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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를 통한 사경 서예의 재조명
김 수 천(원광대학교)
Ⅰ. 머리말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사경인구가 갑자기 늘어나고 있다. 이와 같은 현상에 대하여 종교철학자들은 크게 주목하고 있다. 사경의 행위는 고도의 수양성이 수반되는 것으로 입성(入聖)의 의미가 아주 강하다.
또한 괄목할만한 사실은 오늘날 성행하고 있는 사경은 어떤 특정 종교의 신자가 아닐지라도 그것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사경의 시대적인 의미를 반영한 것으로서, 사경행위가 이미 종교적인 행위를 넘어선 교양적인 문화행위로서 자리잡아가고 있음을 말해준다.
논자는 몇 년 전 신라사경과 관련한 논문을 쓰면서 사경의 행위는 일반적인 서사행위와 많은 차이가 있음을 발견했다. 신라에서 제작된 『대광방불화엄경』 발원문에 의하면, 사경은 단순한 글쓰기가 아니라, 오염된 세속을 정리하지 않고서는 접근할 수 없는 아주 성(聖)스러움의 영역이었다.
고려시대로 들어서면서 인쇄술의 발달로 말미암아 사회적으로 사경의 요구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사경은 수양과 공덕의 의미가 더욱 강해진다. 조선시대 이후로는 억불숭유정책으로 인해 사경에 대한 요구가 적어져 퇴행하기 시작했으며, 근현대에 들어서면서는 명맥이 끊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최근 몇 년 사이에 한동안 쇠락했던 사경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전 세계적으로 성행하고 있다. 다만 예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사경은 불교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종교의 경문을 베끼는 방향으로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사경은 단순한 베낌의 행위가아니라, 몸과 마음을 닦는 수양이나 공덕을 쌓는 신앙행위로서의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해왔다. 따라서 오늘날 성행하고 있는 사경을 전통의 연장선상에서 재조명하는 것은 참다운 사경문화의 발전을 위해서 매우 중요하다고 하겠다. 이에 본 논문에서는 먼저 문헌을 중심으로 사경의 역사에 대해 살펴보고, 현재 사경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있는 전문사경인들을 대상으로 인터뷰한 내용을 덧붙여 사경의 현시대적인 가치와 의미를 밝히려고 한다.
Ⅱ. 사경의 역사
사경에 대한 정의는 아직까지 통일되어 있지 않다. 장충식은 “불경을 필사하는 것을 사경(寫經)이라 한다.”1)고 했다. 현재 사경과 관련한 책이나 논문을 보면 대부분 이와 같은 관점으로 출발하고 있다. 이에 반해, 사경연구가 김경호는
“사경(寫經)의 ‘사(寫)’는 베끼다, 옮겨놓다, 본뜨다, 그리다 등의 뜻을 지닌 글자이다. 그리고 일반적인 의미로서의 경(經)은 법(法), 이법(理法), 성인(聖人)이 지은 책(冊)이라는 뜻을 지닌 글자이다. 따라서 사경(寫經)은 성인(聖人)이 지은 책을 옮겨 쓰는 행위를 의미한다”2)
라고 하여 사경의 정의를 불교경전을 베끼는 것에 제한하지 않고, 성인(聖人)이 지은 책을 옮겨 쓰는 것을 모두 사경으로 보고 있다. 사전적인 의미로 보았을 때, 그리고 불교가 아닌 타 종교에도 사경의 역사가 엄연히 존재했었고, 경전을 베끼는 행위가 현존(現存)하고 있는 것을 감안한다면, 김경호의 사경에 대한 정의가 더 설득력이 있는 것으로 보여 진다.
본 장에서 논구되어지는 사경의 역사는 불교사경이다. 따라서 불교사경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여기에서는 언어 사용의 번거러움을 피하기 위해 불교사경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줄여서 사경이라는 이름으로 통일하고자 한다.
