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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 글] 오래오래 두고 읽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동성연애자 목종의 나약한 정치와 강조의 반란
(980 ~ 1009년, 재위기간 : 997년 10월 ~ 1009년 2월, 11년 4개월)
18세의 어린 목종(穆宗)이 집권하자 왕권은 그의 모후 헌애왕후 차지가 된다. 유난히 정권욕이 강했던 헌애왕후는 김치양과 부부연을 맺고 그들의 소생으로 왕위를 이으려는 음모를 꾸미게 되고, 왕권을 상실한 목종은 도탄에 빠진 나머지 남색을 즐기며 정치를 외면한다. 이에 따라 조정이 일부 척족과 권신들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면서 고려는 점점 혼란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목종은 경종의 맏아들로 제3비 헌애왕후 황보씨 소생이며 이름은 왕송(王訟), 자는 효신(孝伸)이다. 980년에 태어난 그는 경종이 사망할 당시 불과 두 살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왕위는 성종에게로 이어졌다. 하지만 아들이 없던 성종은 왕송을 궁중에서 양육하여 990년에 개령군에 봉했다. 그리고 왕송은 997년, 병으로 누워 임종을 앞둔 성종의 내선으로 왕위에 오른다. 그가 곧 고려 제7대 왕 목종이다.
목종이 왕위에 오르자 그의 나이가 어리다는 것을 빌미 삼아 친모 헌애왕후가 섭정을 실시한다. 정권을 거머쥔 헌애왕후는 곧 자신의 정부 김치양을 불러들인다. 김치양은 성종 대에 천추궁을 출입하면서 헌애왕후와 정을 통하다가 이 일이 발각되어 장형을 당하고 귀양 중에 있던 상태였다.
김치양을 불러들인 헌애왕후는 스스로를 천추태후라 부르도록 하고, 정사를 마음대로 주무른다. 또한 김치양과 버젓이 부부행세를 하며 간통을 하고 아이까지 출산하게 된다.
김치양은 등용된 지 채 몇 년도 되지 않아 우복야 겸 삼사사에 오르고, 인사권을 장악하여 백관의 임면권을 손아귀에 넣었다. 이렇게 되자 전국에서 벼슬을 원하는 자들이 뇌물을 가지고 그의 집으로 몰려들었으며, 그는 거둬들인 뇌물로 3백여 칸이나 되는 집을 짓고 정원에 정자와 연못을 꾸며 밤낮으로 천추태후와 놀아났다.
또한 김치양은 자신의 사당을 짓기 위해 백성들을 부역에 동원하기도 했으며, 이 때문에 백성들의 원성이 날로 높아갔다.
김치양의 권력독점으로 조정이 기능을 상실하게 되자 목종은 그를 내쫓기 위해 여러 가지 방책을 강구하지만 천추태후의 방해로 번번이 실패한다. 이렇듯 왕권을 완전히 빼앗긴 목종은 절망한 나머지 정사를 소홀히 하고 엉뚱하게도 남색을 즐기기 시작한다. 그의 동성연애 대상은 유행간이라는 인물이었다. 유행간은 용모가 남달리 아름다웠는데, 목종은 그의 용모에 반하여 남색을 즐기게 된다.
목종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된 유행간은 곧 합문사인의 벼슬에 오르게 되고, 항상 목종 곁에서 정사를 농단하기 시작한다. 목종은 정사에 관한 한 유행간에게 묻지 않는 것이 없었고, 이에 따라 유행간은 마음먹은 일이면 언제든지 왕을 조정하여 이룰 수 있었다.
왕을 마음대로 조정하게 된 유행간 역시 김치양과 마찬가지로 오만하고 방자한 행동을 일삼았다. 심지어는 백관들을 경멸하여 그들에게 턱과 눈빛으로 지시를 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되자 왕의 측근 신하들은 마치 유행간을 왕처럼 떠받들었다.
유행간은 힘이 강해지면서 유충정이라는 또 한 명의 인물을 목종에게 소개해주었다. 발해 출신인 유충정 역시 외모가 미려하고 신체가 뛰어난 덕택으로 목종의 사랑을 받게 되었고, 조정은 점차 유행간과 유충정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다.
그들 두 사람은 항상 목종 곁에서 왕명을 핑계하여 인사를 좌우하였으며, 때로는 자신들이 마치 왕인 것처럼 많은 궁인들을 이끌고 다니기도 하였다.
조정이 이처럼 혼란의 소용돌이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가운데, 1004년 그동안 김치양과 놀아나던 천추태후는 아들을 출산했다. 이 때부터 김치양과 천추태후는 자신들의 아들을 차기 왕으로 앉히기 위해 온갖 음모를 꾸미기 시작한다.
당시 태조의 유일한 혈통은 안종 왕욱과 헌정왕후의 불륜의 씨앗인 대량원군뿐이었다. 헌애왕후의 친동생 헌정왕후는 경종이 죽은 후에 사가에 머물다가 왕욱과 눈이 맞아 아이를 낳았고, 이를 알게 된 성종은 왕욱을 귀양 보냈다. 그 후 헌정왕후는 혼자 아이를 출산하다가 산욕으로 죽고 아이는 성종에 의해 대궐에서 양육되었다. 이 아이가 바로 대량원군이었다.
천추태후는 자신의 이종조카인 대량원군을 없애면 김치양과 자신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태자로 책봉할 수 있으리라 판단하고, 대량원군을 강제로 머리를 깎여 숭교사로 출가시킨 뒤 다시 양주로 내쫓아 삼각산 신혈사에 머물도록 했다. 그리고 누차에 걸쳐 자객을 보내 그를 죽이려 하였다. 하지만 그때마다 대량원군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김치양과 천추태후의 왕위를 노린 음모가 치열하게 전개되는 가운데 목종은 병을 얻고 말았다. 원래부터 겁이 많던 그는 1009년 봄에 숭교사를 다녀오다가 폭풍을 만난 다음부터 마음이 더욱 약해졌다. 그리고 며칠 뒤 연등회 도중에 기름창고에 불이 붙어 천추전이 불타고, 궁궐 일부와 창고마저 소실되자 슬픔에 잠겨 정사를 돌보지 않고 드러누웠다.
목종이 병으로 눕자 천추태후와 김치양은 대량원군을 죽이기에 혈안이 되었고, 조정은 더욱 엉망진창으로 변해갔다. 왕 곁에는 항상 유행간과 유충정이 그림자처럼 붙어 있었으며, 그들의 측근을 제외한 다른 신하들은 왕의 얼굴조차 볼 수 없었다.
병으로 누운 목종은 좀처럼 편전에 나가지 않았으며, 만나기를 청하는 신하가 있어도 결코 만나주지 않았다. 따라서 유행간과 유충정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모두 왕명이라는 이름을 달았다.
그러는 사이 목종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다. 그는 스스로 임종이 가까워졌음을 알고 한시바삐 후계자를 결정하고자 하였다. 후계자 자격을 갖춘 유일한 혈통은 대량원군 왕순뿐이었다. 하지만 유행간이 왕순에게 선위하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에 목종은 은밀히 채충순과 최항을 불러 차기 왕에 대해 의논하고 황보유의를 신혈사로 보내 대량원군을 데려오라고 명령하였다. 또한 전중감 이주정이 김치양 일파이기 때문에 서북면 순검부사로 파견하고 동시에 서경 도순검사 강조(康兆)를 불러들였다.
강조가 왕명을 받고 서경을 출발하여 동주 용천역에 도착했을 때 내사주서 위종정과 안북도호장서기 최창이 찾아왔다. 그들은 왕의 병세가 악화되어 이미 위독한 상태이기 때문에 천추태후와 김치양이 왕명을 날조하여 북방의 군사권을 쥐고 있는 강조를 소환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미 백성들 사이에선 왕이 김치양 일파에게 살해당했을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했기 때문에 강조는 그들의 말을 사실로 믿고 다시 서경 본영으로 돌아갔다.
이 때 천추태후는 강조가 개경으로 돌아오면 자신들의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는 생각에 도중에서 그를 생포하기로 결정하고 군사를 배치해둔 상태였다. 그 사실은 곧 강조의 아버지에게 전해졌고, 그는 아들이 염려되어 급히 사람을 시켜 ”왕이 이미 죽고 없으니 병사를 거느리고 와서 국난을 평정하라.” 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아버지의 편지를 받아본 강조는 병력 5천 명을 인솔하고 개경으로 진출했는데, 평주(평산)에 도착해서야 왕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알았다. 강조는 병사를 이끌고 온 것을 후회했지만 이미 때는 늦은 상태였고, 결국 부하 장수들의 건의에 목종을 폐립할 것을 결정했다.
