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전직 로이터통신(Reuters) 기자였던 앤드류 맥그레거 마샬(Andrew MacGregor Marshall)이 2013년 10월 31일에 자신의 자신의 블로그 '젠 저널리스트'(ZENJOURNALIST)에 공개한 논문이다. 이 글은 이제까지 태국 정치 및 왕실에 관해 발표된 글 중 가장 심도 있는 내용이며, '위키리크스'(Wikileaks)가 폭로한 미국 정부의 비밀 외교전문을 광범위하게 분석해, 태국 정치의 심연을 이해하는 데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 '크메르의 세계'가 한국어로 번역했고, 동영상 등 일부 자료를 추가했다. 전편을 먼저 읽어보려면 여기(1편, 2편, 3편)를 클릭하라.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4)
กลียุค — Thailand’s Era of Insa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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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Apichart Weerawong / AP) : 2006년 9월 19일 발생하여 탁신 친나왓 전 총리를 실각시킨 쿠테타 직후의 모습. 한 외국인 여성이 쿠테타 소식이 1면에 장식된 태국 보수 영자지 <네이션>(The Nation)을 들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방콕의 중산층들은 꽃과 사탕을 건네며 쿠테타 참여 군인들을 환영했다. 또한 군인들 역시 사진촬영에 응해주는 등 국제사회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풍경들을 연출했다. 하지만 그것은 오로지 방콕 중산층들의 세계에서만 그러했고, 광활한 태국의 북부와 북동부에선 전혀 다른 민심이 태동해 있었다. 이 어이없는 형태의 무혈 쿠테타가 바로 농민과 서민들이 주축인 레드셔츠(UDD) 운동이 탄생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태국의 기득권층은 정보화와 이동수단이 급격하게 발전한 21세기임에도 불구하고, 태국만큼은 어제와 같이 "변하지 않는 태국"일 것이라 생각하는 우를 범했다. [크세] |
2006년 9월 19일의 군사 쿠테타는 태국의 기득권 세력이 저지른 매우 좋지 못한 전략적 오산이었다. 그들은 태국 역사상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총리를 제거해도 태국의 보통 사람들이 그 상황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것이라고 가정했다. 그것은 자신들의 사회가 얼마나 많이 변했는지 이해하지 못했음을 보여준 것이었다.
탁신 친나왓(Thaksin Shinawatra: 1949년생) 총리의 수많은 지지자들은 처음에 푸미폰 아둔야뎃(Bhumibol Adulyadej, 라마 9세: 1927년생) 국왕의 태도에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들은 푸미폰 국왕이 자신들의 수호자이자 지킴이라고 생각해왔지만, 자신들이 민주적으로 표명한 염원을 힘으로 전복시킨 일을 국왕이 용인하는 것을 보며 당황했던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의 충격과 혼동은 역겨움과 분노로 바뀌어갔다. 푸미폰 국왕에 대한 광범위하고도 대중적인 숭배는 불평등한 상하 위계질서를 가진 태국 사회를 이어주는 접착제였다. 하지만 이로써 푸미폰 숭배는 부식되며 쇠퇴하기 시작했다.
기득권층은 또한 탁신이 태국 엘리트 사회에서 불문율로 통하던 '신사의 규칙'을 따를 것이라고도 가정했다. 즉, 자신이 권력에서 밀려났다는 사실을 온순하게 받아들일 것이라 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탁신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탁신은 싸움에 나섰고, 쿠테타를 통해 [과도정부에] 임명된 원로 왕당파들은 탁신의 이러한 반응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그들은 21세기의 정부를 운용하는 데 있어서 무능하기까지 했다.
태국의 기성체제는 ['추밀원'(Privy Council: 국왕자문기구) 의장인] 쁘렘 띠나술라논(Prem Tinsulanonda: 1920년생) 장군이 [배후에서] 조종한 쿠테타에 관해, 마하 와치라롱꼰(Maha Vajiralongkorn: 1952년생) 왕세자의 차기 국왕 즉위를 저지하기 위한 첫단계 정도로 보면서, 쁘렘이 푸미폰 국왕과 공조하여 다음 단계를 추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기득권층은 탁신의 정치적 영향력만 무력화시킬 수 있다면 와치라롱꼰을 왕위계승에서 배제시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2006년 쿠테타는 탁신의 정치력을 파괴하는 일에 실패했고, 왕위계승을 통제하기 위해 쁘렘이 푸미폰 국왕과 공조하여 추가적인 계획도 짜놓지 않았다는 점 역시 금새 드러나고 말았다.
푸미폰 국왕은 자신의 아들을 라마 10세로 즉위시키는 일에 단 한번도 적극성을 보인 적이 없었다. 하지만 2007년 초 무렵부터 그가 왕세자의 왕위계승을 피할 수 없는 일이라고 여기는 것처럼 보였고, 자신은 후계 구도에 변화를 줄 의사가 없다는 신호도 여러 차례 내비쳤다. 그러는 사이에 푸미폰 국왕의 건강은 더욱 악화됐고, 이제 왕위계승이 언제든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도 명확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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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사진) 탁신 정권을 전복시킨 쿠테타 지도부가 푸미폰 국왕과 시리낏 왕후의 발아래 무릎을 꿇고 있다. 이 사진은 국왕이 쿠테타를 승인했다는 점을 홍보하기 위해 태국 언론을 통해 유포된 것이다. 하지만 태국의 온라인 상에서 이 사진은 이제 거의 찾아보기 힘든 상태가 되었다. 중앙 상단으로부터 르엉롯 마하사라논 국방총사령관, 사티라폰 께야논 해군사령관, 그리고 이 쿠테타의 실세 격인 손티 분냐랏끌린 육군사령관(우측 끝)이다. 등을 보이고 있는 인사는 추밀원 의장 쁘렘 띠나술라논 장군이다. [크세] |
왕당파들 사이에 발생한 패닉(공황) 상태는 과열 수준으로 상승했다. 그들은 바로 얼마 전에 대단한 인기를 누리던 총리를 [군부 쿠테타를 통해] 실각시켰다. 그것은 왕위계승 예정자의 차기 국왕 즉위를 저지하기 위한 것으로서, 지극히 도발적인 시도였다. 하지만 그들은 푸미폰 국왕 사후에 와치라롱꼰이 국왕으로 즉위할 가능성이 여전히 매우 높다는 점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왕세자가 왕위에 즉위할 경우, 그는 필시 탁신을 망명생활에서 귀국시켜 다시금 총리가 될 수 있도록 할 터였다. 이제 탁신과 와치라롱꼰이 정치적 주도권을 쥐게 될 시대가 피할 수 없을 것처럼 보였고, 그때가 오면 왕당파들은 자신들이 저지른 일에 대한 보복에 직면할 것이다. 탁신과 왕세자 모두 다혈질적 기질과 복수욕이 두드러지는 인물들이다.
