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 학교에 입학
개구쟁이 아들이 드디어 초등학생이되었다. 우리집은 모란 시장 맞은 편 배밭 변두리에 살았는데, 아이들이 배밭 사잇 길로 가면 학교가는 지름길이다. 배밭에는 농장 주인이 만든 변소 두 개가 나란히 붙어 있었다. 옛날 농사에는 인분이 필요해서 사람이 오가는 길몫에 공중 변소처럼 두 개를 나란히 지어 지나가다가 볼일 보라고 지어 둔 것이다.
그러나 비료나 퇴비가 나오자 변소는 점점 방치되어 짚으로 올린 지붕은 파삭 싹아서 석가래가 드러나서 금방 쓰러지게 생겼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변소 환기 구멍으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아이들 소리가 들렸다.
동네 사람들 말로는 떠돌이 거지 가족이 남정네는 폐병쟁이고, 예펜네는 문둥병이라고 하며 침을 뱉어가며 수근덕 거렸다.. 또 남정네는 구걸한 돈으로 밤새도록 노름을 한다고 하였다. 두 개의 변소를 메워서 하나는 부엌으로 하나는 방을 만들었다 한다.
아들 녀석이 입학하자 학교 오가는 길몫이라 그 집 아이들이 눈에 띄었는지, 학교 갔다 와서는
“엄마 저 집에 먹을 것을 좀 갔다 주라”고 하였다. 나는 예사로 듣고 흘려버렸다. 다음 날 학교갔다 와서는
”엄마 뭘 갔다 줬냐“ 고 확인 하기에
”안 갔다.“ 하니까 화를 내며 펄펄 뛰었다. 하는 수 없이 쌀을 좀 퍼고 돼지고기를 사서 가지고 갔다. 그 와의 만남이 내 생애에 억겹의 인연의 고리가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 여인은 내가 들고 온 걸 받으면서도 고맙다고 거지처럼 굽신 거리지도 않았다. 방 앞에는 툇마루 대신 사과 궤짝 두 개를 엎어 놓았는데, 나더러 앉으라 해서 앉았다. 그러자 자기 이이야기를 털어 놓기 시작했다.
자기는 고급 공무원과 결혼했었는데, 신혼 때 나병이 나타나자 이혼 당해서 친정에 있었다 한다. 나의 유년 시절에는 소록도 같은 나환자들의 수용소는 못 들어봤다. 그 시절에는 나병환가 생겼다는 소문만 돌면 환자들이 떼로 몰려와서 환자를 내어 놓아라고 해서 데리고 같이 뭉쳐다니며 같이 얻어먹고 또 그들끼리 결혼도 하고 아이를 낳았던 시절이다.
그 여인의 흉축한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지만, 말에 조리가 있고 교양미까지 느낄 수 있었다. 내 생각에는 친정은 제대로 사는 집안이었고, 공부도 많이 한 것 같았다. 부모들은 문둥이 떼에게 딸을 빼앗기느니 차라리 떠돌이 병든 거지 청년과 맻어 준 것으로 짐작되었다.
그렇게 그와 만나고는 집으로 돌아왔지만, 가깝게 살아서 그 여인과 나는 가끔 만나서 대화를하게 되었다. 또 내가 나가는 교회를 같이 가자고 했더니 한번 나왔기 때문에 나는 그의 믿음의 부모 입장이 되었다. 그 여인은 먹을 물도 빨래도 과수원집 수돗물을 받아 먹고 빨래도 하였는데 오늘 우리 교회를 갔다고 자랑을 하자,
“그 교회 다니려면 우리물운 먹지말라”고 해서 수도폼푸를 박아서 흙탕물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그 손으로 계속 폼푸질을 하였다. 그럴동안 또 먹을 물과 빨래는 우리집에서 하였다. 빨래한 물이 먹물 같았다.
그 다음 주일날 교회를 나오지 않았기에 오후에 가서 방문을 열어보니 누워있었다. 병원에서 유산을 시키고 왔다고 하며 추어서 덜덜 떨었다. 나는 당장 우리집 연탄불을 들고 가서 방을 따뜻하게 해주고, 그 날부터 연탄과 먹을 죽은 자연 내 담당이 되었다.
그 집 남정네는 이른 아침이면 아기를 누더기같은 포대기로 두르고 두 아이는 걸리고 매일 나가고 나가면 그 집에는 개미새끼 한 마리 얼씬하지 않아서 내가 아니면 그 여인은 생으로 굶어죽게 생겼다.
