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만나고 싶었습니다 - 대담 / 본지 편집주간 임 애 월
죽음 이후를 ‘계승’하는 신성한 의식의 작업
김 명 원 시인
- 이른 봄부터 창궐하기 시작한 코로나19는 아직도 우리 주변을 맴돌며 우리들의 생활을 감시하고 있는 것만 같다. 두 눈 부릅뜨고 호시탐탐 노려보다가 빈틈이 보이면 비집고 들어올 기세다.
그런 이유로 이번 호 <이 계절의 시인>은 그전부터 만나고 싶었던 대전의 김명원 선생님을 모시고 비대면 지상 인터뷰로 진행하기로 했다 -
임애월 : 김명원 선생님, 안녕하세요? 직접 만나서 시원한 냉면이라도 한 그릇 사드려야 하는데, 봄부터 갑자기 창궐하는 코로나19 때문에 이렇게 비대면으로 만나 뵙게 되네요.
김명원 : 반갑습니다. 시절이 하 수상하니 일상의 생활환경이 참 많이 변했네요. 조금은 소원하게 들릴 수도 있는 ‘사회적 거리 두기’가 이제는 완전히 오래된 습관처럼 느껴집니다. 저도 코로나가 아니라면 선생님을 직접 뵙고 눈부신 계절을 향유하며 좋은 이야기를 수더분하게 오래 나눌 수 있을 텐데요. 아쉽지만 이렇게 이메일로 마음을 나누게 되었군요.
임애월 : 갑자기 행동반경이 제약을 받게 되니까 굉장히 불편하고 성가신 일들이 많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약대를 졸업하셨으니까 그쪽 분야도 전문가이실 텐데, 앞으로 코로나 바이러스가 완전히 종식되긴 어려운가요?
김명원 : 그러게요. 백신이 개발되기 전까지는 아무래도 꽤 오랜 시간이 걸릴 듯합니다. 요즘 여러 국가에서 백신 개발에 심도 있는 연구를 거듭하고 있다고 하니 조만간 우리에게도 코로나로부터의 해방과 자유가 획득되지 않을까 기대하고는 있습니다. 하지만 질병의 생태계가 코로나를 극복한다고 해서 종식될 문제인가 하는 면에서는 회의가 듭니다. 아마도 또 다른 변종의 바이러스나 수퍼박테리아가 돌연히 출연하여 지구 곳곳을 창궐할 테니까요.
임애월 : 그 동안 자유롭던 생활이 얼마나 소중했던 시간인지 안타까운 마음으로 돌아보게 되네요.
시인들과의 대담집을 엮으신 대담전문가(?)님을 인터뷰하려니까 사실 약간 부담이 됩니다. 《한국시학》의 <이 계절의 시인> 대담 코너는 만나고 싶은 시인님들과 소소한 이야기들을 나누며 술도 한 잔하고 그러는 자리였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지면으로 만나 뵙고 질문을 드리려니 너무 딱딱하게 진행되는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김명원 : 맞아요. 시인들끼리 만나면 술도 있고 밥도 있고 곁에 어둠의 깃털도 좀 내려 주고, 그런 넉넉한 서정성이 있어야 하는데요. 저도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그리고 제가 예전에 시인들과의 대담집 《시인을 훔치다》를 출간하기는 했지만 그저 시인 분들을 한 분씩 찾아뵙고 소소한 근황을 여쭌 정도지요. 한 분 한 분의 모든 시적인 행보와 내력을 찬찬히 여행하기란 시간도 많이 소요될 뿐더러 가능하지 못한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선생님과도 그저 제 주변 이야기를 진솔하게 나누는 것으로 인터뷰가 진행되면 참 따듯한 시간이 될 듯해요. 더듬더듬 제 어눌한 이야기를 들어 정리하시려니 수고가 많으시겠습니다.
임애월 : 저도 선생님의 소소하고 진솔한 이야기들이 기대됩니다.
대전대학교에 전임으로 나가신다고 들었는데, 요즘 근황은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김명원 : 요즘은 컴퓨터를 활용하여 화상강의를 하고 있어요. 직접 강의실에서 만나 수업이 진행되지 못하는 부분은 과제로 대체하고 있는데요. 학생들은 과제가 배로 늘어나 힘들어하고, 저 역시 제 강의를 수강하는 300여 명 학생들의 과제들을 매주 평가하고 피드백 해 줘야 해서 피로도가 엄청납니다. 대면수업보다 업무량이 상당하지요. 늘씬하게 지쳐있답니다.
임애월 : 참, 그러시겠군요. 화상강의보다 그 피드백이 더 큰 문제군요.
고향은 천안인데 초등학교 때 공부를 잘 해서 서울로 유학(?)을 가셨다고요? 학구열이 참으로 대단한 집안입니다. 형제자매가 8남매라니 그때 당시에는 참 다복하다고 주변 이웃들이 부러워했겠어요.
김명원 : 주변 분들이 참 부러워했지요. 저는 사랑을 귀중한 유산으로 나누어준 ‘사랑예찬주의자’이신 아버지와 온몸으로 사랑하는 방법을 가르쳐준 ‘사랑실천주의자’이신 어머니 사이에서 자란 막내이었으니 얼마나 많은 사랑을 누렸던 것인지요. 제 성장기를 그리자면 낭만성 짙은 분홍빛 그림들이 떠오릅니다. 행복 충만의 시절이었어요. 완벽했습니다.
임애월 : 와아, 그 부분은 굉장히 부럽습니다. 사실 어린 시절이 평생의 운명을 좌지우지 하는데... 선생님께서는 태어나고 성장하는 환경을 선택받으신 셈이군요.
선생님께선 학생 때는 어떤 소녀였을까요? 요즘 말로 엄친딸이었을 것 같긴 합니다만.(웃음)
김명원 : 제 입으로 ‘엄친딸’이라고 하기에는 참 쑥스러운데요, 무궁한 상상을 하는 것을 즐겨하는 저로서는 규범에 얽매이는 약학과에는 전혀 가고 싶지 않았어요. 워낙은 미학과에 가고 싶었지요. 그러나 미학은 얼마든지 부차적으로 공부할 수 있으니, 대한민국처럼 아직 부강하지 않은 나라에서는 여성도 전문적인 직업을 가져야 한다고 성화이셨던 부모님께서 의대나 약대에 가라는 강압에 못 이겨 진학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제 창의적인 능력과 전혀 별개로 응용 학문이던 약학은 거의 고문 수준이었습니다. 저는 대신 <현대음악사 및 감상>이라는 교양 과목부터 미술학부 강의와 철학과 강의, 국문학과 이어령 교수님 강의도 대학 시절 내내 도청하곤 하였어요. 전천후 학생이었던 것이지요.
학교 동아리 활동도 참 부지런히 했어요. 가장 젊은 시절에 해 볼 수 있는 뜨거운 기회다 싶어서 몸에 화상이 날 정도로 참여했지요. 특히 연극반 활동을 충성 바쳐 했는데 대학연극경연대회에서 수상을 하기도 했고요. 미팅을 어찌나 잘 주선했는지, 그 능력을 높이 사 대학교 사년 내내 과대표를 맡았어요. 학교 행사 때마다 사회를 보는 것은 늘 제 몫이었고, 절대 외모는 미치지 못하지만 화려한 언술과 고급스러운 매너 덕분에 각 대학교 신문들이 우편함을 넘치게 배달되었고, 인근 대학의 남학생들로부터 여섯 겹의 호위를 받는다고 해서 '육겹'이라는 애칭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윤기 나는 인기의 절정 구가 시절이었지요.
임애월 : 아하, 역시 대단한 인기 학생이었네요. 친구들의 질투도 많이 받으셨겠어요.
좋은 기억이 아니어서 대답하기 불편하신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10여 년 전에 선생님께서 《시와시학사》에서 <젊은시인상>을 받으시고 수상소감 인터뷰하신 기사를 인터넷으로 읽은 기억이 나는데요. 시를 쓰시게 된 동기가 암 발병과 관련이 있다고요?