폐립을 결정한 강조는 사람을 시켜 왕이 잠시만 귀법사로 몸을 피했으면 한다는 내용의 서찰을 궁궐로 보냈다. 귀법사로 피해 있으면 김치양 일파를 제거한 다음 다시 데리러 가겠다는 뜻이었다.
강조는 그렇게 목종을 안심시킨 다음 군대를 몰아 왕성으로 진군했다. 병사들이 궁 안으로 밀려들자 목종은 폐위를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스스로 모후와 함께 궁인들과 유충정을 데리고 법왕사로 몸을 피했다.
목종이 궁궐을 빠져나가자 강조는 목종을 폐위시키고 대량원군을 왕으로 세웠다. 그리고 김치양 부자와 유행간 등 7명을 죽이고 그 도당과 천추태후의 친속 이주정 등 30명을 귀양 보냈다.
한편 법왕사로 떠난 목종은 최항을 시켜 강조에게 말을 내어줄 것을 부탁했고, 이에 강조가 말 한 필을 보내주자 충주로 말을 몰았다.
하지만 강조는 뒷일을 염려하여 목종을 죽이기로 결심하고는 사람을 시켜 사약을 먹도록 강요했는데, 목종이 이를 거부하자 결국 강조의 수하들이 목종을 살해하고 자살한 것처럼 꾸몄다.
목종은 결국 객지에서 비명횡사하고 말았던 것이다. 목종이 죽자 강조의 수하들은 문짝으로 관을 삼아 시체를 보관하고 강조에게 보고하니, 강조는 적성현 창고에서 쌀을 내어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1009년 2월에 일어난 이 같은 강조의 역모사건으로 11년 4개월 동안의 목종시대는 끝이 났다. 또한 이 사건은 현종 즉위 후 거란이 고려를 침입하는 빌미가 되기도 한다. 이 때 그의 나이는 30세였다.
이제현은 『고려사』에서 목종의 치세에 대해 이렇게 평하고 있다.
”경부는 노나라의 예법을 위반하였고, 불위는 진나라의 화근을 빚어냈으며 제나라 환공은 자기 시체에서 벌레가 생기도록 거두는 자가 없었고, 진시황은 모래톱에서 객사하였으니 이런 사람들이 어찌 만대의 치욕을 모면할 수 있겠는가? 목종은 이런 사람들의 실패를 교훈으로 하여 일의 시초부터 마땅한 방비를 하지 않았다가 결국 모자가 함께 화를 입고 왕실을 거의 망칠 뻔하였던 것이다. 아아! 목종의 불행은 오히려 불행이 아니로다.”
목종은 생을 마감한 지 한 달 후에 적성현 남쪽에서 화장되었으며 능호는 공릉이다.
목종은 선정왕후 유씨 이외에 다른 부인을 두지 않았으며, 소생은 없었다. 그가 소생이 없었던 것은 아마 남색을 즐겼기 때문일 것이다.
선정왕후 유씨는 태조의 아들 수명태자 소생 홍덕원군 왕규의 딸이다. 죽은 후에는 목종 사당에 합사되었다.
[출처] 고려 제7대 왕 목종실록 ㅡ 동성연애자 목종의 나약한 정치와 강조의 반란|작성자 여름을청하다
불륜의 씨앗 왕순의 파란만장한 삶과 즉위 과정
경종 이후 고려 왕실은 왕위를 승계할 왕자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는다. 경종은 죽을 당시에 아들이 겨우 두 살밖에 안 된 젖먹이였기 때문에 사촌동생 성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어야 했다. 그런데 성종은 딸 둘만 얻었을 뿐 아들을 얻지 못했다. 그래서 별수 없이 경종의 아들 목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하지만 목종은 단 한 명의 자식도 얻지 못했다. 왕족 중에 근친을 통해 아들을 낳은 사람은 안종 왕욱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아들은 경종의 제4비 헌정왕후와의 불륜관계에서 얻은 아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위를 승계할 왕자가 없는 상황이 되자 불륜의 씨앗인 왕순에게 시선이 집중됐다.
왕순의 어머니 헌정왕후는 태조의 제4비 신정왕후 황보씨 소생 대종 왕욱의 딸이며, 아버지 안종 왕욱은 태조의 제5비 신성왕후 김씨 소생이다. 따라서 안종은 헌정왕후의 삼촌이 된다. 그리고 헌정왕후는 성종과 남매지간이기도 했다.
헌정왕후는 경종과 사별한 뒤 사가에 머물렀다. 그녀의 사가는 왕륜사 남쪽에 있었는데 그 근처에 왕욱의 집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주 왕래하였고, 마침내 서로 연정을 품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아이를 잉태했다.
왕욱이 귀양지로 떠나던 992년 7월 임진일 헌정왕후는 비로소 아이를 낳았다. 하지만 그녀는 산욕으로 죽었다. 이렇게 해서 태어난 아이가 왕순이다.
비록 불륜으로 태어난 아이였지만, 왕순은 태조의 손자이자 성종 자신의 사촌동생이었다. 성종은 왕순을 불쌍하게 생각하고 유모를 선택하여 궁중에서 그를 길렀다.
유모는 아이에게 항상 ‘아버지’ 라는 단어를 가르쳤다. 그러던 어느 날 성종이 찾아왔을 때 아이는 그를 아버지라고 부르며 무릎 위로 기어올라갔다. 그 광경을 보고 성종은 눈물을 흘리면서 아이를 아버지에게 데려다 줄 것을 명령했다.
이것은 왕순이 두 살 때 일이다. 이후 왕순은 귀양지에 있는 아버지 왕욱에게 보내진다. 하지만 996년 왕욱이 병으로 죽자 왕순은 아버지마저 잃게 된다.
다섯 살에 고아 신세가 된 왕순은 이듬해 다시 개경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이 해에 성종이 죽고 목종이 들어서면서 왕순은 목숨이 위태로운 처지에 놓인다.
목종이 왕위에 오르자 모후 천추태후가 섭정을 하게 되고, 왕권은 일순간에 그녀의 손에 넘어간다. 왕권을 장악한 그녀는 김치양과 간통하여 아들을 낳고는, 목종이 아이를 낳지 못하자 자신과 김치양 사이에 태어난 아들을 왕으로 세우기 위해 음모를 꾸민다. 그러자니 자연히 유일하게 왕위 계승권을 가진 동생의 아들 왕순이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었다.
왕순은 당시 이미 대량원군에 봉해져 있었다. 자식을 낳지 못한 목종이 1003년에 그를 대량원군에 봉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목종이 자식 없이 죽는다면 그가 왕위를 이을 것은 기정사실화된 일이었다.
그 때문에 왕위를 노리고 있던 천추태후는 억지로 왕순의 머리를 깎게 하고 개성의 숭교사로 출가시켜버렸다. 그리고 1006년 왕순은 다시 양주로 내쫓겨 삼각산의 신혈사에 머물러야 했다.
이 때부터 천추태후는 누차에 걸쳐 자객을 보내 왕순을 죽이고자 했다. 하지만 신혈사의 노승이 방 안에 굴을 파고 그 위에 침대를 놓는 방책으로 그를 숨겨주었기 때문에 다행히 목숨은 건질 수 있었다.
그런 가운데 목종이 병으로 눕게 되었다. 이 때문에 헌애왕후는 왕순을 죽이기에 더욱 혈안이 되었다. 자객을 보내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직접 심복을 시켜 독이 든 술과 음식을 먹도록 강요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때마다 왕순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그리고 죽음의 공포에 떨며 몇 번에 걸쳐 목종에게 편지를 썼다.
그의 편지는 유행간에 의해 곧잘 중간에서 사라지곤 하였다. 하지만 대량원군을 차기 왕으로 앉혀야 된다고 생각하던 유충정이 그의 편지를 왕에게 전달함으로써 다행히 위기상황을 전할 수 있었다.
목종은 이 때 이미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을 간파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우복야 김치양이 왕위를 노리고 있다는 것도 유충정을 통해서 전해들은 상태였다. 그래서 충주부사로 있던 채충순을 은밀히 불러 왕순의 편지를 보여주며 한시바삐 신혈사로 가서 그를 대궐로 데려오도록 하는 한편, 서경 도순검사로 있던 강조를 도성으로 불러들여 병권을 안정시켜 도성의 안위를 도모하고자 했다.
하지만 강조는 왕의 명령이 천추태후에 의해 조작되었다고 생각하고 김치양 일파를 제거하기 위해 군사 5천을 이끌고 개경으로 향했다. 서경을 떠날 때 강조는 목종이 이미 김치양 일파에 의해 살해됐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경기도 평주에 이르렀을 때 왕이 살아 있다는 말을 듣고 그는 머뭇거리게 된다. 하지만 군사를 이끌고 와 반역으로 몰릴 것이 불 보듯 뻔한 처지에서 선택의 길은 한 가지뿐이었다. 그는 바로 궁궐을 향해 말을 달렸다.