[태국 기득권층에 편향적 태도를 보였던] 미국 대사 랠프 보이스(Ralph L. Boyce: 1952년생)는 2007년 1월 16일 본국에 보낸 비밀 외교전문에 <쿠테타 주모자의 귀신 나오는 꿈>(Coupmakers’ Haunted Dreams)이란 제목을 붙였다. 그는 이 전문에서, 탁신 정권을 전복시킨 왕당파 장성들이 불안과 걱정에 시달린 나머지 밤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라고 보고했다. 또한 던칸 맥카고(Duncan McCargo) 역시 <태국: 걱정거리의 나라>(Thailand: State of Anxiety)에서 2007년 당시를 지배하고 있던 분위기를 통찰력 있게 재현한 바 있다. 태국 기득권층은 2006년 쿠테타가 자신들을 실존적 위협으로부터 구해줄 것이라 여기고 지지했다. 하지만 구원은 커녕 자신들의 종말을 더욱 필연적으로 만드는 데만 기여한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자포자기의 시대는 자포자기의 수단을 낳는 법이다. 2007년 중반, 쁘렘과 연줄이 있는 보수 왕당파들은 악명 높은 동영상 한편을 유출시켰다. 그것은 2001년 '논타부리 궁'(Nonthaburi Palace)에서 열린 시랏(Srirasmi) 왕자비의 생일파티 모습이었다. 이 동영상에서 [왕세자의 3번째 부인인] 시랏 왕자비는 수많은 시종들이 보는 앞에서 [토플리스만 걸친] 거의 나체의 모습으로 등장했다. 그리고 와치라롱꼰 왕세자는 그 모습을 만족스런 표정으로 지켜보면서, 파이프 담배를 물고 있었다. 2007년 11월 7일자로 발송된 미국의 비밀 외교전문은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왕세자는 악명 때문에 계속해서 시달리고 있고, 그것은 더욱 악화될 가능성도 있음. 상황이 이렇게 된 데는 왕세자와 그의 배우자의 이미지에 위험할 수도 있는 동영상 자료가 온라인과 DVD를 통해 유포된 데도 그 이유가 있음. (중략) 왕실 일각에서는 [시랏] 왕자비에게 유리할만한 내용이면 무엇이든 약화시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작업하는 세력이 존재함. 본 대사관은 이러한 폄하 행위가 왕세자에게도 영향을 미치는 문제라고 판단하고 있음. |
2007년 7월, 와치라롱꼰 왕세자와 시랏 왕자비가 유럽에 나가 있는 동안, 매우 고위급의 소식통들이 "와치라롱꼰이 에이즈 때문에 사망했다"는 거짓 정보를 유포시키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악한 에피소드는 <위키피디아 영문판>(Wikipedia)의 '와치라롱꼰 왕세자' 항목에까지 실렸지만, 왕당파 성향의 문서작성자가 해당 내용을 삭제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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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캡쳐사진) <위키피디아 영문판>의 '와치라롱꼰' 항목에 실렸던 사망에 관한 거짓 소문과 관련된 내용.
[번역] --- "2007년 7월, 와치라롱꼰 왕세자가 사망했다는 보도되지 않은 소문이 널리 퍼졌다. 이 소문은 끊임없이 계속됐고, 태국 군부와 외교가의 소식통들은 국내 언론 및 외신의 고위급 편집자들에게 사실을 확인해주었다. 하지만 엄격한 '왕실모독죄'(lese majesté) 때문에 국내 언론들은 이 정보를 감히 보도하지 못했다. 왕실은 이 소문을 긍정도 부인도 하지 않았다. 결국 건강한 모습의 와치라롱꼰이 2007년 7월 27일 부인인 시랏 왕자비가 '까세삿 대학'(Kasetsart University)에서 가정경제학 전공으로 [문학]석사 학위를 받는 행사에 나타나고 나서야 이 소문이 사라질 수 있었다." |
기존의 사회적 질서를 계속해서 존속시키기 위해, 왕당파 기득권층은 왕실에 대한 대중적 숭배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군주의 가족들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훼손하고 있었다. 원래 이런 방식의 채택은 너무도 위험성이 따르는 전략이었다. 이러한 역설적 상황을 이해하려면 그들이 가진 절망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와치라롱꼰 왕세자는 기득권층이 자신을 폄하하면서 왕위계승 전망을 적극적으로 파기시키려 시도한다는 점을 이미 알고 있는 상태다. 이제 싸움은 모든 것을 얻지 못하면 그 전부를 잃게 되는 제로섬 게임이 됐다. 쿠테타 지도부 및 '옐로셔츠'(PAD: 국민 민주주의 연대) 운동을 지지했던 엘리트 계층이 만일 와치라롱꼰의 라마 10세 즉위를 막지 못한다면, 그들은 파멸의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기득권층은 왕세자의 왕위계승을 막을 수만 있다면, 대가를 얼마를 지불하든 그 무엇이든 할 용의가 있었다.
특히 주목할만한 점은 그들의 카미카제 전술이 약간은 성공을 거뒀다는 점이다. 와치라롱꼰은 자신의 후천성면역결핍증(HIV: 에이즈 보균자) 감염 사실이 왕위계승 방해공작에 이용당할 수도 있다는 점을 깨닫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건강이나 장수와는 별 상관이 없는 문제였다. 왕세자의 감염은 에이즈 발병으로 이어지진 않았다. 지금은 비용 지불 능력만 있다면 항바이러스제를 사용하여 HIV 바이러스를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시대이다.
그러나 태국에서 왕권과 관련된 이념은 서로 얽혀있는 두 가지 종교의 세계관에서 나오고 있다. 그것은 바로 불교와 힌두교이다. 불교 전통에서 국왕은 '탐마랏'(dhammaraja: 法王)을 이념형으로 하며, 위대한 영적 덕목을 소유할 때만 성취 가능하다. 이 관점에서 보면, 와치라롱꼰의 왕위계승 자격은 특출할 정도로 취약하다. 그리고 힌두교 전통에서 국왕의 적법성은 '신왕'(devaraja, 神王) 사상에서 유래하는데, 그것은 혈통과 관련이 있다. 이 측면에서 와치라롱꼰의 왕위계승 요건은 흠잡을 데 없는 것이었다. 그는 푸미폰 국왕과 시리낏(Sirikit: 1932년생) 왕후의 독생자로서, 하늘이 내린 왕자인 셈이다. 그런데 그의 피가 백혈병은 물론이고, 심지어 도덕적 오명이 붙기도 하는 HIV에 감염됐다는 사실은 그의 자격을 취약하게 만들어버린다.