김명원 : 다소 색다른 저의 이력에 대해 말해 보겠습니다. 저는 시인이 되기 전에는 이화여대 약학과를 졸업하고서 대전성모병원 약제과에서 책임약사로, 결혼 후에는 서울 한미약품 병원기획부에서 주임약사로, 열정적으로 일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어린 아이 둘을 키우며 탁구공 마냥 정신없이 회사 일이며 집 안 일이며 분주하게 이리 저리 뛰어 다니며 생활하던 어느 날, 출산 직전의 고통처럼 엄습하곤 하던 복통의 정체가 밝혀질 무렵에서야 저는 그것이 이미 전이된 대장암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덕분에 대장을 반이나 떼어내면서 암세포가 전이된 비장 등을 섬세하게 절제하는 수술을 받았음은 물론이고요. 한 번도 제 마음 속에 불행을 대비한 의자를 준비한 적이 없기에 죽음을 바로 목전에 둔 저로서는 그 의자에 앉아야 한다는 극심한 불안과 분노로 불면의 밤들을 보내야 했습니다.
아직 삶이라는 완성된 성취의 탑을 축조하지도 못 한 채, 아직 아이들에게 엄마라는 임무를 다하지 못한 채, 나를 그들로부터 떼어놓으려고 하는 신에게 주먹질을 해대며 가슴을 치는 슬픔은 오죽했을까요?
그러기에 저는 암을 통해 진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은 나 혼자가 아니라는 것, 더불어 살아가고 있었음을. 또한 아프지 않았다면 결코 이르지 못했을 진리의 일부를 가슴 속에 담는 계기가 되었지요. 그것은 내 몸이 내 것이 아니라는 것, 신과 부모로부터 잠시 빌려 온 몸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지요. 선물로 주신 축복의 몸, 죽은 후에 감사히 잘 사용했습니다, 라고 깨끗이 반납해야 할 나 자신을 그릇된 습성과 건강에 대한 오만과 불규칙하고 편협 된 생활로 몸과 영혼 모두 온통 암 종양으로 더럽힌 일, 저는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음을 뒤늦게 알게 된 것이었습니다.
항암요법 후, 저는 삶에 대한 성찰을 시작하게 되었고, 숨이 턱에 찰 정도로 분주하던 일상의 무게를 비웠으며, ‘반디자연학교’라는 생태환경학교를 친구들과 설립하였고요. 더불어 다시 삶을 되찾은 후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이 문학이었음을 깨닫고는, 그것도 시였음을 발견해 내고는 그 길로 들어서게 되었답니다.
임애월 : 대단하시네요. 그러고도 학교를 설립하셨다고요? 역시 타고난 열정은 식지 않나 봅니다.
시를 쓰시게 된 계기도 궁금하고요, 학부는 약대를 졸업하셨는데 대학원은 국문학을 전공하셨잖아요? 이과와 문과라는 간극이 분명 있었을 텐데 문과로 방향 전환을 하신 이유도 궁금합니다.
김명원 : 서울아산병원에서 수술 후, 항암치료 기간이었던 13개월 동안 대전 친정집에서 요양 후 서울로 다시 올라와서는 짐을 꾸리기 시작했습니다. 서울의 환경적 요소가 도움이 되진 않을 것으로 판단되어서였지요. 남편 직장이 서울이어서 서울 근교 신도시인 군포시 산본으로 이사하게 되었고, 군포라는 도시에 대한 소속감도 갖고, 문학에 대한 첫 열망도 꽃피울 겸 1996년 봄, 군포주부백일장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주부의 신분으로 처음 참가하는 백일장에서 저는 뜻밖에 ‘장원’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장원을 한 의무 사항으로 경기도주부백일장에 대표로 나가게 되었고, 그곳에서도 ‘장원’을 하게 되었는데 그 당시 심사를 맡으셨던 임병호 선생님과 김대규 선생님께서 탁월한 역량을 갖춘 여성이라고 칭찬을 하시면서 ‘마로니에 전국 여성 백일장’에 나가 보라고 적극 추천해 주셨습니다. 내친김에 그래보자고 결심하고 참가하게 되었는데, 그 곳에서도 ‘장원’의 영예를 안게 되었고요. ‘마로니에 전국 여성 백일장’은 서울 문예진흥원에서 주최한 행사였는데, 그 곳에서 심사위원장이시면서 문예진흥원장이셨던 문덕수 선생님을 뵙게 되는 계기가 되었답니다. 그 후 등단을 하지 않았지만 '마로니에 전국 여성 백일장 장원'의 경력을 인정받아 군포문인협회가 결성되면서 회원으로 등록해 달라는 연락을 받게 되었어요. 군포문인협회에서 뵙게 된 임헌영 선생님의 추천을 받아 문덕수 선생님께서 주간으로 계시던 《詩文學》(1996년 10월호) 이라는 시지(詩誌)를 통해 등단하였습니다. 제게 詩의 씨방이 있음을 감지하게 된 것이고요,
임애월 : 타고난 문학적 재주가 깊숙이 숨어있었군요.
김명원 : 그 후 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병원에 갔더니 이제는 암의 공포로부터 졸업해도 된다고 하더군요. 저는 남편의 동의를 구하고 언제나 그리워 절절매던 친정집이 있는 대전을 향해 귀향하게 되었습니다. 건강이 더 좋아지자 제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문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어린 시절부터 늘 그리움으로 편편이 쌓여있었던 ‘문학’이었어요. 저는 다시금 보너스로 얻은 인생이라면, 정말로 제가 좋아하는 것을 해 보고 싶었습니다. 가족들에게 이야기했더니 내 건강만 괜찮다면, 무조건 적극적으로 동의하고 돕겠다는 의견들을 제시해 주었지요. 그래서 성균관대 국문학과 대학원으로 용감하게 진학하게 된 것이고요. 문학을 본격적으로 심도 있게 공부하고 싶어서요,
임애월 : 드디어 암세포로부터의 해방되셨군요. 아주 다행한 일입니다. 1996년 《시문학》으로 등단하셨는데 당시 기억에 남는 일화나 에피소드, 혹은 ‘문단’이라는 집단이 주는 신선한 임팩트(?) 같은 게 있었나요?
김명원 : 직업인인 약사로서 지내다가 암을 앓는 바람에 덜컥 시인이 되고 보니 문청 시절도 없는데다가 문단 선후배도 한명도 없는 허허벌판 시단에 홀로 서 있어야 했지요. 《시문학》으로부터 문단 행사라고 초청 받아 프레스센터에 갔었거든요. 행사장에 모인 모든 분들은 서로 인사를 나누며 즐겁게 담소하는데, 저는 아는 사람이 없어서 구석에 혼자 우두커니 앉아 어쩔 줄 몰라 하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물론 그런 저를 가엽게 여기시고 훗날, 김규화 선생님과 김용언 선생님께서 참 살뜰하게 챙겨주셨지만요,
임애월 : 1999년 첫시집 슬픔이 익어, 투명한 핏줄이 보일 때까지를 발간했을 때 어떤 느낌이셨을까 궁금하네요. 처음이라는 건 두 번째나 세 번째에 비해 뭔가 느낌이 다를 것 같아서요.
김명원 : 누구나 다 그럴듯한데요. 저도 첫 시집을 출간하고는 종로 교보문고를 들락날락하였어요. 시집코너에 안착되어 있는 제 시집을 직접 만져보고 확인하고 싶었고, 혹여 제 시집을 열어 읽어보는 독자가 있으면 곁에서 심장이 쫄깃거리더라고요. 첫 출산한 아기를 신생아실에서 면회하는 기분이랄까요. 두려울 정도로 반갑고 두근거리는 설렘이 가득했지요.
지고 말면 그 뿐
흔적이 살아 있던 자리에
바람조차 성글 터인데
그랬으면 좋겠다
내 사랑 어디에도
있었다 속죄하지 않아도 되는
불현듯 피었다 지는
선운사 동백처럼
지고 나면 그 뿐
아무런 자취 못 찾아 눈머는
깨끗한 허무였으면 좋겠다.
- 「동백꽃 -선운사에서」 전문
임애월 : 첫 시집 표제시를 읽어봤어요. “불현듯 피었다 지는 선운사 동백”과 “눈머는 깨끗한 허무”는 결국 흘러가버린 “내 사랑”처럼 분명 “있었”지만 지금은 “아무런 자취 찾을 수 없”는, 상처조차 남지 않는 말간 이미지들이 선명하게 가슴으로 스며드네요. 사랑은 대부분 한시적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영원을 믿지요.
김명원 : 에로스로서의 사랑은 그렇겠지요. 사랑이란 사랑하는 대상들끼리 욕망하는 크기와 무게가 서로 다르니 늘 어긋나기 마련이겠고요. 치열하게 목숨껏 사랑한다 하여도 언젠가는 반드시 그 사랑이 끝날 테니 더욱 허무할 수도 있겠고요. 그럼에도 사람들은 다시금 사랑을 생명 에너지로 환치하려 또 새로운 사랑을 찾아 나서겠지요.
