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대마도는 부산에서는 49.5KM 떨어져 있고, 일본 본토(쿠슈)의 후쿠오카에서는 138KM가 떨어져 있으니 일본 보다는 우리나라에 더 가까운 섬! 그래서 그런지 옛날부터 일본과 한국을 잇는 가교역할을 한곳으로 면적은 708.66KM2로 거제도의 1.7배, 울릉도의 10배 크기이며 일본에서 3번째로 큰섬이다.
대마도는 본섬 상하 2개외에 107개의 크고 작은 섬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그중에서 유인도는 5개뿐이고 섬중 약89%는 산악으로 산림자원이 풍부하며 오염되지 않은 원시림이 잘 보존된 곳이다. 현재 인구는 37,788명정도로 대마도의 중심지인 이즈하라에 약 16,000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스씨마시로 6개정(町)으로 형성된 나가사끼현에 속한다.
1975년 개통된 쓰시마공항에는 항공편(일본국내선)이 후쿠오카에서 1일 5편(50분 소요), 나카사끼에서 5편(35분)이 있으며 후쿠오카, 나까사키등에서 들어 오는 선편도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부산 국제여객터미널과 이즈하라항과 히타카나항간에 운항중인 "대아고속해운(051-469-9185)"의 "씨플라워호"와 "드림플라워"가 운행한다. 요금과 운행시간은 대아고속 회사로 직접문의 바라빈다.
섬내 해수욕장은 미우다 해수욕장, 아오시오노사또 오우라 해수욕장, 미쯔시마정 해수욕장, 이쿠찌 하마 해수욕장등 4개가 있고, 유명한 산은 야타테 산(645.5M), 아리아케 산(558.2M), 시로 야마(275.0M), 오오토리케 산(555.0M), 시라타케 산(515.3M) 등인데 그중에서 으뜸은 짙은 초록색 숲속에 우뚝 솟은 하얀 바위산 정상이 일품인 시라타케산(白嶽山)이다.
시라타케산은 이즈하라 시내를 벗어나 북쪽으로 조금 가면 산행기점이 있으며 입구에는 안내표식이 있었다. 시라다케산은 일본계와 대륙계 식물이 골고루 분포돼 아름다운 혼효림을 이루고 있었고 원시림이 잘 보존돼 있어 일본의 국가지정 천연기념물로 돼 있었다. 산의 정상부에는 큰 암석이 불쑥 튀어올라 신비로움을 더하고 있었으며, 정상에서는 대마도 섬전체가 한눈에 들어오고 날씨가 좋은 날은 부산과 거제도 섬이 보인다고 하는데 날씨가 좋지않아 불행하게도 볼수는 없었다.
산행 초입은 등산로가 비교적 완만하게 시작되다가 능선쯤에서부터는 가파른 계단과 바위 길로 되어 있었다. 정상은 너무 비좁아서 여러 사람이 서 있을수가 없을 정도이며, 정상에 도착하는 대로 기념사진을 찍고 뒤에 오는 사람들이 올라올수 있도록 내려오는데 한10분쯤 되내려오다 갈림길에서 전망대 쪽으로 방향을 잡아 하산하는데 길이 경사가 완만하고 적당하게 그늘도 있어서 산책로를 걷는 기분이었다. 올라갈때는 약 한시간정도 소요되었지만 하산은 능선길로 해서 두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이 지방 사람들은 등산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지 우리가 산행을 하는 동안 현지인은 한 사람도 구경을 못하였다. 그리고 어떤 곳은 숲이 너무 울창하여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운 곳도 있었다.