강조의 군대는 순식간에 궁궐을 장악했다. 궁궐을 장악하자 추종자들이 그를 왕으로 세우려 했지만 강조는 거부했다. 그리고 목종을 폐위하여 양국공으로 낮추고, 대량원군 왕순을 데려와 왕으로 세웠다. 그가 바로 고려 제8대 왕 현종(顯宗)이다.
1. 수난을 먹고 자란 군주 현종과 고려의 국력 신장
(992년 ~ 1031년, 재위기간 : 1009년 2월 ~ 1031년 5월, 22년 3개월)
현종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거란의 침입으로 몽진하는 신세가 된다. 하지만 이미 수난에 이골이 난 그는 계속되는 어려움을 극복하고 성종 대 이후 과거로 등용된 인재들과 함께 고려의 위상을 새롭게 정립하는 데 성공한다. 이로써 고려는 성종 이후 제2의 도약기를 맞이하게 된다.
현종은 992년 태조의 제5비 신성왕후 김씨 소생 안종 왕욱과 경종의 제4비 헌정왕후 황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어나면서 어머니와 사별하고 성종에 의해 궁중에서 양육되었으며, 1003년(목종 6년)에 12세의 나이로 대량원군에 책봉되었다. 그리고 1009년 2월 목종이 강조에 의해 폐립되자 대신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이 때 그의 나이 18세였다.
현종은 왕위에 오르자 곧 교방(敎坊, 음악을 가르치던 곳)을 혁파하고 목종 대에 늘어난 궁녀 1백여 명을 해방하였다. 그리고 유윤부를 문하시중으로 삼고, 유방헌을 평장사로, 강조를 이부상서 참지정사로, 진적을 형부상서 참지정사로, 류진을 상서 좌복야로, 왕동영을 상서 우복야로, 최항을 좌산기상시로, 김심언을 우산기상시로, 채충순을 이부시랑 좌간의대부로, 김려를 병부상서로, 문인위를 공부상서로 각각 임명하여 조정을 일신하였으며, 연등회를 부활하여 백성들의 화합을 도모하고 동북 변방으로 이주시켰던 남도 출신 양민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등 민심을 진작시키기 위한 일련의 정책을 실시하였다.
하지만 현종은 즉위 초부터 전란에 휘말려 고초를 겪어야 했다. 거란이 목종의 폐위를 구실 삼아 고려를 침략했기 때문이다.
여진족의 고변으로 목종 폐립의 내막을 알게 된 거란은 1010년 7월 급사중 양병과 대장군 나율윤을 파견하여 목종 살해사건의 진상을 밝힐 것을 요구하였다. 고려는 이에 따라 진적과 윤여를 거란에 파견하여 목종 폐립사건의 양해를 구하였으나 거란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거란과 고려 양국 간에 전쟁 분위기가 형성되었고, 현종은 강조를 행영도통사로 삼아 병력 30만으로 하여금 통주(평북 선천)에 주둔하며 거란군을 방어하게 하였다. 그리고 그해 10월 마침내 거란왕은 40만 대군을 직접 이끌고 고려로 진군했다.
압록강을 건넌 거란은 먼저 흥화진을 포위하고 도순검사 양규(楊規)에게 편지를 보내 항복을 종용하면서 목종을 죽인 강조를 거란에 압송하면 회군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고려가 이를 거부하자 거란군과 고려군 사이에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거란군 40만 대군 중 20만은 인주 남쪽 무로대에 주둔하고 나머지 20만이 통주로 밀려들었다. 이에 통주에 주둔하고 있던 강조가 병력을 이끌고 응전하였지만 패배하여 포로가 된 후 거란군에 의해 죽었다. 거란군은 그 여세를 몰아 남하하였고, 이 때부터 양국 간에 전면전이 전개되었다.
고려는 거란의 대군을 맞아 반격을 개시했지만 역부족으로 한 달 만에 곽주와 서경을 내주고 거듭 후퇴해야 했다. 그리고 이듬해 1월에 거란군은 개경까지 밀어닥쳐 궁궐을 소각하고, 민가를 모조리 불살랐다. 이 때 현종은 경기도 광주에 머물러 있다가, 거란군이 남하해옴에 따라 장곡과 인의(전북 태인)를 거쳐 노령산맥을 넘은 다음 남해안의 나주로 몸을 피했다.
그러나 거란군은 입성 7일 만에 개경에서 물러났으며, 다시 점차 북쪽으로 퇴각하였다. 고려군과의 전면전에서 병사들이 이미 기진맥진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양규와 김숙흥이 이끌던 1천여 명의 병력과 7차에 걸친 싸움 끝에 수만의 군사를 잃은 상황이었다. 애석하게도 전투 중에 양규와 김숙흥은 전사하였지만 그들의 끈질긴 게릴라식 공략으로 거란군은 더 이상 고려에 머물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거란군이 퇴각하자 현종은 전주, 공주 등을 거쳐 2월 중순에 개경으로 돌아왔다. 왕성에 도착한 현종은 백관을 다시 세우고, 전란 중에 공을 세운 자를 포상하고 거란에게 협조한 자를 징계하였으며, 백성들 중에 공훈을 세운 사람들에게 특별히 관직을 추증하는 등 전후 수습책을 마련하였다. 또한 전란 중에 소실된 궁성을 복구하고 서경의 황성(평양성)과 송악성을 중수하도록 했다.
그러는 와중에 여진족이 침입하여 고려는 또 한 번 전운에 휩싸였다. 동여진의 군대가 전함 1백여 척을 이끌고 경주를 급습한 것이다. 하지만 전란에 익숙해 있던 고려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여진은 곧 퇴각하였으며, 고려는 여진을 압박하며 침략의 책임을 추궁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1012년 5월에도 동여진 군대가 경상도 일대를 침략하였지만 문연, 강민첨 등이 이끄는 고려군에 의해 격퇴되었다.
이처럼 거란, 동여진 등의 주변국과의 잇따른 전쟁을 겪으면서 고려는 국방에 대한 새로운 각오를 하게 되고, 한편으론 전쟁에 따른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서 거란과 화해를 모색하기도 했다.
하지만 거란왕은 고려왕이 직접 거란을 예방할 것을 요구하였고, 고려가 이를 수용하지 않자 강동의 6개 성을 탈취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고려는 몇 번에 걸쳐 사신을 파견하여 거란왕을 달래며 현종이 와병 중이어서 거란에 입조하지 못한다고 양해를 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란은 1013년 5월 여진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오다가 대장군 김승위가 이끄는 군대에게 패하고 돌아갔다.
이후에도 거란은 몇 번에 걸쳐 강동의 여섯 성을 요구하며 끈질기게 고려 침략을 감행했다. 그리고 마침내 1018년 12월 소배압(소손녕의 형)이 이끄는 거란군 10만이 다시 침략을 감행했다(제3차 침입 당시 거란군을 이끈 장수에 대해 『고려사』에는 소손녕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원나라 때 편찬된 요나라 역사에는 소배압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고려사』의 기록을 오기로 보고 『요사』의 내용을 취했다).
거란의 대군이 밀려올 것을 예상한 고려는 20만 병력을 조성하여 평장사 강감찬을 상원수로, 대장군 강민첨을 부원수로 임명하여 거란군을 대적하게 하였다. 흥화진에서 고려군과 거란군의 일차 접전이 벌어졌고, 이 전투에서 고려군이 승리하였다. 하지만 거란군 일부가 개경으로 진주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자 강민첨이 병력을 이끌고 추격하여 격파하였다.
하지만 소배압이 이끄는 주력부대가 어느덧 개경 백 리 밖까지 진주해오자 고려군과 거란군 사이에 일대 접전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이 때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 주력부대가 거란군의 후방을 교란하며 압박을 가해오자 전세가 불리함을 느낀 소배압은 퇴각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고려군에 의해 귀주에서 거의 몰살당하고 말았다. 1019년 2월 초하룻날 벌어진 이 전투가 유명한 귀주(龜州)대첩이다.
두 번의 큰 전란을 겪은 현종은 강감찬의 건의에 따라 개경 외곽에 성곽을 축조하고 거란군에 의해 훼손된 강동 6성과 각 지방의 성곽을 정비하여 국방에 만전을 기하였다. 또한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하고 과거제를 활성화하여 왕권을 강화하였으며, 인재를 우대하고 문인을 양성하여 국가의 재목들을 길렀다.
