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 / 보고 싶은 불. 보살
중생을 삼악도로부터 건지는데 큰 힘과 지혜가 필요한 이유는?
타력적 지혜와 자비
불교의 세계관에서 볼 때 인생의 모든 의미가
1회적인 짧은 생애로 마무리되지는 않는다.
해탈을 이룰 그날까지 무수한 세월을 영겁이라는
날줄과 씨줄을 짜가면서 생과 사는 거듭된다.
더불어 인간은 부지불식간에 그 생과 사의 모순을 매 찰라마다
깊이 흔적을 남기면서 발걸음을 내딛는다.
그래서 어쩌면 신나게 살아간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살기 위해서 먹고 마시는 일이 결국 죽음으로 종지부를 찍고 만다.
그래서 불교는 생의 측면뿐만 아니라 죽음의 측면도 중요시한다.
아미타불과 그 아미타불의 세계인 정토는 바로 죽은 자들의 님이며,
죽은 자들이 살아가는 극락의 세계이다.
그 정토세게의 주인인 아미타불의 협시보살로서
좌측에 있는 분이 관세음이고 우측에 있는 분이 대세지이다.
여기서 관음은 자비를, 대세지는 지혜를 각각 상징한다.
그래서 현생에서서 지혜와 자비를 각각 대표하는 보살이 문수와 보현이라면,
사후 세계에서 지혜와 자비를 각각 대표하는 보살이
대세지보살과 관음보살이라고 일컫는 모양이다.
나는 여기에 한 가지 더 보태겠다.
문수와 보현이 자력적 의미에서 지혜와 자비를 대표한다면,
관음과 대세지는 타력적 의미에서 지혜와 자비를 보여준다는 것을.
아미타불이 망자들의 님이기도 하면서 절대 타력의 주체이기 때문에 그렇다.
인간이란 신까지도 뛰어 넘어 천지를 홀로 거닐 수 있는
절대 주체의 주인공이지만도 하지만,
반면 떨어지는 낙엽만도 못 할 만큼 연약한 존재이기도 하기에
자력과 타력의 양면은 모두 똑같은 비중으로 인간에게 다가선다.
아니 살아가는 것이 나날이 힘든 나약한 중생에게는
타력이 훨씬 가슴에 와 닿는다.
정토 신앙은 이러한 타력적 의미와 망자들을 극락으로 인도하는
정토 왕생이라는 두 가지 구원 의지를 간직한다.
그 정토 신행에서 지혜의 측면을 드러내는 보살이 바로 대세지인 것이다.
지혜의 힘으로 중생을 정토로 이끄는 님
대세지보살의 산스크리트 이름은 마하 스타마 프랍타 이다.
마하란 주지하다시피 대(大)를 의미하고
스타마는 힘 또는 세력을 의미하는 중성 명사로서
력(力) 또는 세(勢)로 한역된다.
프랍타는 가득 채우다는 뜻의 프라(Pra)의 과거분사로서
'가득한', '충만한'이라는 뜻이다.
결국 큰 힘으로 가득찬 보살이라고 하여 대세지(大勢至),
득대세(得大勢), 득세지(得勢至) 등으로 의역되었고
약하여 세지(勢至)라고도 했다.
대세지 보살의 힘은 바로 지혜의 힘이다.
지혜는 빛으로 상징된다.
무명의 어둠은 지혜의 밝은 빛이 스며듬에 따라 자연스레 사라진다.
그 지혜의 강력한 힘으로 대세지보살은 중생들을 안락의 세계로 인도한다.
그것을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이 보살의 이름을 가이 없는 광명인 무변광(無邊光)이라고 하며
또한 지혜의 광명으로 일체 중생을 두루 비추어,
지옥, 아귀, 축생 등 삼악도(三惡道)의 고난을 여의게 하는
위없는 힘을 지니고 있으므로 대세지라고 한다.'
그렇다면 같은 지혜의 보살로서 대세지가 문수와는 달리
어떻게 정토로 향하고자 하는 중생들의 타력적인 마음에 지혜를
심어줄 수 있었는가를 그의 전생을 통해 알아보자.
『능엄경(能嚴經)』제5권에는 대세지법왕자(大勢至法王子)가 등장한다.
그는 오랜 옛날 초일월광(超日月光) 부처님으로부터
아이가 어머니를 간절히 부르듯
부처님을 일념으로 염하는 염불 삼매의 가르침을 받았노라고 하면서
그분의 설법 내용을 말한다.
'만약 중생이 부처님을 기억하면서 염불하면 지금이나 미래에
반드시 부처님을 친견하게 되어 부처님과 거리가 멀지 않게 되리니,
방편을 빌리지 않고서도 저절로 마음이 열리게 되리라.
이는 마치 향기를 물들이는 사람의 몸에 자연스레 향기가 배는 것과 같으리니,
이를 이름하여 향광장엄(香光莊嚴)이라한다.'
이러한 내용의 설법을 듣고 왕자는
'저는 본래의 인지(因地)에서 염불하는 마음으로
무생인(無生忍)에 들어갔고,
지금 이 세계에서도 중생을 정토로 이끌어 돌아가게 합니다'라고
하면서 자신의 역할을 설명하고 있다.
