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어느 날 저녁, 일곱 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동네 목욕탕에 갔다가 그 녀석을 만났다. 졸업하고 3년 만에 보는 얼굴이라 그곳이 목욕탕이라는 것도 잊고 반갑게 인사를 나누었다. 녀석은 3년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우리 지역 아이들의 집단 성폭행 사건으로 구속된 B라는 녀석의 친구이기도 했다. 그 때문에 자신도 졸업 직전에 제법 고초를 겪었던 터였다.
목욕탕 탈의실에 있는 커다란 평상에 앉아 참 어색한(?) 차림새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 갑자기 뭘 잘못 먹었는지 옆에 있던 우리 아들이 먹은 걸 게워 내기 시작했다. 주변의 시선이 집중되고 고약한 냄새가 번져 가는데, 녀석이 재빨리 수건들을 뭉치더니 흥건한 토사물들을 치우는 거였다. 몹시 미안하고, 고맙고, 또 뭉클했다. 그래서 나는 녀석을 우리 집으로 데리고 와 맥주를 마시며 늦은 시간까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게 된 것이다.
녀석은 학창 시절엔 ‘잘 나가는 아이’로 분류되는 축이었다. 인물이 좋고, 웃음이 많아서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좋았지만, 교사로서는 다루기 쉽지 않은 아이였다. 학교의 무의미함을 일찍 깨달은 듯 수업 시간엔 늘 엎드려 있었고, 때로 교사들의 차가운 시선에 꼿꼿이 응대하기도 했다. 요리사 자격증을 따겠다는 둥 이런저런 시도를 하는 것 같기도 했지만, 끈기가 없어 늘 좌초하는 것 같았다.
졸업하고 난 뒤 어떻게 살았는지 물어 보았다. 주로 웨이터 일을 했다 한다. 주방 일도 배워보려 했는데 손재주가 없어 잘 안 돼서 레스토랑 일을 하다가, 우연한 계기로 1년가량 룸살롱 웨이터도 했다 한다. 하룻저녁에 팁으로만 십 수만원을 받아 챙기는 생활에 길들여지면서 방탕하게 살기도 했다 한다. 그렇게 허송세월하다가 문득 이렇게 살다가는 망가질 것 같은 두려움이 들어 작년부터 공장 일을 시작해서 지금 1년이 다 돼 간다고 한다.
시급 5천원을 받으며 귀가 찢어질 것 같은 기계음 속에서 수도관 나르는 일을 한다고 한다. 거기서 완전히 새로운 세상을 만났다고 녀석은 말했다. 먹고 사는 일이 이렇게 힘든 것인지 몰랐다고, 머리 희끗한 아저씨가 그 고된 일을 잔업 철야도 마다않으며 매일같이 해내는 걸 보면서 먹고 사는 일이 참 무섭다는 걸 느꼈다고 한다. 그 아저씨한테는 죄송스럽지만, 그게 너무 끔찍해 보여서 지금은 직업 군인이 되려고 시험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한다.
녀석에게 3년 전 그 사건으로 구속된 친구 B의 안부를 물어보았다. 그 사건으로 우리 학교에서 구속된 세 아이 중 하나였던 B와는 나도 나름의 인연이 있다. B는 몇 개월의 소년원 생활을 했고, 그 일이 거의 잊혀진 작년 어느 날 함께 구속된 친구와 함께 학교를 찾아왔던 것이다. 녀석은 교장 선생님께 사죄하기 위해 왔지만, 출장 중이던 교장 선생님을 만나지는 못하고 여러 선생님들 앞에서 고개 숙여 용서를 빌었다. 그리고 현관 앞에서 나와 만났다.
그때는 봄이었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녀석은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나는 밥이라도 한 끼 사 주고 싶었지만, 녀석은 멋쩍은 표정으로 사양했다. 헤어질 무렵 나는 B에게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를 물었고, 녀석은 지금 부사관 시험 준비를 하고 있다 했다. 그 세월이 녀석을 성숙케 한 것은 분명해 보였다. “잘 살아야 한다”라고 나는 온 마음을 담아 빌어주었다.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B와 헤어졌다.