한편 거란왕은 전쟁에서 대패한 소배압을 징계하고, 1019년 5월에 동경 문적원소감 오장공을 보내 고려에 화친을 제의해왔다. 또한 동여진 추장 나사불도 같은 해 6월에 부하들을 이끌고 입조하여 화의를 약속하였으며, 서여진의 추장 아라불도 7월에 부하들을 거느리고 와서 말을 바치며 화의를 다짐했다. 그리고 그해 9월에 고려는 탐라, 흑수, 말갈 등의 소수민족들을 위해 연회를 베풀어 위용을 과시하며 변방의 안정을 꾀했다.
이처럼 고려는 거란의 10만 대군을 격파한 후 국내외적으로 위상이 한껏 높아졌으며, 그에 따라 고려 사회도 빠른 속도로 안정을 되찾아갔다.
사회가 안정되자 현종은 전란 중에 소실된 문화재와 서적들을 복구하기 시작했다. 전란 중에 소실된 사초를 복원하기 위해 황주량으로 하여금 태조에서 목종에 이르는 7대 왕의 실록을 편찬하게 하는 한편, 황룡사를 비롯한 사찰들을 중수하게 하고, 6천여 권의 대장경을 편찬토록 하였다. 이 때 편찬된 실록이 고려 최초의 실록이며, 또한 이 때 편찬된 대장경이 후에 원나라 침입 중에 만들어지는 팔만대장경의 모태가 된다.
이 같은 현종 대의 국력 강화에 힘입어 고려는 13세기까지 거란, 여진 등과 평화적인 외교관계를 유지하며 안정을 지속할 수 있었다.
현종은 비록 많은 수난을 당하였지만 오히려 그것을 이용해 국력을 신장시키고 문화를 발전시켰으며, 고려의 위상을 대외에 과시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너무 많은 고초를 겪은 탓인지 1031년 5월 재위 22년 만에 40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이제현은 『고려사』에서 현종의 치세에 대해 이렇게 평하고 있다.
”군자는 나라를 잘 다스릴 때에도 환난에 대한 경각심을 잊지 않아야 하며, 편안할 때도 위태로움을 생각하여 시종일관 삼가는 마음을 늦추지 않음으로써 천도를 받든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나는 현종에게 아무런 흠집도 찾을 수가 없구나.”
현종의 능은 송악산 기슭에 있으며 능호는 선릉이다.
[출처] 고려 제8대 왕 현종실록 ㅡ ① 수난을 먹고 자란 군주 현종과 고려의 국력 신장|작성자 여름을청하다
현종의 가족들
현종은 원정왕후 김씨를 비롯한 13명의 부인에게서 5남 8녀를 얻었다. 13명의 부인 중 원정왕후 김씨는 소생이 없었고, 원화왕후 최씨가 2녀, 원성왕후 김씨가 덕종, 정종을 비롯하여 2남 2녀를, 원혜왕후 김씨가 문종을 비롯 2남 1녀를 낳았으며, 원용왕후 유씨와 원목왕후 서씨는 소생이 없었다. 그리고 원평왕후 김씨 1녀, 원순숙비 김씨 1녀, 궁인 한씨 1남, 궁인 박씨가 1남을 낳았다. 그 외에 원질귀비 왕씨, 궁인 이씨 등은 소생이 없었다.
이들 가족 중 제1비 원정왕후를 비롯한 각 왕후들의 삶을 간략하게 언급한다. 이외에 덕종, 정종, 문종 등의 아들들은 각 왕들의 실록에서 다루기로 하고, 딸들 중에 경성왕후(덕종 비), 효사왕후(덕종 비), 인평왕후(문종 비) 등도 각 왕의 실록에서 다루기로 한다.
원정왕후 김씨( ? ~ 1018년)
원정왕후 김씨는 성종의 제2비 문화왕후 김씨 소생이다. 언제 태어났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며 현종이 왕위에 오른 1009년 5월에 왕비에 책봉되었다. 그녀는 책봉된 직후부터 거란의 침입으로 인해 현종을 따라 몽진길에 올라 많은 고초를 겪었다. 그리고 1018년 4월 무진일에 현덕궁에서 20대의 젊은 나이로 소생 없이 생을 마감하였다. 그녀가 죽을 당시 개성에는 전염병이 돌고 있었는데, 그녀도 아마 이 때 사망한 것 같다.
능호는 화릉이며, 능의 위치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원성왕후 김씨( ? ~ 1028년)
원성왕후 김씨는 김은부의 딸이다. 1011년 현종이 나주로 몽진하다 돌아오면서 공주에 머문 적이 있는데, 당시 공주 절도사로 있던 김은부는 자신의 맏딸을 시켜 왕의 의복을 짓게 하였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1011년 2월 현종은 그녀를 왕비로 맞아들이고, 그녀의 동생 둘도 함께 왕비로 맞아들인다. 원혜왕후와 원평왕후가 그녀의 두 동생이다.
원성왕후 김씨 소생으로 덕종(제9대 왕), 정종(제10대 왕), 인평왕후, 경숙공주 등이 있다. 1028년에 생을 마감하였고, 능호는 명릉이다.
원화왕후 최씨(생몰년 미상)
원화왕후 최씨도 성종의 딸이며 제3비 연창궁부인 최씨 소생이다. 원정왕후 김씨와는 이복남매간이며 원화왕후가 왕비에 책봉된 후 곧 제2비로 책봉됐다. 그녀도 현종이 나주로 몽진할 때 함께 갔다는 기록이 있다.
입궐 초에는 향춘전에 머물렀기에 향춘전왕비라고 불리었으며, 후에 상춘전이라고 고쳤다. 그녀 소생으로 효정공주와 천수전주 두 딸이 있다.
사망연대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며, 능에 관한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
원혜왕후 김씨( ? ~ 1022년)
원혜왕후 김씨도 김은부의 딸이며, 원성왕후의 친동생이다. 원성왕후가 왕비에 책봉된 직후에 입궐한 듯하며 문종(제11대 왕), 평양공 왕기, 효사왕후(덕종 비) 등을 낳았다. 1022년에 생을 마감하였으며, 능호는 회릉이다.
원용왕후 유씨(생몰년 미상)
원용왕후 유(劉)씨는 성종의 아우 경장태자의 딸이다. 출생연대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며 1013년(현종 4년) 5월 계묘일에 왕비에 책봉되었다. 소생은 없었으며, 죽음과 능에 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원목왕후 서씨( ? ~ 1057년)
원목왕후 서씨는 이천 사람이며 내사령 서눌의 딸이다. 서눌은 서희의 아들이므로 그녀는 서희의 손녀가 된다. 1022년 8월에 숙비에 책봉되었으며, 흥성궁주로 불리었다. 소생은 없었으며, 1057년(문종 11년) 생을 마감하자 문종은 화장을 명하고 유골만 묻었다. 자식을 낳지 못했으므로 중신들의 의견에 따라 능호가 내려지지 않았다.
원평왕후 김씨( ? ~ 1028년)
원평왕후 김씨는 원성왕후와 원혜왕후의 친동생이며 김은부의 딸이다. 언제 입궐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서열상으로 봐서 원목왕후가 입궐한 1022년 이후일 것이다. 1022년에 그녀의 둘째 언니 원혜왕후가 죽었는데, 그녀는 아마 죽은 언니를 대신하여 입궐한 듯하다.
소생으로는 효경공주가 있으며, 1028년에 생을 마감했다. 능호는 의릉이다.
2. 거란의 2차 침입과 불굴의 용장 양규
993년 80만 대군으로 제1차 침입을 시도하다 서희와의 담판으로 강동 6주를 내주고 물러난 거란은 1010년과 1018년 다시금 2, 3차 침입을 감행한다.
거란의 침입 구실은 목종 폐립사건이었다. 거란에게 목종 폐립사건의 내막을 알려준 것은 동여진이었다. 여진은 당시 동서로 분리되어 있었는데 서여진은 고려와 가까웠던 반면 동여진은 관계가 좋지 않았다. 때문에 1010년 초에 좌사랑중 하공진이 동여진을 공격하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실패로 돌아갔고, 그 보복으로 유종이 조공차 화주관에 온 여진인 95명을 죽여버렸다. 그러자 동여진 측은 거란왕에게 달려가 목종 폐립사건의 내막을 고변하게 되었고, 한편 고려 조정은 사건의 책임을 물어 하공진과 유종을 귀양 보냈다.
여진으로부터 목종이 강조에 의해 강제로 폐립되었다는 사실을 전해들은 거란왕은 그해 5월 고려 조정에 강조를 거란으로 압송할 것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고려가 이를 수용하지 않자, 11월 거란의 성종이 직접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한다. 이것이 거란의 2차 침입이다.