결국 이 보살은 끊임없이 염불 수행을 해 온 결과 무생법인을 얻어,
그 힘으로 중생들은 정토로 이끈다는 말이 된다.
염불, 그것은 부처님을 가슴 깊이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염불을 임의대로 편의에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일념으로 간절하게 부처님을 떠올려 그 생각이 끊임없이 이어진
즉 삼매의 경지로 들어선다.
삼매의 경지에서 부처님을 부르니,
이미 거기에는 나와 부처님과의 간격이 없다.
나와 부처님은 한 몸이 된다.
대세지보살은 자신을 철저히 비우고 간절히 부처님을 염했기 때문에,
부처님의 대자비에 싸여 자타불이(自他不二)의 경지에 들어갔으며,
그것은 사실 반야의 불이(不二)적 지혜를 나타내므로
마침내는 생사를 모두 여읜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자연스레 얻게 된 것이다.
여기서 지혜란 염불로 자신을 한없이 비워내 절대 타자인
아미타부처님께 귀의한 결과 생겨난 '타력적 지혜'인 것이다.
그렇게 염불을 통한 불이적 지혜-타력적 지혜,
그 지혜의 빛으로 염불하는 중생을 정토로 이끄는 보살,
그 정토로 이끄는 힘이 어마어마하게 세서,
그 힘이 끝간데 없이 어디든지 미치기에 대세지라 하게 된 것이다.
아미타 삼존불, 우리의 대세지보살
대세지보살은 관세음보살과 더불어 아미타불의 협시(協侍)로
등장하여 한국인의 마음에 정토로 향하는 굳건한 힘을 보태준다.
가난과 고통에 좌절하여 쓰러지는 중생들에게 힘을 북돋워주며,
고지가 바로 저긴데 예서 머물수 없다면서 부단히 독려하여
마침내 정토 세계에 당도케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대세지보살은 아미타 삼존불의 협시보살로서
그림 또는 조각으로 모습을 나투게 되었다.
경북 군위군(軍威郡) 팔공산 자락의 아미타 삼존불이나
천은사 극락전의 아미타 삼존도에서
그 힘차고 아름다운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대세지보살의 모습을 보면 보관(寶冠)에 보병(寶甁)이
새겨져 있을 뿐,
그 밖에는 화불(化佛)이 담긴 보관을 쓴 관세음보살과 별반 차이가 없다.
이는 『관무량수경』의 다음 구절을 충실히 따른 것으로 보인다.
'이 보살의 신체는 관음보살과 동일하며, 원광(圓光)을 갖추고
널리 (빛을) 비추고 있다.
머리 정상의 육계(育계) 위에 하나의 보병(寶甁)이 있다.
그밖에 신체의 모습은 관음과 동일하다.'
군위의 제2의 석굴암 아미타삼존불에서 우리는 통일신라시대,
그 당시의 정토를 그리워하는 우리 옛 조상들의 굳건한 믿음을 읽을 수 있다.
이 군위의 삼존불에서는 힘이 느껴진다.
원만한 상호를 한 아미타본존불과 그보다는 좀 작게 조성된
관음보살상과 대세지보살에서는
전체적으로 세련되고 섬세한 맛은 떨어지지만
신라 시대의 강건한 기풍이 잘 드러나 있다.
아미타 삼존불게 귀의하는 마음은 통일신라시대 뿐만 아니라
고려 시대나 조선시대에도 면연히 이어졌다.
상당수 남아있는 고려 불화의 아미타삼존도에서 그 선명한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천은사 아미타 삼존도는 1776년 그려진 것으로
아미타불화의 세계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여기에 등장하는 대세지 보살은 보관에 보병이 새겨져 있음은 물론이거니와 손에는 경책을 들고 있다.
이렇게 경책을 들고 있는 모습은 조선 시대 대세지보살상의 한 특징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이 보살의 지혜를 상징하는 것이다.
아미타불을 사이에 두고 대세지보살과 나란히 서있는 관세음보살은
화불로서 아미타불 입상(立像)이 새겨진 보관을 썼으며
손에는 보병을 들고 있다.
천은사 아미타 삼존도에서 느껴오는 자비의 미학은 어느 불화 못지않게
우리들의 마음을 다정다감한 정토의 세계로 인도한다.
삼존불의 원만한 상호와 그윽한 눈동자에서 누구라도 눈물을 흘리며
도타운 자비와 지혜, 그리고 강력한 힘에 파묻히길 바랬을 것이라는 느낌이 온다.
사실 이 작품이 조선 시대 말기에 그려졌다면,
그 당시 가부장적 유교사회에서 할 말 못하고 서럽게 억눌렸던 여심들의 마음을 달랬을 것이고,
가난과 압박에 지친 힘없는 민초들에게 더없는 마음의 위안을 보냈으리라.
이 밖에도 아미타삼존불이 많이 그려지거나 조성된 사실을 보건대,
정토로 향하는 염불 수행자들은 대세지보살에게 지혜와 용맹스러운 힘을 간구했을 것이다.
대세지보살은 그렇게 현실의 질곡을 벗어나게 해주는 님으로서의
우리 곁에 항상 서 있을 것이다.
[출처] 목야뜨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