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기행 첫째 날 저녁, 보은의 북실과 삼년산성을 거쳐 장내리까지 해월 선생과 동학의 교조신원운동이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 보국안민(輔國安民)을 기치로 내건 사회운동으로 확대된 배경, 그리고 안타까운 혁명 좌절의 과정에 대해 표영삼 선생께 생생하게 전해 들었다.
표영삼 선생께서 수십 년 발로 답사하고 자료를 연구하고 주민들에게 청문하면서 그나마 이 정도라도 근거를 남긴 덕에 우리들에게까지 사실들이 전해지고 있다고 생각하니 선생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가 더욱 새롭게 다가왔다.
다음은 답사 첫째 날인 2005년 3월 26일 토요일, 일행이 하룻밤 묵어간 구병산마을, 문화관에서 저녁 8시부터 한 시간 남짓 진행된 표영삼 선생의 강의 내용 초록이다. 훨씬 더 풍부한 내용을 말씀해주셨지만 여시아문(如是我聞)은 늘 받아 적는 사람의 수준에 따라 그 한계가 지어진다는 점을 대단히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
단양 송두둑 여규덕가에서 용담유사 간행
내일 갈 앞재에서 해월선생 말씀하신 것 몇 가지만 짧게 이야기 하겠습니다.
원래 해월선생은 앞재에 오시기 전에 단양에 꽤 오래 사셨습니다. 구 단양이라고, 아까 식사한 음식점에 사인암 사진이 있던데, 거기서 들어가는 대강면 천동리 끝자락인데, 중간에 송두둑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언덕위에 소나무가 꽉 차있던데 그래서 송두둑이라고 했나 봅니다. 인제에 계실 때 동경대전을 내고, 인제 분들이 돈을 보내줘서 천동리 송두둑 여규덕의 집에서 용담유사를 냈습니다. 여규덕, 여규신 두 형제가 있었는데, 여규신씨는 여운형씨의 할아버지였고, 그 아드님은 기독교로 개종했습니다.
25년 전, 겨울에 거길 찾아 갔는데 눈이 많이 와서 대강면까지만 버스가 들어가고 더 이상은 못가더군요. 눈길을 걸어서 물어가며 여규덕 선생댁을 찾아갔는데, 마침 환갑잔치에 모인 예순 넘는 노인 몇분이 계셔서 물었더니, 여기다 저기다 하고 네 가지 주장이 엇갈리더군요. 현장에 가보니까 그 근방인건 분명한데 어딘지 확정하기 어렵웠습니다.
몇 해 뒤에 가도 마찬가지더군요. 15년 지난 다음에 거기 표지석을 크게 만들었는데 ‘용담유사를 아무 해에 해월선생 주장으로 몇 부 냈다’고 만들어 세웠는데, 마을 이장이 정확히 모르니까 마을 입구에 세운 것입니다. 요전 강의 시간에 말한 것처럼 필사본과는 달리 인쇄한 경전을 내고 권위가 높아졌지요. 사람들도 해월 선생을 많이 찾아왔습니다. 사람이 많이 몰리니까 관의 탄압이 심해집니다. 그러면 해월선생은 꾸물대지 않고 바로 보따리를 들고 떠납니다.
가섭사에서 손병희를 후계로 인정
송두둑을 떠나 전라도 사자암에 가셨다가, 공주 마곡사 지나 가섭암이라는 암자에 가 계셨습니다. 21일간 가 계신 것으로 압니다. 보은의 황하일, 전봉준의 스승이라는 서장옥, 이분은 해월선생의 사돈입니다. 해월선생의 아들 덕기와 서장옥 선생의 따님이 결혼을 합니다.
학자들 중에는 두분이 서로 사이가 틀어졌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런 일은 없었고 서장옥은 끝까지 해월선생을 모셨습니다. 해월선생은 가섭사에 수행하러 들어가시고, 가족들을 로 모십니다. 가섭사는 거의 다 올라가봐야 집이 있는 게 보입니다. 뒤에 바위 밑에 물이 꽤 많이 나옵니다.
