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씨름이 배출한 당대최고의 씨름꾼이었던 이만기. 그가 은퇴한 지 벌써 19년의 세월이 흘렀다. 모래판의 황제로 불리던 그도 현역시절 천하장사에 대한 주변의 높은 기대치에 부담을 가졌던 때가 있었다.
이로 인해 그는 악몽을 꾸기도 했다. 어떤 때는 체육관이 무너져 경기가 취소되는 꿈을 꿀 정도로 심한 압박감에 시달렸다고 후일담을 털어놓았다.
은퇴이후 대학교수, 방송인, 해설위원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던 이만기는 지난 2006년 씨름연맹으로부터 영구제명 조치를 받는 시련을 겪는다. 쉽고 순탄한 길을 갈수 있었음에도 굳이 굴곡진 삶을 선택한 까닭은 무엇일까.
◇천하장사에 오르다=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무명의 그가 1983년 4월 17일 제1대 천하장사에 올랐다. 그가 결승에서 최욱진 장사를 3-2로 꺾는 이변을 일으키자 세상은 경악했다.
“언론에서도 강력한 우승후보로 최욱진, 이봉걸, 홍현욱 장사 등을 거론했는데 생각치도 못한 제가 돼버렸으니 다들 ‘소 뒷걸음질치다’가 장사 된 격이라고 한 마디들 했죠.”
당초 이만기의 목표는 전날 열린 자신의 체급인 한라장사 우승이었다. 그러나 최욱진 장사에게 져 준우승에 그쳤다.
“그날 잠을 한 숨도 못 잤어요. 한라장사 우승을 위해 그토록 열심히 훈련을 했었는데, 천하장사는 워낙 쟁쟁한 선배들이 많아 아예 1등 할 거라는 생각도 안했습니다.”. 그러나 이만기는 4강에서 이준희 장사에 기적 같은 승리를 거두며 결승에 진출하는 파란을 일으켰다.
“막상 결승에 올라가니 또 욱진형이었어요. 그 앞날 충천했던 자신감이 없었어요.”
막상 승부는 예측불허였다. 2-2의 팽팽한 접전, 마지막 판에 그가 쓴 기술은 그의 주 기술이 아닌 호미걸이였다.
“보통 그런 상황에서 자신 있는 기술을 많이 쓰는데 저는 순간적으로 호미걸이를 걸었어요. 왜 그게 보였는지 몰라도, 그게 딱 걸렸죠.”
◇이만기 세상이 열리다= 그렇게 극적으로 천하장사에 올랐지만 주변의 반응은 냉담했다. 아무도 실력으로 인정해 주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다들 운이라고 치부했다. 이기고도 이만기는 절치부심해야만 했다. 운동량을 배로 늘렸다. 마침 학교에서도 숙소와 훈련공간을 마련해줘 미친 듯이 훈련만 했다. “그때 제가 우승할 거라고 예상한 분이 딱 한분 계셨어요. 바로 김성률 교수님이었죠. ‘이만기가 될 거다. 한번 주목해봐라’, 이 한마디 던졌는데, 엉겁결에 던진 말씀인 것 같기도 하고(웃음)”
이후 다음달인 5월 5일, 마산서 열린 제2회 체급별 장사씨름대회서 이만기는 8강에서 탈락했다.
“그때 천하장사는 운빨이란 소릴 더 들었습니다. ” 그런 이만기에 대한 평가가 달라진 것은 제2대 천하장사를 제패하고 나서부터다. “2대 천하장사에 오르자 운이란 소리가 쑥 들어갔습니다.”
그때부터 이만기는 국민들의 관심사를 한 몸에 받기 시작했다. 이후 이만기는 승승장구했다. 83년부터 90년에 그가 은퇴하기까지 7년 동안 그는 천하장사 10회 제패 등 공식대회 49차례 우승기록과 함께 승률 86.5%의 전무후무한 대기록을 남겼다.
거의 모든 대회에서 싹쓸이 우승을 하다시피 했다. 그가 초대 천하장사에 오르고 사람들의 말이 많았을 때 그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앞으로 천하장사 10번 하는 게 제 꿈입니다.”라고
◇방송출연은 씨름홍보 목적= 이만기는 1990년에 은퇴했다. 현역시절 그는 씨름스타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훤칠한 외모를 가진 그는 당대 인기여배우와 스캔들까지 터지는 등 별의별 악성루머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런 그의 뒤를 강호동이 이었다. 천하장사 5회에 빛나는 강호동은 이만기의 10회 기록을 깰 가장 유력후보였다.