거란의 침입이 예상되자 현종은 강조를 행영도통사로 삼고, 상장군 안소광을 도병사로, 소부감 최현민을 좌군병마사로, 형부시랑 이방을 우군병마사로, 예빈경 박충숙을 중군병마사로, 형부상서 최사위를 통군사로 각각 임명하여 군사 30만을 보내 통주(평북 선천)에 주둔시켜 거란군을 방어하도록 했다.
거란군이 압록강을 건너 제일 먼저 진출한 곳은 흥화진(평북 의주)이었다. 40만 대군으로 흥화진이 포위되자 흥화진 도순검사 양규가 낭중 정성과 부사 장작 등과 함께 방비책을 세우고 성을 고수한다.
성의 방비가 만만치 않음을 알게 된 거란왕은 부하를 시켜 화살로 고려군측에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게 하였다.
”그대들의 전 임금 왕송이 우리 나라를 섬긴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지금 역신 강조가 오왕을 죽이고 어린아이를 왕위에 올렸으므로 내가 정예부대를 인솔하고 이미 국경을 넘었으니 너희들이 강조를 붙잡아 내게로 끌고 오면 즉시 회군할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곧바로 개경으로 쳐들어가서 너희 처자들을 몰살할 것이다.”
이 편지를 받아본 고려군은 그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다는 답장을 하였고, 거란왕이 재차 편지를 보내 항복을 종용했지만 고려군은 수용하지 않았다. 그러자 거란왕은 전면전을 선언하고 병력 20만을 인주 남쪽의 무로대에 주둔시키고, 나머지 20만은 강조가 머물고 있는 통주로 출동시켰다.
거란의 20만 군대가 통주로 출동하자 강조는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그들과 대응하였다. 강조는 병력을 셋으로 나누었다. 제1병력은 강조의 통솔 아래 삼수의 요소에 배치하고, 제2병력은 통주 근방 산에, 제3병력은 통주성에 진을 쳤다.
거란은 몇 번에 걸쳐 강조가 지휘하고 있는 삼수의 고려군을 공격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강조는 지형적인 이점을 이용하여 거란군이 밀려오면 검차(劒車)를 앞세우고 적을 공략하였다. 이 같은 고려군의 검차전략으로 거란은 더 이상 진군을 못하고 제자리 걸음만 해야 했다. 그래서 거란은 야음을 틈타 기습작전을 감행하기로 하고 야율분노가 이끄는 별동부대로 하여금 고려의 본영이 있는 삼수를 급습하게 하였다.
몇 번에 걸쳐 승전을 거듭하던 강조는 적군의 습격에 관한 보고를 받았으나 군사를 보내지 않고, 오히려 적을 삼수 깊숙한 곳으로 유인하여 몰살시킬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거란군이 본영을 급습하자 고려군은 당황한 나머지 우왕좌왕하였고, 그 틈을 이용해 거란의 대군이 앞쪽으로 밀려들었던 것이다.
순식간에 고려군은 포위되었고, 강조는 포로가 되어 거란왕에게 끌려가야 했다. 강조를 보자 거란왕은 자신의 신하가 되길 맹세하면 살려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강조는 ”고려 사람으로 거란의 신하가 될 수 없다.” 고 거절했다. 그때 행영도통부사 이현운이 ”두 눈으로 이미 새 세월을 보았거늘 어찌 일편단심 옛 산천만을 생각할 수 있으랴.” 하면서 거란의 신하가 되길 청했다. 이에 강조가 ”너는 고려인인데 어째서 그 따위 말을 하느냐?” 고 꾸짖었다. 그 소리를 듣고 거란왕은 강조를 죽이라고 명령했다.
통주에서 강조가 이끌던 고려 정예군을 대파한 거란은 다시 흥화진으로 향했다. 그들은 강조의 편지를 위조하여 항복을 권유하였으나 양규는 ”우리는 왕의 명령을 받고 이곳에 왔으므로 강조의 항복 지시는 받아들일 수 없다.” 고 한마디로 거절했다.
그 사이에 거란군은 다시 곽주로 진군했다. 그러자 곽주 방어사 조성우는 야밤을 틈타 도망쳤고 대회덕, 이용직 등은 싸우다가 전사했으며 곽주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듣고 양규는 별동대 7백 명을 이끌고 흥화진을 출발, 통주에 흩어져 있던 군사 1천 명을 모아 곽주에 머무르고 있던 적병 6천 명을 전멸시키고, 양민 7천여 명을 구해 통주로 후퇴했다.
이 때 거란왕이 이끄는 20만 병력은 서경을 무너뜨리고 개경으로 진주하고 있었다. 이에 중신들이 현종에게 항복을 건의하지만 강감찬의 결사적인 반대로 현종은 백관들을 이끌고 경기도 광주로 내려갔다. 이 과정에서 현종은 몇 번에 걸쳐 죽음의 위협이 있었으나 중랑장 지채문의 호위로 무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거란군이 계속 남하함에 따라 현종과 백관들은 공주를 거쳐 노령산맥을 넘어 나주로 피신했다.
한편 양규의 활약으로 후방에 진을 쳤던 거란군의 기세가 조금씩 꺾이자, 이 틈을 노려 고려 장수들은 패잔병들을 모아 전열을 가다듬고 맹렬한 기세로 거란군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귀주의 별장 김숙흥이 중랑장 보량과 함께 적군을 기습하여 1만여 명을 죽였으며, 양규는 적의 주둔지인 무로대를 급습하여 적군 2천여 명을 죽이는 승리를 거두며 포로 3천여 명을 구출한다. 그 후에는 이수에서 적군 2천5백을 무찔렀으며, 여리첨에서도 1천여 명을 섬멸시켰다.
이후 양규와 김숙흥은 병력을 합쳐 거란군 선봉대를 애전에서 기습하여 대승을 거둔다. 하지만 이 때 개경에서 회군한 거란왕이 대군을 이끌고 갑작스럽게 밀려드는 바람에 고려군은 몰살당하고 말았다. 양규와 김숙흥은 이 전투에서 수십 대의 적의 화살을 맞고도 끝까지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그러나 이미 지칠 대로 지친 거란군은 1011년 정월 별수 없이 퇴각하게 된다. 이에 정성이 이끄는 고려 군대가 퇴각하는 거란군을 맹렬히 추격하여 압록강에서 많은 병력을 수장시키고 강동 6성을 회복한다.
이로써 거란의 2차 침입은 일단락된다.
전쟁이 끝나자 현종은 양규의 전공을 포상하고 공부상서직을 추증하였으며, 그의 처 홍씨에게는 매년 벼 1백 석을 내리고 은율군군이라는 봉작을 주었다. 또한 아들 양대춘에게는 교서랑이라는 관직을 내렸다. 한편 별장 김숙흥에게는 장군직이 추증되고 그의 어머니에게 매년 곡식 50석이 내려졌다.
현종 10년에 양규와 김숙흥 두 사람에게 공신록권이 발급되었고, 현종 15년에는 삼한후벽상공신 칭호가 내려졌다. 현종의 교서는 양규에 대해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병사들을 지휘하매 그 위엄은 사기를 앙등시켰고, 원수들을 추격하니 그 위력은 강토를 평안히 하였다. 정의의 칼이 빛나는 곳마다 만인이 다투어 도망쳤고, 6균(鈞)의 활을 당길 때마다 적병들이 모조리 투항했다. 이로써 성과 진이 보전되고 사기 또한 드높았다.”
이 글은 양규의 용맹과 기개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아버지의 이 같은 기개를 본받아 그의 아들 양대춘도 최충이 ”지조가 탁월하고 지략이 많으며 군사 방면에도 통달한 인재” 라고 평가할 만큼 뛰어난 장수로 성장한다.
[출처] 고려 제8대 왕 현종실록 ㅡ ② 거란의 2차 침입과 불굴의 용장 양규|작성자 여름을청하다
3. 거란의 3차 침입과 강감찬의 맹활약
거란은 2차 침입에서 회군하는 조건으로 두 가지를 내걸었다. 첫 번째는 고려 국왕의 거란 입조이며, 두 번째는 강동 6주의 반환이었다. 하지만 고려는 왕이 와병 중이라는 핑계를 대며 거란에 입조하지 않고 대신 형부시랑 진공지를 보냈다. 또한 강동 6주의 반환도 거부하였다.
이렇게 되자 거란의 성종은 강동 6주를 무력으로 차지하겠다고 공식 천명하여 압박을 가하는 한편, 야율행평과 이송무를 잇따라 보내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고려가 이를 수용하지 않자 1014년 소적렬을 보내 통주를 침략했다가 흥화진 장군 정신용과 별장 주연에게 패배하여 물러났다.