저도 젊을 때 절에 수도 한다고 가본 적이 있는데, 항상 식량 보급이 문제입니다. 깊은 산중에서는 져 나르기가 더욱 힘듭니다. 찬거리는 짜게 절인 게 다지요. 가섭암에는 준비하고 간 게 아니라서 먹을 거리를 계속 사다 나르는데, 일행 중 나이가 어린 손병희 어른이 꽤 먼 유구 장까지 계속 다녔습니다.
해월 선생은 한번에 다녀와도 될 일을 계속 반복해서 심부름을 시킵니다. 일부러 그랬답니다. 손병희 어른이 성질을 안 부리고 계속 잘 다녔습니다. 또 하루는 솥을 부뚜막에 거는데, 애써 솥을 걸고 나면 틀렸다며 몇 차례나 계속 다시 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의암이 그 뜻을 알고는 싫은 내색을 않고 척척 해냅니다. 한참을 그러고 나서 ‘그만하면 쓰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뒤로 두 분은 더욱 깊은 사제간이 되는 겁니다.
송두둑을 떠나 6년 동안 가족들과 헤어져 떠돌아다니게 됩니다. 곁에서 김씨 사모님을 얻어서 결혼을 하시라고 자꾸 권합니다. 예전에는 옷을 빠는 게 보통일이 아닙니다. 통 빨래를 하는데 옷감을 다 뜯어서 빨고 다시 꿰매고 다리고 하는데 해월선생은 부인이 없으니까 이 제자 저 제자 부인들이 돌아가면서 하는데 귀찮기도 하고 선생이 혼자 사시니까 생활이 말이 아닙니다.
사방에서 부인을 얻으라고 재촉을 합니다. 김씨 사모님은 한번 결혼을 했었고 딸이 하나 있는 분으로 안동 김씨 입니다. 이분과 결혼을 하십니다. 그러나 김씨 사모님은 내일 가보게 될 앞재에서 돌아가십니다.
그로부터 3년 뒤에 또 다시 결혼을 하시게 됩니다. 손병희 어른이 누이 동생을 해월과 결혼 시키자고 하니까 다들 찬성했습니다. 외모가 빼어난 것은 아니지만, 성품이 좋고 음식 솜씨도 좋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해월 선생은 노인네가 무슨 재혼이냐고 역정을 내고 반대 하십니다. 해월 선생은 63세였고, 손씨 부인은 26살이니까 연령 차이가 많았습니다.
손씨 부인이 결혼할 때 해월 선생에게서 ‘영감 냄새가 나더라’고 했답니다. 늙으면 사람 몸에서 냄새가 나지 않습니까. 해월 선생의 첫 부인은 나이가 어떻게 되시는지 기록이 없습니다만 이분도 손씨였습니다. 해월 선생과 연세가 비슷했을 겁니다. 1900년에 돌아가시는데 그 때까지 손병희 선생의 누이가 해월 선생의 첫 부인을 시어머니 모시듯이 깍듯이 모십니다.
이렇게 해월 선생께는 세 분의 부인이 계셨습니다. 나중에 해월 선생의 손자 최익환이 자기 친 할머니 묘만 남기고 나머지 두 분의 시신을 화장해 버렸습니다. 손병희 선생의 누이인 세 번째, 손씨 사모님 묘는 여주 금사면 주록리 해월 선생 묘에 같이 있습니다.
해월 선생은 늘 쫓겨 다니다 보니까 무슨 고리짝이라도 매고 다니는 게 아니라 겨우 작은 보따리 하나 들고 피해 다녔습니다. 이 때문에 최보따리라는 별명을 얻습니다.
해월은 앞재에서 장내리로 나오시게 됩니다. 장내리에 도소가 설치된 것은 사통오달 영남 호남 경기 강원으로 가는 길이 편리해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갑신정변 등으로 세상이 혼란스러울 때 민 중전(민비)에게, 개화파의 비밀 정보를 갖다 주던 신상훈이 충청 감사로 내려오고, 최희진이라는 자가 단양군수가 내려와서 동학을 압박합니다. 이 때 단양에서 강수 선생이 잡힙니다.