불교 성전은 원래 고대 인도의 표준어인 범어(梵語, Sanskrit)로 표기되었다. 사경의 시작은 석가의 언어를 석가의 제자들이 범어로 기록했던 때로부터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그러므로 불교의 전래를 목적으로 종려 껍질에 베껴 쓴 패엽경(貝葉經)은 최초의 사경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입장에서 사경의 연원을 찾는다면 중국으로부터 불교가 수입된 이후로 보아야 할 것이다. 범어(梵語, Sanskrit)로 기록되었던 것이 불교의 중국유입과 더불어 역경사업이 활발해졌고, 이와 더불어 포교를 목적으로 하는 경전의 필사에 매진하게 되었다고 본다. 일반적으로 불교의 중국 전래는 후한(後漢) 명제(明帝)의 영평(永平) 10년 서역을 거쳐 중인도의 승려 섭마등(攝摩騰) 축법란(竺法蘭)이 불설 42권의 장경(藏經)을 가져온 데서 시작되었다고 한다.3)
중국에서의 사경은 후한(後漢) 말년으로부터 시작된다. 한의 환제, 영제 때에 안세고, 지루가참 등 10여 명의 서역(西域) 고승들이 낙양(洛陽)에서 전문적으로 역경(譯經)사업을 하였다. 이같은 역경사업은 양진, 남북조, 수, 당을 거쳐 송대에까지 1,000여 년간 지속된다.
이러한 중국 사경의 전개과정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시기는 수(隋)나라이다. 수(隋) 문제(文帝)는 사경생(寫經生)을 모집하여 3만여 권의 서적(書籍)을 필사하는 동시에 36부의 불경을 서사하여 모두 13만 권이 넘는 책을 만들었다. 이렇게 황실(皇室)의 보호아래 많은 대도읍에서는 사원 안에 사경소(寫經所)를 두어 사경을 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민간에서 불교를 유통시켜 사경이 육경(六經)의 수보다 수십 배 많게 된다. 이 무렵 동일 부류의 불경이 천 권에서 만 권까지 필사되었다 하니 가히 그 수량과 공력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후 사경은 당(唐) 태종(太宗)에 이르러 다시 중흥기를 맞이하게 되고, 측천무후(則天武后)시대에 이르러서도 부흥하게 된다. 특히 당 태종은 사경에 많은 정성을 기울였는데, 한 가지 특기할만한 점은 사경의 사성에 승려를 비롯한 명필 등을 대거 참여시켰다는 점이다. 정관(貞觀) 9년(635)에 칙서를 내려 대총지사(大總持寺)의 승려 지통(智通), 비서랑 저수량(褚遂良)에게 원내(苑內)에서 일체경(一切經)을 초사(抄寫)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주목된다. 여기서 저수량은 초당(初唐) 3대가로 일컬어지는 대표적인 서예가중의 한 사람이다.
사경서체의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서예가는 동진(東晋)의 왕희지, 남조(南朝)의 사령운, 수(隋)의 지영, 당(唐)의 구양순, 우세남, 저수량, 유공권 등을 들 수 있는데, 사경생들은 이들의 서법을 연마한 후에 뛰어난 예술성을 지닌 사경 서체를 탄생시켰던 것이다.4)
송대 이후는 사경이 쇠퇴한다. 그 이유는 송대에 이르러 인쇄술의 광범위한 발달과 보급으로 인해 필사를 통한 사경의 광선유포(廣宣流布)의 기능이 인쇄술로 넘어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경은 광선유포의 기능을 상실함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지속된다. 왜냐하면 광선유포의 기능을 인쇄술로 넘겨준 후에는 공덕(功德)과 수행(修行)의 개념이 강조되어 공덕과 수행을 쌓기 위한 방편으로 널리 행하여졌기 때문이다.5)