2007년, 왕세자를 위한 실험 프로젝트가 태국에서 시작됐다. 의료진은 혈장 여과 및 자기활성 세포선별(magnetic activated cell sorting: MACS) 기술을 이용하여, 혈류 중의 감염 세포들을 제거하고자 했다. 이에 사용될 장비의 조립까지 마쳤지만 실제로 사용되진 않았다. 그 대신 와치라롱꼰은 독일에 있는 한 의료원에 장기간 입원했다. 흥미로운 점은 그의 독일 방문 시점이 독일 의사들이 소위 '베를린 환자'(Berlin patient)란 별명으로 유명한 에이즈 환자 티모시 브라운(Timothy Brown)을 성공적으로 완치했던 시점과 일치한다는 점이다.
티모시 브라운은 골수이식 수술로 완치됐다. 이 방법은 줄기세포와 함께 처리된 HIV 저항력을 지닌 골수를 이식하는 것이다. 브라운은 급성 골수성 백혈병과 함께 HIV에 동시에 감염되어 있었고, 의학적 사례로는 유일한 것이어서 치료에도 매우 복잡한 절차가 필요했다. 그의 백혈병은 골수이식을 필요로 했다. 그를 치료한 독일 의사들은 바로 그 과정에서 그의 HIV도 치료했던 것이다.
와치라롱꼰 역시 HIV와 백혈병을 동시에 갖고 있다. 하지만 그가 골수이식 가능성을 탐색하긴 했지만, 공개되지 않은 이유로 수술은 진행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독일에서 비정통적 대체의학적 치료요법을 시작했다. 여기에는 HIV에 감염되지 않은 피를 정기적으로 수혈하는 일도 포함됐다.
태국에서 진행된 실험적 치료와 독일에서 진행된 수혈에서 호기심을 끄는 점은, 그러한 일들이 그의 HIV를 결코 치료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수혈요법은 환자의 혈액 속에 포함된 HIV 감염 세포의 확산만 엄청난 수준으로 감소시켰을 뿐이다. 그렇지만 와치라롱꼰은 자신의 피를 가능한한 많이 정화시키는 일이 중요하다고 믿었던 것 같다.
지도급 왕당파 인사들이 왕세자에 대한 네가티브 캠페인을 펼친 데 이어, 커다란 상황 변화가 또 한가지 있었다. 시리낏 왕후는 푸미폰 국왕의 회의적 반응에도 불구하고, 지난 수십년간 와치라롱꼰 왕세자에 대한 최고의 후원자였고, 아들의 왕위계승을 위해 최전선에 나서곤 했었다. 그런데 그녀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시리낏 왕후는 자신이 태국을 재앙으로부터 구할 운명을 타고났다고 생각했고, 16세기 아유타야(Ayutthaya) 왕국의 왕비 시 수리요타이(Sri Suriyothai, สมเด็จพระศรีสุริโยทัย: 1548년 사망)가 바로 자신의 전생이라고 믿었다. 수리요타이는 1548년 버마-시암 전쟁(Burmese-Siamese War of 1548) 당시 남장을 하고 전쟁터에 출전했던 여성으로, 남편인 마하 짜끄라팟(Maha Chakkraphat, สมเด็จพระมหาจักรพรรดิ: 1509~1569) 국왕이 위기에 처했을 때 전쟁용 코끼리를 타고 남편을 위해 싸운 것으로 전해진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수리요타이는 이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지만 남편인 마하 짜끄라팟 국왕은 버마 군대를 무찌르고 태국을 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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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동영상) 태국 영화 <수리요타이의 전설>의 뮤직테마 편집본.
2001년 개봉된 영화 <수리요타이의 전설>(The Legend of Suriyothai)은 수리요타이 왕비의 일대기를 다룬 내용으로서, 태국 영화 역사상 최대의 자본과 물량이 투입되어 제작됐다. 이 영화는 시리낏 왕후의 제안으로 제작됐고, 시리낏 왕후가 직접 감독과 배우도 선정했다. 감독인 찻리찰름 유콘(Chatrichalerm Yukol, หม่อมเจ้าชาตรีเฉลิม ยุคล: 1942년생)은 태국 감독들 중 비교적 국제적 지명도를 가진 시나리오 작가이자 영화감독으로, 왕자급 칭호인 멈짜오(Mom Chao) 품계의 소지자이다. 주연 여배우 삐야팟 피롬팍(Piyapas Bhirombhakdi, หม่อมหลวงปิยาภัสร์ ภิรมย์ภักดี: 1962년생) 역시 평민 최고의 품계인 멈루웡(ML) 칭호을 지닌 왕실 직계 종친이다(싱하맥주 부회장의 부인임).
이 영화의 주연배우 삐야팟 피롬팍 및 그 아역을 맡은 피몬랏 피솔리야붓(Pimolrat Pisolyabutr, พิมลรัตน์ พิศลยบุตร: 1983년생) 모두 젊은 시절의 시리낏 왕후와 거의 흡사한 외모를 지닌 점은 이 영화가 시리낏 왕후와 얼마나 밀접한 관련성을 지닌 작품인지를 짐작케 해준다. 이 영화의 스토리 전개는 역사적 사실에 픽션이 많이 가미된 것으로 알려졌다.
<수리요타이의 전설>은 최대 2천만 달러의 제작비가 투입됐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왕족들이 대거 참여한 작품이기에 그 재정적 내용에 관해선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이 영화의 전쟁 장면 촬영에는 엑스트라 배우 수천명과 진짜 코끼리 수백 마리가 동원됐고, 16세기 아유타야 왕국의 사회상을 보여주기 위해 태국 전역의 여러 지역에서 3년에 걸쳐 촬영이 이뤄졌다. 또한 왕실의 후원을 받은 만큼, 일반 감독의 작품이라면 접근이 불가능한 장소들에서도 촬영이 가능했다.
이 영화는 원래 8시간 분량으로 촬영됐고, 2001년 태국에서 개봉됐을 때는 185분 짜리로 편집됐으며, 5시간 분량의 DVD도 발매됐다. 2003년에는 142분 분량으로 미국에서 개봉됐는데, 미국 개봉작은 <대부>(The Godfather) 3부작으로 유명한 프란시스 포드 코플라(Francis Ford Coppola: 1939년생) 감독이 직접 편집을 담당했다. 이 영화의 음악은 프로그레시브 락 그룹 '그리폰'(Gryphon) 출신의 영국 영화음악가 리차드 하비(Richard Harvey)가 담당했다. [크세] |
시리낏 왕후의 시녀들 중 왕세자를 미워하면서 정치적 야심을 가진 측근들이 부추기기 시작하자, 왕후는 점점 자신이야말로 태국을 영도하는 데 최상의 인물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와치라롱꼰의 어린 아들 티빵꼰 라서미촛(Dipangkorn Rasmijoti: 2005년생) 왕자를 왕위에 앉힌 후 자신이 섭정을 맡는 방안을 생각해냈다.