해월 선생은 마곡사 근처 가섭사에 숨었다가 멀리 달아납니다. 이렇게 한 것은 고비원주(高飛遠走)하라는 수운 선생의 당부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언제나 도 경계를 넘어서 멀리 가시는데, 이번에는 경상도 영천 땅 ‘화계’로 가셨다고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화계라는 동네를 찾으려고 꽃 화(花)자 들어간 곳을 다 뒤져봐도 좀처럼 없습니다. 실제로는 영천이 아니라 경상도 영일군 기개면에서 '꽃내'라는 곳은 아무데도 없어서, 이게 불화자일 수도 있겠다 샆어 '불냇'을 물어보니까 한 골짜기 마을이 있는데 옛날에 원(院)이 있던 자리라고 합니다. 화계동은 불냇인데 한자 표기로 花谿라고만 되어 있으니까 그걸 찾기가 어려웠던 겁니다.
앞재에서 내린 위생준칙
해월 선생이 처음 앞재에 오실 때 9월 달에 쫓겨와서 음력 11월이 되도록 여름 옷을 입고 떨고 계셨다고 합니다. 이치흥 어른이 무명 7필을 갖다 줍니다. 한 필은 스무 자인데 옛날 무명은 폭이 좁습니다. 이걸로 옷과 이불을 해서 겨울을 납니다.
여기서 자리를 잡고 안정이 된 후 여러 가지 설법을 하십니다. 시대가 혼란하니까 사람들이 많이 찾아옵니다.
선생은 위생에 각별히 신경 쓰라는 ‘위생준칙’을 내립니다. 위생준칙이라는 말은 기록하는 사람들이 만든 용어겠지만, 아무튼 그런 설법을 하십니다. 찬밥과 더운밥을 섞지 말라, 개숫물을 함부로 버리지 말라, 가래침을 아무데나 뱉지 말고 길에서 뱉게 되면 반드시 묻어라, 부엌을 항상 깨끗이 하라, 목욕재개하고 수련하라는 등의 말씀을 하십니다. 금년에는 기운이 안 좋아 병이 돌 것이라는 말씀도 붙여서 하셨다고 합니다.
그해 7월 정말로 콜레라가 돌아 엄청난 희생이 납니다. 정신문화연구원에서 낸 연대표에 보니까 그 해에 콜레라가 유행해서 8월에 찬바람 불고서야 멈췄다고 합니다. 이건 교중의 기록과 일치 합니다. 10월쯤 가니까 ‘동학을 하면 콜레라도 안 걸린다’는 소문이 돌아 사람이 더 많이 몰려옵니다.
내가 어릴 때 일본 순사들이 위생 검열을 하고 다녔습니다. 칼을 차고 와서 집집마다 돌면서 지저분한 게 있으면 뺨을 때리고 엄격하게 하는데, 천도교인 집은 검사도 안했습니다. 천도교에서는 가마솥과 도마를 늘 깨끗이 하라고 했습니다. 한울님이 보고 가시다가 부엌을 깨끗이 해야 복을 놓고 간다는 말씀들을 하셨습니다. 누가 복을 주고 그런 건 아니지요. 그러나 늘 그런 말을 새겨듣고 위생에 신경을 썼습니다.
사람들이 모여드는데, 그 중 대부분은 치병을 하려고 그랬을 겁니다. 지금은 운동이 어떻고 신념이 어떻고 하지만 옛날에는 다들 치병구복(治病求福) 하려고 그랬습니다. 세상이 어지러울 때 다른 신흥종교들도 대개 그랬습니다. 아무튼, 교도가 많이 늘어났습니다.