임애월 : 인간들이 하는 사랑(남녀 간)은 아무리 아가페적인 사랑을 지향한다 해도 결국은 사람과 사람이 만남이 아니겠어요. 어쩌면 그래서 아름다운 것이기도 하고요.
‘김명원 시인“으로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문학상들을 참 많이 받으셨네요. 그만큼 여러 곳에서 작품성을 인정받으셨다는 의미인데 그래도 수상하면서 가장 감동적이었던 상이 있었다면 어떤 상이었나요? 곤란한 질문인가요? (웃음)
김명원 : 곤란하다니요. 물어봐 주시기를 간원하고 있었는 걸요. 안 물어봐 주시면 제가 자랑할 수도 없고요. 완전 농담입니다. 좀 웃자고요.(웃음) 실은 뒤늦게 늦깎이로 등단한 저로서는 수상을 한다는 것이 송구스럽고 민망하였습니다. 일부 지인들은 상복이 터졌다고 말씀하시면서, 누구보다도 어렵게 전환한 시인의 길이기에 그만큼 치열하게 노력한 결과가 아니겠느냐고 격려해 주셨지요. 상을 많이 받는다는 것은 제도권에 편입된다는 부담스러운 일이기도 하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시를 열심히 잘 쓴다고 고봉으로 주는 밥상과도 같은 것이니 이 뜨끈한 밥상을 받으면서 어찌 기쁘고 환하지 않았겠습니까.
문학상 중에서도 특히 감동적인 상은 ‘시와시학상 젊은 시인상’과 ‘호서문학상’입니다. 2008년에 수상한 ‘시와시학상 젊은 시인상’은 고인이 되신 서울대 김윤식교수님과 고은 시인, 김남조 시인, 경희대 김재홍 교수님께서 심사를 하셨고, 직접 김윤식교수님께서 제게 금메달을 걸어주셔서 가슴 뭉클했어요. 김윤식교수님의 이론서들로 문학을 공부했거든요, 그리고 작년 2019년에 받은 호서문학상은 제가 활동하고 있는 터전인 대전에서 주시는 상이라 더욱 의미 깊더라고요.
임애월 : 그러시군요. 선생님께서는 시인으로서도 참 열정적이십니다. 제가 인터뷰로 만난 스무 분이 넘는 시인들 중에서 단연 열정 부문 1위이십니다.(웃음)
두 번째 시집 달빛 손가락은 제목부터 몽환적이고 감각적인 느낌이 들어요. 김수이 평론가는 작품해설에서 ‘촉각의 경험과 상상의 사유를 위해 바쳐진 시집’이라고 하면서 ‘다양한 제재를 선택하고 이를 생생한 살의 감각으로 시에 새겨 넣고, 절실하게 다가오는 대상에 최대한의 열정과 수고를 쏟아 부어 시를 쓰는 시인’이라고 했는데 詩作에 있어서 촉감을 통한 감각적인 형상화는 처음부터 계산된 기법인지요?
김명원 : 말씀하신 ‘촉감을 통한 감각적인 형상화’는 아마도 세상을 다순 시선으로 관찰하려하고, 새로운 사유를 발견하려하고,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를 저만의 이미지의 옷으로 잘 입혀 낸 일이라고 답변 드리고 싶습니다. 제 주변에 펼쳐져 있는 모든 풍경이 제 시의 소재이자 주제입니다. 저는 하루에 한번씩, 가급적이면 빠트리지 않고요. 산이나 천변을 산책하고 있는데요. 고요로 깊어가는 숲길을 바라본다든지, 반짝거리면서 글썽이는 강물을 들여다본다든지, 허공을 쪼아 먹는 새들의 날갯짓들을 유심한 눈길로 관찰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근사한 풍경은 역시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이 연출해 내는 일상의 장면은 그 자체만으로도 숭엄한 감동이니까요. 그 안에 놓여 있는 모함과 질시, 반목과 배려, 화해와 용서, 이런 것들이 어우러져 생의 지도를 그려내거든요. 그들이 제 시의 스승입니다. 그 소리를, 그 움직임을, 빠짐없이 듣고 베끼고 옮기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 제 詩作 공부입니다.
한 때 격렬했던 포옹의 지문을,
속 겹 사이사이에 숨은 장미 살을 비집고
내 문신을 새겼던 그 밤의 기억들을,
끝끝내 말해달라고 우기던 차디찬 달빛의 손가락들을,
이제는 잊으라고?
- 「빨래 1」 전문
임애월 : 이 외에 「빨래」 연작시들에서는 직접적이고도 감각적이며 강렬한 에로스적 심상들이 나타나는데... 몇 번 읽다보니 참 신선했어요. “벗어던지고만 싶었을” 오래 되고 더러워진 묵은 것들을 보면 누구든 “남김없이 빨아주고 싶”을 테니까요.
사실 ‘빨래’ 연작시는 이 시집의 작품들 중에서 가장 먼저 강렬한 느낌으로 다가오거든요, ‘빨래’에 천착하게 된 특별한 이유가 혹시 있으셨나요?
김명원 : 예리하신 안목에 놀라울 뿐입니다. 더러워진 묵은 것들을 보면 “남김없이 빨아주고 싶”지요. 그래서 '빨래'는 그 자체로 환유가 됩니다. 더러워진 무언가를 다시금 새롭게 재생시키는 이미지로 가득 차 있으니까요. 저는 설거지를 할 때나 빨래를 할 때 많은 생각을 부립니다. 특히 빨래를 할 때가 더욱더요. 빨랫감을 뒤지면서 주머니에서 쏟아지는 모래알을 볼 때는 아이가 헤매고 다닌 여행지의 해변을 떠올리고, 와이셔츠에 묻은 때 얼룩을 보면서는 오욕에 물드는 현대인의 생활을 성찰하기도 하고요. 그런데 그 빨래가 여성인 내 손에 의해 빨린다는 것에 착상하여 에로틱한 이미지를 구현하게 되었답니다. "얼마나 빨아 주어야 만족하겠니?"라는 경박한 격정은 빨래라는 대상을 남성화하여 감각적으로 접근하게 된 동기가 됩니다. 빨래하는 행위가 '빤다는 것'과 '물'을 매제로 이루어진다는 것, 혹은 깜깜한 세탁기 안에서 서로 뒤엉키면서 애욕의 시간을 펼쳐 보인다는 것 등이 이러한 「빨래」 연작시를 쓰게 된 동기가 되었지요.
임애월 : 이 시집 딜빛 손가락에서 촉각의 심상들을 김수이 평론가는 ‘근대의 남성지배문화의 시각중심주의에 반하는 여성의 감각’, 그 중에서도 모성에 기초한 페미니즘적 시각을 형상화‘하여 ’이해와 감싸 안음의 지향성을 발휘하‘고 있다고 했어요. 남성중심의 시대적 모순에 대해 배타적이거나 항거가 아닌 ’감싸 안음‘으로써 오히려 그 남성지배의 힘을 넘어선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래서 모성은 위대한 것인가 봅니다.
김명원 : 네, 모성은 위대한 것이지요. 신이 일일이 모든 이들을 다 돌볼 수가 없어서 어머니를 만들었다고 하니까요.
임애월 : 「죽음」 「문상」 「부의금」 등 ‘죽음’을 모티프로 쓴 작품들도 꽤 보이는데요, 「진짜 시인」 마지막 부분을 가져와 봤어요.
죽음은 삶의 마지막 과정이라 자연스러운 현상이긴 한데, 평상시에는 잊고 살다가 문득 목전에서 마주했을 때 그 충격이 크게 다가오곤 하지요. 아버지의 마지막 ‘유언’이 ‘진짜 시(詩)라고 여겨지는’ 이유는 아마도 그 진정성 때문이 아닐까요?
