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5년 이후 그는 툭수상대성이론이 옳다는 걸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수성궤도의 정확한 기술과 함께
그 아이디어의 간결함은 그에게 그 논문의 진실성을 믿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수성 예측과 그다지 신빙성이 없는 한 가지 다른 양의 측정 이외에는
아인슈타인의 중력 설명을 뒷받침할 만한 실제 세계의 증거는 없었다.
분명한 시험 수단은 있었다.
1915년에 아인슈타인은 한 가지 간단한 예측을 했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무거운 물체 옆을 지나가는 빛의 경로가
특정한 양, 예를 들어 태양 표면을 스치고 지나가는 궤도를 따라가는 빛줄기의 경우
약 1.75각초만큼 휘어져야 했다.
그 에측을 훨씬 더 정확하게 하기 위해서
아마도 당대 최고의 이론천문학자인 에딩턴은
뉴턴의 체계 하에서 빛을 구부리는 양을 계산했다.
이에 대한 새로운 주장과 함께 동일한 관측이 나왔다.
그리고 영국의 왕립천문학자인 프랭크 다이슨 경은
1919년 5월 29일에 일어날 개기일식이
아인슈타인의 새로운 중력법칙을 조사할 절호의 기회라고 말했다.
개기일식의 경로는
주로 남대서양을 지나겠지만 몇 차례 육지에 접근할 터였다.
다이슨은 그리니치 왕립천문대가 그 효과를 측정하기 위해
브라질 대륙의 소브랄과 서아프리카 해안의 프린시페라는 작은 섬에 각각 한 팀씩,
두 탐험대를 보낼 것을 제안했다.
그리고 프린시페 팀은
영국의 주요한 아인슈타인 지지자인 아서 에딩턴에게 인솔하게 하기로 결정했다.
에딩턴의 선택은 아마도 이 모든 노력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을 역설해 줄지 모른다.
다이슨이 이 계획을 밀어붙이고
3차 이프로전투라는 불행한 사건이 한창 벌어지고 있던 1917년에,
그것에 필요한 막대한 자금을 모금했던 것은
적국이었던 독일 과학자의 이론을 확인하려는 목적에서였다.
그리고 이 이론은 보통의 이론도 아니었다.
아인슈타인의 중력이론은
영국 과학의 위대한 성인 뉴턴의 이론에 명백히 도전하고 있었다.
1917년은 많은 영국인들이
독일인을 돕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도 반역에 가까운 행위로 간주하던 시기였다.
에딩턴은 전쟁을 반대하는 퀘이커교도였다.
그는 자신의 군 입대를 심리하는 장교들에게
“신이 내게 살인을 하러 나가라고 명하지는 않을 거라고 믿는다”고 말하고,
그런 상황에서도 용감하게
“설사 양심적 거부자들의 병역거부가 승리와 패배의 차이를 만들 수 있다고 해도”
계속 거부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것은 아인슈타인이 좋아하는 타입의 사람이었고
두 사람은 전쟁 뒤에 좋은 친구가 되었지만,
당시 그의 저항은 감옥에 들어가고도 남을 행동이었다.
이런 에딩턴의 연구에 다이슨이 이 과학자를 보호하면서
조심스럽게 민족주의에 호소했다.
그는 에딩턴의 연구는
그의 케임브리지 선배들인 다윈과 볼 그리고 애덤스에 필적한다고 말했다.
에딩턴이 연구를 계속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은 아주 중요했다.
그의 노력들은
“특히 가장 중요한 과학적 연구들은 영국 과학의 전통을 지탱해 주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다이슨은 자신이 ‘대단히 중요한 사건’인
1919년에 일식을 관측할 수 있는 허가를 막 받았다고 알려주었다.
다이슨의 책략은 성공했다.
징병위원회는 때가 되면 에딩턴이 남쪽으로 가서 실제로 일식을 관측한다는 조건으로
그를 풀어주었다.
아인슈타인은 영국이 내린 이례적인 조치의 본질을 이해하고
1919년 11월에 런던의 《더 타임스》에
“그것은 훌륭한 과학자들이 많은 시간과 수고를 들였을 게 분명한
귀국의 위대하고 자랑스런 과학연구 전통과 완전히 합치하는 조치이며,
귀국의 과학연구소들은
전쟁 동안 적국에서 완성되고 출간된 어떤 이론의 함축을 시험하기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고 썼다.
그만큼 일식을 통한 중력의 확인은 과학 세계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계획이었다.
두 팀은 3월에 항해를 시작했고,
에딩턴과 코팅햄은 4월 23일에 프린시페에 도착했다.
5월 16일쯤 사흘 밤 동안 두 과학자는 야간 비교 사진을 찍었다.
에딩턴은 경솔하게도 팀이 잘 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경망스러운 그의 행동에 신이 노했던가,
일식 날인 5월 29일에는 거센 폭풍우가 몰려왔다.
비는 정오에 그쳤지만,
이미 부분일식이 시작된 오후 1시 30분 무렴에야 두 사람은 해를 보았다.
잔뜩 끼어 있던 구름이
어두워지고 있는 해의 얼굴 위에서 차츰 사라지자 에딩턴은 임무를 떠올렸다.
두 사람은 최대한 빨리 작업했다.
그가 쓴 대로 “나는 사진건판을 바꾸느라 정신이 없어서
일식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그저 일식이 시작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한 번,
그리고 도중에 구름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보려고 또 한 번 슬쩍 보았을 뿐이었다.”