영부를 금하다
앞재에 오신 몇 해 뒤, 김씨 사모가 병으로 돌아가십니다. 영부는, 주문을 쓴 걸 태워서 물에 타서 마시는데, 이게 사람의 신념에 따라 효과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었던 모양입니다. 김씨 사모는 영부를 썼지만 잠시 차도가 있다가 결국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해월 선생은 그 이후로 영부를 차츰 권하지 않다가 노년에는 아예 하지 말라는 금령을 내립니다. 김씨 사모 무덤은 앞재 저수지 뒤에 있었는데 화장하고 묘를 없앴기 때문에 이제 아무 자취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또 이곳에서 천주직포(天主織布)를 말씀하십니다. 서택순이라는 분 댁에서 들러 점심을 먹는데 식사를 마칠 때까지 베짜는 소리가 계속 들려옵니다. 촌에서는 가마솥에 불을 때서 밥을 하니까 꽤 오랜 시간이 걸렸을 텐데, 해월선생은 계속 베틀 소리가 들려오니까 마음이 쓰이지 않았겠습니까. ‘누가 베를 짜는가?’ 하고 물으니까 서택순이 ‘저희집 며느리가 짭니다.’ 대답합니다. ‘며느리가 짜느냐, 한울님이 짜느냐’고 다시 묻습니다. 무슨 말인지 몰라서 서택순이 대답을 못하더라고, 말씀을 앞재에 와서 사람들에게 다시 하십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질문을 던지고는 결국 답을 말씀하시지는 않습니다. 해월선생은 대개 그랬습니다. 답을 직접 말씀하시지않고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하게 하신 겁니다. 여러분도 상상력을 발휘해서 직접 답을 구해보십시오.
김씨 사모를 송두둑에서 모셔와 살림을 하는데 집에 좁아 사람들이 자주 모이질 못합니다. 원래는 좁았던 집이 아닌데 왜 좁아졌는가? 첫째 사모님 손씨 부인이 딸 셋을 데리고 오신 겁니다. 집이 좁아진 겁니다. 교중 기록은 신비하게 써놨는데 저는 안 믿습니다. 어느 날 문을 열고 나가니 첫째 부인 찾아와서 버선발로 나가 모셔오셨다고 합니다. 이걸 보고 김씨 사모님이 질투가 나셨다고 합니다. 할 수 없이 장내에 따로 살림을 냅니다.
또 이곳에서 “사람이 오면 사람이 왔다고 하지 말고 한울님이 왔다고 하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장사를 해도 그렇고, 관청에도 그렇고 교인 관계도, 편향되게 하면 대접을 못 받습니다. 얘기를 들어주는 것을 누구나 좋아하는데, 이게 쉽지 않습니다. 저도 그걸 잘 못합니다. 남의 얘기 들어주기가 고역입니다. 틀린 얘길 하면 끊고 자기 말을 하게 되는데, 나불거리지 말고 잘난 척 하지말고, 지는 척 하고 들어주라는 말씀을 하셨습십니다.
'네다바이’라는 말이 있지요. 그건 대개 똑똑한 사람들이 걸려듭니다. 어리숙한 사람은 경계심이 있으니까 안 걸려듭니다. 상대가 어리숙해보이니까 네가 뭘 어쩌겠냐 하고 얕잡아보다가. 어릴 때부터 봐도 똑똑한 사람이 걸려듭니다.
이중적 세계관을 부정한 향아설위
포덕 19년 1877년, 정선에 가서 개접하십니다. 개접은 파접한 것을 다시 잇는다는 것인데, 어떻게 하는가 하면 지금처럼 토론을 하는 겁니다. 오지영이 기록에 보면 남쪽에서 싸운다고 해월선생에게 화해를 시키려고 뛰어 왔다고 하는데, 그 분은 접주도 아니고 그런 위치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 얘길 하니까 해월 선생은 ‘도소에 가서 얘기 하라’ 고만 말하고 아무 말도 안하십니다. 해월선생의 스타일이 그렇습니다. 언제나 의논하고 다수의 의견을 모아서 오라고하지 직접 의견을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장내 보은 취회도 교조신원을 넘어서 동학의 신념체계에 보국안민을 내세워 동학을 사회화하는 과정이니까 무척 신중하게 접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곁에서 7월부터 하자고 하는데 좀처럼 대답을 안 하십니다. 10월에 가서야 추수 끝나고 시작하게 하시지요.
시천주(侍天主), 한울님을 언제부터 모시는 것인가, ‘포태할 때’부터인가, ‘낙지(落地), 즉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인가, 수운 선생처럼 깨달았을 때부터인가 생각해보라고 질문을 던지고는 끝내 대답을 주지 않습니다. 토론을 했겠지만 결론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천도교 기록에는 직접 언행을 기록한 게 없습니다. 수운, 해월 선생이 직접 쓴 것은 남아 있는데 언행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여시아문(如是我聞) 하듯이 해놓으면 좋은데, 기록이 없습니다. 강수 같은 분도 문장가인데 자기 의견만 써놓았지 해월선생이 직접 어떤 말을 하셨다는 것은 써놓지 않았습니다.