그런데 그날 그 녀석에게 들으니 B는 요즘 치열하기로 유명하다는 부사관 시험에 최종 합격했지만, 그 사건에 연루된 것이 밝혀지는 바람에 결국 합격을 취소당하고 일반병으로 입대하고 말았다 한다.
그 녀석이 집으로 돌아가고, 나는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했다. 녀석들은 여전히 떠돌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 고마움이 물결치기도 했다. 만약 그 녀석들이 앞으로 제 삶을 그럭저럭 책임 질 수 있는 존재로 성장한다면, 이를 위해 학교와 사회는 과연 무엇을 해준 것일까를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내가 만약 그 녀석처럼 유흥가 생활을 했다면, 다시 시급 5천원짜리 공장 노동자 생활로 되돌아올 수 있었을까, 혹은 꼬맹이가 게워 낸 토사물을 선뜻 나서서 치워주는 소박한 인간미를 간직할 수 있었을까 생각해 보았다. 아무래도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내가 만약 B였다면, 출소 후 내게 다가왔을 여러 유혹을 물리치고 시험공부에 몰두할 수는 있었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것도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날 밤, 나는 영화 <파이란>을 생각했다. 오갈 데 없는 바닥으로 떨어진 한 삼류 양아치에게도 질기게 남아 있는 갱생의 갈구를, 그런 그에게 다가온 ‘사랑’으로 인하여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게 되는, 믿을 수 없는 구원의 신비에 대해 생각했다. 일본 정토진종의 개조(開祖) 신란(親鸞, 1173-1262) 스님은 이런 가르침을 남겼다. “선인(善人)도 왕생한다. 하물며 악인(惡人)임에랴….” 예수의 사도 바울로는 “죄가 많은 곳에 은혜도 많다”고 가르쳤다지만, 궁극의 자리에서 선인과 악인에 대한 구분은 무의미한 것인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 녀석과 녀석의 친구 B를 생각하던 그 밤의 상념들은 나를 이상한 자유로움으로 풀어 놓아주었다. 그리고 나는 ‘상처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교사는 늘, 끊임없이, 자신 아닌 누군가를 탓한다. 아이들을 탓하고, 학부모와 학교와 정권을 탓한다. 어느 편이든, 그 진단은 사실 관계에서 별로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옳고 그름이 구획될 수는 없으리라 생각했다. 궁극의 자리에서 바라보면 옳고 그름도, 선인도 악인도 없을 것 같다. 오직 마음 가난한 자와 교만한 자의 구분만이 있을 것 같다. 한국의 교사는 지금 어느 편에 서 있을까.
2.
어느 시절이건 폭력은 교육의 장에서 함께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시대의 아이들에게서 상처에 대한 공감과 연민의 감각이 점점 퇴화해 가는 것은 분명하다. ‘요즘 아이들’은 때로 황소개구리처럼 느껴진다. 감당이 안 되는 아이들의 세계가 분명 우리 앞에 있다. 그러나, 이런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한다. 거기에 아이들 자신의 책임은 어디까지가 될까, 라는.
대체로 비슷하겠지만, 나는 교직 초년 시절 아이들에게 주눅 들어 살았다. 어떻게 저렇게 생각 없이 행동할 수가 있을까, 어찌 저렇게 누구한테나 당당하고 무례할 수가 있을까, 저들이 이 어리숙한 신참 교사를 선생으로 인정하기는 할까, 하는. 그런 자괴감이 나를 참 힘들게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아이들을 조금씩 알게 되면서 나는 아이들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아이들은 아이들이다. 그리고, 내게 이런 믿음이 서서히 자리 잡아 갔다.
아이들에게 선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만의 타고난 천품이요, 악한 것이 있다면 어른들이, 혹은 이 사회가 그들에게 아로새긴 상처라고. 그들은 가냘픈 존재일 뿐이므로 그들에게 물어야 할 죄는 없다고, 믿게 되었다.