시리낏 왕후는 또한 [언론재벌로서 옐로셔츠 운동의 창시자이자 선동가인] 손티 림텅꾼(Sondhi Limthongkul: 1947년생)과도 점점 친해졌다. 왕후는 여동생인 붓파 끼띠야꼰(Busba Kitiyakara, บุษบา กิติยากร: 1934년생)의 자택에서 손티를 만나곤 했다. 시종들이 끊임없이 지켜보는 왕궁에서 벗어나 휴식을 취하면서 술을 마시고 카드 놀이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왕후는 동생인 붓파의 집을 몰래 방문하길 즐겼다. 손티도 당시 붓파의 딸인 수타완 라다완(Suthawan Ladawan, สุธาวัลย์ ลดาวัลย์ เสถียรไทย: 1958년생)과 [혼외] 교제 중이었으므로, 붓파의 집을 자주 드나들었다. 수타완 라다완은 ['쭐라롱꼰 대학'에서 환경경제학을 가르치는 학자로서, 탁신 행정부에서 외무부장관 및 부총리를 역임한] 수라끼얏 사티욘타이(Surakiart Sathirathai, สุรเกียรติ์ เสถียรไทย: 1958년생)의 부인이다. 시리낏 왕후는 손티와 대화를 나누면서 점차 그로부터 영향을 받게 됐다.
엘리트 계층이 태국의 현실 세계를 벗어나 자신들의 맨션이나 구중궁궐의 높은 담벼락 뒤에서 왕위계승을 방해하기 위한 망상적 음모를 꾸미는 동안, 군주제에 대해 태국인들이 갖고 있던 신앙심은 무너져가고 있었다.
2007년 8월 19일, 군사 쿠테타를 통해 임명된 과도정부는 ['국민의 헌법'이라 불린] <1997년 제정 헌법>을 대체할 새로운 헌법안의 국민투표에 착수했다. <1997년 헌법>은 엘리트 계층이 기대했던 기능을 수행하지 못했던 것이다. 새로운 헌법안에는 독소조항들이 많이 포함됐다. 새 헌법안은 태국의 엘리트 계층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결과를 보장받기 위해 작성한 것이다. 이 헌법안의 규정에 따르면, 만일 새 헌법안이 부결될 경우 과도정부가 태국 역사상 출현했던 과거의 모든 헌법들 중 그 어떤 것이라도 마음대로 채택할 수 있도록 했다. 따라서, 새 헌법안에 반대 투표를 한다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었다.
군부가 전폭적으로 후원하는 대국민 선전전이 대대적으로 시작됐다. 이 캠페인은 "국왕 폐하를 사랑하자. 국왕 폐하를 생각하자. 국민투표에 참가하자. 2007년 헌법안을 수용하자"는 슬로건을 내걸었기 때문에, 헌법 개정안 찬반투표의 불참은 국왕의 뜻을 거역하는 일과 마찬가지라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헌법개정안은 노란색 표지에 싸여 배포됐다. 노란색은 국왕을 상징하는 색깔이다.
하지만 이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투표자의 42%가 "반대" 표를 던졌다. 이것은 놀랄만한 결과였다. 그 동안 국왕의 지지도에 관한 여론조사를 실시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에, 도대체 국민들 중 몇 %나 진심으로 국왕을 숭배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2007년 개헌안 국민투표는 필시 그러한 궁금증에 대한 최선의 측정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며, 태국에서 왕당파 국민의 비율이 기득권층이 주장하는 것보다는 훨씬 적다는 것을 암시해주었다.
2007년 12월 23일 실시된 총선을 앞두고도 또 다른 대국민 선전전이 전개됐다. [사막 순타라웻(Samak Sundaravej: 1935~2009)을 총리 후보로 내세우며] 새로 탄생한 탁신의 위성 정당인 '국민의 힘 당'(PPP)을 꺽기 위해, 태국 군부와 왕당파 기득권층은 은밀하고 불법적인 전술들 몇가지도 사용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PPP는 만성적으로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보수정당 '민주당'(Democrat Party)을 엄청난 격차로 2위로 만들면서 손쉽게 승리를 거머쥐었다. 2월28일 해외에 망명 중이던 탁신이 귀국했다. 수많은 지지자들이 '수완나품 국제공항'(Suvarnabhumi Airport)에 나와 환호하며 눈물을 흘렸고, 탁신은 공항의 땅바닥에 엎드려 절을 했다.
2007년 총선은 왕당파 기득권층에겐 엄청난 타격이었다. [2006년 9월 19일의 쿠테타 이후] 일년 이상의 기간 동안 민주주의 헌정질서를 중단시켰고, 시도해볼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속임수까지 동원했지만, 태국 땅에서 탁신의 인기를 무너뜨리려 했던 그들의 노력은 철저하게 실패했다. 그리고 불과 몇달만에 [보수 왕당파] 옐로 진영에는 우울함과 근심이 만연하면서, 열기에 찼던 일년 전의 분위기는 증발해버렸다. 그 자리는 무성하게 자라나고 있던 호전성의 아찔한 분위기가 대체해버렸다.
사태가 이렇게 된 것은 시리낏 왕후 때문이었다. 2008년 4월경이면 왕후는 손티의 옐로셔츠 운동에 대해 전적인 지지를 다짐하면서, 푸미폰 국왕의 사후 망나니 아들인 와치라롱꼰 왕세자를 왕위계승 과정에서 배제시키고 [손자인 티빵꼰을 통해] 자신이 직접 섭정을 하겠다는 마음을 굳힌다. 이로 인해 2008년 3월 [시리낏 왕후가 잠시 입원중이던] '쭐라롱꼰 병원'(Chulalongkorn Hospital)에서 와치라롱꼰 왕세자가 분노로 반응했다는 것은 미국 대사관의 비밀 외교전문(2009년 11월 23일자)에도 언급되어 있다. 그 계획은 특히 시리낏 왕후가 이미 76세가 다 되어가던 시점에서, 그녀가 남편인 푸미폰 국왕보다 건강 면에서 더 낫지도 않다는 점 때문에도 미친 계획이었다.
