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92)> 효종 현종 3 - 북벌의 실체(2)
북벌하면 효종과 송시열이고, 효종과 송시열 하면
북벌이라는 등식이 마련된 결정적 근거는 효종과 송시열의 독대 내용입니다.
송시열이 쓴 ‘악대설화’라는 책에는, 효종이 송시열과
독대하며 다음과 같이 북벌의 의지와 전략을 깊이있게 상의했다는 말이 나옵니다.
- 오랑캐(청)는 반드시 망하게 될 형편에 처해
있소. 오랑캐를 물리칠 좋은 기회가 언제 닥쳐올지 모르므로 정예화된 포병 10만을 길러 두었다가 기회를 봐서 저들이 예기치 못했을 때 곧장
산해관으로 쳐들어갈 계획이오.
그러나 송시열이 위와 같은 독대 내용을 공개한 때는 효종 사후 16년이 흐른 숙종 1년 때이고,
송시열은 이즈음 예송논쟁을 잘 못 이끈 죄로 유배되어, 죽은 효종에 대한 충성심을 인정받아야 할 절박한 처지였습니다.
때문에 위와
같은 내용의 독대가 정녕 있었는지 의심이 들 수밖에 없고, 설령 위 내용이 독대 후 바로 기록해 둔 진정한 것이라 하더라도 거기에 송시열이
북벌에 대한 의견을 밝힌 것이 전혀 없는 점과 전회에서 본 사정을 종합해 보면, 송시열을 북벌의 기수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북벌은 송시열과는 관계가 없고, 오로지 효종의 단독 기치가 되고 맙니다.
효종이 북벌을
꾀한다는 건 당시 사대부들 사이에 널리 퍼진 이야기였고, 이로 인해 효종의 북벌 의지를 들었다는 기록이 여러 곳에서 발견되나, 정작 효종실록에는
북벌과 관련된 구체적인 논의나 어떤 명령도 보이지 않습니다.(청에서 알면 골치 아프니까?)
그러면, 효종의 북벌 추진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효종 북벌론의 실체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먼저 조선이 사대부의 나라라는 것과 효종이 가졌던 정통성에 관한 콤플렉스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조선은 사대부의 나라였기에 사대부의 지지를 얻지 못한 군왕의 권력은 사상누각이라 할만
했습니다
그런데 사대부가 목숨과도 같이 숭배하는 주자의 나라 명을 오랑캐인 청나라가 침범했고, 그 오랑캐에 인조는 무릎을 꿇기까지
했습니다.
또한 계통을 중시하는 주자의 나라에서 장자도 아닌 몸으로 왕위에 오른 효종으로서는 사대부의 지지를 얻을 묘책을 강구할
필요성이 더더욱 컸습니다.
이에 효종이 사대부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주자를 숭상하고 오랑캐를 멀리하는 것, 즉 북벌이 필요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결론적으로, 위에서 본 여러 정황을 종합해 보면, 효종이 북벌을 꾀하려 했던 것은 사실이나, 북벌은 효종이
현실적으로 달성하고자 한 목표라기보다는, 북벌을 강조함으로써 사림의 지지를 얻겠다는 정치적 계산과 더불어, 쉽게 침략당하지 않는, 즉 문약에
빠지지 않은 단단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의지가 합쳐진 다목적용 슬로건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담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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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93)> 효종 현종 4 - 예송논쟁
북벌을 기치로 한 나름대로의 개혁군주 효종은 자신의 꿈을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한 채 1659년 5월 4일, 재위 10년 만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습니다.(향년 41세)
효종은 귀 밑에 종기가
심각해 침의 신가귀로부터 침을 맞고 고름을 조금 짜낸 후 이것이 화근이 되어 몇 말이나 되는 엄청난 양의 피를 쏟고 곧 그 충격으로 사망했다고
합니다.
한마디 유언을 남길 겨를도 없는 순식간의 일이었고(타살설이 있으나 근거나 배경이 취약합니다), 침을 놓은 신가귀는 교살형을
당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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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이 죽은 후 선양에서 태어난 아들이 18세의 나이에 왕위를 이으니, 이가 조선
제18대 왕인 현종입니다.
현종 시대를 특징지을 수 있는 키워드 둘은 예송논쟁과 전례가 없을 정도의
흉년입니다.
예송논쟁은 왕이 죽었을 때 예법상 상복을 몇 년 입어야 하는지에 관한 남인과 서인 간의 격렬한 논쟁을
말합니다.