아이들은 무수한 상처를 받으며 성장한다. 누구도 상처 없이는 성장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한 존재에게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무언가를 들이댄다면, 그것은 상처를 발생시킬 일체의 가능성을 거세한 무균질의 진공 상자 같은 것이어서는 안 된다. 거기서 양육된 존재는 영혼 없는 물질덩어리일 뿐이며, 적당한 자극에 예측 가능한 크기로 반응하는 모르모트에 불과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존재는 그 불균형과 부조화로 인하여 예측 불가능한 폭탄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교육은 상처를 거세하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응시하고 그것과 대화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결국, 교육이란 상처와 뒤엉켜 그것과 함께 흘러가는 과정일 뿐이지 않은가. 그러나, 지난 시절 한국 교육은 아이들의 상처에 완전히 무심했고, 이제는 이 상처가 폭력으로 분출하는 현실에 대한 공포로 전전긍긍할 따름이다.
3.
1999년 발생한 미국 컬럼바인 고등학교 총기 사고를 다룬 구스 반 산트 감독의 <엘리펀트>라는 영화 이야기를 좀 하려 한다. 마이클 무어 감독의 <볼링 포 컬럼바인>이 그 사고의 배후에 있는 병든 미국 사회를 집요하게 추궁한다면, <엘리펀트>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를 비추고 있다.
이 영화는 컬럼바인 사고로 희생된 12명의 아이와 1명의 교사, 그리고 가해자인 에릭과 딜런(영화 속에서는 ‘알렉스’라는 이름으로 나온다)이 사고 직전 공유했던 각자의 짧은 시간대를 아무런 극적 효과 없이 비춰 준다. 외모 콤플렉스를 지녔고, 처절한 따돌림을 당하지만, 거기에 수긍하는 여학생 미셸,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아버지 때문에 정서가 불안한 존과 그런 존을 한심하게 바라보는 완고한 교장, 존이 빈 강의실에서 혼자 눈물지을 때 잠시 관심을 보이다 다시 내용 없는 동성애 관련 토론에 몰두하는 아카디아, 낯선 사람을 보면 일단 카메라부터 들이대는 고독한 사진광 일라이의 움직임이 펼쳐진다. 그들의 동선은 서로 엇갈리게 마주치기도 한다.
다이어트와 쇼핑, 남자친구 말고는 아무 관심 없는 브리트니와 두 친구들은 식당에서 먹은 음식들을 곧장 화장실에서 토해낸다. 토하는 것보다 살찌는 것이 더 싫다면서. 남자친구 네이든 앞에서는 한없이 청순한 캐리는 다른 여자애가 네이든과 눈만 마주쳐도 복도건 어디서건 두들겨 패 버리는 무서운 여학생이다.
이제 가해자 에릭과 알렉스가 있다. 알렉스는 수업 시간에도 야비한 아이들에게 몰래 얻어맞는 왕따 학생이다. 집으로 돌아온 알렉스는 서툰 솜씨로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를 연주한다. 알렉스의 집으로 비슷한 처지의 친구 에릭이 온다. 좀 이어 택배로 주문했던 최신형 총기가 배달된다. 에릭은 “오늘이 우리가 죽는 날이다”고 말한다. 문득 그들은 키스도 못해보고 죽는 것이 한스러워지고, 그래서 샤워장에서 최후의 키스를 나눈다. 그리고 중무장한 채 학교로 들어가 한 명씩 천천히 쏴 죽인다.
제일 먼저 도서관으로 가서 책을 정리하는 미셸을 쏘고, 상황 파악 못하고 자신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대는 일라이를 쏘고, 미리 작심한 듯 교장 선생을 사냥하듯 몰아서 쏴 죽인다. 알렉스는 토론장에서 총소리를 듣고 뛰쳐나오는 아카디아를 죽이고 화장실로 간다. 거기서 먹은 것을 토해내고 다시 거울 앞에서 화장을 고치는 브리트니와 두 친구를 쏜다. 그리고 식당에서 다시 만난 동료 에릭을 쏘고, 식당 냉동창고에 숨은 커플 네이든과 캐리를 쏜다. 그리고 이 영화는 끝난다.
도대체 조금도 납득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인물 설정과 그들의 동선에는 극적 허구가 개입돼 있지만, 그밖에 모든 것은 사실에 바탕해있다. 그렇다면 이건 대체 뭔가. 컬럼바인 총기 사고는 아주 우발적으로 생겨났지만, 또한 필연적인 사고이기도 하다. 극히 우발적인 원인과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결과의 필연성, 그 머나먼 인과의 거리 속에 이 사건이 담고 있는 비극성이 엎드려 있다. 이 영화에는 더러 따돌림과 같은 비정상적인 상황도 등장하지만 그것들조차 너무나 일상적이고 또한 자연스럽다.