평생 퍼주기를 좋아하고 내 것 네 것이 없던 아버지를, 학생들이며 학부형들이며 선생님들이며 누구도 존경해마지않는 아버지를, 유독 우리 가족만은 존경하지도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것인데, 아버지 돌아가시던 날 아침, 중환자실 면회시간에 내게 이르신 말, 바쁜데 왜 이런 델 부러 왔느냐, 산 사람은 죽는 사람을 마중할 필요 없다, 사는 데 열중해라, 아이들 잘 크냐? 그리고 나에게 꽂혀있는 저 링겔 주사기 바늘 빼다오, 내게 먹일 주사약이 있다면, 살 수 있는 다른 사람에게 놔다오, 그게 유언이었는데, 나는 왜 이 말씀이 자꾸 진짜 시(詩)라고 여겨지는 것인지
- 「진짜 시인」 부분
김명원 : 지방 중고등학교 교장이셨던 아버지께선 거의 성자 수준이셨어요. 전쟁 후에는 굶주린 학생들을 데려다가 밥을 해 먹이고 재우고 가르치셨고, 등록금을 못 내는 제자들은 모두 그의 부양 받을 의무가 있는 아들딸이 되어 월급봉투는 번번이 체납고지서로 변하기도 했고요. 출장비 십 만 원을 받아 서울 가서는 여관비 아끼려고 친척집에서 자고 남은 여비를 총무과에 반납한 수없이 소소한 일들이며, 갈 곳 없는 술집 여자를 데려다가 집에서 재우는 바람에 엄마는 생면부지의 여자와 사십여 일을 살며 불고기에 백숙에 탕수육에 특별요리를 해 먹이라는 아버지의 성화에 따라 할머니 생신 상에도 오르지 못했던 음식을 여자 덕분에 우리가 푸지게 먹어 보았고요.
평생을 퍼주기 좋아하고 내 것 네 것이 없던 아버지를, 학생들이며 학부형들이며 선생님들이며 누구도 존경해 마지않는 아버지께서 돌아가시던 날 아침, 중환자실 면회 시간에 제게 이르신 말씀이, 시에 나와 있는 그대로예요. “바쁜데 왜 이런 델 부러 왔느냐, 산 사람은 죽는 사람을 마중할 필요 없다, 사는 데 열중해라, 아이들 잘 크냐? 그리고 나에게 꽂혀 있는 저 링겔주사기 바늘 빼다오, 내게 먹일 주사약이 있다면, 살 수 있는 다른 사람에게 놔다오.” 그게 유언이었어요. 아버지께선 죽음을 예견하고 계셨지요. 그러니 곧 죽을 사람인 본인에게 링거액 낭비할 필요 없다고 하시며, 저에게조차 어서 가서 사는 데 열중하고 공부 열심히 하라고 이르시더군요. 저는 그 유언이 진짜 詩라고 여겨졌어요. 온몸으로 나눔의 생을 사신 분. 융통성 없이 정의롭게 교장직을 수행하신 분, 두려움 없이 담담하게 죽음을 제대로 맞이하시는 분. 그분이 진짜 시인이라고 말이지요.
임애월 : 진심으로 존경하고 사랑하시는군요. 훌륭하신 아버님이십니다.
재작년에 시집 오르골 정원을 펴내셨어요. 그 “신묘한 노래상자”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으로 “무한위로”를 받는다고 하셨는데, 오르골에 대한 특별한 사연이 있으시다고요?
김명원 : 오르골은 일정한 음악이 자동 연주되는 음악 완구이지요. 저는 아주 오래 전, 생일 선물로 받은 오르골을 좋아해서 쓸쓸한 상념에 젖는 저녁이나 밤이면 자주 태엽을 감습니다. 그러면 그 오르골 안에서 깊이 잠자던 소녀가 두 팔을 들고 원반 위에서 선율에 맞춰 춤추기 시작하지요. 또랑또랑 우물 안에서 연주하는 듯한 맑은 음계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무심을 툭 털고 돌아가고요. 이 신묘한 노래 상자 속에서 튀어 오르는 무한 위로가 저에게 곧바로 도착한답니다. 이 오르골을 선물 받았던 날로 달음박질해 가는 건데요. 아버지, 엄마, 오빠와 언니들 사이에 앉아 있는 저는 초등학생입니다. 엄마가 만들어주신 백설기 시루떡도 보입니다. 생일축하 노래도 들립니다.
공부를 좀 잘해서 경기여중에 넣겠다고 서울대를 다니던 큰오빠의 강압적인 권유로 서울 사립 금성국민학교로 강제 전학해 간 시골 소녀. 그래, 아니야, 라는 기본 서울말을 못 배워서, 기여, 아니여, 라고 아직 충청도 서산 사투리를 쓰고, 놀아주는 친구가 한명도 없고, 내 진한 사투리에 웃음보가 터지는 그들에게 주눅 들고, 아이들이 엄마 손을 잡고 다니는 모습에 심술 나고, 오빠들이 모두 귀가하지 않은 서울 면목동 집에 하교 후 혼자 앉아 있으면 골목 밖에서 엄마, 라고 부르는 여자아이의 목소리에 울음보가 터지던 그 때 그 시절로 내달리는 거예요.
아버지께서는 서산농고 교장선생님으로 계셨고, 대학과 고등학교를 다니던 오빠들은 서울에 집을 구해 자취를 했고, 엄마는 서산과 서울을 오가며 두 집을 돌봐야 하셨지요. 초등학교 4학년 어린이날, 공군에어쇼를 금성 티브이에서 신나게 보다가 저의 장래를 계획하려 하경한 오빠들 손에 잡혀 저는 납치 수준으로 득달같이 상경했습니다. 제 책상이 없어 오빠들이 쓰는 의자 위에 책들을 일곱 권이나 얹고 방석을 놓아야 겨우 책상 높이에 제 키가 맞았고, 서울 지리를 몰라 버스를 갈아타며 창밖을 수십 번 노려보아야 했던 때였지요. 서울로 멀리 유학 간 막내딸을 위해 시루떡을 해 머리에 지고오신 엄마로부터 어디서 구했는지 저는 오르골을 선물 받았습니다. 모처럼 서울과 서산 가족이 모두 모였던, 웃음이 폭죽으로 터졌던, 전혀 외롭지 않았던 생일날이었습니다.
임애월 : 외로울 때마다 행복했던 어린 시절로 돌아가게 해주는 신기한 마법의 완구 맞네요.
김명원 : 이후 그 노래 상자는 제 외로움을 함께 한 친구가 되었어요. 서울에서 서산이 얼마나 먼지를 지도 속에서 색연필로 그어보며 울던 날, 집으로 갈 수 있는 방학이 얼마나 남았는지 하루하루를 세어보던 날, 중학생이 되고 세상의 부조리와 모순에 가슴을 태우던 날, 늦게 방문한 사춘기를 혹독하게 치르며 마음이 아프다고 조퇴하던 고등학생 어느 날, 약대 실험복을 입고 교내 시위에 참여했던 팔십년의 봄날, 암 수술을 위해 입원 짐을 싸던 겨울 아침, 딸아이가 실명 직전에 수술을 하고 눈을 붕대로 감고 나오던 날, 그 모든 날들에 이 오르골 음악을 켰습니다. 두 손을 번쩍 들고 항복하는 듯한 포즈로 춤을 추는 오르골 소녀를 들여다보며, 두 손을 든 ‘항복’이 ‘행복’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르골 소녀는 저를 기다렸다는 듯이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저를 아무런 근심 걱정 없는 초등학생 생일날로 데려다 주었습니다, 박수 소리, 축하 노래, 오직 제가 인생의 주인공이던 그 저녁으로 안내해 주었거든요. 오르골 음악을 들으며 저는 충분히 순수한 위로의 세례식을 치를 수 있었지요, 그 이후 시인이 되어서도 오르골을 들으며 백석의 시절로 가보기도 하고, 연극 무대를 설정해 보기도 하고, 실연을 한 여인의 중얼거림을 시연해 보기도 하면서, 공상과 환상과 온갖 상상을 해가며 시를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르골 연작시들이 만들어졌습니다.
제가 누추하도록 반복하는 말은 시가 아닙니다. 시 이전의 무릇 말 더듬, 눌 언어 이전의 하 몸짓, 낮은 몸짓 이전의 도드라진 한숨, 사막 한숨 이전의 그 그 그 목울대 힘줄, 더듬거리는 나의 주저는, 그 그래요, 아셨겠지만 노래도 아닙니다,
- 「오르골 2-시인的」 부분
임애월 : 두 손을 번쩍 든 오르골소녀의 “항복”이 곧 ”행복“이라는 코멘트에 주목했어요. 그게 어쩌면 앞에서 언급했던 ”모성“과도 일맥상통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모성의 품은 넓고 깊고 순수하니까요.
김명원 : 서울아산병원에 입원하고 있을 때 가장 보고 싶었던 친정 부모님께서 대전에서 올라오셨습니다. “왜 대장염인데 꼭 수술을 해야 하는 거냐? 약으론 안 된대?” 저는 연로하신 부모님께 대장염이라고 말씀드렸었거든요. 두 분은 아무런 걱정 없이 제 곁에 앉아서 마련해 오신 도시락을 드시고 가셨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도 모르는 앞날을 헤아리면서 돌아가시는 두 분의 뒷모습을 뵈며 눈물을 얼마나 흘렸던지요.
