로 조달하였다. 상하이에서 홍성린 선우혁과 손잡고 인성소학교를 설립함에 동참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료할 지음 상하이에 온 몽양 유정 서병호 이광수 선우혁 김순애 안정근 한원창 등과 독립의 큰 뜻을 모아 신한청년당을 결성함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여 유정은 지근거리에서 그를 동당의 부책임자로 추대하여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함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성사시켰다. 나라의 상징으로서의 신한청년당을 대표하여 외교력이 강한 우사 김규식을 한국의 대표로 선별 파견함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고 순리라고 역설하였다. 몽양도 이에 동조하고 우사를 최종적으로 대표로서 정식 파견하기에 이른 것이다.

송계는 나이 어린 유정을 특히 총애하여 동지들로 하여금 그의 고견을 잘 수렴하도록 각별히 당부한바 있다. 유정은 송계의 권유에 따라 임정을 구성함에 위로는 원로 독립지사 이동녕 이시영 이회영 조성환 등을 모시고 동지들로서는 최창식 신익희 이광수 윤현진 등을 포섭하여 20여일 만에 의정원 의원 29명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리하여 동 4월 10일 김 신부로에 모인 29명은 제헌의원이 된 것이다. 이들은 유정의 안내로 좁은 회의장에 임석하여 제1회 회의를 열었다. 여기서 국호관제 정부관원 임시헌장 등을 의결 선포함으로써 대한민국의 건국을 정식으로 성립시킨 것이다.

송계는 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다가 평남 중화군의 조사원으로 임명되어 그 지방의 유력자 재산가 학교 종교 실태 등을 조사하고 임정에 보고하였는데 이를 근거로 하여 임정은 독립운동을 전개해 나가는데 일조가 되었다. 그 중간마다 유정이 나서서 연락을 취하였으며 원로와의 소통과 부족한 정보를 보완하고 전달하는 임무를 도맡아 수행하였다.

1920년 11월 9일 대한거류민단 단원으로 교민의 자치와 복지향상에 크게 기여하여 유정도 그의 노고에 새삼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다시 한중호조사에 가입하여 한중 양 국민의 공동 항일전선 구축에 동참함으로써 두 나라 국민들로부터 크나 큰 존경과 칭송을 받았다. 중국이나 임정 요인들도 송계와 유정은 진정한 한 중 양국의 우호 증진과 국익을 위하여 절대적으로 필요한 인재라고 평가하였다.

그러나 정들자 이별이란 말이 있듯이 유정이 인촌과 고하의 권유로 서울 동아아일보사로 가게 되자 신한청년당의 동지들이 깜짝 놀란 것이다. ‘아니 유정이 임정을 마다하고 귀국하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고 하는가 하면 ‘동아일보사의 권유도 좋으나 우리임정의 앞길이 이제는 막막할 따름이요.’하고 절망감에 젖은 목소리가 한동안 임정 주변을 맴돌았다. 유정이 그만큼 임정 동지들로부터 신임이 두터웠었다는 증좌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고국의 동아일보도 독립운동 못 지 않는 중요한 나라사랑의 필요한 업무이기에 신한청년당의 동지 5명은 못내 아쉬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유정은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임정 청사를 머뭇거리고 있었다. 신한청년당의 동지들의 정성이 담긴 선물을 한 아름씩 유정에게 안겨주면서 석별의 정을 못내 감추지 못하고 말았다. 유정은 매우 애석해 하면서 ’동지들이시여 저는 지금 가지만 곧 특파원이 되어 이곳 상하이에 다시 올 것입니다. 부디 몸 건강하시고 더욱 힘차게 독립운동으로 보답하셔서 속히 완전한 국권을 회복해 주시길 두 손 모아 하나님에게 간구 기도드립니다.’하고 눈물의 작별을 고하고 황포강을 따라 고국으로 향발하였다.

이미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임정 선배동지 선우혁과 단장의 이별을 할 때와도 같게 유정은 눈물이 앞을 가려 한동안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송계(한진교)는 1977년 애국장을 추서 받았다.

유정은 귀국한 뒤에도 상하이의 동지들을 머리에 떠올리면서 아스라한 추억에 그리워하고 그들의 친절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독립동지의 혈연적인 인연이란 것이 혈육의 그것과도 같이 소중하여 이토록 깊고 넓은 연분이 오랫동안 내면적으로 지속되게 연속되리라고는 예전에 미처 몰랐었다고 추억하고 있었다.

그리운 그의 몸과도 같았던 임정의 동지들이 유정에게는 얼마나 평생 동안 귀중하고도 막강한 피의 인연을 맺어 주는지 몰랐던 것이다. 사실 유정은 돌아와서 동아일보사의 논설 기자로 인촌과 고하를 모시고 신문사에 매일 출근하며 근무할 때도 가끔은 상하이시절의 임정과 그리운 동지들을 떠올리곤 하였다. 그만큼 추억이 그립다는 뜻이기도 하였다. 유정은 그들의 기대에 보답하려는 큰 뜻에서 열심히 동사의 기자로서 항일 기사를 쓰고 일본인과의 투쟁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이처럼 임정시절의 신한청년당원 동지들은 끝내 잊을 수 없는 소중한 믿음의 벗이었다고 몇 번이고 되 뇌이곤 하였다. 임정의 동지들 중 가장 잊을 수 없는 분들이 신한청년당원이라고 생각하였다.