하지만 절망에 빠져있던 왕당파 기득권층과 옐로셔츠 운동 세력은 이러한 놀랄만한 사태의 발전을 크게 기뻐했다. 자신들이 모든 것을 잃을 것처럼 보였고, 탁신과 와치라롱꼰의 무시무시한 지배력도 막을 수 없을 것처럼 보이던 바로 그때, 시리낏 왕후가 그들의 편에 서면서 희망을 안겨줬던 것이다. 그들은 감히 자신들이 최후의 승리를 거머쥘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와치라롱꼰을 배제한 채 시리낏 왕후를 섭정으로 세운다는 기득권층의 계획은 여러가지 결함들 외에도 또 다른 커다란 문제를 안고 있었다. 바로 푸미폰 국왕이 그러한 생각을 완강하게 반대한 것이다. 푸미폰 국왕은 지난 20년 동안 시리낏 왕후에게 소외를 당하고 있었다. 그는 아들인 와치라롱꼰에게도 예사롭지 않은 불안감을 갖고 있었지만, 시리낏 왕후가 자신의 실질적 후계자가 될 것이란 계획은 더욱 더 끔찍한 일이었다.
태국 왕당파들이 가진 푸미폰 국왕에 대한 존경심이 진정성을 가진 것이라면, 그들의 권모술수는 푸미폰 국왕의 반대에 부딪힐 경우 종언을 고해야만 했다. 하지만 태국 엘리트 계층은 원칙보다 자기보존이 훨씬 더 중요했다. 그들이 자신들의 늙은 군주에 대해 얼마나 애착을 가지고 있든간에, 왕세자에 대한 실존적 공포가 그러한 애착을 능가하는 위력을 발휘했다. 그리하여 푸미폰 국왕의 반대마저 쉽사리 묵살되고 말았다. 태국 기득권층이 감히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시리낏 왕후가 자신들의 편에 섰기 때문이었다. 80세의 라마 9세(=푸미폰 국왕)는 국내외로부터 과찬을 받아가며 자신의 재위 60주년 기념식을 성대히 치른지 불과 2년이 지난 시점에 이르러서야, 자신이 얼마나 적은 권력만 소유하고 있었는지를 참으로 절감하게 된 것이다.
설상가상인 점은, 푸미폰 국왕의 바램을 고의로 무시한 옐로셔츠 운동 지도부가 끊임없이 국왕에 대한 거짓된 충성심을 주창하면서, 자신들이 탁신의 사악한 계획으로부터 국왕을 수호하기 위한 충정에서 일어선 것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 불행한 군주에게 심지어는 더 나쁜 일도 일어났다. 2008년 중반, 시리낏 왕후가 국왕과 함께 지내기 위해 후아힌(Hua Hin)에 위치한 해변 별궁인 '왕끌라이깡원 궁전'(Wang Klai Kang Won Palace: '근심이 없는 궁전'이란 뜻)으로 이주해왔던 것이다. 표면상 이유는 점점 병약해지고 있던 푸미폰 국왕을 돌보겠다는 것이었지만, 실상은 국왕이 왕후의 계획을 피해나가는 일을 감시하고자 했던 것이다.
와치라롱꼰이 라마 10세로 즉위하는 일을 막는 일이 조금이라도 성공할 가망이 있으려면 특히 제도권 기구 3곳을 접수해야만 한다. 우선 무엇보다도 '추밀원'(Privy Council)이 중요하다. 만일 푸미폰 국왕이 왕세자를 차기 국왕으로 올려놓지 못한 채 사망한다면, <1924년 제정 왕실 왕위계승법>에 따라 '추밀원'이 대안적 후보를 추천할 여지는 여전히 남아 있게 된다. <1924년 제정 왕실 왕위계승법> 제10조는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왕위를 계승할 후계자는 백성들의 전적인 존경을 받아야만 하며, 백성들이 그에게 달가운 마음으로 의지할 수 있어야만 한다. 만일 백성들 다수가 반대한다면 그는 왕위계승의 선상에서 배제돼야만 한다. |
둘째, 군 수뇌부가 계획에 동의해야만 한다. 왕위계승 과정을 통제하는 것을 군부가 동의하지 않을 경우, 군부는 신속하게 그 계획을 진압하여 분쇄할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와치라롱꼰 왕세자가 '추밀원'의 결정에 반발해 군사적 차원의 도전을 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그 경우에도 군대가 수도를 사수하면서 왕위계승자 대체 계획을 엄호해줄 수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셋째, 태국 헌법에 따르면 '추밀원'의 결정사항을 공식적으로 비준하고 새로운 군주의 즉위를 선포하는 것은 의회이다. 과감한 속도로 실행을 해야 한다는 점이 기득권층의 계획에 있어서 또 다른 결정적인 요인이란 점을 감안하면, 군부 쿠테타나 사법부에 의한 쿠테타를 일으킨 후 새로운 국회를 구성할만한 시간이 부족할 수도 있을 것이다. 대안적 국왕 후보를 즉시로 제시한 후 왕위계승권자를 교체하지 않는 한, 푸미폰 국왕의 승하 사실이 공표되는 순간 와치라롱꼰은 부전승을 통해 국왕의 지위를 얻으려 할 것이다.
대안 후보를 공식적으로 세우지 않은 채 보내는 한시각 한시각은 기득권층의 계획 성공 가능성을 엄청나게 감소시킬 것이며, 국가적 내분의 가능성도 심각하게 가중시키게 될 것이다. 더구나 이 계획의 실행자들에게 있어서, 와치라롱꼰의 즉위를 공개적으로 방해했다가 만의 하나 실패할 경우의 상황은 너무도 암울한 것이기에 생각조차 싫은 일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이 계획이 일단 실행단계로 접어들었을 경우, 성공하지 못한다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일단 '추밀원'은 [왕당파에게] 완전히 접수된 상태였다. 의장인 쁘렘 장군은 왕위계승 방해 계획의 추동력이며, 그의 늙은 동료들(=추밀원 위원들)은 모두 와치라롱꼰을 극심하게 혐오한다. 군 수뇌부 역시 이 계획을 지지했다. 3군 수뇌부는 전원이 시리낏 왕후의 시종들이었고, 그 중 대다수는 왕후에 대해 광신적인 충성심을 보이는 자들이다.
문제는 국회였다. 21세기의 시작 무렵부터, 탁신 친나왓은 심지어 자신에게 승산이 별로 없어 보이던 선거를 포함하여 모든 선거에서 승리했다. 무기력한 '민주당'이 이러한 형세를 단기간에 변화시킬 가망성은 없어보였다. 의회를 탁신의 손아귀에서 빼앗아올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점은 탁신이 향후 다시금 승리하여 복귀할 수 있는 기회조차 찾지 못하도록 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기득권층은 이러한 일이 군주제의 위상에 어떤 해를 미칠지 의식하지 못한 것 같았다. 왕당파 군부가 일으킨 2006년 9월의 쿠테타로 인해 국가의 안정성은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지만, 기득권층과 옐로셔츠 운동은 2007년 12월 총선을 통해 새로 출범한 [친-탁신계] 정부를 다시 한번 전복시키기 위해, 왕후의 명시적인 후원 속에서 또 다시 공격적인 캠페인에 돌입했다.