퇴원 후 시댁에서 머물다가 요양 차 대전 친정집에 내려간 후 일주일 즈음이 지날 무렵, 밤 9시 뉴스를 보기 위해 누워 계시는 엄마에게 손톱을 깎아드리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신문지를 넓게 펴고 엄마의 손톱을 똑 똑 소리 내며 깎아드리는 동안 제 가슴에도 똑 똑 슬픔과 아픔의 물방울들이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있었지요. 어차피 항암치료를 받는 기간 친정집에 오랜 동안 머물러야 하는 것이라면, 지금 내 상황을 알려드리는 것이 낫겠다 싶어 저는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엄마, 실은 저 ‘대장염’으로 수술 받은 것이 아니에요, ‘염’자를 ‘암’자로 바꾸어야 해요.
엄마의 얼굴을 정면으로 볼 수가 없어서, 왠지 큰 죄를 지은 것만 같아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벌떡 일어나시는 엄마 얼굴에는 이미 눈물이 범벅이 되어 있었습니다. 엄마는 제 어깨를 가볍게 때리시면서 원망의 목소리로, 이미 알고 있었다고, 명원이 네가 오빠와 언니들에게 부모님을 속여 달라고 부탁한 것 같아서 그냥 모르는 척 하고 있었다고, 그런데 집에 들르는 오빠와 언니들 모두 말이 없고 밥도 안 먹고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여 눈치를 채시게 되었다고 말이지요. 그런데 나에게 아는 척을 하면 명원이 네가 곤란해 할까 봐 말을 못하고 있었노라고, 네가 그런 성격이니까 암에 걸리지, 다른 아이들 같으면 제일 먼저 엄마한테 이런 사실을 알리고 도움을 받을 텐데… 너는 그저 너 혼자 외로움을 견디면서 가장 가까운 엄마에게도 염려를 끼치지 않으려고 지금에야 알리니 그런 몹쓸 병에 걸리지, 하시면서 저를 붙들고 소리 내어 우시는 것이었습니다.
임애월 : 이 답변을 읽으면서 저도 갑자기 눈물이 흐릅니다. 맹세컨대 어머니는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사랑입니다.
김명원 : 제가 암이라는 사실을 실토하고 난 후 엄마는 다음 날부터 전사(戰士)가 되셨어요. 어디에서 들으셨는지 항암 작용이 뛰어나다는 느릅나무 껍질이며, 갈대 뿌리며, 뽕잎이며, 녹즙이며, 안 먹어 본 것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유성에 장이 선다는 날마다 장을 보셔서 끓여주시는 개고기도 처음 먹어보는 것이었지만 암에 효험이 있건 없건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고요. 민간요법의 모든 것은 이미 음식이 아니라 엄마의 극진한 정성이었기에 저는 이를 악물고 열심히 먹고 돌아서서는 설사를 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엄마는 전혀 개의치 않으시고 계속 보신용 음식을 해대셨지요. 자식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무어든 전국 각지를 돌며 구해 오셨습니다.
이런 사랑이 아니었다면, 저는 다시 일어설 수 있었을까요? 이런 병이 아니었다면, 저는 이다지 큰 사랑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었을까요? 그렇기에 저는 엄마를 통해 두 번 태어났습니다. 한 번은 엄마의 자궁으로부터, 그리고 또 한 번은 제 질병인 암으로부터 구원해 주셨으니까요.
임애월 : 네, 물론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끝이 없지요.
정덕재 시인은 ‘김명원 시인이 오르골에 천착하는 이유는 시가 가지고 있는 천진함과 음악성 때문’일 거라면서 ‘불완전한 존재성을 끊임없이 말하면서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정서를 시에 담아내지만 그것이 비극적이지 않는 이유는 오르골이라는 음악완구에 시를 담고 있기 때문’이라 하셨어요. 즉 오르골의 순수성과 천진함이 ‘죽음과 존재를 음악적 이미지로 접근하게’ 하고 있어서 비극마저도 넘어서게 한다는 의미인가 봅니다. 게다가 무한 반복이라는 기막힌 부활이 그 안에 이미 내장되어 있기도 하니까요.
김명원 : 눈 밝은 정덕재 시인이 아주 정확하게 제 오르골 연작시들을 읽어내고 있더라고요. 오르골 연작시들은 작가회의 시인들이 만드는 기관지인 《작가마당》 신작 소시집으로 실었던 것인데요. 그 때 존경하는 정덕재 시인이 제 시 해설을 맡아 써주셨지요. 제가 가지고 있는 오르골 사진을 찍어 보내달라고까지 하신 면밀한 시인이에요. 제가 비밀스레 의도한 것들을 어찌 그렇게 죄다 찾아 내셨던지요. 소머즈의 시력을 지니고 있거나 셜록 홈즈의 비범한 추리력을 가진 시인인 듯 했어요.
임애월 : 작품 「국가시인고시國家詩人考試」를 통해 문단 등단제도에 대한 문제점을 드러내고 싶으셨다고요?
김명원 : 우스운 시이지만 아픈 시입니다. 시인이 되고 싶어 하는 시적 화자는 ‘국가시인고시’를 치르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합니다. 시험 1교시에 지필고사를 치러야 한다는 것은, 시 창작에 왜 필요한지는 모르겠지만 막강한 이론서들로 무장을 하는 일부 시인의 지적 허세를 지적하려고 해서였습니다. 시험 2교시, 종합검진을 받아서 합격해야 한다는 항목에서는 문화예술교육진흥원 창작지원 사업에서 누락된 경우 등 수십 명 시인들의 조기 사망원인으로 ‘절망 심장 발작 증후군’이라는 병명이 규명된 이후 처해진 조치라고 힘껏 문단 세태를 비틀었고요. 시험 3교시의 적성검사와 심리테스트도 통과해야 한다는 조항은 인정받지 못해도 예술을 향한 초강력 열정 구조를 가지고 있는 건지, 돈벌이가 안 되는 시 창작 작업에 늘 행복해 할지에 대해 스스로 검열해 보자고 넣은 것이에요.
임애월 : 이재훈 시인은 《시와정신》 기획특집 「금강의 시적 흐름을 찾아서-공시적 맥락의 현역 시인들을 중심으로」에서 위의 시가 이 시대 시인들에 대한 서글픈 자화상이라고 해설했더라고요.
김명원 : ‘국가시인고시’라는 현실에는 없는 시험이 시인이 되기 위해서는 실제적으로 필요할지 모른다는 상상은 오히려 너무 사실적으로 읽히며, 시인의 명명을 얻은 후 시단에서 겪어본 세월에 대한 솔직한 고백들이 풍자보다 역설의 언어를 통해 드러난다는 점을 강조하였습니다. 시인들의 지적 허영심과 시인으로서의 자존심과 통음의 사교를 버텨낼 마음의 체력이, 그리고 학력과 자본과는 무관한 적성검사를 이겨낼 시험들이 바로 그렇다고요. 자신의 이름을 명명한 시고시원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우리 모두의 시인들에게 통용되는 자화상인 것이라고 말이지요.
시의 마지막 부분에서, 어디에 필요한 것인지 주민등록 등본과 학력증명서까지 첨부해야 한다는 것은 실력이나 능력보다 우선 외형적인 형성 조건을 염두에 두는 문단 등단 제도에 대한 문제점을 저는 드러내고 싶었습니다.