우리나라에서의 사경의 시원은 전하는 기록으로 보아 삼국시대에 이미 성행하였을 것이나 역사적으로 수많은 내우외환으로 인해 이 시대의 확실한 사경이 한 점도 없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6)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 상편의 기록으로 보아 그 하한 연대를 불교 전래 초기인 4C 후반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사경유물이 안타깝게도 이루어진 사경 유물이 현존하지 않아 더 이상의 자세한 내용은 알 수가 없다.7)
실물에 의거한 사경의 역사는 통일신라시대로부터 거론될 수 있다. 목판본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704~751)은 세계최고의 인쇄물로서, 한국 전통서예의 토속미와 변화미를 공부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8)
이 시기의 사경으로는 백지에 먹으로 쓴 『대방광불화엄경』2축(軸)이 전래되고 있다. 이 사경 뒷부분에는 발원문이 실려 있는데, 이 자료에 의거하여 본 경문이 경덕왕 13년(754) 8월 1일에 시작하여 다음해인 755년 2월 4일까지 6개월 14일이 걸려 완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로서 『대방광불화엄경』은 현존하는 국내 최고의 사경으로 위치를 굳히게 되었다.9) 또한 이는 그간 유례가 없던 신라시대의 유일한 육필사경(肉筆寫經)이란 점에서 그 가치가 막중하다.10)
고려시대에는 통일신라 이래로 전해지던 사경의 전통이 계승되면서 더욱 다양한 발전을 하게 된다. 고려시대 사경은 귀족 불교라는 고려시대 신앙 성격이 말해주듯이 국왕과 귀족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사경은 백지에 먹으로 쓴 것보다 금(金), 은(銀)을 사용한 금자경(金字經)과 은자경(銀字經)이 성행하였다. 고려 초기에는 도읍의 주요 사찰을 중심으로 사경하였으나 무신이 집권한 중기 이후부터는 국가에서 설치한 사경원(寫經院)에서 했다.11)
충렬왕(忠烈王) 이후에는 금 ․ 은자사경 사성의 기법이 절정기에 이르게 된다. 그리하여 수차례에 걸쳐 많게는 1회에 100여명의 사경승이 원(元)나라에 파견되어 중국의 금 ․ 은자 대장경을 사성해주고 돌아오기도 하고, 때로는 원나라에서 고려에 감독관을 보내 금자대장경(金字大藏經)을 사성하여 가져가지도 했다. 그리고 수회에 걸쳐 금 ․ 은자사경의 바탕지인 고려청지(高麗靑紙 :紺紙)를 원나라에서 요구하였다. 한 번은 원나라에서 환자(宦者 : 내시) 방신우(方信佑)를 보내 왕이 사경승(寫經僧)과 경필사(經筆師 : 在家佛子) 300명에게 궁(宮)을 희사하여 만든 사찰인 민천사(旻天寺)12)에 모아 금자대장경을 사성하도록 하였다 하니 우리나라 금 ․ 은자 장엄경 사경 사성의 수준이 어느 정도였으며, 국가적인 차원의 지원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늠하는 데에 별 무리가 없다고 하겠다.13)
조선시대의 사경은 쇠퇴기로 본다. 조선시대 초기의 불교는 태조 등 몇몇 임금과 대비나 왕비 등 왕실의 비호 아래에서 맥은 이어 왔으나 배불(排佛)이라는 정치적인 소용돌이 속에서 종파의 통폐합과 사찰의 폐지와 더불어 재산을 몰수하는 등 고려시대 불교계의 면목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이 시대의 사경은 고려시대에 비해서 자연히 그 양이나 질에 있어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전래되고 있는 사경의 수는 얼마 되지 않으며 그 기록마저도 부진한 편이다.14)
Ⅲ. 사경의 제작정신
사경은 일반적인 서예와 비교할 때 제작태도가 다르다. 예로부터 사경에서 행하여졌던 일자일배(一字一拜), 일자삼배(一字三拜), 일행일배(一行一拜), 일행삼배(一行三拜) 는 다른 서사행위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사경제작의 특수성을 보여주는 실례라 하겠다.