하지만 거란의 침략은 계속되었다. 그들은 이듬해 정월 압록강에 다리를 놓고, 다리 양 옆에 고려 침략을 위해 성을 구축했다. 이에 고려는 군사를 동원하여 공격을 가하였으나 패하여 퇴각하고 말았다. 거란은 이 여세를 몰아 이번에는 흥화진을 포위하였다. 그러나 거란군은 장군 고적여, 조익 등에 의해 격퇴당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번에 걸쳐 다시 통주를 공략하였다. 그리고 여진이 거란을 도와 배 20척을 이끌고 구두포를 침략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번번이 실패하여 퇴각해야만 했다.
이렇듯 쉴 새 없이 소모전을 벌이던 거란은 1015년 4월에 다시 야율행평을 보내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고려도 강하게 반발하며 야율행평을 억류하여 돌려보내지 않았다. 그러자 그해 9월 다시 이송무를 보내 같은 요구를 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고려는 냉담했다.
거란과의 전면전을 예상한 고려는 우선 거란의 후방 병력을 묶어놓기 위해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 거란의 침략에 대비하라는 언질을 준다.
마침내 거란의 성종은 1016년 야율세량과 소굴렬에게 고려 침공을 명령하였고, 이들이 고려군의 저항에 밀려 퇴각하자 이듬해에 소합탁을 보내 다시금 침입을 감행했으며, 마침내 1018년 12월 소배압이 지휘하는 10만 대군을 동원하여 대대적인 침략을 해왔다.
고려 역시 거란의 대대적인 침입을 예상하고 20만 군대를 조성하였다. 20만 군대의 상원수는 평장사 강감찬이 맡았다.
강감찬은 병력을 이끌고 흥화진으로 나아가 쇠가죽을 꿰어 흥화진 동쪽으로 흐르는 내를 막았다. 그리고 거란군이 건너기를 기다렸다가 물을 터뜨리고, 복병으로 하여금 흩어지는 거란군을 공격케 하여 크게 승리하였다.
흥화진 전투에서 엄청난 사상자를 낸 소배압은 무모하게도 개경을 향해 계속 진군하였다. 이에 부원수 강민첨이 뒤를 추격하여 자주(평남 자산)의 내구산에서 거란군을 격파하였고, 시랑 조원이 이끄는 고려군이 남하해온 거란군을 대동강 근방에서 다시 한 번 크게 섬멸하였다.
이렇듯 계속되는 패배에도 불구하고 소배압은 개경 입성의 망상을 버리지 않았다. 이듬해 정월 그는 자신의 직할대를 이끌고 개경에서 백여 리 떨어진 황해도 신은현(신계)까지 진출하였다.
이 때 강감찬은 이미 병마판관 김종현에게 군사 1만을 주고 도성으로 돌아가 방어하도록 해둔 상태였다. 또한 소배압이 무모할 정도로 빠르게 개경을 향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현종은 성밖의 백성들을 모두 성안으로 불러들이고 들판의 작물과 가옥을 전부 철거하라고 명령했다.
이 때문에 막상 개경 밖에 도착한 소배압의 병력은 탈진한 상태에서 개경 공략을 포기하고 말머리를 돌려야만 했다. 거란군이 회군하려는 기색을 보이자 강감찬은 곳곳에 아군을 매복하여 급습하도록 했다. 그리고 마침 귀주에서 소배압의 거란군과 강감찬의 고려군은 정면으로 맞닥뜨렸다.
처음에는 양 진영이 팽팽히 맞선 채 대등한 형세를 이뤘지만 김종현의 부대가 가세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더구나 그때 갑자기 풍향이 바뀌어 비바람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불기 시작하자 남쪽에 진을 치고 있던 고려군의 기세는 한층 높아졌다.
전세가 불리하다는 것을 깨달은 거란군은 북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고, 고려군은 맹렬히 추격하여 그들을 거의 섬멸하였다. 이 싸움에서 살아 돌아간 거란군은 적장 소배압을 비롯해 불과 수천 명에 불과하였으니, 거란 역사상 가장 비참한 패배였다. 또한 겨우 목숨만 부지한 채 거란으로 되돌아간 소배압은 거란왕으로부터 징계를 받고 관직에서 쫓겨났다.
흔히 귀주대첩으로 불리는 이 싸움을 이끈 인물은 강감찬이었다. 그는 경주로부터 금주(시흥)로 이주해와 금주 호족으로 성장한 강여청의 5대손이다. 아버지는 고려 건국에 공로가 있어 삼한벽상공신에 오른 강궁진이며, 본관 금주에서 949년에 강감찬을 낳았다. 자칫 무인으로 알기 쉬운 그는 성종 대에 과거에 장원급제한 문인이며 누차에 걸쳐 승진을 거듭한 끝에 예부시랑, 국자제주, 한림학사, 승지, 좌산기상시, 중추사 등을 역임하고 거란의 3차 침입 당시에는 정2품의 서경유수 겸 내사문하사 평장사에 올라 있었다.
귀주대첩으로 거란에 씻을 수 없는 치욕적인 패배를 안겨준 그는 전란 이후에는 개성 외곽에 성곽을 쌓을 것을 주장하는 등 국방에 힘썼으며, 몇 권의 저서도 남겼으나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 몇 번에 걸쳐 은퇴를 청원하여 현종의 허락을 받아내 쉬기도 했으며, 1030년에는 벼슬이 문하시중에 올랐다. 그리고 1032년에 생을 마감하였으니 향년 84세였다.
고려 최초의 실록 ‘칠대실록’ 편찬 과정
1011년 거란의 2차 침입으로 개경이 함락되고 궁궐이 불타는 바람에 사초가 완전히 소실되었다. 이에 따라 현종은 사료를 복원하기 위해 황주량에게 명령하여 태조에서 목종까지의 실록을 편찬하도록 했다. 이것이 고려 최초의 실록인 ‘칠대실록’ 이다.
어명을 받든 황주량은 전국 각지를 다니면서 사료를 수집하였다. 이 과정에서 사실적 근거가 없는 내용들은 나이 먹은 노인들에게 물어서 보충하였다.
자료 수집 작업이 완료되자 1013년 9월 황주량, 최충, 윤징고, 주저 등 네 명이 수찬관에 임명되어 실록 편찬작업에 들어갔다. 그리고 21년 후인 1034년(덕종 3년) 총 36권으로 편찬이 완료되었다.
‘칠대실록’ 편찬 이후 고려는 각 왕대마다 실록을 편찬하는 전통이 생겼다. 실록 편찬 방식은 처음엔 사관의 수찬관이 직접 편찬하는 당나라 방식을 택하다가 인종 대에 편찬된 제16대 ‘예종실록’ 이후에는 실록 편수관을 따로 두는 송나라 방식을 택하게 된다.
이렇게 편찬된 ‘고려실록’ 은 이자겸의 난 때에 불에 탈 뻔하기도 하고, 원나라 침입 때는 원에 빼앗기기도 하였으나 가까스로 보존되어 조선 초에는 태조에서 공양왕에 이르는 고려 34대 왕의 실록이 모두 편찬될 수 있었다.
그러나 애석하게 임진왜란 때 춘추관이 불타면서 소실되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고려실록’ 이 있었는지조차 알지 못하게 되었다.
‘현종실록’ 편찬 관련사항
‘현종실록’ 편찬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실려 있는 ‘최충의 찬’ 이 ‘현종실록’ 에 인용된 사실을 감안할 때 ‘현종실록’ 은 최충 등에 의하여 편찬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최충이 수국사로 재직하였던 1037년에서 1055년 사이에 편찬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현종시대의 세계 약사
현종시대 중국은 여전히 송과 거란이 패권을 다투고 있었다. 송과 거란은 세력 팽창을 위해 계속해서 서로를 공략함으로써 한동안 전쟁이 이어졌다. 이 시기에 송나라에서는 화약과 나침반이 발명되기도 하였다. 한편 유럽에서는 신성로마제국의 콘라트 2세가 이탈리아를 원정하고 로마에서 황제 대관식을 거행함으로써 신성로마제국의 힘이 더욱 커졌다.
[출처] 고려 제8대 왕 현종실록 ㅡ ③ 거란의 3차 침입과 강감찬의 맹활약|작성자 여름을청하다
고려 제9대 왕 덕종실록
덕종의 짧은 치세와 오래 기억된 ‘덕(德)’
(1016 ~ 1034년, 재위기간 : 1031년 5월 ~ 1034년 9월, 3년 4개월)
현종 후기의 안정은 덕종(德宗) 대에도 이어진다. 16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를 이은 덕종은 나이답지 않은 너그러움과 섬세함을 바탕으로 명민한 정치를 펼쳐나가지만 병약한 탓으로 왕위에 오른 지 3년여 만에 생을 마감한다.