27회 국가 시인 고시 과목이 발표되었다
시험 1교시,
이승훈의 시론
폴 존슨 지식인의 두 얼굴
마타아스 반 복셀 어리석음에 대한 백과사전 등
13가지 책자에서 무작위 선정 주관식으로
20개 문항 문제가 출제된다고 한다
시험 2교시,
종합검진을 받아서 합격해야 한다
문화예술교육진흥원 창작지원사업에서 누락될 경우
원고료는커녕 잡지를 사주면서 시를 실어야 하는 경우
지명도 일 순위 출판사에서 시집 출간 거절을 당한 경우
각종 문단 행사 뒤풀이, 사교용 혹은 접대용 과음을 해야 하는 경우
종내 웃으며 버틸 기초 체력검사이다
수십 명 시인들의 조기 사망 원인으로
‘절망 심장 발작 증후군’이라는 병명이
규명된 이후 처해진 조치이다
시험 3교시,
적성검사와 심리테스트도 통과해야 한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스스로 당당한
초강력 열정 구조를 가지고 있는 건지
돈벌이 제로인 시 창작 작업에 늘 행복해 할지
죽을 때까지 경쟁의식이 끊임없이 솟아나고 있는 건지
확실히 선별하는 시험 문제를 만들기 위해
정부기관에서 특별연구소에 의뢰, 입증한 테스트들이다
가차 없이 걸려들면 2교시까지 공들인 탑이 무너지기 십상이다
뿐이랴, 학령기부터 써왔던 일기장 제출은 필수,
어디에 필요한 것인지, 주민등록등본,
학력증명서까지 첨부해야 한다
삼수를 하고 있는 우둔한 화자는
시인 전문 양성 학원에서 열심히 준비한
경쟁자들과 겨루어서 기필코
시인이 되어야 한다
국가에서 배급한 시인 배지를
가슴에 눈부시게 달고
고향 어귀 현수막에 펄럭이는
“축, 김명원, 국가 인정 시인이 되다”
바라보는 그날까지 이까짓
시고시원(詩考試院)에서의 고생쯤
우습다
- 「국가시인고시國家詩人考試」 전문
임애월 : 이 시의 내용처럼 현실에서 “국가시인고시”가 있다면 어떨까 하는 상상도 해보게 되네요. 웃을 일이 아닌데... 씁쓸한 웃음이 나옵니다.
김명원 : 「국가시인고시國家詩人考試」를 치러야 시인이 되는 것인 양 불필요한 절차들을 마음껏 비틀어보려고 우리 시단의 세태를 풍자한 시라서요. 현실에서 “국가시인고시”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겠지요. 시인은 권력이 아니니까요. 시인이란 가장 순수한 영혼의 대변자로서 자유로 표상되어야 할 테니까요.
임애월 : 당연하지요.
선생님께서는 현재 등단제도의 과정 중에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김명원 : 이형권 평론가는 등단 제도에 대한 날카롭게 비판을 가하고 있는데요. 현재의 등단 제도는 등단한 작가들만이 문학 활동을 해야 한다는 암묵적인 규율로 인하여 폐쇄적인 문단 구조를 형성하며, 매체나 심사자를 중심으로 하는 문학 권력을 형성하여 문학상의 공정성을 저해하고, 신문사가 문예지의 상업성이나 이념을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된다는 점, 그리고 모든 분야에서 경력보다 능력을 중시하고 경계를 해체하는 시대적 흐름과 충돌한다는 점 등을 문제점들로 들고 있습니다.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출판 시장의 형성에 따라 자연스럽게 좋은 시인을 소개하고 유통 소비하는 외국 선진국처럼 우리는 시적 역량에만 주력하면 안 되는 것일까요? 언제까지 각종 신문사들의 신춘문예에 세월을 담보하고, 유수 전문 시지의 신인문학상에 계절을 잃어야 하는 걸까요?
임애월 : 그 말씀에 저도 공감이 갑니다.
김명원 : 시인은 시를 쓰는 사람이지요. 목매고 시를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시가 찾아오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 사람입니다. 시가 무어라고, 경제적인 수단으로 쓸 수도 없고, 힘을 드러내는 권력적인 도구로도 활용하기 어렵고, 축적 재산이나 경력의 집적으로도 불가능한 걸 왜 그렇게 번민하며 공을 들이고, 애타 하고, 결별 선언을 당할까봐 노심초사 하고 그러는 것일까요. 미처 발견해 내지 못했거나 혹은 놓쳐 버린 기막힌 사유든 인식을 다른 시인의 시에서 읽게 될 때, 온 몸을 휘감는 환희와 질투라니요. 저로서는 도저히 감당되지 않는 깊이와 높이를 지닌 수 세기 전의 시를 암송하며 느끼는 전율이라니요. 그러니 시가 돈이 되지 않고, 그 흔한 인정 가치에서 배제된다 하여도 저는 어쩌지 못하고 시를 생각할 밖에요. 시를 고민하고, 시를 감식하고, 시에게 구애하며 애걸할 밖에요.
임애월 : 시에게 모든 걸 저당 잡히셨네요. 천생 시인이십니다.
「시 건강검진」에서는 시 창작의 고통 혹은 완성된 작품에 대한 애착이라고 할까요.... 그런 복잡한 감정들이 엿보입니다.
김명원 : 「시 건강검진」은 말씀하신 대로 시 창작의 고통과 완성된 작품에 대한 애착을 드러낸 시입니다. 시인이라며 누구나 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시 이미지와 더 할 수 없는, 그래서 절대 잊히지 않을 묵직한 메시지가 남는 시를 쓰고 싶어 하겠지요. 하지만 그런 시를 만나고, 얻고, 내 시로 품어 안기는 절대 쉬운 일이 아니라서 그런 좌절감을 그 시에 진솔하게 담고 싶었던 것입니다.
임애월 : “생존이라는 도박에서 가장 큰 밑천은 생명 그 자체이므로 이 생명이 내기에 걸려있지 않으면 삶은 빈곤해지고 무기력해진다” , “죽음을 어떻게 하면 내면화할 수 있을까요. 죽음의 날개 뼈들을 만지작거리며 죽음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감각적으로 핥고 맛보고 느끼고 만질 수는 없는 것일까요”... 시집 오르골 정원 말미의 <시인의 산문>에서는 ‘죽음’을 측면이나 후면이 아닌 정면으로 맞닥뜨리고 죽은 자들의 기억을 재편성해 내는 작업을 하고 계시다고 하셨는데 조금 소개해 주시지요.
김명원 : 모든 인간은 반드시 죽는다는 보편적인 진리에 대해 우리 모두는 공정함을 느낍니다. 그것은 아마도 인생의 긴 여정동안 인간이 가지는 유일한 평등이기 때문일 것이겠지요. 프로이드는 말하죠. 죽음에 대한 태도는 우리의 삶에 강한 영향을 미치는데, 생존이라는 도박에서 가장 큰 밑천은 생명 그 자체이므로 이 생명이 내기에 걸려 있지 않으면 삶은 빈곤해지고 무기력해진다고요. 따라서 죽음을 따로 떼어놓고 사는 삶을 생각하는 경향은 많은 것을 단념시키고 배제하는 결과를 낳는다고 말이에요.
죽음에 대한 태도를 적극적으로 갖추기 위해 사람들이 죽음을 미리 앞당겨 경험할 수 있으려면 두 가지의 조건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하나는 자신이 살아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죽음이 타자의 죽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직간접적으로 수많은 다른 사람들의 죽음을 경험하지만 정작 자신의 죽음은 아쉽게도 예기치 않는 순간에 단 한 번만 경험하게 되고, 그 죽음조차도 스스로는 제대로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겠고요. 죽음이 임박한 순간에는 이미 자신의 모든 육체적 기능이 정지해버리기 때문에 죽음을 자신의 내부로부터 일일이 경험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여요.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죽음 직전에 인생이 끝나버리는 까닭에 죽음은 자기 인생의 사건이 아니라고 했겠지요.
그래서 저는 살아있는 내내 죽음을 기억하고, 죽음을 내면화하고, 죽음을 시의 추동력으로 삼고자 해요. 죽음을 연습하면서, 즉은 이들을 소환해 내면서, 지금 여기에 주어진 저의 생을 더 뜨겁게 가동하고 가열해 낼 수 있게 되거든요.
임애월 : 물론 이 지구상의 사람들은 모두 먼저 죽은 자들의 삶의 터전이었던 곳에서 그 뒤를 따라 살아갑니다. 아니 우리는 모두들 천천히 죽어가는 건가요. 역사는 죽음의 행로를 따라서 이어지는 것이니까요.
김명원 : 맞습니다. 저는 가끔 제가 있는 곳에서 무슨 역사가 이뤄졌을까 곰곰 생각해 봅니다. 내가 누워 자는 이 집 터에서는 말발굽 소리를 울리며 깃발아래 죽어간 백제군이 있었을 것이고, 한국전쟁 중 포탄을 맞고 죽어간 군인이 있었을 테고, 한 인생을 정성스럽게 살다 간 어느 여성의 죽음이 있기도 했겠지요. 우리는 이처럼 주검들의 잔영을 길게 드리우며 그 죽음의 실체와 함께 우리네 삶을 엮어가는 것이겠고요, 실로 삶과 죽음의 경계는 얼마나 무력한 것일까요. 지난 달 젊기만 했던 금은돌 시인과 최미아 시인의 죽음 소식을 접하며 더욱 그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죽음은 우리 삶 속에 깊숙이 뿌리 내린 실존이라고 말이지요. 싱싱한 사과의 육질 한가운데 죽음을 잉태한 검은 씨앗들이 촘촘히 박혀 있는 것처럼요.