탁신의 입장에서 보면, 왕당파들이 '국민의 힘 당'(PPP)을 공격하는 일이 심각한 위협인 동시에 묘한 매력을 지닌 기회이기도 했다. 만일 그가 이 위기를 성공적으로 버틸 수만 있다면, 와치라롱꼰이 라마 10세로 즉위하는 일을 보장할 수 있을 것이고, '킹 메이커로서의 역할'에 따른 막대한 보상도 기대할 수 있을 터였다.
새로 부임해온 미국대사 에릭 존(Eric G. John)은, 건방진 동시에 왕당파에 편향적 태도를 보였던 자신의 전임자 랠프 보이스보다는 태국 정치에 대한 상황파악이 훨씬 더 빠른 인물이었다. 그는 2008년 11월 4일 본국으로 보낸 비밀 외교전문에서 태국의 갈등 상황을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비록 다양한 행위자들이 있긴 하지만, 태국의 정치적 환경 속에서 전선은 매우 명료하게 그려지고 있음. 그러나 태국의 정치위기를 "국왕 대 탁신"의 싸움이라고 보는 환원주의적 주장은 상황을 지나치게 단순화시킨 것임. 양 진영 어느쪽 캠프도 자파에 충성을 맹세한 이들 모두를 통제하진 못하고 있고, 양 캠프 내에서도 조연급 인사들이 특정 의제들에 관해 의견이 갈라져 있는 상황임. 세계 모든 국가들이 고유한 역학관계를 갖고 있고, 태국은 군주제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나라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국은 현재 동아시아의 여타 국가들에서 전개됐던 시나리오의 태국판 버전을 경험하고 있음. 즉, 경제성장이 민주주의 제도의 성숙보다 앞서 나가면서, 새로운 그룹이 구시대 엘리트들의 특권에 도전을 하고 있는 형국임.
분열된 태국 사회의 양 진영 모두 자립심을 가진 중산층 참여자들을 갖고 있지만, 탁신 친나왓 전 총리는 자신의 집권기인 2001~2006년 사이에 펼친 포퓰리즘 정책에서 혜택을 본 북부 및 북동부 지방의 충성도 높은 유권자들에게 의지하면서, 자신의 진영에 지침을 내리고 동맹 세력에게 재정적 지원도 한다는 점은 상당한 확실성을 갖고 추정해볼 수 있음. 탁신의 [정치적] 기구(=집권 PPP)는 시리낏 왕후를 정점으로 하는 왕당파, 방콕 중산층, 남부지방 주민의 연합세력과 대치하고 있음. 양 진영은 영향력 발휘를 경쟁하고 있고, 다른 편이 정치 권력을 이용하여 자기 편을 (완전히 타도하려 들지 않는다면) 최소한 주변부로 밀어낼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러한 일을 두려워하고 있음. 양 진영의 핵심 인사들은 본 대사관과의 사적인 접촉에서, 푸미폰 국왕 사후 진행될 왕위계승이 바로 태국의 진실의 때가 될 것이란 점을 스스럼 없이 인정했음. |
2008년 3월 28일, 손티 림텅꾼은 옐로셔츠 운동의 정기적인 집회를 재개했다. 5월 19일은 '위사카 부차'(Visakha Bucha Day, 붓다의 날)였다. 이 날은 태국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명절이다([역주] '위사카 부차'는 동북아 지역 불교의 '사월초파일'(부처님오신날)에 비견되는 날로서, 남방불교에서는 붓다의 탄생, 깨달음, 입멸을 함께 기리는 날이다). 시리낏 왕후는 이날 아누퐁 파오찐다(Anupong Paojinda: 1949년생) 육군사령관과 함께 방콕에 위치한 '전승(戰勝)의 사찰'인 '왓 차나 송크람'(Wat Channa Songkram) 사원을 방문했다([역주] 여행자 거리인 '카오산 로드 인근에 위치). 미국대사관 대리공사였던 제임스 엔트위슬(James Entwistle)은 2008년 6월 18일 본국에 보고한 비밀 외교전문을 통해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그 사원은 전통적으로 왕족들이 '위사카 부차' 날에 방문하던 사찰이 아님. 일반적으로 이 사찰은 이런 저런 형태의 전투에 나가는 이들이, 참전을 앞두고 기도를 하던 곳임. |
그것은 선전포고였다. 이어서 2008년의 나머지 기간에 이어진 사건들은 정말로 이례적이었다. 태국의 기득권 세력은 선거로 탄생한 정부에 대해 공개적인 게릴라식 내란을 전개했던 것이다. 옐로 진영 내의 각기 다른 여러 세력들은 놀라울 정도로 협력했다. 여기에는 '옐로셔츠'(PAD) 운동의 시위대, 엘리트 계층인 원로 정객들, [기득권층에] 편향적인 사법부, [보수 야당인] '민주당', [주류] 언론들, 군부까지 모두 동참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네트워크 군주제'가 그 힘을 과시하는 형국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푸미폰 국왕이 영향력을 행사한 것이 아니라, 시리낏 왕후와 그 측근들의 작품이었다.
흥분한 광적인 왕당파들은 그 외침소리와 편집증적 분위기를 사상 최고조로 증가시켰다. 그리고 왕실모독 처벌법(lèse majesté law: 형법 제112조)을 이용하여 정부의 대응을 약화시키고 외국 언론들까지 위협했다.
정부의 주 대변인 역할을 맡고 있던 총리실 장관 짜끄라폽 펜캐(Jakrapob Penkair, จักรภพ เพ็ญแข: 1967년생)와 존경받던 언론인인 영국 BBC 특파원 조나단 헤드(Jonathan Head)는 바로 전년도인 2007년 8월에 '태국 외신기자클럽'(FCCT)이 주최한 토론회에서 행한 발언들 때문에 왕실모독 처벌법 위반을 했다는 공격을 받았다. 짜끄라폽은 당시의 토론회에서 태국의 후견인 관행 문화를 비판하고, 쁘렘 장군을 향해 몇가지 신랄한 논평을 했었다. [보수 야당인] '민주당'도 그간 자신들이 표현의 자유를 신봉하는 진보적 정당인 것처럼 행세하던 가면을 벗어던지고, 짜끄라폽에 대한 불신임 투표를 준비했다. 짜끄라폽은 결국 5월30일 사임했다.