사경은 부처님의 말씀을 새기고 익혀 실천하는 데 그 궁극적인 목적이 있다. 따라서 사경의 과정은 바로 수행의 과정이 된다. 고려에서는 사경을 공덕경(功德經)이라고 불렀다. 사경을 하면 무량공덕이 쌓인다는 이야기는 불교 경전에 기록되어 있다. 묘법연화경 법사공덕품에 보면
“만일 선남자 선여인이 이 법화경을 받아 지니고 읽거나 외우거나 또 해설하거나 베껴쓰면 이 사람은 마땅히 팔백의 눈의 공덕과 천이백의 귀의 공덕과 팔백의 코의 공덕과 천 이백의 혀의 공덕과 팔백의 몸의 공덕과 천이백의 뜻의 공덕을 얻으리라. 이 공덕으로 육근을 장엄하여 다 청정하게 되리라. 이 선남자․ 선여인은 부모로부터 받은 청정한 육안으로 삼천대천세계의 안팎에 있는 산과 숲과 강과 바다를 보게 되며 아래로는 아비지옥에서 위로는 유정천(有頂天)에 이르기까지 다 보게 되리라. 또한 그 가운데 있는 일체 중생을 보며 또 업의 인연과 과보로 나는 곳을 다 보고 다 알리라.”15)
라고 하여 사경의 수행적 효능에 대하여 자세하게 적고 있다. 묘법연화경 보현보살권발품에는 “다만 베껴 쓰기만 하여도 이 사람은 명이 다하면 마땅히 도리천(忉利天)에 태어난다”16)고 하였고, “이 법화경을 수지하고 독송하여 바르게 생각하고 닦고 익혀 베껴쓰는 이가 있으면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곧 석가모니불을 친견하고 부처님 입으로부터 이 경전을 듣는 것과 같으니라”17)고 하였다. 묘법연화경 약왕보살본사품에는 “어떤 사람이 이 법화경을 듣고, 만약 스스로 쓰거나 남에게 쓰게 하면 얻는 바 공덕은 부처님 지혜로 다소를 헤아릴지라도 그 끝을 모르리라”18)고 기록되어 있다. 금강경 지경공덕분에는 “만약 또한 어떤 사람이 이 경전을 듣고서 환희심을 낸다면 그 복이 앞의 복 보다 크다 할 것이, 그런데 하물며 이 경을 쓰고 받아 지니고 읽고 외워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 설명한다면 그 공덕이 얼마나 크겠느냐”라는 경문이 있다.19) 또, 지장왕보살본원경 여래찬탄품에는 “더욱이 선남자 선여인이 스스로 이 경을 쓰고 혹은 남에게 쓰는 것을 가르쳐주고, 혹은 스스로 보살 형상을 조각하고 그리고, 심지어 남에게 조각과 그림을 가르치면 이들이 받는 과보는 반드시 큰 이익을 얻는다”20)고 기록되어 있다. 상기한 바와 같이 불교경전에는 사경의 무량공덕을 이야기하고 있다.
불교 성전의 필사는 불교가 수입되던 초기에는 불교를 알기 위한 단순 전사(轉寫)의 차원으로 시작하였으나 사찰이 세워지고 교단(敎團)이 성립되면서부터는 신앙적인 의미가 부여되었다. 사경이 부처님의 말씀을 옮기는 행위이기 때문에 흐트러짐이 없는 엄격한 신앙 의식이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신앙 의식은 개개인의 수행 자세를 가다듬고 부처님에 대한 실체감 충족과 신앙인으로서의 자신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불경은 불(佛), 법(法), 승(僧) 삼보(三寶) 가운데 가장 중심 되는 법보(法寶)로서 법신 사리이고 법화경에서는 불경을 전신사리(全身舍利)와 동일하게 설하고 있다. 이와 같이 불경은 불상이나 탑 이상의 신앙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사경 제작에는 불상이나 탑의 조성 못지않은 종교적인 의식이 따랐다.21)
사경의 제작 과정에 대해서는 신라 백지묵서 『대방광불화엄경』발원문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사경을 하는 법은 닥나무 뿌리에 향수를 뿌려 자라게 하고, 닥나무가 다 자란 연후에는 닥나무 껍질을 벗기는 사람, 종이를 만드는 사람, 경문(經文)을 쓰는 사람, 표구하는 사람, 불보살을 그릴 때 심부름하는 사람들은 보살계를 받고 불가에서 먹는 밥을 먹어야 한다. 이상의 사람들은 만약 대소변을 보거나, 잠을 자거나, 밥을 먹었을 때는 향수로 목욕을 해야만 한다.