 

8. 결론

이상으로 유정의 임정 동지들 중 신한청년당원 들을 중심으로 한 소론을 마무리 한다.

유정은 서울에서부터 알고 지내던 몽양을 비롯하여 한진교 선우혁 장덕수 김철 등과의 교류를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고 신한청년당을 결성한 초창기 중심인물들과 유정과의 교류를 중점적으로 살펴보았다. 유정이 교류한 임정의 요인들은 임시의정원 의원 29명을 비롯하여 한중호조사 조직원, 상하이거류민단원들, 한국노병회원들, 독립신문사동지들 등 여러 부분의 동지들이 소중한 교우관계를 맺었다 .그 중에서도 난징에서 상하이에 온 이후 제일 먼저 결성한 단체가 신한청년당이었기에 그들을 우선적으로 취급한 것이다. 더욱 그들은 뒷날 임정의 기간요원이 되었기에 유정으로서는 가장 기억에 남는 우정을 교류한 못 잊을 선후배 동료동지들이었던 것이다. 유정은 뒷날 임정을 기억할 때 ‘내가 가장 애착이 간 동지들은 신한청년당의 선배, 동지들이었고 그들이 가장 정이 많이 든 애국동지들이었다.’ 라고 회상한 말을 종합해 보면 이 신한청년당의 동지가 제일 먼저 기억되었고 머리에 떠올랐던 것 같다.

40명 내외의 임정 요인들은 각개 약진하여 초창기에 결성한 신한청년당원 중 10여 명이 기간요원이 되어 그 뒤 당원을 다수 포섭 가입시킬 수 있었다. 임정이 수립 선포되기 전에는 한국을 대표한 단체가 곧 바로 이 신한청년당 뿐이었음을 감안하면 나라의 상징으로서의 이 당이 곧 한국의 상징이 된 것이다.

몽양이 최고 리더가 되어 그를 중심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선포 되기에 이른 것이다. 물론 최고의 원로 이동녕을 비롯한 이시영 조성환 이회영 등이 있었으나 유정의 애착과 기억에 남는 이들은 몽양 설산 일강 선우혁 한진교 등이 아니었을까 한다.

이들은 한 결 같이 상하이의 분위기를 알고 보니 군주제의 시행이 얼마나 후진적인 국가체제인가를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군주제의 국가체제로는 20세기 이후로 경쟁력이 떨어진다고 믿어 상하이를 중심으로 한 민주공화정체만이 세계적인 추세이며 신사회의 동력수단이 될 수 있다고 믿어 그렇게 나라의 정치체제를 굳혀 간 것이다. 50대의 이동녕과 이시영도 민주공화제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자는 안을 들고 고집을 보인일도 있었다. 이를 보면 상하이의 분위기는 벌써 민주체제로 굳어지고 있음을 짐작함에 무리가 없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매우 선진적인 혁명적의식의 보급이 이미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때의 정치체제는 매우 선진적인 앞선 선택이었던 것이다.

유정은 이를 중심으로 하여 독립운동을 신명나게 펼치고 있었다. 특히 몽양 등 5명의 동지가 유정을 각별히 아끼고 후원해주어 유정은 독립운동가로서 크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선배동료로부터 신임을 받아 신명나게 상하이를 중심으로 중국과의 외교관계도 고려하면서 한중 양국 간의 우호 증진에도 크게 기여한 것이다. 장제스가 유정의 공로를 치하하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유정의 임정에서의 기여도를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단지 아쉬운 것은 유정이 임정을 27년(1919~1945) 동안 지키지 않고 동아일보사로 전근 간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충청도 출신의정원 의원 유정은 다른 지역의 출신보다 신망과 의리가 남달리 깊고 넓어 동료나 선배동지들로부터 가장 촉망받는 독립운동가로 지목되어 있었다. 아마도 그것이 유정의 경쟁력이 아니었겠는가 싶은 생각이다. 몽양도 유정과의 돈독한 우정과 정치적 신망을 상호간에 조명하면서 생사를 초월하여 독립동지로서 사사건건 의론하고 타협하면서 소통과 타협 속에 독립운동의 방략을 제시하고 이를 실행해 나간 것이다.

더욱 설산의 각별한 존경과 교우를 가장 소중하게 여긴 것으로 보인다, 동아일보가 창간된 뒤 유정을 동아일보사로 오도록 인촌이나 고하에게 서슴지 아니하고 천거한 것을 보면 더욱 그와의 신의 우애가 남달랐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겠다. 그것은 그만큼 유정의 인품과 덕망 인망 그리고 인간미가 흘러 넘쳐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유정은 60평생을 오로지 나라를 찾는 일에만 집착하여 가족이나 친인척을 돌보지 않았던 사실도 국가를 우선시하였다는 선공사후적(先公私後的)이라는 인촌의 좌우명의 교훈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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