한편 [원로 보수 정객인] 아난 빤야라춘(Anand Panyarachun: 1932년생)은 오랜 기간 유명 외신기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외신기자들에게도 아난은 자신들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최고 엘리트 계층 소식통이었다. 아난은 사적으로 헤드에게 말하기를, 그가 입건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확신시켜 주기도 했다. 하지만 5월27일 경찰이 FCCT에 들이닥쳐, 당시 FCCT 회장을 맡고 있던 니르말 고쉬(Nirmal Ghosh)를 3시간 동안 심문했고, FCCT 사무실의 컴퓨터들도 압수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이러한 협박 전술은 효과를 발휘했다. 방콕 주재 외신기자들은 왕실모독 처벌법에 저촉될만한 내용에 관해 기사를 쓰길 두려워했고, 이후 태국에서 발생중인 상황을 전세계에 설명함에 있어서 방콕 주재 외신기자들은 끔찍할 정도로 형편없는 수준의 능력만 발휘했다.
2008년 5월 25일, 옐로셔츠 운동은 '민주기념탑'(Democracy Monument)에서 집회를 개최했고, 약 1만명의 군중이 모였다. 옐로셔츠 시위대는 국회의사당과 정부청사로의 행진을 시도했고, '막카완 교'(Makkawan Bridge) 근처에서 저지를 당했다. 그러자 그들은 '막카완 교' 위에다 상설 집회장 무대를 설치했다. 그것은 이후 193일 동안 이어지면서 점점 더 과격해질 옐로셔츠 시위의 출발점이었고, 정부의 통치기능 마비를 위한 시도임이 분명했다.
6월18일, 태국과 캄보디아가 프랑스 파리에서 회담을 갖고, 9세기 크메르 제국 시대에 건립된 '쁘레아위히어 사원'(Preah Vihear temple, 프레아비히어 사원)을 유네스코(UNESCO)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한다는 데 합의한 '공동 커뮤니케'에 서명했다.
'국제사법재판소'(ICJ)는 '1962년 판결'을 통해 산봉우리 꼭대기에 위치한 '쁘레아위히어 사원'을 캄보디아 영토라고 규정했지만, 사원 주변에는 태국이 자국 영토라고 주장하는 '4.6 ㎢ 면적의 분쟁구역'이 존재했다. 양국의 공동 커뮤니케는 탁신 행정부 및 [쿠테타 이후 들어선 군사정권의 과도총리를 역임했던] 수라윳 쭐라논 행정부로 이어지면서 수년간의 외교적 협상을 거친 후 서명된 것이었고, '유네스코'도 양국 모두가 동의하면서 그것이 양국간 영토분쟁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경우 등재가 가능하다는 입장을 갖고 있었다.
양국이 서명한 '공동 커뮤니케'의 내용에는, 태국이 '쁘레아위히어 사원'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지지하지만 그것이 양국간 영토분쟁 관련 협상에 예비적 근거로 사용될 수는 없다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었다. 하지만 옐로셔츠 운동은 이 사안을 정부를 공격하기 위한 절호의 기회라고 보았다. 옐로셔츠들은 집권 PPP 정부가 "태국 영토를 캄보디아에 팔아먹었다"면서 완전히 그릇된 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민족주의적 분노를 자극하고 자신들의 반정부 시위를 강화하기 위해 태국-캄보디아 국경에서 위험한 긴장을 조성해나갔다.
6월20일, 수천명의 옐로셔츠 지지자들이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정부청사를 향해 행진했다. 그 사이 '민주당'은 6월 24~25일에 국회에서 내각 불신임안에 관한 심의를 열자고 요구하면서, '쁘레아위히어 사원'과 관련하여 정부를 공격하는 일에도 동참했다. 정부 여당은 국회에서 불신임안을 큰 힘도 안 들이고 부결시켰지만, 태국 주류 언론 대부분은 야당(=민주당)에 유리한 논조로 기사를 썼다.
한편, 사법부는 다시 한번 친-탁신 진영에 손상을 줄 판결 준비를 시작했다. 7월8일, '대법원'은 탁신의 고위급 측근인 용윳 띠야빠이랏(Yongyuth Tiyapairat)의 총선 선거법 위반 혐의 최종심에서 용윳의 유죄를 확정했다. [2006년 쿠테타 후 제정된] <2007년 헌법>에 따르면, 용윳의 불법선거 유죄 판결이 집권 여당인 PPP 전체의 해산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게다가 '헌법재판소'도 너빠돈 파타마(Noppadon Pattama: 1961년생) 외무부장관이 캄보디아와 '공동 커뮤니케'에 서명하기 전에 국회의 공식적인 동의절차를 먼저 밟았어야만 한다고 판결했다. 이 판결의 결과로 너빠돈은 7월10일 사임했다. 미국대사 에릭 존은 7월9일 본국에 보고한 비밀 외교전문에서 "본 대사관은 '헌법재판소'의 분석이 의문의 여지가 있음을 발견했다"고 논평하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이번 판결은 탁신의 지지자들에게, 사법부가 탁신 및 그 동맹세력에게 비우호적이라는 인상을 더욱 강화시켜주었을 것으로 보임. |
또한 탁신을 반대하는 세력들은 2003년에 있었던 계약 건과 관련하여 탁신 및 그 부인인 퍼짜만 다마퐁(Potjaman Damapong: 1956년생)의 부패 혐의에 유죄 판결을 이끌어내기 위한 노력도 강화해나갔다. 퍼짜만 역시 세금포탈 혐의로 고발됐다. 미국대사 에릭 존은 본국으로 보낸 비밀 외교전문에서, 태국 사법부의 정치화가 장기적으로는 태국의 미래에 커다란 해를 미칠지도 모른다고 경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사법부가 탁신을 투옥시키거나 혹은 그의 위신을 회복불가능한 수준으로 손상시킴으로써 탁신을 소외시켜버릴 능력을 발휘할 가능성도 있음. 본 대사관은 탁신이 총리로서의 자신의 권한을 이용하여 자기 자신이나 혹은 자신의 측근들에게 이익이 되도록 했을 개연성도 있다고 보기 때문에, 탁신에 관한 한두건의 유죄판결이 나올 가능성도 존재한다고 보고 있음.
하지만 본 대사관은 태국인들 사이에서 사법부가 정치화되고 있다는 인식이 증가하고 있다는 점 역시 지적하고자 함. 이러한 인식은 2006년 4월 푸미폰 국왕이 분수령이 될만한 연설을 행한 후부터 증가하고 있음. 푸미폰 국왕은 당시 연설에서, 사법부가 현재 진행중인 정치위기 해소를 위해 행동에 나서라고 촉구했었음.