그러나 돌연 강호동은 전성기에 은퇴한다. 이만기는 강호동이 일찍 은퇴한 것에 아쉬움을 표시했다. “처음에 강호동이 씨름계를 떠나 연예계로 갔을 때 씨름인들이 안 좋게 생각했어요. 지금은 타 분야에서 정상에 오른 호동이가 대견스럽죠.”
이만기는 강호동을 천부적인 씨름꾼으로 평가했다. 그의 체형이 타고난 씨름체질이라는 것. “체형을 보면 상체가 두껍고 목이 짧아 힘을 쓰는 체형에 속한다.”면서 “강호동이 천하장사 5회 제패에는 다 이유가 있다”고 설명했다.
얼마 전 이만기는 강호동이 진행하는 무릎팍 도사에 출연해 화제를 모았다. 씨름의 홍보를 위해 출연을 결심했다는 이만기는 그 방송 이후 비타민과 스펀지 등의 인기프로그램의 고정게스트로 출연해 남다른 끼를 발산중이다.
“솔직한 모습을 시청자에게 보여주려고 노력하는 것뿐인데, 그런 점을 좋게 보는 것 같아요. 제가 출연하면 사람들은 자연스레 씨름을 떠올릴 테니까요, 그걸로 만족합니다.”
6년만에 씨름해설위원으로도 복귀해 전방위로 씨름홍보에 나서고 있다.
◇경남씨름 맥 이어야= 은퇴이후 이만기는 그 이듬해인 1991년에 인제대 교수로 부임했다. 지난 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마산에 출마했다가 낙선도 했다. 그러나 방송에서 광고에서 맹활약하며 순탄한 인생여정을 밟을 것 같았던 그의 여정이 지난 2006년 엇갈리기 시작했다.
무능행정을 질타하며 갈등의 골이 쌓였던 씨름연맹으로부터 끝내 영구제명조치를 당한 것. 그는 자신을 재야 씨름인으로 지칭했다. “착잡하죠. 못하니깐 잘 하라고 씨름인으로 씨름발전을 위해 조언하고 비판적인 목소리를 낸 것뿐인데, 너무 안타까운 것은 조상의 얼이자 민족의 혼이라 할 수 있는 민속씨름이 완전히 죽었어요. 지금 책임질 사람이 있습니까. 누가 책임질까요. 남은 씨름인들은 어디로 가야합니까?”
이만기는 씨름의 옛 인기 회복에 넘어야 할 산이 많다고 지적했다.
그가 보는 현 씨름은 선수는 대형화되었지만 기술은 오히려 퇴보했다는 것. “작은 선수가 덩치 큰 선수를 이기는 것이 씨름의 묘미인데 그런게 사라졌어요. 그런게 없으니 씨름이 식상해지는 거죠.”
이종격투기 등으로 숱한 씨름스타들이 빠져나간 뼈아픈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만기는 새로운 스타발굴과 기술개발을 원하는 팬들의 수요와 욕구에 적극 맞춰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자신의 뿌리인 경남 씨름에 대해서도 깊은 애착을 드러냈다. 최욱진 장사를 비롯해 많은 천하장사를 배출한 경남씨름의 전국적인 위상을 언급했다.
“원래 마산과 진주가 경남씨름의 근원이에요. 예전에는 김성률 교수님을 비롯해 지역을 지키면서 후배를 많이 길러냈죠. 그런데 난 김해, 호동이는 서울에 있잖아요. 우리가 가서 후배를 가르치고 맥을 이어가야 하는데, 그게 맥인데... 맥이 끊어져선 안 됩니다.”
이만기는 다수의 천하장사를 배출한 경남씨름의 맥은 영원불멸 이어져야 한다고 재차 강조했다.
“씨름은 조상의 얼이자 민족의 혼이에요. 영원히 계승하기 위해서도 그 중심에 경남씨름이 서 제 몫을 다해야 합니다.”
▲사진설명
1= 1회 천하장사 등극 후 짚차를 타고 모교인 경남대학교로 향하고 있는 이만기 장사.
2= 경남대학교에서 1회 천하장사 등극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3= 현역 은퇴 후 방송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있는 이만기교수가 방송에서 대담을 하고 있는 모습.
4= 천하장사를 지낸 씨름인으로서 씨름을 한시도 잊을 수 없다. 최근에는 학생들과 함께하는 씨름체험시간도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