사경을 쓸 처소에 들어가서 사경을 할 때는 안을 깨끗이 하고, 깨끗한 바지 ․ 수의(水衣) ․ 비의(臂衣)를 입고, 천관(天冠)을 써서 장엄할 것이고, 두 청의동자가 관정침을 받들고, 한 사람은 기악인 네 사람을 따르면서 음악을 연주하고, 다른 한 사람은 향수를 뿌리고, 또 한 사람은 꽃을 받들고 가면서 길에 뿌리고, 또 한 법사는 향로를 받들고 인도하고, 또 한 법사는 범패를 부르며 인도한다.
모든 경문 쓰는 스님들은 각기 향과 꽃을 들고 사경소에 도착하면 삼귀의과 삼반정례를 올려서 불보살 ․화엄경에 공양한 다음 올라가 앉아서 경문을 쓴다.
경심을 만들 때도 이와 같이 하고, 불보살상을 그릴 때는 청의동자와 음악 하는 사람은 빼고 몸을 깨끗이 한 사람만 함께 한다. 경심 안에는 사리 1매를 넣는다.22)”
위에서 보듯이, 사경의 제작은 경문을 쓰는 사경사 한 사람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들의 지극정성(至極精誠)이 결집되어 이루어지는 성(聖)스러운 행위였다. 신라의 사경사들은 사경의 제작에 앞서 심신의 재계(齋戒)와 수양(修養)에 철저했다. 사경사 뿐만 아니라, 종이를 만드는 사람, 표구하는 사람, 심부름하는 사람 등 사경제작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은 몸과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집단재계의식에 참여했고, 심지어 종이의 재료로 쓰여 질 닥나무에게도 향수를 뿌려 정성을 들였다. 이와 같은 사경제작의 엄격하고 장엄한 진행절차는 그에 참가하는 모든 사람들을 성(聖)의 세계로 안내했을 것이다.
위의 자료는 선인들이 사경을 대하는 신앙적 태도를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아쉽게도 사경을 대하는 정신적 측면을 기록한 자료는 거의 전하고 있지 않다.
Ⅳ. 인터뷰 논증
앞에서 밝혔듯이 사경은 조선시대 때 억불숭유정책으로 쇠퇴 일로에 놓이게 된다. 이어서 근현대에 이르러서는 사경이 무엇인지를 잘 모를 정도로 전통이 단절되었다. 따라서, 오늘날에는 사경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어도 그것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잘 모르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사경의 제작기법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사례들을 기록한 문헌이 아주 적다. 또한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조차도 전수가 잘 되지 않고 있어서 사경을 연구하고자하는 사람들을 어렵게 하고 있다. 이러한 힘든 상황 속에서도 열심히 사경의 황무지를 개척해나간 사람들이 있다. 이들을 직접 방문하여 인터뷰를 하였다. 인터뷰를 추진한 이유는 전통적인 사경기법에 대한 맥락이 이들에 의하여 다시 전승되어지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1. 김종우 선생과의 인터뷰 일시 : 2005년 1월 10일
장소 : 대전 둔산동 햇님 아파트 자택
* 사경을 하게 된 동기 : 오랫동안 승려생활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불화와 사경을 하는 것이 신앙생활과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불화와 사경을 선택했다.