덕종은 현종의 장남으로 제3비 원성왕후 김씨 소생이다. 1016년(현종 7년) 5월 을사일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왕흠(王欽), 자는 원량(元良)이다. 1020년 5세의 나이로 연경군에 책봉되었다가 2년 뒤에 태자가 되었다. 그리고 1031년 5월 현종이 죽자 중광전에서 16세의 어린 나이로 고려 제9대 왕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그는 먼저 선대 왕들에게 즉위를 고하고, 대사면령을 내려 죄가 가벼운 죄수들을 풀어주었으며, 또한 각 지방에서 진상된 말을 대신들에게 나눠줌으로써 화합정치를 표방하였다.
즉위 2개월 뒤에는 유소를 중군 병마원수로 삼고 장극맹을 병부상서로, 홍빈을 형부상서로, 이유섬을 공부상서로, 김종현을 우간의대부로, 황보영을 어사잡단으로, 문사명을 전중어사로, 손위를 전중승으로, 박의부를 감찰어사로 임명하는 등 백관들을 전폭 교체하였다.
조정의 백관이 안정되자 덕종은 거란에 유교와 김행공을 파견하여 압록강에 설치한 다리를 철거하고 억류한 고려 신하들을 송환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거란은 이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다. 이에 고려는 거란에 대해 사절단 파견을 중지하여 외교적인 압박을 가하였다.
거란은 고려의 사절단이 중지되자 1032년 정월에 사신을 보내려 했으나 고려의 거부로 입국하지 못했다. 고려는 압록강 다리를 철폐하고 억류 중인 신하를 돌려보내지 않으면 국교를 단절하겠다며 삭주 영인지(영흥)와 파천에 성을 쌓아 전쟁에 대비했다.
한편 1032년 3월에는 거란의 정국 혼란으로 고선오, 고진성, 최운부, 이운형 등 20명에 달하는 중앙관료 출신들이 고려로 망명하자 이들을 받아들여 거란의 내부 사정을 파악하도록 하였다. 그해 4월에 다시 거란 관료 출신 해가, 내을고 등 27명이 귀순해오자 이들도 받아들였으며, 6월에는 거란에 머무르던 우응, 약기 등의 발해인 50여 명이 망명해옴에 따라 이들도 역시 수용하였다. 그리고 이후에도 거란 관료들의 망명을 적극 받아들였다.
이처럼 덕종은 현종과 마찬가지로 거란에 대해 강경한 자세를 유지하면서 정권다툼으로 밀려난 거란인들을 받아들여 그들의 정국을 진단하고 내부 사정을 분석하기도 했다.
고려의 입장이 이처럼 강경일변도로 나오자 1033년 10월 거란은 정주를 침략하여 군사적인 압력을 행사하려 했지만 고려군에게 패배하여 퇴각하고 말았다. 이후 거란은 더 이상 고려에 대해 군사적 도발행위를 감행하지 못했다.
현종대의 두 번에 걸친 대대적인 외침 속에서 국력을 한층 신장시킨 고려는 덕종 대에는 군사적으로 강성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매우 안정되어 있었다. 성종 대 이후 꾸준히 성장한 과거 출신 신진관료들이 바로 이러한 정치적 안정의 기반이었다.
정치 · 외교 이외에 덕종은 교육 분야에서도 새로운 전환을 모색한다. 즉위년인 1031년 윤10월 처음으로 국자감에 시험제도를 도입하여 국자감을 명실공히 고려 제일의 교육기관으로 부상시켰던 것이다.
국자감에 입학시험을 설정했다는 것은 성종 대 이래 추진되던 지방교육기관 육성계획이 완료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그 이전에는 단순히 힘 있는 집안 자제들이 형식적으로 거쳐가던 국자감에 시험제도를 도입함으로써 인재를 실력에 따라 뽑을 수 있게 되었다.
즉위 초에 이렇듯 고려의 안정을 위해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시도를 하긴 했지만 덕종 치세는 오래가지 못했다. 1034년 9월 급작스럽게 약해진 몸을 유지하지 못하고 병석에 누운 그는 아우 평양군 왕형에게 선위하고 19세의 어린 나이로 생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이제현은 『고려사』에서 덕종에 대해 이렇게 평하고 있다.
”덕종은 부모 상을 당하여서는 자식으로서 효를 다하였고, 정치를 함에 있어 아버지의 하던 일을 고치지 않았으며, 원로들인 서눌, 왕가도, 최충, 황주량 등을 신임하여 조정에는 서로 기만하는 일이 없었다. 이 덕분에 백성들은 편안한 삶을 누렸으니 비록 봉황이 날아들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의 시호에 덕(德) 자를 붙인 것은 역시 당연한 일이로다.”
덕종의 능은 개경 북쪽 교외에 마련되었으며, 능호는 숙릉이다.
덕종의 가족들
덕종은 경성왕후 김씨를 비롯하여 5명의 부인을 두었으며, 제2비 경목현비에게서 1녀, 충주 유(劉)씨에게서 1녀 등 2명의 공주를 얻었다.
제1비 경성왕후 김씨는 현종의 딸이며 원순숙비 김씨 소생으로 덕종과는 이복남매간이다. 그녀는 1034년 2월에 왕비에 책봉되었으며, 덕종 사망 후 52년을 더 살다가 1086년 7월에 죽었다. 능은 질릉이며 위치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제2비 경목현비 왕씨는 중서령 왕가도의 딸이다. 1031년 왕비에 책봉되었으므로 경성왕후보다 먼저 왕비에 올랐으나 왕족이 아닌 까닭으로 제2비로 기록된 듯하다. 소생으로 상회공주가 있으며, 능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제3비 효사왕후 김씨도 경성왕후와 마찬가지로 현종의 딸로서 원혜왕후 김씨 소생이다. 따라서 그녀도 덕종과 이복남매지간이 되고 제11대 왕 문종과는 동복남매간이다. 그녀에 대한 더 이상의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제4비 이씨와 제5비 유씨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이씨는 부여군 공방시랑 이품언의 딸이라는 것과 유씨는 충주 사람 검교소감 유총거의 딸이라는 내용만 전한다. 이들의 칭호가 기록되어 있지 않아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 알 수 없으나 왕비로 책봉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충주 유씨는 공주 1명을 낳았다.
‘덕종실록’ 편찬 관련사항
고려 최초의 실록인 ‘칠대실록’ 은 현종 대에 편찬작업이 시작되어 덕종 3년인 1034년에 완료된다.
‘덕종실록’ 에 관한 내용은 『고려사』에서 이제현이 덕종에 대해 평한 글 중에 직접 언급되고 있는 것으로 봐서 만들어졌던 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이 어느 시기에 누구에 의해서 편찬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현종실록’ 을 최충이 노년에 편찬하였던 것에 비추어 ‘덕종실록’ 역시 이 때 함께 편찬되었을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출처] 고려 제9대 왕 덕종실록 ㅡ 덕종의 짧은 치세와 오래 기억된 ‘덕(德)’|작성자 여름을청하다
고려 제10대 왕 정종실록
정종의 실리책과 고려의 안정
(1018 ~ 1046년, 재위기간 : 1034년 9월 ~ 1046년 5월, 11년 8개월)
정종(靖宗)시대로 접어들면서 고려 사회는 거란 침입으로 야기된 혼란을 극복하고 평화기를 정착시킨다. 국교를 단절하고 있던 거란과 다시 외교관계를 맺고 사회 전반에 팽배해진 위기의식을 불식시키는 한편, 사회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일련의 안정책을 단행하게 되는 것이다.
정종은 현종의 차남이자 원성왕후 김씨 소생으로 1018년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왕형(王亨), 자는 신조(申照)이다. 5세 때 내사령과 평양군으로 책봉되었고, 1034년 9월 19세의 어린 나이로 임종에 직면한 친형 덕종의 선위를 받아 고려 제10대 왕에 올랐다. 이 때 그의 나이 17세였다.
왕위에 오른 정종은 서경과 개경에 팔관회를 열고 대사면령을 내려 백관과 백성들의 화합을 도모하였으며, 황주량을 예부상서로, 최제안을 이부상서로, 최충을 형부상서로, 유지성을 공부상서로 기용하여 조정을 개편하였다. 또한 온건파인 황보유의를 내사문하평장사로 임명하여 거란과의 화의를 모색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평북 창성에 성을 쌓아 주민을 이주시키고 덕종 대에 시작된 천리장성 축조작업을 지속시켜 국방에 힘을 기울였다. 이에 대해 거란에서는 통첩을 보내 장성 축조를 중지할 것과 동시에 국교를 정상화시킬 것을 요구해왔다. 하지만 고려는 자국의 국방을 위해 성을 쌓는 것은 당연하며, 거란에 억류된 고려 사신들을 돌려보내고 거란이 무력으로 차지한 압록강 지역을 돌려주면 자연스럽게 국교는 정상화될 것이라고 논박한다.