1920년에 와서야 무슨 말을 들었다는 말이 여기저기서 막 나옵니다. 그런데도 시천주를 어떤 시점부터 한 것으로 보는가에 대해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는 영 기록이 없습니다.
1872년에 향벽설위, 향아설위에 대해서도 물음을 던집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훗날 71살이 되신 후, 1897년, 앵산동에서 상다리 돌려놓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몸 안에 조상의 모든 유전정보가 함축돼 있지 않습니까. 내가 직접 돌려놓아야겠다고 결심하시고, 이건 대답을 해놓으신 겁니다.
여기까지 주로 앞재에서의 해월 선생 설법에 관한 강의를 마치고 질의 응답을 진행했다.
질문 : 향아설위(向我設位)는 위패를 거꾸로 돌린다는 말입니까?
아니, 위패가 내 마음 속에 들어온다는 겁니다. 위패는 없어지는 거지요. 지난 시절의 생각들 중 바꿀 게 뭐냐, 삶의 틀이든, 정신세계든 ‘저 세상’이 있다는 문화는 이중세계를 만들어 놓은 겁니다. 현실을 감성세계, 저세상을 초 감성세계라고 한다면, 해월 선생은 이걸 모두 부정합니다.
오랜 동안 지속돼온 인류의 생각의 틀, 저 높은 곳에서 무엇을 규정해서 내려보내 준다는 생각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수운선생께서 “천상에 상제님이 옥경대에 계시다고 보는 듯이 말을 하니 음양이치 고사하고 허무지설 아닐런가” 하신 것처럼 해월선생도 이런 이중 세계관을 부정 하는 겁니다. 조상님이 계시다고 초혼하고 상차려서 제사지내는 그 의식을 부정하신 겁니다.
나는 살고 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어찌되었든 살고 있는데, 생명의 본성은 어떻게든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자살은 이성의 작용으로 행하는 것이지만 어쨌든 생명은 살려고만 합니다. 다만 이성을 가진 인간은 ‘어떻게’를 고민합니다.
공동체를 염두에 두는가, 내 멋대로만 살려고 하는가를 두고 갈등이 옵니다. 공동체는 가족, 이웃, 국가, 세계로 확대되겠지만 일차적으로는 가족 공동체가 있겠지요. 값어치 있게 산다, 참되게 산다, 뜻있게 보람 있게, 이런 말들은 막연할 수도 있습니다. 제멋대로가 보람 있다면 그렇게 사는 거고 공동체 속에서 보람을 찾으면 그렇게 살려고 하겠지요.
사람이라는 존재는 껍질에 싸여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 지식의 높낮이, 국가와 사회적 신분이런 지위 가 나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런 조건은 운명적으로 규정된 조건인데, 의식으로라도 이것들을 다 벗기고 나면 우리는 인간이라는 동일한 지평 위에 놓입니다. 여기서 생각을 넓히면 모두가 하나의 생명이라는 지평에 놓입니다.
생명은 세포라는 기본적인 개체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세포는 신진대사를 통해 살지 혼자는 절대로 못살잖아요. 태양계, 빛, 공기, 자유 에너지의 순환이 없으면, 태양계 뿐만 아니지요. 온 우주의 순환을 떠나서 혼자서 산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가치 판단에는 생명과 더불어 살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겁니다.
제사를 지내는 혼령이 인격을 가지고 떠돌아다닌 다는 이중적인 세계관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조상이 계신다면 조상께 씨를 물려받은 내 안에 조상님이 다 계시는 것입니다. 지방을 떼어 버리고 조상이 내 안에 있다고 보고 제사상을 나를 향해 돌려놓으라고 말씀하신 겁니다.