* 사경의 방법 : 묘법연화경을 소재로 감지에 금니로 그린 변상도는 고려시대 때 있었다고 전해져오지만, 현재는 부분적으로 전하고 있다. 그래서, 당대(唐代)에 제작된 목각본 묘법연화경 변상도를 구입하여 무늬, 글씨, 제기를 우리의 형식으로 재구성하여 보았다. 매일 매일 기도하는 마음으로 썼다. 모두 7폭인데, 한 폭마다 변상도를 그리고 만자를 썼다. 너무나 글씨가 작기 때문에 피로감을 덜기 위하여 작품위에 돋보기를 대고 써야했다. 5㎜의 사경 만 자를 쓰는 것은 참으로 지난한 작업이었다. 사경을 쓸 때 글씨 한 자 한 자를 사람으로 생각하고 썼다. 이렇게 작은 글씨가 개별적으로 있으면 아무런 쓸모가 없다. 그러나 밀알이 모여서 태산을 이루듯이 조그만 글씨가 그곳에 있음으로서 작품이 된다. 잘난 사람 못난 사람 할 것 없이 5㎜의 글자처럼 사람들이 모두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지기를 바라면서 총 7만 자를 완성해나갔다. 4-5개월이 지난 후 눈병이 나기 시작했다. 눈병이 나 이유는 눈을 깜박이지 않고 글씨를 쓰니 눈의 수분이 말라 나타나는 증상이었다. 의사는 눈을 깜박여야 병이 낳는다고 했다. 그러나 작업의 성질상 의사의 말을 따를 수 없었다. 평균 2주일에 한번 씩 안과에 가서 눈 치료를 받으면서 작품을 완성할 수 있었다. 법화경을 읽으면서 박물관에 있는 법화경 변상도의 내용이 경전과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잘못된 도상을 바로잡으려고 원문 독해를 여러 번 했다. 또한 중국의 변상도를 참고하면서 고려 변상도의 도상이 잘못된 것을 바로잡았다. 중국의 변상도가 더 경전의 내용에 가까웠다. 도상의 내용이 중국의 것과 달라진 이유는 고려인들이 경전내용을 분명히 숙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렸기 때문으로 추측한다.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창조적인 변용이 가능한 것은 되도록 보완하면서 그리려고 했다. 그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임했기 때문에 법화경 밑그림을 그리는 데만 3,4개월이 걸렸다.
* 사경할 때의 마음가짐과 신앙체험 :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목적으로 사경을 한 것이 아니다. 신앙적인 의미로 사경을 했다. 경구를 쓰다가 몇 글자가 갑자기 들어올 때가 있다. 누가 뭐라 한 것도 아닌데, 문득 깨달을 때가 있다. 신심이 없으면 사경을 못한다. 사경을 쓰다 남은 종이 조각 하나라도 버리지 않았고, 버릴 일이 있으면 절에 가서 태웠다. 이것은 누가 시켜서 한 일이 아니다. 사경하기 전에는 손을 깨끗이 씻었고, 몇 십분 간 경전을 읽고 마음이 떠나지 않도록 했다. 마음수행이라 생각하고 사경을 했다. 몇 년 전에 법화경서사보탑도를 제작했다. 이것은 일본에 남아있는 고려금니서사법화경보탑도를 재현한 작품이다. 높이 380㎝ 폭 106㎝의 대작에 2만 6천자의 글자로 탑을 조성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작업인지는 날이 갈수록 몸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금니로 글씨를 쓰는 것은 먹으로 쓰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아교가 강하거나 약하면 획이 끊어지므로 금의 온도와 농도가 적당해야 한다. 글씨가 너무 작기 때문에 돋보기를 놓고 사경을 했다. 바닥에 펴놓고 엎드려서 불편한 자세로 쓰기 때문에 금방 허리에 무리가 왔다. 4개월이 지나니 전신이 쑤시고 아팠다. 그래서 아픔 몸을 이끌고 가끔 병원에 가서 주사도 맞고 물리치료도 받았다. 이와 같은 어려움 속에서도 멈추지 않은 것은 ‘아무리 어렵더라도 사람이 한 것은 할 수 있다’는 신념이 작용한 것 같다. 비록 작품제작 기간 동안 몸이 성한 곳이 없을 정도로 쑤시고 아팠지만, 경전 한 자 한 자를 작품에 써나가는 기쁨은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법희(法喜) 그 자체였다. 너무나 오랜 기간 동안 인내력을 요하는 작품이므로 잘 쓰고 못 쓰고를 떠나서 전체적으로 완전한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만을 생각했다. 드디어 작품을 완성하는 날이 왔다. 2001년 여름에 시작하여 2002년 가을까지 무려 13개월(아침 9시부터 밤 12시까지 작품제작에 몰두)동안 오직 작품을 온전히 완성해야 한다는 일념이 현실로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완성 후 ‘이제 무언가를 이루었다’는 성취감을 맛보았다. 수상자 발표가 있던 날, 새처럼 팔을 활짝 펴고 하늘을 날다가 땅에 사뿐히 내려오는 꿈을 꾸었다. 그 날 아침 대한민국전승공예대전에 대상으로 당선됐다는 전화가 왔다.