대마도를 둘러보고 느낀점은 깨끗하다는 것이었다. 길거리에 청소부가 없고 쓰레기가 보이지 않아(등산로도 마찬가지) 가이드한테 청소부가 보이지 않는다고 했드니 버리는 사람들이 없으니 당연히 줍는 사람이 필요하지 않다는 설명이었다. 그런데 한군데, 유일하게 해수욕장에서 쓰레기 두개를 발견하였는데 한개는 "오양맛살" 포장지이고 한개는 우리나라 "막걸리"통 이었다. 한글도 선명한 우리나라 쓰레기였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여름 태풍으로 인하여 우리나라 해안에 버린 쓰레기들이 파도에 휩싸여 일본으로 떠 내려와 일본정부에서 우리나라 정부에 공식항의까지 한바 있으며 부산외대에서 쓰레기 치우려 간다는 기사를 본적이 있습니다. 제발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지 마십시요. 국제 망신감이니까요...
두번째는 자가용이나 택시는 전부 소형차 뿐이며 교통질서를 잘 지킨다는 사실입니다. 서로 양보하고 클락션을 울리지 않는 선진 교통질서를 배우고 온것 같습니다.
그리고 "독도는 우리땅"인가의 노래가사가 잘못되엇다는 사실입니다.
노래가사에 의하면 "독도는 우리땅, 대마도는 일본땅."을 "독도는 우리땅, 대마도도 우리땅"으로 고쳐 불러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우리 선조들이 잘못하여 우리땅 대마도를 일본이 관리하고 있다는 사실도 뼈아픈 교훈이었습니다.
*대마도가 우리땅이라는 사실 안내
대마도는 고려 때부터 우리의 속령이었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고려 문종 36년(1083)부터 공민왕 17년(1368) 사이 대마도에서 사신을 보내 방물(方物)을 바친 기록이 있다. ‘해행총재(海行摠載)’는 조선 초 신숙주(申叔舟) 등 17명의 관리가 통신사로 일본에 다니면서 남긴 기록물이다. 이 기록에 따르면 “삼국 시대에 이미 일본에 사는 왜인(倭人)들은 대마도를 외국으로 보았고, 대마도 사람들은 스스로 반(半)조선인으로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대마도가 우리의 영토였다는 사실은 여러 문헌에서 발견된다. 세종 원년(1419년) 조선 정부는 삼군도체찰사(三軍都體察使) 이종무(李從茂)로 하여금 대마도를 정벌케 했다. 그리고 세종 9년(1427) 7월17일 병조판서 조말생(趙末生, 1370~1447) 명의로 항복하라는 문서를 보냈는데, 이 문서에는 “대마도는 경상도 계림(鷄林·경주)에 예속된 곳이라, 본디 우리 영토다. 여러 문헌에도 그렇다고 되어 있다(對馬島 隸於慶尙道之鷄林 本是我國之地載 在文籍昭然可考)”고 적었다. ‘양계강역도(兩界疆域圖)’ 기서(記書)에도 “영남지대마도(嶺南之對馬島·대마도는 영남에 속한다)”라는 표현이 있으니 대마도는 우리 영토였음이 분명하다.
세종 24년(1442) 신숙주(1417~1475)는 통신사의 서장관으로 일본에 가 대마도에서 계해약조(癸亥約條)를 체결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성종 2년(1471)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를 저술했는데, 이는 15세기의 대마도를 연구하는 기본 문헌 중의 하나다. 이 책에 실려 있는 대마도에 관한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군(郡)은 8개이고 사람은 모두 바닷가 포구에서 살고 있다. 대마도의 포구는 82개나 된다. 남북은 3일이면 다 돌아볼 수 있고 동서 횡단은 하루나 반나절이면 족하다. 바다와 접한 사면은 모두 돌산이고 땅은 척박하다. 백성은 가난해서 소금을 굽거나 물고기를 잡거나 해산물을 잡아, 팔아서 살고 있다. 종(宗)씨가 대대로 도주(島主)가 되는데, 풍속은 신을 숭상하여 집집마다 소찬(素饌)을 차려놓고 제사를 지낸다. 대마도는 해동 여러 섬의 요충지이므로 조선을 왕래하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본도(대마도)의 거주자에 한하고 도주의 문인[渡航證]을 받아야 조선에 올 수 있게 했다.”
