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독교회사 34
(신사참배 반대운동 2)
신사참배 강요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과정에서
제일 우선 순위에 둔 것이
기독교 학교였다.
공립학교에서는 신사참배가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미션스쿨의 경우는 그렇지 않아
선교사들은 방향을 결정해야만 했다.
북장로교 전체의 정책결정을 책임져야 할
호트크로프트는 총독부가 신사참배를
여러가지 명목으로 기독교 학교에
강요한 이상 학교 설립의 근본인
기독교 자체가 위험에 처할수 있기 때문에
당연히 기독교인의 양심에 기초하여
신사참배를 거부하였고
그 결과 선교사들 스스로 세운 학교를
스스로 폐쇄하게 되어
이 중대한 결정을 한국 교회와 선교사들,
미국 선교본부가 일치하여 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교장에서 파면당한 매큔 선교사는
당당하게 맞섰고 상당수의 신앙인들이
신사참배의 강요앞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들의 신앙 양심을 충실하게 지키며 맞섰다.
또한 몇몇 미션스쿨은 타협하지 않기 위해
문을 닫기도 하였으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적지 않았으며
사실 타협하는 사람들이 반대하는 사람들보다
더 많았다는 것이 당시의 현실이었다.
한국주재 미국 선교사들이
매큔 선교사처럼 모두 신사참배를
반대한 것은 아니다.
원한경(언더우드 선교사 아들)은 선교사역에서
학교가 꼭 필요하고 신사가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신사참배를 거부할 이유가 없으니
신사참배를 하면서 학교운영을
계속 할 것을 주장하였다.
최경례는 신사참배가 머리와 몸을 약간
구부리는 것이므로 결코 앉아서 절하거나
엎드리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한국 천주교 역시 신사참배는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애국적 행사이므로 신사참배를 허용한다는
교황청의 발표로 신사참배를 공식화하였다.
바티칸 교황청의 이러한 결정은
다분히 정치적인 고려에 의한 것이었다.
당시 바티칸 교황청은 일본과 일찍부터 관계를 맺어
1919년 도쿄에 교황청 대사관을 설립했고
1942년까지 3국 동맹을 맺은
독일 이탈리아 일본(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나라)과
외교관계를 맺었으나
연합국 중에서는 어떤 나라와도
외교 관계를 맺지 않았다.
또한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했을때에도
국방헌금을 일본 외무성에 보냈을 뿐 아니라
일본에 적극 협력하도록
극동의 모든 천주교회에 지시했다.
감리교 역시 신사참배를 종교적 의미가 없는
애국적인 행위로 보고 신사참배를 허용한다.
결국 미국 남, 북장로교에 속한 미션쿨과
호주 장로교 미션스쿨은 폐교를 결정해
미국 남장로교에 속한 10개의 학교와
6개의 병원, 북장로교 소속 11개 학교와
호주 장로교 소속의 학교는 폐쇄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