임애월 : 산문의 맨 마지막 구절이 인상적이었어요.
“저는 제 시를 통해 그들 삶의 한 갈피를 ‘계승’합니다. 그들의 죽음을 찬란한 명예로 잇고, 탄식을 새로운 서사로 환치하며, 그들의 ‘부재/재존재’를 제 시에 영감으로 작동시킵니다. 그들의 죽음과 죽음 이후는 제 시에 당당히 진입해 들어와, 망각의 순환을 물리치는 에포스의 질서로 자리 잡습니다. 이렇게 요즘 저는 제 삶에, 제 시에 뜨겁게 입 맞추는 중입니다”
먼저 간 죽음들을 또렷이 기억하며 그들의 죽음을 통해 현재의 삶을 더 뜨겁게 살아내려는 선생님의 의지와 열정이 참 눈부시네요.
김명원 : 저는 시집이건, 소설책이건, 평론서건, 화보집이건, 악보 책이건 제일 먼저 작가의 출생한 연도와 작고한 연도를 확인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지요.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을 읽으면서 제일 먼저 그가 언제 태어나고 언제 이 세상을 하직하였는지를 확인하고는 그가 살다가갔던 BC 384년에서 BC 322년을 상상해 봅니다. 부르노(1548∼1600), 부르하베(1608∼1738), 생 시몽(1760∼1825), 슈베르트(1797년∼1828), 고골(1809∼1852), 카루소(1873∼1921), 릴케(1875∼1926), 프리다 칼로(1907∼1954), 김소월(1902∼1934), 이상(1910∼1937), 윤동주(1917∼1945), 김수영(1921∼1968), 기형도(1960∼1989), 최인호(1945∼2013) 등도 모두요. 세계 각지에서, 그리고 우리나라 각 곳에서 그분들이 활동했던 시대의 환경을 복기하면서, 그들이 남긴 문장들과 업적과 작품을 통해 그들을 재구성해내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이미 죽었으므로 그들 삶의 기억을 재편성해내는 것은 오로지 살아 있는 저의 작업이겠지요. 이 오만하고도 흉측하고 자유로운 상상적 작업은, 그들은 이미 죽은 자들이고, 그들은 나에게 저항이나 반박을 할 수 없다는, 끝내는 저에게 주먹조차 휘두를 수 없다는 침묵의 영역에서 가능합니다. 그들은 제가 어떤 방식으로 편집하는지 모른 채, 더구나 그들의 죽음에 대한 일련의 작업을 원하지 않는다고 하여도, 저는 중단할 수 없고요. 저는 나름대로 이런 맹렬한 죽음들의 기억법이 죽은 이들에 대한, 살아있는 시인으로서의 예의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으니까요.
임애월 : 수많은 죽음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그들의 오래된 뼈를 만져보고 그 속에서 신비하고 새로운 생명력을 찾아내어 그 의미를 ‘계승’하려는 작업인가 봅니다.
김명원 : 요즘 저는 한용운을 기립니다. 에밀리 브론테를 연민합니다. 요즘 저는 니체를 다시 고민합니다. 저는 반 고흐와 산책하고, 박인환과 식사합니다. 요즘 저는 윌리엄 언솔드와 대화하고 키에르케고르에게 타전합니다. 버스정류장에서 길 건너편에 서있는 오장환에게 손을 들고, 백야를 등진 도스토예프스키에게 편지를 씁니다. 보부아르의 거실을 드나들고, 벤야민과 커피를 마십니다. 고정희와 등반하고, 존 레논과 팔씨름을 하고, 고트프리드 벤의 진료실 앞에서 기다리지요.
즉 그들과 끊임없이 소통하고요. 일제강점기시기에 외로이 죽어갔던 윤동주 시인과 별이 빛나는 밤을 올려다보고, 기형도 시인의 가슴 아픈 집안 내력에 귀 기울이고요. 이런 작업들이 그들의 죽음 이후를 제 나름대로 ‘계승’하는 신성한 의식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또한 이런 작업이 제게는 시적 영감으로 작용하고요.
임애월 : 네, 한번 뜻을 세우면 굽히지 않은 도전과 그 열정에 큰 박수를 보냅니다.
재미있게 말하면 외도라고들 하나요. 시 쓰기 말고 앞으로 꼭 해보고 싶으신 다른 일이 혹시 있으신지요?
김명원 : 영화 제작입니다. 유년 시절, 영화가 귀해서 토요명화나 일요명화극장을 티브이에서 보려고 가슴 설레며 기다렸던 추억들이 있어요. 영화를 통해 연애를 배우고, 의리와 신의를 느끼고, 정의와 보다 나은 사회를 꿈꾸게 되었지요. 기회가 된다면 서정이 있으면서도 시회 제반의 문제점을 천착해 내는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어요. 그리고 정년퇴직 후에는 문학을 기본으로 해서 인성의 덕목들을 익히는 프로그램으로 개인 방송을 해보고 싶고요.
임애월 : 영화 제작이요? 정말 욕심도 많으신 아름다운 열정의 소유자십니다.(웃음) 요즘은 유튜브가 대세이긴 합니다. 개인방송국도 많아졌고요. 그 일도 꼭 해내실 거예요. 끝으로 선생님 작품 중에서 가장 애착이 가거나 좋아하시는 시 한 편 소개해 주세요.
김명원 : 간결한 시적 구조를 가진 시인데요. 「아름다운 이유」입니다. 몇몇 방송에서 소개된 이후 독자 분들이 블로그에 많이 올려 주셨더라고요. 생명들의 유한성을 인식하면, 그래서 시간이 머물지 않고 다 가버린다는 것을 알게 되면, 오늘 이 순간이 가장 반짝반짝 눈부시게 아름답다는 것을 인지하게 되지요.
봄이 아름다운 이유는
봄이 가 버리기 때문입니다
여름이 아름다운 까닭은
여름이 가 버리기 때문입니다
가을이 아름다운 이유는
가을도 가 버리기 때문입니다
겨울이 아름다운 까닭은
겨울 역시 가 버리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 사랑이 가 버리기 때문입니다
- 시 「아름다운 이유」 전문
임애월 : 뒷모습이 아름다운 건 차마 전하지 못한 애달픈 마음이 어느 한구석에 남아있기 때문일까요.
긴 시간 동안 어쭙잖은 질문에 답변을 써 주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시절이 다시 좋아지면 한번 만나 뵙도록 하지요. 감사합니다.
김명원 : 네, 그러시지요. 감사합니다.
- 암을 극복하면서 들어선 문학의 길
건강이든 문학이든 일이든
무엇 하나 허투루 지나치지 않고
치밀하고도 섬세하게 기획하고
결국 이루어내는 김명원 시인
외모만큼이나 아름다운 그 열정에
진심으로 큰 박수를 보낸다.