여기서 두 가지 물음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마음으로 생각하면 되지 뭐 하러 요란하게 상을 차려놓느냐는 겁니다. 그 당시 사람들의 머물러 있던 생각을 감안하면, 인간의 정리를 벗어버리기 어려우니까 제사상을 차려놓는 거지요. 일부 교인은 물을 차려 놓는 데 그것도 상징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겠지요. 해월선생은 수운선생 제사는 지냈는데 당신 조상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왜 그러셨는지, 기록만 없는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세계를 어떻게 보고 살 것인지, 그것은 자기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두 갈래 길에서 오른 쪽으로 갈 것인가 왼쪽으로 갈 것인가, 그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게 인간의 삶 아닙니까. 결단하는 것입니다. 일본말로 가께라고 하는데 무엇에다 운명을 걸 때, 결단하는 겁니다. 인간의 삶은 결단하는 겁니다. 어느 한 쪽을 선택한다고 곁에서 누가 비판해도 소용없습니다. 다만 결정할 때 공동체를 생각해야 합니다.
아나키스트들은 국가권력이 생명과 자연의 흐름을 가로막는다고 보았습니다. 국가권력은 결국 어떤 계급이 다른 계급을 지배하기 위한 도구라고 보는 겁니다. 권력은 자연의 흐름이 아니다. 아나키스트들은 미국과 한국, 나라마다 구체적인 주장은 조금씩 다르지만 공동체 운동으로 가는 것은 막지 않습니다. 최소한 공동체를 떠나서 뜻있고 보람 있는 것을 찾기 어렵습니다. 자기만을 내세우는 것은 극복해야하지 않을까, 결단을 하되 공동체를 돌아보면서 해야 합니다.
질문: 시천주를 어느 시점부터 하는 것인지에 대해 말씀하신 것과 관련해서 보충 설명해주십시오. 포태된 순간부터 시천주 한 것이라고 본다면 요즘 낙태 반대논리와도 관련이 있다고 여겨집니다.
1871년 정선 별어원에서 말씀하십니다. 청량리에서 기차타고 영월로 해서 정선에 갑니다. 정선에 오일장이 섭니다. 사북사건이 난 곳이지요. 나라와 언론에서 조작하고 과장한 한 사건이도 합니다.
아무튼, 그곳에 구절리에서 가는 작은 철도길이 있고 작은 역이 셋 있는데 그 첫째가 별어역 다음이 신평 그 다음에 정선이 있습니다. 별어 가기 전에 유인상이라는 분이 사셨는데 거기서 말씀하셨습니다. 언제부터 시천주 됐다고 생각하느냐. 향아설위에 대해서는 말씀을 주시고 훗날 71살 때 스스로 답을 주셨지만 이 문제는 답을 안 주셨습니다. 수운 선생의 천에도 해석이 없습니다. 천은 뭐라고 규정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무(無)도 아닙니다. 무라고 하면 유(有)의 반대이니까 어떤 존재 규정이 있는 거지요. 신 관념이라는 말씀은 하십니다. 신 개념이나 신 속성이 아니고, 속성은 구체적인 사물의 성질이니까 말입니다. 다만, 규정지을 수 없지만 느낄 수 있다는 말은 나옵니다. 글쎄, 무슨 말인지 깊은 뜻은 모르겠고...
질문: 접주 중에 여성접주도 있었습니까.
요즘에는 있는데, 예전에는 보질 못했습니다. 혁명 때 여걸은 장흥에 김 조위라는 김소사라고 있었는데, 그 양반이 말도 타고 다니고 요란했다고 일본 기록에 나옵니다. 진법을 구사하면서 대오를 지휘하고 대단했는데, 유생들은 ‘미친년’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나중에 붙잡아서 유생들이 어떻게 지독하게 때렸던지 뼈가 다 드러났습니다. 그 지독한 일본군이 이렇게 비참하게 때릴 수 있나 하고 놀랄 만큼 아주 처참한 모습으로 죽었습니다.
요즘에는 책임자를 여성으로 하고 교령도 그래야 한다고 말하는데 그만한 조직력을 보이는 분이 나오시면 그렇게 되겠지요.
더 이상 시간을 늦출 수가 없어 답사 도중에 펼친 강좌는 여기서 마감 할 수밖에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