이러한 논쟁은 수년간 이어졌고 그 과정에서 숱한 사람들이 유배되고 더러는 죽곤 하였습니다.
효종이 죽은 후
그 상례(喪禮)로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가 상복을 얼마나 입어야 하는지에 관해 남인과 서인 간에 1차 예송논쟁이 일어났습니다.
이때
서인은 1년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한다는 주장을 했고, 남인은 3년 동안 입어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송시열 등 서인의
주장은 효종이 인조의 둘째아들로서 장자(長子)가 아니므로 1년간 모친이 상복을 입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허목, 윤휴 등
남인의 주장은 효종이 비록 둘째아들이기는 하나 왕위를 계승했기 때문에 장자와 다름이 없으므로 모친이 3년간 상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현종시대의 이러한 1차 예송논쟁에서는 서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자의대비는 1년간 상복을 입었습니다.
2차
예송논쟁은 현종 말년에 효종의 부인이 죽자 다시 자의대비의 복상을 몇 년으로 할 것인가에 관한 논쟁입니다.
이번에는 남인이 1년설을
주장했고, 서인은 대공설(大功, 8월)을 주장했으나 남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졌습니다.
상복을 몇 년 입을 것인가를 두고, 조선을
좌우하는 사대부들이 편을 나누어 몇 해에 걸쳐 논리와 꼬투리 잡기를 총동원해 물고 물리는 싸움을 이어간 것입니다.
담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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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94)> 효종 현종 5 - 환국의 시대 돌입
전회에서 본 예송논쟁은 단순히 복상 문제를 둘러싼 당파의
대립이 아니라, 왕권을 어떻게 위치 지을 것인가에 대한 정치적 입장의 근본적인 차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즉 효종이 둘째 아들이라서
장자의 예를 따를 수 없다는 서인의 견해는 왕권도 일반사대부와 동등하게 취급하려는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신권(臣權)의 강화를 꾀하려는
입장이었고,
반면 비록 효종이 둘째 아들이지만 왕은 장자의 예를 따라야 한다는 남인의 견해는 왕권을 일반사대부의 예와 달리
취급하려는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왕권강화를 통해 신권의 약화를 꾀하려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기준으로는 상복을 몇 년
입는 것을 가지고 온 나라가 몇 해 동안 죽고 살기로 논쟁을 벌이고, 이 문제로 귀양에 사람이 죽기까지 한다는 것이 이해될 리가
없습니다.(부국강병을 위해 이리 오래 논쟁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이것이 그 시대의 본질이고 또 한계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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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의 백성은 방납과 가혹한 군역 등으로 큰 고통을
받았는데, 현종 말년에는 유례를 찾기 힘든 혹독한 기근이 연속해서 찾아왔습니다.
조선 8도에서 아사자가 속출하고 각종 전염병이
들끓었으며 곳곳에 파묻지 못한 주검이 언덕을 이루었고, 비가 오면 냇물에 시체가 떠내려갔으며, 거리에는 버려진 아이들이 넘쳐났다는 기록이 여러
곳에서 발견됩니다.
이때의 실록에 각 도의 감사들이 굶어죽거나 병들어 죽은 사람의 수를 월별로 보고 한 것이 나오는데, 전국의
아사자와 병사자의 합계가 1만 명을 웃도는 달이 많았습니다.(축소 보고에도 불구하고)
현종은 1674년 8월 18일, 15년 재위
기간 동안 별다른 치적도 없이, 또한 죽음에 이른 과정에 대한 기록도 남기지 않은 채 34세의 젊은 나이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남인과 서인의
예송논쟁과 당파싸움,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기근 외에는 특별한 것이 전혀 없는
시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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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이 죽은 후 그의 외아들이 13세의 어린 나이에 보위에 오르니 이
사람이 조선 제19대 임금인 숙종입니다.
조선 후기의 역사를 관통하는 중요한 주제의 하나는 당쟁(黨爭)입니다. 그것은 국정 운영은
물론 사상적 지향과 교유·혼맥 같은 인간관계에 이르는 여러 현상의 향배를 결정한 핵심 요소였습니다.
숙종은 이러한 당쟁의 중심에 서
한평생을 보냈는데, 이러한 숙종의 치세를 요약하는 정치사적 단어는 “환국(換局)”(정치적 국면의 전환)입니다.
환국은 당파의 교체와
정책의 변화, 인명(人命)의 처분 등을 수반했습니다. 장희빈과 관련된 익숙한 주제는 환국의 과정에서 발생한 대표적 사건입니다.
담에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