구름은 개기일식 초기에는 최악이었지만
개기일식이 거의 끝나가고 있을 즈음엔 충분히 걷혀 있었다.
그 팀은 열여섯 장의 사진을 찍었지만 가망성이 있는 사진은 단 여섯 장뿐이었다.
그 중 네 장은 오직 영국에서만 현상될 수 있었고,
나머지 두 장 가운데 한 장만이 기초적인 현장분석이 가능할 정도였다.
에딩턴이 확인한 것은 1.61각초±0.3으로 측정된 굴절이었다.
이것은 아인슈타인의 이론을 확인하기 위해 주장할
예측값 1.75각초에 충분히 가까운 값이었다.
나중에 그는
그 사진건판에 있는 희미한 별들로부터 그 값을 이끌어냈던 순간이
일생 최고의 순간이었다고 회고했다.
소브랄 팀은 날씨가 더 좋아서 대여섯 장의 유용한 사진을 찍었지만,
분석을 하자 그 상들은 아인슈타인 값의 절반 정도의 굴절만 확실하게 하는 것 같았다.
에딩턴은 오류가 있는 게 틀림없다고 확신했지만,
9월쯤 영국 학회에서 관측된 굴절은 예측된 두 값 사이에 놓여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10월, 에딩턴과 그의 동료들은
소브랄의 첫 번째 기계 결과에 오류를 발생시키는 광학적 결함이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다행히 소브랄의 두 번째 기계가 찍은 네 개의 상들은
일관되게 아인슈타인의 값을 보여주는
프린시페에서 얻은 최상의 자료를 확인시켜주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아인슈타인은 문제가 있는 소브랄의 결과들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자신감을 잃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 여름의 어느 날
파울 오펜하임과 그의 아내 가브리엘라 오펜하임 에라라가 그를 방문했다.
그는 몸이 불편해서 두 친구를 침대에서 맞았다.
담화를 나누는 동안
로렌츠에게서 최종적인 확인은 아니지만 유망한 소식이 담긴 전보가 도착했다.
가브리엘라는 75년도 더 지난 뒤 그 광경을 기억해 냈다.
그는 잠옷차림이었다.
그녀는 그의 양말을 볼 수 있었다.
전보가 도착했다.
아인슈타인이 전보를 개봉하고는 “내가 맞을 줄 알았지”라고 말했다.
그녀는 그가 자신이 옳다고 생각했다거나 믿었다고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럴 줄 알았다’”고 말했다.
그 뒤 10월 말에 영국으로부터 직접 희소식을 들었다.
11월 6일, 런던 웨스트엔드의 한복판에 있는 피카딜리의 본부에서
조지프 존 톰슨이 주재하는 영국 왕립학회가 열렸다.
철학자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는 그 학회에 참석하기 위해
케임브리지로부터 특별한 여행을 했다.
그는 이렇게 썼다.
“긴장된 흥미로 가득한 분위기가 마치 그리스 드라마 같았다.
우리는 최고의 사건인 이 새로운 사실에서 드러나는
운명의 판결을 논평하는 코러스였다.
분위기도 아주 극적인 요소를 갖고 있었다.
전통적인 의식들이 있었다.
그리고 뒤에는 뉴턴의 사진이 걸려 있어서
우리에게 과학적 일반화의 최고봉이 200년도 더 지난 지금에야
처음으로 수정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다.”
화이트헤드 개인의 관심도 대단해서
“위대한 사색의 모험이 마침내 안전하게 상륙했다”고 말했다.
그에게 그 사건이 그렇게도 위엄 있었던 것은
인간이 한 조각의 진리를 발견할 때 찾아오는 궁극적인 확실성, 그 불가피성이었다.
그는 “물리학 법칙들은 운명의 판결”이라고 썼다.
이 운명은 프랭크 다이슨 경에게도 찾아왔으며
그는 일식 관측의 결과를 발표했다.
아인슈타인이 자연에 대해서 말했던 것은 모두 사실이었다.
즉 시간과 공간이 구부러지고 물질과 에너지가 그 곡선 주위로 휘어지며
빛은 시공기하학을 따라간다.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아인슈타인의 우주가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다.
다이슨의 발표와 에딩턴과 소브랄의 주요 관측자인 앤드류 크로멜린의 잇따른 의견에는
전혀 이의가 제기되지 않았다.
약간의 이의가 제기되기도 했지만,
전자를 발견한 인물이자 앞에 있는 뉴턴처럼 왕립학회의 학회장인
위대한 물리학자 J. J. 톰슨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뉴턴 시대 이후 중력이론과 관련해서 얻은 가장 중요한 결과인 이것이
그와 너무나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왕립학회의 모임에서 발표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톰슨은 영국의 일식 관측자들에 의해 확인된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인류 사고의 최고의 업적들 가운데 하나”라고 말했다.
아인슈타인은 1918년에 막스 프랑크의 생일날 연설에서 자신의 감상을 밝혔다.
“갈망해야 할 것은······ 선재하는 조화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며 (함축으로) 프랑크와 그 자신을 몰아갔다.
그는 그러한 아름다움을 어렴풋이 감지하는 것은
특별한 형태의 헌신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이런 종류의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정신상태는
종교적 숭배자나 사랑에 빠진 사람의 정신상태와 유사합니다.
일상의 노력은 신중한 생각이나 프로그램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부터 나옵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343~352쪽)
날마다 좋은 날!!!
- 키작은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