이처럼 고려가 타협책과 강경책으로 양면전략을 구사하자 거란은 일단 압록강에 병력을 보내 고려에 대해 무력시위를 감행한다. 하지만 이것이 먹혀들지 않자 결국 화의책으로 억류 중인 사신들을 돌려보냄으로써 1038년 4월 양국의 외교관계는 정상화된다. 이에 따라 고려는 상서좌승 김원충을 거란에 파견하고 그해 8월부터 다시금 거란의 연호를 사용하게 된다. 이로써 고려와 거란의 대치관계는 일단락되고, 이후부터 거란이 멸망하는 13세기까지 양국 간의 평화가 지속된다.
평화기가 지속되었지만 고려는 장성 축조작업을 중단하지 않았고, 1044년 마침내 압록강 어귀에서부터 동해안의 도련포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완성한다. 천리장성의 완성으로 고려는 거란, 여진 등의 북방족의 내침을 효과적으로 막아낼 수 있는 전초기지를 마련했고, 또한 북방문화에 의한 고려 풍속 침해를 막아낼 수 있는 문화 방비벽을 얻게 된 셈이었다.
이 같은 국방력의 증대는 고려 사회를 외침에 대한 근심으로부터 벗어나게 함으로써 내부 기강 확립에도 많은 도움을 준다. 1039년에 노비종모법(奴婢從母法)을 제정하고, 1045년에는 악공과 잡류들의 자손들이 과거에 진출하는 것을 금지시켰으며, 1046년에는 장자상속법을 마련하는 등 정종은 변방의 안정을 바탕으로 일련의 사회 안정책을 실시한다.
하지만 정종의 치세는 그다지 오래가지 못했다. 너무 어려서 왕위에 올라 기력을 쇠진한 탓에 몸이 병약해졌고, 나약한 몸으로 정사에 몰두하다가 1046년 초에 중병으로 드러눕고 말았다. 그리고 그해 5월 이복동생 낙랑군 왕휘에게 선위하고 29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으니 재위 11년 8개월 만이었다.
이제현은 『고려사』에서 정종의 치세에 대해 이렇게 평하고 있다.
”거란은 탐욕스럽고 사나워서 신의를 맺을 상대가 아니므로 태조가 이것을 깊이 경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거란이 발해를 배신했다는 이유 때문에 국교를 단절한 것은 잘한 일이 아니었다. 현종은 국사를 바로잡기에 급급하여 외교에 신경 쓸 수 없었고, 덕종은 나이가 어렸으니 전쟁을 조심해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왕가도가 거란과의 화친을 끊자고 주장하였으니 이것은 그들과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백성을 안심시키자는 황보유의의 의견보다 못하였다. 정종은 왕위에 오른 지 2년 만에 우리측 대부 최연가를 거란에 파견하였고, 4년에 거란측 사신 마보업이 우리 나라에 왔다. 이 때부터 옛날의 우호관계를 회복하여 그들을 감동시켰으니, 이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 단지 책략의 하나일 뿐이었다. 이에 대하여 사람들은 정종이 선대 왕의 유업을 계승하여 국가를 보전하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정종의 능은 개경 북쪽 교외에 마련되었으며, 능호는 주릉이다.
정종의 가족들
정종은 5명의 부인을 두었으며, 4남 1녀의 자녀를 얻었다. 선대 왕들과 달리 5명의 부인이 모두 전혀 혈연관계가 없는 족외혼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이는 정종의 왕권이 비교적 강력하지 못했으며 신하들의 입김이 그 어느 때보다 크게 작용했다는 의미이다.
5명의 부인 중 제1비 용신왕후 한씨가 1남을 낳았으며, 제2비 용의왕후 한씨가 애상군 왕방, 낙랑후 왕경, 개성후 왕개 등 세 아들을 낳았고, 제3비 용목왕후 이씨가 도애공주를 낳았다. 이들 외에 제4비 용절덕비와 제5비 연창궁주 노씨는 소생이 없었다.
정종의 가족 중 다섯 왕비의 삶을 간단하게 언급한다. 정종의 네 아들 중 장남 왕형과 왕방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고, 나머지 두 아들은 문종 대에 모두 봉작과 식읍을 받은 것만 기록되어 있어 이들에 대한 상세한 언급은 생략한다.
용신왕후 한씨(? ~ 1036년)
용신왕후 한씨는 단주 사람으로 한조의 딸이다. 그녀는 정종이 평양군으로 있을 때 혼인하였으며, 정종이 왕위에 오르자 연흥궁주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리고 이듬해 1035년 아들 왕형을 낳았다. 하지만 이 때 낳은 왕형에 대한 더 이상의 기록은 찾아볼 수 없고, 『고려사』 ‘열전’ 에서도 정종의 아들이 세 명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봐서 어릴 때 죽은 것으로 판단된다.
아들을 낳은 그녀는 곧 정식으로 왕비에 책봉되어 혜비로 불렸다. 그리고 다시 정신왕후에 봉해졌으나 1036년 7월에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이후 문종 2년에 용신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능호는 현릉이다.
용의왕후 한씨(생몰년 미상)
용의왕후 한씨 역시 한조의 딸로 용신왕후의 친동생이다. 언니를 따라 궁중에 들어왔던 그녀는 1038년 4월 여비에 책봉되고 창성궁주라는 택호를 받았다. 후에 다시 현덕궁주라고 호를 고쳤으며, 1040년 정식으로 왕비에 책봉되었다.
그녀 소생으로 왕자 애상군 왕방, 낙랑후 왕경, 개성후 왕개 등이 있다. 사망연대와 능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용목왕후 이씨(생몰년 미상)
용목왕후 이씨는 부여 사람으로 공부시랑 이품언의 딸이다. 왕비 책봉 과정과 연대에 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호를 창성궁주라 하였고, 소생으로 도애공주가 있다. 사망연대와 능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용절덕비 김씨(? ~ 1102년)
용절덕비 김씨는 경주 사람으로 문하시중 김원충의 딸이다. 호를 연흥궁주라 하였으며 숙종 7년(1102) 3월에 죽었다. 죽고 난 다음 숙종은 그녀를 덕비에 추증하고 시호를 용절이라고 하였다. 능에 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며 소생은 없었다.
연창궁주 노씨(? ~ 1048년)
연창궁주 노(盧)씨의 가계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녀가 원래 궁녀로 입궁했던 것으로 봐서 귀족 출신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궁인으로 입궁한 그녀는 용모가 뛰어나 정종의 사랑을 독차지하였다. 그렇지만 별다른 봉작을 받지 못하다가 정종이 죽고 문종이 왕위에 오른 후 연창궁주가 되었다. 이는 정종의 유언을 따른 것인데, 문종이 정종의 유언을 실행에 옮기자 대신들의 반발이 거세게 일었다. 문하성과 어사대의 대신들은 노씨가 정식으로 정종과 혼인한 관계가 아니므로 연창궁을 내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문종은 대신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녀에게 연창궁을 내주었다.
이 같은 우여곡절 끝에 연창궁주의 자리에 오른 그녀는 문종 2년(1048년) 3월에 사망하였으며, 능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정종실록’ 편찬 관련사항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어디에도 정종, 문종, 순종의 실록에 대한 언급은 없다. 하지만 제13대 ‘선종실록’ 이 만들어졌던 것으로 봐서 이들 세 왕의 실록도 편찬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시기가 정확히 언제인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현종실록’ 이 정종 대 말기에서 문종 대 초기에 수국사로 재직하던 최충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감안할 때 ‘덕종실록’ 과 ‘정종실록’ 또한 최충의 주도로 편찬되었을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현종실록’ 과 ‘덕종실록’ 은 정종 대에, 그리고 ‘정종실록’ 은 문종 대에 편찬되었을 것이다.
정종시대의 세계 약사
정종시대 중국은 송나라가 북진정책을 실시하여 북경을 대명부로 삼는다. 이 때 거란은 힘이 약해져 송의 북진을 저지하지 못하고 오히려 화의조약을 맺는다. 문화적으로는 송나라에서 처음으로 철판인쇄법이 도입되어 인쇄문화에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었다.
이 때 유럽에서는 하인리히 3세가 독일 왕 겸 로마황제의 자리에 올라 황제권의 전성기를 이룬다. 그는 이탈리아를 원정(1046년)하여 교황 클레멘스 2세를 세웠고, 로마교회는 교회회의에서 교황 3명이 폐위되는 혼란을 겪는다. 한편 영국에서는 헐디 카누트 왕이 즉위하고, 스코틀랜드에서는 맥베스가 왕위에 오른다.
[출처] 고려 제10대 왕 정종실록 ㅡ 정종의 실리책과 고려의 안정|작성자 여름을청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