창밖은 이제 완연한 여름이다-
■□ 시인의 자선시
별 세탁소 외 4편
김 명 원
그 집
별나게 부부간 금실 좋고
별 볼 일 있이 다림질만 풀풀 하는
별 세탁소
남편과 아내
얼마나 닮았는지
서글 눈매며 도톰 입이며
썰매를 타듯 허공에서 미끄러지는 손길의 삼박자까지
다리미에 데일까 엉덩이 유난히 흔들며
바람이 신나게 뜀박질 할 때마다
호호, 작은 물결 무늬 이루는
저 어여쁜 연못 좀 보아
하얀 백조 두 마리
삼십 년이나 말없이도
수화手話로만 우리 옷을 말끔히 펴놓는
위 아래 왼쪽 오른쪽 멍들고 뒤틀린 날들의 분노도
깨끗이, 구김살 없애는
마술의 잔잔한 수면 위로
부지런히 오후가 헤엄쳐 가는
저 고요함 좀 보아
증기다리미가 어둠 밀어 올리며
맑은 구름 한 점씩 만들 때마다
누구도 못 다릴 영롱한 것들이
딸 새롬이의 눈에 반짝
비쳐드네, 별들이야
아줌마 분식집
가톨릭의대부속 대전성모병원에 근무하던 때
야근을 마치고 이른 아침마다 밥을 먹던
병원 골목 ‘아줌마 분식집’ 식당에는
나 말고 한 청년이 더 있었는데
항시 라면을 먹는 그는
밑반찬 깍두기나 노란 무는 손도 대지 않았다
수개월 지나 수인사 나눈 사이가 되었을 때
라면국물까지 다 마시면서 깍두기 안 먹는 이유를 묻자
그 청년, 병원보일러실에서 일마치고 전문대 수업 가는데
점심값 아끼려면 아침으로 저녁까지 때워야 하는 상황
무를 먹으면 빨리 소화될까봐
참는 거라고
분식점 밖 3월, 봄바람은 못내 쌀쌀했고
목련꽃봉우리 하얀 입술들은 완강히 닫혀 있었다
후로도 청년과 나는 매일 그 식당에서 아침을 먹었고
청년의 상에는 고집 센 주인에게 소박맞은
깍두기 노란 무 언제나 그대로였다
결혼하면서 병원을 사직하던 날
분식점에 들러 아줌마에게 적당한 돈을 드리며
청년의 아침을 곱빼기로 주십사 부탁했다
삼 년 쯤 흘렀을까
아이를 출산하려 고향집에 들렀다가
라면 맛 그리워 그 식당에 우정 가게 되었는데
반가워하는 주인아줌마
목각 인형 브로치를 내어준다
보일러공 청년은 대학 졸업 후 병원을 떠났고
언젠가 내가 들르면 전해 달라는 선물였다고
가난했지만 가장 빛나는 시절에 먹었던
라면이 왜 맛있었는지 나는
그 날 라면을 시켜 먹으며 알게 되었다
나로 인해 깍두기 안 먹는 까닭을 알게 된
아줌마는 내가 지불한 금액 말고도
청년에게 곱빼기 식사를 연일 대접했을 것
애 낳으려면 많이 먹어둬야 혀,
푸짐한 양은 냄비를 들고 오는 아줌마 앞치마에도
목각 인형 브로치가 슴벅한 청년 눈망울 마냥
글썽이며 반짝이고 있었다
시 빵을 굽다
2급 시조리사 자격증을 수여받은 날,
시 빵을 구워냈다
삼년이라는 맵고 시큼한 시간들이 소요되었고
간질처럼 열병을 앓게 했던 도깨비불이 불쏘시개였으며
간헐적인 말더듬, 흐릿한 시력, 하얀 불면, 죽을 듯
호흡곤란, 그런 것들이 시 빵 재료로 쓰였다
상한 언어들을 가는 체로 걸러낼 때 힘겨웠고
무성한 이미지의 오븐을 예열할 때 불안했고
덜 익은 상징이 될까봐, 바싹 탄 알레고리로
불량식품이 될까봐 노심초사하였다
기다리는 내내 꾹 참지 못하고
열두 번도 더 오븐을 열었다 닫았다
둥근 모양을 네모로 고치고
식상하지 않은 향료를 첨가하고
군더더기 메시지를 잘라내고
조바심치는 비유의 즙을 발라대었다
당도 높은 랑그Langue도 소스로 솔솔 뿌렸다
겨우 빵이 만들어졌다
맛깔스런 시대의 문학을 공급하겠다고
예술철학적 노동자로 무급 봉직 해온 세월의 식탁 앞에
우두커니 앉는다
누구도 함부로 사지 않을 빵빵하지 못한 시 빵!
나 혼자 눈물에 찍어 시식할
두려운 새벽이 밝아온다
엄마라는 호명의 바깥
얇고 낡은 햇살이 그나마 눈머는 정오
열두 살, 밥은 아랫목에 묻어두었고 찌개는 곤로 위에 있다, 엄마는 사소한 문장을 남기고, 된장찌개가 고이 숨긴 적적한 온기마저 지우는 눈발 속으로 혼잣말하는 활엽수처럼 사라져갔다. 발자국도 없이 한 줌 흰 새로 날아갔다.
함께 심었던 대추나무 위로 수십 번의 분노가 봄마다 붉은 비를 뿌렸고, 수백 번 달들이 복면을 한 채 후회하고 체념하는 사이, 수천 번 목 쉰 바람 가루들이 고였다가 흩어져 내렸다. 수만 번 딸꾹질하는 먹구름이 한숨을 몰아갔다.
엄마, 손을 두고 가시지요. 가끔은 자욱한 심해에서 죽지 않을 만큼만 아프게요. 허공은 가르지 못할 만큼 무겁고 단단해서 오늘이 무섭습니다. 버려진 내 두 발로는 저을 수 없는 저 돌의 축사들, 음메 음메 울부짖는 볕뉘에서, 나는 누구인가요, 당신의? 혹은 당신과?
느릿느릿 당신을 탐구합니다. 당신에게서 게워져 나오는 미역과 거북알과 태초의 신음 따위를, 결코 썩지 않을 묘지 밖으로 하늘은 늘 비겁하고 남루해질 뿐인데, 누가 사랑을 만들었을까요. 이제는 그 페이지를 뜯어 신발 모퉁이에 적실까요. 사춘기를 건너 온, 격정기를 돌아 온
쉰 두 살, 내 눈물에 가둔 겨울들이 막 새기 시작합니다.
교보문고行
탐조여행(探鳥旅行)에 필요하다는
조류도감을 사기 위해 교보문고로 가며
호주머니 깊숙이 삼만원을 넣었다
내가 서있는 지하철 첫 칸에서 왼쪽으로
창 밖 나무들이 바람에 쏠리며 발 빠르게 지나는 사이
금정역에서 한 여인이 탔다
눈을 감고 있는 여인은 더듬더듬
노래를 한다, 주님 내 발 붙드사 그 곁에 서게 하소서…
들고 있는 초록색 바구니 하얀 은닢을 만지고 있는
그녀의 손가락만이 느리게 살아 움직이는 삼분간
나는 삼십 번을 망설이다 오천원을 넣었다
이제 조류도감은 살 수 없지만 읽고 싶었던 책 몇 권은 살 수 있어
나는 작게 안도했다
사당역에서 검은 안경의 부부가 탔다
남편은 앞에서 지팡이를 휘두르고
아내는 남편의 허리를 잡고 한 쪽에는
초록색 플라스틱 바구니를 들었다 그들도
노래를 한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우리 주 은혜 놀라워…
나는 망설이지 않고 오천원을 넣었다
아직도 얼마든지 책은 살 수 있어,
나는 다시 오천원 어치 마음이 가벼워졌다
서울역에 거의 다 와 아홉 살쯤 여자아이가
올라탔다, 첫돌도 지나지 않았을 아기를
업은 채 껌을 돌리며 아기가 운다고 아홉 살 아이는
버럭 버럭 욕을 해댔다, 흘러내린 포대기를
올려주는 아주머니에게도 바득바득
화를 냈다, 나는 다시 만원을 꺼냈다
고맙다는 말조차 없는 아이를 위해서가 아니라
내 마음이 만원 어치 가벼워지기 위해서였다
만원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이제 내 마음이 무거워지는 누구도
만나지 말기를 바랬다, 아직도 호주머니에는
만원 어치의 무거움이 남아있으니까
조류도감은 살 수 없지만
내가 사고 싶은 시집은 살 수 있다는 희망의
종각역에서 무사히 내렸을 때
형광등이 반만 켜져 깜박이는 지하보도 끝 편
고단함과 추위에 나부끼는 할아버지와 만났다
포장용 색 테이프를 붙여 입은 해진 바지에
주름살 투성이의 파카 위로 머리칼조차
남겨져 있지 않은 대머리가 눈 시리게 빛났다
나는 벗겨진 신발 옆에 남아 있던 만원을 놓았다
한 달을 벼르던 교보문고 행은 거기에서 끝났다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나는 먼 여행을 마치고
이동하는 철새 떼에 섞여 있었다
아주 아주 가벼워져 날아가고 있었다
김명원 시인
충남 천안 출생. 이화여대 약학과 및
성균관대 대학원 국문학과 졸업(문학박사)
1996년 《詩文學》으로 등단
시집 슬픔이 익어, 투명한 핏줄이 보일 때까지
달빛 손가락, 사랑을 견디다, 오르골 정원
공저 한국 소설 읽기의 열두가지 시각
시인 대담집 시인을 훔치다등 출간
《애지》 《시선》 《시와인식》 《시와상상》
웹진 《시인광장》 등에서 편집위원으로 활동
노천명문학상, 성균문학상, 시와시학상 젊은시인상
한국시인정신작가상, 대전시인협회상, 호서문학상 수상
현재 대전대학교 H-LAC 혜화리버럴아츠칼리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