그러자 며칠 안 되어 보건소에서 나와서 소독을하고 집 주위에 새끼 줄이 쳐져 있었다. 팻말에는 장티브스환자가 생겼으니 접근을 금한다는 경고문이 붙었다. 그렇다고 자식을 외면할 부모가 없듯이 한 번이지만 그와 나는 깊은 관계였다. 죽을 끊여서 방으로 들어 갈 때 마다, 거름 보다 더 역한 냄새에 숨이 막혔다. 그런데 나를 볼 때 마다 그 여인은 간드러진 피리소리 같이
“이 이 은 혜 르 을 어 찌 갚는 다 요 오 요” 하는 말이 완전 바람 소리에 간가히 울리는 피리 소리다. 그러기를 한 열흘이 되었을까,
나 역시 아침에 일어나면 바로 부엌으로 들어가지 못 했다. 자고 먹는 것도 힘드는지, 언제나 마당에 앉아서 좀 쉬었다가 부엌으로 들어가서 아침 밥을 지였다. 마당에 펑퍼짐하게 앉아서 줄을 타고 올라 가는 나팔꽃을 쳐다보고 있는데, 내 시야에, 그 집 지붕 위에 옷이 얹어져 있었다.
그러자 낯선 할머니가 눈물을 훔치면서 내게로 오더니,
“아주머니 우리 아이를 돌 봐줘서 고마웠다고” 하면서 어젯 밤에 우리 아가는 숨을 거두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미싱이 있으면 이것을 좀 박아달라”고 내밀었다. 펴 보니 누른 광목천인데, 치마 저고리 고쟁이 버선 뿐인데, 그게 수의로 보였다. 나는 즉시 교회로 뛰어가서 목사님께
“그 영혼을 위해서 기도 좀 해 달라고” 부탁하고, 돌아 서는데 권혁서 목사님이 돈 오 천을 주셨다. 그 돈을 받아서 돌아오는 길에 모란장 포목집에 가서 지갑에있는 돈을 털어서 삼베 한 필을 끊었다. 사모님과 소집사가 오셔서 수의 일섭을 악수 두건 이불까지 다 만들었다. 사모님 “제가 신앙의 부모니까 제가 목욕시켜 옷 갈아 입혀서 보내고 싶어요”. 했더니 사모님이 펄쩍뛰면서
“몸이 약한 사람이 무슨 말이냐” 고 하면서 수의나 전해 주라했다. 그 이틑날 일생을 사용했던 육신인데 소리 없이 말끔히 처리 되어 그 여인은 흔적도 없어졌다..
그 여인은 생전에도 목장갑을 끼고 그 손으로 옆 집 부록 공장에서 찍어내는 부록을 나르면서 돈을 벌었다. 또 아침이면 배밭 빈 터에는 먹거리도 심었다. 하루는 그 집 남정네가 자기는 할 줄 모른다 면서 부인이 심은 옥수수며 들께 파를 뽑아서 우리마당에 수북히 쌓아두고 갔다. 나는 옥수수는 찌고, 들께 잎은 반찬 만들어서 우리와 나누어 먹었다.
시골서 자란 나는 여름 날이면, 멍석이나 평상에 앉아서 시원한 바람 맞으며 가족끼리 밥 먹었든 향수가 생각나서 여름이면, 한 번씩 마당에 자리를 펴서 저녁을 먹었다. 그때 지나가던 그 집 아저씨가 우리를 보고는 타박거리며 앞서 가는 딸 아이를 부르더니, 어께에 맨 가방을 벗겨서 우리 자리에 거꾸로 털자 빵, 풋사과, 과자가 봉지채로 쏟아져 나왔다. 나는 가져가서 아이들 먹이라고 하자, 우리아이들은 낮에 많이 먹었다면서 아이들 주라고 두고 갔다. 또 어느날은 그 아저씨가 큰 양은 양푼에 미수가루를 고봉으로 들고 와서는
“이거 우리 어머님이 시골서 아이들 먹이라고 찹쌀로 만든 귀한 미수가루입니다. ”잡수세요” 하고 주고갔다. 나는 받아도 께름직해서 아이들은 끓여서 줄 셈으로 받았다. 어느새 아이들이 대접을 갖고와서 물을 타서 먹으려고 하였다.
“안돼 끓여서 줄게” 하자 다나라나면서 퍼 먹었다.
그러다가 우리는 스승의 명령으로 수도권으로 옮겨갔고, 그들도 다른데로 가서 만날 수가 없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