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유도복
김선강
어느 날 장롱 속을
열다가 본
곱게 접혀 있는 유도복
누구의 것일까
연탄처럼 검은 검정 띠에
이름 석 자 보이네
누군가가 정성 들여 달아 놓은
노오란 이름 석 자
이유 없이
접혀 버린 꿈의 날개
그래서 아버지가 가끔 외로웠나 보다
이야기 하나(나의 이야기)
찬바람이 제법 무섭게 불어대던 대학교 4학년 늦가을 어느 날, 아버지가 내 곁을 갑자기 떠나셨다.
눈을 마주친 채 안녕이라는 마지막 인사도 못 나누었다.
'너는 아빠 목소리가 궁금하지도 않니? 전화도 없니...'라고 남기셨던 음성 사서함의 목소리가 그렇게 마지막이었다.
다른 지역으로 전근가셔서 가족들과 떨어져 지내셨던 아버지,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기 위해 들린 아버지의 자취방에 남겨져 있던 마늘다지기, 혼자서 그 작은 부엌에서 끼니를 준비하셨을 그의 모습이 떠올라 한참을 울었었다.
아버지는 고등학교 선생님이셨다. 그야말로 딱 선생님, 우리 3명의 딸들에게 누구보다 엄하셨고 가르침이 분명한 분이셨다. 남들에게 절대 피해를 주지 말아야 한다고 항상 말씀하셨고, 늘 단정한 옷차림에 말 표현 하나하나 예의바르게 행동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고향을 떠나 강릉에 정착하신 아버지는 참 곧고 외로운 분이셨다.
이제 나이가 드니 그 때는 결코 이해하지도, 이해하고도 싶지 않았던 아버지의 삶이 보인다.
나는 교무실 아버지 책상에 놓여 있던 전자계산기를 아직도 가지고 있다. 시 속의 유도복처럼 아버지를 떠올리게 한다.
마늘 다지기, 전자계산기....
이야기 둘(수업 이야기)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시이다. 최고라는 것은 다른 것과 비교하여 우월하고 탁월하다는 뜻일 것이다. 시의 형식과 의미, 주제 등을 살펴보아 어느 하나 뒤처지지 않아야 함이다.
나에게는 이 시가 이미 답으로 정해져 있었다. 국어 교사로서 질문과 회의가 늘어가던 몇 해 전이었다. 시낭송으로 여는 국어 수업을 시작하면서 과연 이 활동이 학생들에게 의미가 있는 일인가? 괜한 시간 낭비가 아닌가 하는 약간의 망설임이 있었던 시기인데 이 시로 인해 지금까지 그 수업을 이어 올 수 있었으니 내게는 충분히 최고의 시이다.
시낭송 수업의 시작은 ‘시집 읽기’부터 시작했었다. 그러려면 우선 학생들이 읽어야 할 시집을 선정해야 하는데 중학교 아이들의 수준에 맞는 시집을 선택하기까지 약간의 시행착오도 있었다. 처음에는 무조건 ‘좋은 시, 유명한 시인의 작품,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시’를 선택하고 아이들이 그 의미를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함에 안타까워했다. 아이들이 감성이 메말라 시를 제대로 읽지 못한다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종류의 시집들 속에서도 아이들이 고른 시들을 함께 듣고 이야기를 들으면서, ‘문학사적인 의의’와 ‘감상’ 사이에는 큰 괴리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시의 내용이 가볍다고 결코 감상도 가볍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선생님이 추천한 시가 반드시 친구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시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매일 한 명씩 자신이 선택한 시로 수업을 시작하는데, 학생들은 시와 어울리는 음악을 시낭송 배경 음악으로 골라 와야 했고, 시를 선택한 이유와 관련 있는 이야기를 발표해야 했다.
‘아버지의 유도복’이라는 시를 슬픔을 억누르면서 한 글자 한 글자 읽어 가던 그 아이, 마지막에는 눈시울이 붉어져서 자신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꺼내기 힘들어 했던 그 아이와 함께 그 공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함께 진심으로 마음을 나누었다. 불과 2주 전에 그 아이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이 시의 의미를 더욱 강렬하게 받아들이게도 했겠지만, 단순히 그것 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접혀 있는 유도복을 보며 아버지의 사라진 꿈을 떠올렸던 시인과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아버지와의 추억과 사랑을 그리워했던 한 아이가 이 시를 통해 위로받을 수 있었다. 시를 함께 나눈 우리도 위로받고 그 아이의 슬픔에 진정한 위로를 건넬 수 있었다.
문학과 시의 역할과 의의에 대한 질문은 그 날 이후로 명쾌해졌다. 시는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읽히고 공감할 수 있을 때 힘을 갖는다. 그것이 나 혼자만의 공감과 위로가 아니고 타인과 함께 할 때 더욱 최고의 힘을 발휘한다.
최고의 시는 혼자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 울림을 주고 공감하며 함께 나누는 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