태국 사법부는 현재 명망과 신뢰 면에서 볼 때, 탁신을 소외시키기 위해 필수적인 수준은 확보하고 있음. 탁신을 소외시킨다는 목표는 태국 군부가 2006년 9월의 쿠테타와 2007년 정국을 통해 이미 시도했던 일이지만 실패하고 말았음. 하지만 사법부가 전통적인 역할을 넘어서서, 점차로 정치 지형을 그려내기 위한 결정적인 도구로 봉사할 경우, 장기적인 관점에서 사법부 역시 고통에 시달릴 수도 있을 것임. |
7월22일, '다 토페도'(Da Torpedo)라는 애칭으로 유명한 시민운동가 다루니 찬천실빠꾼(Darunee Charnchoensilpakul)이 왕실모독 처벌법 위반 혐의로 체포됐다. 그녀가 체포된 것은 7월 18~19일 사이에 진행된 '옐로셔츠 운동 반대 집회'에서 행한 연설 때문이었다. 미 대사관 대리공사 제임스 엔트위슬이 2008년 8월 1일 본국에 보낸 비밀 외교전문에서 지적한대로, 다루니의 발언 중 일부는 태국 사회의 가장 민감한 금기사항들을 건드리고 있었다. 엔트위슬은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그녀(=다루니)는 푸미폰 국왕이 자신의 형이었던 아난타 마히돈(Ananda Mahidol, 라마 8세: 1925~1946) 국왕의 비정상적인 죽음에 연루됐을 가능성을 시사했음. 그리고 태국이 왕정을 폐지시킨 네팔의 선례를 따라야 한다고 촉구했음. 또한 그녀는 연로한 국왕이 의사결정에서 쁘렘 띠나술라논 추밀원 의장이 결정하도록 의존하고 있다고도 암시했음. |
왕당파 기득권층과 옐로셔츠 운동, 그리고 사법부가 터무니없는 일들을 저지르면서, 왕실의 위신이 더욱 실추되는 일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미 대사관 대리공사 엔트위슬은 8월1일자 비밀 외교전문에서 친-탁신 인사인 짜란 딧타아피차이(Jaran Ditapichai: [역주] 탁신 행정부의 국가인권위원 역임) 및 [반-탁신] 옐로셔츠 운동 지도자 중 한명인 솜끼얏 퐁파이분(Somkiat Pongpaiboon)의 말을 인용하면서, 그들이 왕당제 반대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고 발언했다는 점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레드셔츠'(UDD) 활동가인 짜란은 과거 공산주의자였으며, 프랑스 혁명에 관해 저술한 자신의 책에서 왕정에 대한 혐오감을 드러내 논란을 불러일으킨 적이 있는 인물임. 그는 본 대사관과의 접촉에서, 다루니의 경우처럼 왕정 반대 정서를 공개적으로 표명하는 경우가 증가하는 것을 느끼면서 자신도 놀랐다고 말했음. 그는 "현재 많은 태국인들이 그녀와 유사하다. 온라인이나 커피숍, 그리고 지역 라디오 방송 등이 그렇다"고 말함. 짜란은 발언에서, 태국 현대사 최초로 국왕이 대중들로부터 공개적으로 심한 비판을 받고 있다고 말함. 짜란의 주장에 따르면, 여러 지역 라디오 방송들이 청취자 전화를 받는 프로그램을 방송하는데, 전화를 건 애청자들이 국왕이 과거 쿠테타들을 지지한 데 대해 불만을 표시하면서, 군주제가 태국 민주주의 발전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시각을 드러내곤 한다고 함.
옐로셔츠 운동 지도자 중 한명인 솜끼얏도 본 대사관과의 접촉에서, 자신 역시 2005년을 기점으로 왕정 반대 웹사이트들이 급증하는 것을 인식했다고 말함. 또한 그는 왕세자의 부인인 시랏 왕자비가 세미 누드로 등장하는 동영상 DVD가 광범위하게 보급된 일도 언급함. |
탁신과 그의 부인 퍼짜만은 8월이 되자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을 참관하러 해외로 출국했다. 하지만 중국 방문 일정을 마친 탁신은 태국으로 귀국하지 않았고, 부부가 함께 런던행 비행기에 올랐다. 8월11일, 탁신은 자필로 쓴 성명서를 태국 언론사들에 전송하여 배표했다. 그는 자신을 상대로 진행 중인 재판절차가 불공정한 것이라고 맹비난하면서, 그 때문에 자신은 귀국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옐로 진영은 피 냄새를 감지했다. 탁신이 공식적으로 도주한 것이었다.
* 시리즈물 바로가기 :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1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2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3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4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5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6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7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8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9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10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11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12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제13편)"
- ""깔리육", 태국의 광기시대 : 왕위계승과 정치위기 (완결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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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 모두 와치라롱꼰 왕세자가 어릴때부터 행실을 바르게 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아마도 그랬더라면
태국은 지금쯤 "통일된 왕당파"와 "순수 공화파"(=왕정 폐지파)가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이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지 않나 싶습니다..
핵심은 태국 왕실이 재산이 너무 많고 실질적 영향력이 너무 세서 나타난 현상이죠..
그런 시스템 속에서 국왕이나 왕자의 개인적 인품이 훌륭하다고 해서 달라질 건 별로 없다고 봅니다..
오히려 망나니 왕세자 덕분에
왕정이 숨이라도 붙어 있을 공간을 마련한 셈이지요.
하여간 아이러니합니다..
@울트라-노마드 또 그럴 가능성도 있겠군요. 요지경입니다 ,,, 주위에 태국 사람들은 온통 푸미폰 국왕에 대한 경애심이 가득합니다. 시린톤 공주가 왕을 이어주길 바라고 있는것 같아요. 그런데 정말 왕세자가 에이즈 환자였군요. 이 문서는 아주 단언을 하고 있네요 ~
그러게 말이죠..
저도 속설들은 알고 있었지만,
증거가 없어서 언급은 안 했었는데..
앤드류 기자의 정보력과 관점이 워낙 중요하다 보니..
그에 의거할 경우엔 거의 사실로 보입니다.,.
@울트라-노마드 그러게요 왕세자를 에이즈라고 단언해버리니 저도 읽고 깜놀했습니다. 저도 소문만 들었었습니다만, 설마 설마 했는데 ,,, 요즘은 뭐 길게 가지고 가도 되는 병이 되버리지 않았나 싶네요. 그나저나 왕세자가 뒤집히고 띠빵콘 왕자가 왕이 되고 섭정을 한다면 정말 피바람이 몰아치겠네요. 왕세자 성격상 가만있지 않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