조선 초기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대마도는 원래 경상도 계림(鷄林)에 속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세종(재위 1419~1450년)의 ‘유대마도서(諭對馬島書)’에도 대마도는 경상도 계림에 예속된 본시 우리 영토라는 내용이 있다.(월간 "신동아"에서 퍼온글임)
*볼거리 소개
1).최익현 선생의 순국비: 구한말 대 유학자이며 항일운동가인 최익현선생은 대마도에 유배된뒤 일본에서 경작한 식량을 거부한 일화는 유명하며, 대마도에서 돌아가신 선생의 유해는 백제의 비구니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슈젠지(水前寺:이즈하라에 있음)에 나흘 안치한후 부산항으로 이송하였으며 선생의 넋을 기리고저 1986년 일해재단등에서 순국비를 건립하였다.
2).신라사신 박제상 순국비: 신라 내물왕은 왜국과의 통교를 위해 아들을 인질로 보내기로 하고 지모가 뛰어난 박제상을 딸려 보냈는데 왕자일행이 쯔시마의 사비노우미노미나토에 이르러 정박하게 되자 박제상은 왕자의 침실에 짚인형을 재우고 다른배로 왕자를 무사히 탈출시키고 본인은 사형에 처한 곳에 순국비를 세웠다. 울산광역시 울주군 두동면에 가면 박제상의 사당이 있으며 그 부인은 취술령 꼭대기에서 남편 돌아올날만 기다리다 돌이 되어 "망부석"이 되었으며(취술령 정상 부근에 있음) 그 혼은 비들기가 되어 취술령 부근의 은을암에 있다고 함.
3).한국전망대: 쯔시마내 가장 북쪽의 마을 카이쯔시마쵸에 위치한 한국전망대는 한국의 이미지를 담아
만든 팔각정 건축물로 한국산 재료에 우리나라 전문가를 초빙해 만들었다고 하며 날씨가 좋은 날은 육안으로 부산의 윤곽이 뚜렷히 보인다고 함.(우리가 간날은 흐려서 부산을 볼수는 없엇지만 불법이지만 011,017휴대폰으로 국내와 통화할수 있는 유일한 지역이었음)
4).만제키다리: 쯔시마는 원래 하나의 섬이었으나 1900년경 일본 해군이 섬의 가장 좁은 부분은 뚫어 인공으로 해협을 만들어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역할을 하였으며러일전쟁의 결과로 우리나라를 침략하게 하였다고 하는 의미있는 다리임.
5).아유모도시 자연공원: 수려한 자연경관을 그대로 살린 공원으로"은어가 돌아온다"라는 뜻이라고 함.
계곡전체가 천연화강암으로 펼쳐진 자연공원으로 구름다리,산책로,놀이기구,캠프장시설등이 있음.
(*산악회 단체 산행시는 이 캠프장을 이용하면 좋을것임)
6).고려문과 조선통신사비: 향토자료관 입구에 있는 옛 이즈하라 성문인 고려문은 에또시대 일본을 방문한 통신사의 행렬을 맞이하기위한 문으로 태풍시 훼손된것을 1989년 복원한것이며 임진왜란이후 약200년간 12회에 걸쳐 통신사 방문으로 이루어진 활발했던 교류관계와 우호관계를 21세기에도 계속하자는 뜻에서 통신사비를 세웠다고함.
*숙박시설 안내
호텔급 : 시사이드호텔 하마유, 쯔타야 호텔, 호텔 카키타니, 킨 세키칸, 호텔쯔시마,호텔마루야,야나기야 호텔등
여관급: 반쇼카쿠, 야마니카 여관, 미쯔와 여관, 펜션비죠즈카, 차야비죠즈카등
민박(民宿이라고 함): 다수 있음
유스호스텔:세이잔지
시라다케 정상에서 OCB(52)산우회 배영길(부경대 법대교수)부부
2005년 12월 3일~4일 OCB(52)산우회 사모님들- 대마도 관광겸 히라다께 등산기념사진
첫댓글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다음에는 대마도 백악산에 갔어 백양산악회 깃발을 꽂고 옵시더
저는 8월 23일 시라타게 예약해 두었습니다..백양산악회 깃이라도 달고 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