상식의 시선에서는 병리적인 상황들이 ‘자연스러운’ 일상의 일부가 될 때 치유는 불가능해진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아이들끼리, 그리고 교사와 아이들에게서,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살아있는 인간의 감정 교류’는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 아이들은 모두 제 고독과 제 욕망으로만 움직이는 물질덩어리가 되어 있다. 그것은 지옥의 한 풍경이다.
<엘리펀트>는 상처가 거세된 공간 속에서 역설적으로 아이들이 얼마나 자연스럽게 상처를 체득하고 있는지, 그리하여 그 상처가 어떻게 인간을 망가뜨리는지를 처절하게 그려낸다. 이 영화에는 묵시록적인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한국 교육을 염려한다면, <엘리펀트>와 한국 교육의 거리를 잴 수 있어야 한다.
4.
물론 한국 교육은 컬럼바인 고등학교와 많이 다르다. 그들처럼 풍요로운 물적 환경도 없다. 아침부터 밤까지 한정된 좁은 공간에서 부대끼므로 그 끔찍한 개인주의가 자라나는 것도 쉽지 않다. 고등학생이 택배로 최신형 총기를 주문할 수 있을 정도로 자유로운 총기 문화도 없다. 그러나, 아주 비슷한 것이 있다. 컬럼바인 고등학교처럼 한국 교육에서도 아이들의 상처와 그것의 의미는 철저하게 거세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이 모든 병적인 징후들-아이들의 아픔에 대한 감수성과 지성의 퇴화-이 서서히 ‘자연스러운’ 것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있어야 할 것은 없고, 없어져야 할 것은 계속 부풀어 오른다.
한국 교육을 관통하는 가장 뚜렷한 정서적인 기류는 ‘일 없이, 편하게’ 가려는, 안락에 대한 충동이다. 성장기의 모든 시간 속에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폭력과 그로 인한 상처를 응시하고, 대화하고, 어루만져 주고, 그럼으로써 극복할 수 있는 것으로, 견딜만한 것으로 바꾸어 주는 ‘교육의 기술’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아이들은 ‘살기 위해’ 상처를 내면 깊숙한 자리에 묻는다. 그리고 그 상처를 일생토록 짊어지고 다닌다. 상처는 폭력으로 외화하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을 끝없이 방해한다.
결국 한국 교육은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으며, 따라서 한국 사회는 나아지지 않는다. 아이들은 혼자서 저지르고, 혼자 감당하며, 그 속에서 자라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육을 통해 아이들을 키운다’는 거짓말은 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아이들을 사랑한다’는 거짓말도 하지 말아야 한다.
나는 이 글에서 아주 단순한 이야기를 던진 것이다. 아이들의 ‘상처’를 바라보자는 것이다. 그것은 누가 준 것인지, 교사인 내 책임인지, 부모의 책임인지, 이 사회가 부과한 억압의 다른 이름인지, 이도 저도 아니라면 결국 어찌할 수 없는 태생적인 조건인지…. 그리하여 아이들에게 상처 속에서 자라날 ‘기회’를 주자는 것이다. 날마다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그러나 대개 외면해버리고 마는 이 모든 ‘교육적인 상황’을 응시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상처의 의미’는 그 단어조차 낯선 것이 되어 간다. 나는 늘 이런 질문에 시달린다. ‘상처’를 다루지 않고서, 지금 우리가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벌이고 있는 이 모든 일들은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라는.
지금도 이 땅에는 내가 만났던 그 녀석과, 녀석의 친구 B와, 그들의 수없는 친구, 선배, 후배, 동년배들이
알 수 없는 상처를 안고서, 알 수 없는 인생길을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다. (월간 우리교육 2007년 6월호)
첫댓글 선생님의 글이 늘 기다려집니다.~~
선생님, 교육이건 우정이건, 어떤 커뮤니티에서도 상처를 같이 감당하고 들여다 보는, 그런 동행이 필요하다 생각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맘이 아련하니 술 생각이 다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