* 사경과 심신건강 : 중압감이 생기면 병이 생긴다. 신앙심으로 쓰면 마음이 즐겁다. 체력에 있어서는 안배를 해야 한다. 책상에 앉아서 하루 종일 사경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 사경을 안 한 사람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 : “사구게(四句揭)로 상대방을 깨우치게 한다면 그보다 더한 일이 없다”라는 말이 있다. 연필이나 펜으로 사경을 해도 감화를 줄 수 있다. 틈나는 대로 사경도 하고 불화도 그리고 싶다. 창작과 전통을 조화롭게 하여 작품을 제작하고 싶다. 이 시대의 부처님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까를 생각한다. 부처님께서 어느 곳에서 어떤 모습으로 우리를 보고 계실까를 생각한다.
2. 김시운 선생과의 인터뷰 일시 : 2006년 7월 20일
장소 : 청주 초암서예학원
동행자 : 원광대학교 동양학대학원 정용남 학생
* 사경을 하게 된 동기 : 17년 동안 출품하여 입선을 6번 했다. 한 번 더 입선하면 졸업인데, 계속 떨어졌다. 2001년 마지막이다 라고 생각하고 출품했다. 다음에 내면 성을 간다는 결심을 했다. 그해에 소자부(小字部)가 신설되었다. 그래서 법화경 방편품 1,800자 금니사경을 썼다. 되든 안 되든 끝이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이 우수상이 되었다. 93년 가을 갑자기 “서예가 이렇게 가서는 안 된다”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얼마 후 신비스러운 꿈을 꾸었다. 산행(山行)을 하는데, 하얀 옷을 입은 노인께서 무엇을 잔득 안고 다가오더니 그 물건을 나에게 던졌다. “너는 이것을 써야 한다.” 그 물건을 받자마자 쓰러지면서 잠을 깼다. 그 다음날 속리산 문장대 경업대에서 약수물을 한잔 마시고 근처에 있는 관음암(觀音庵)에 들렀다. 계획 없이 발길 닿는 대로 우연히 들린 곳이었다. 거기에는 노승과 행자가 있었다. 노승이 나를 바라보며 “물은 잘 드셨는지요. 이렇게 먼 길 오셨으니 선물 하나 드리겠습니다”라고 하면서 책 한권을 주었다. 한지로 된 금강경 육필사경 선장본이었다. 몇 사람과 같이 갔는데, 나에게 인연이 닿은 것 같다. 글씨가 너무나 좋았다. 먹으로 쓴 선필(禪筆)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조그마한 글씨를 쓸 수 있을까? 집에 와서 시도해 보았다. 잘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계속 시도해보았다.
* 사경의 방법 : 어느 날 전시장에서 여초선생님의 금강경 사경을 볼 기회가 있었다. 깨알만한 글씨를 바라보면서 환희심이 일어났다. 그 후 동방아카데미에 입학하여 금강경 강의를 2년 동안 들으면서 서예의 세계를 이해하기 시작했고, 이어서 3년 동안 변상도를 실기위주로 배웠다. 금니 사경을 하다보면 고민에 부딪칠 때가 많다. 사경 쓰는 방법이 전승이 되지 않아서 배우는데 고생이 많았다. 재료사용법에 대해 아는 사람도 좀처럼 전수를 해주려고 하지 않는다. 금의 발색법에 대해 고민한 적이 있다. 예를 들어 핵심부분을 반짝반짝하게 할 경우가 있는데, 이것을 가르쳐주질 않았다. 알고 보니 아주 쉬웠다. 가장 문제되는 것은 아교처리방법이다. 그에 대해서는 책으로 나와 있는 것도 없고, 기법전수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아 홀로 터득해야만 했다. 세월이 한참 지난 후에 금니는 어교(魚膠)를 사용한다는 것을 알았다. 어교는 민어부레로 만든다. 민어는 8,9월에 잡아 처리한다. 민어부레 10개를 구하고는 신이 났다. 중탕에 중탕을 거듭하여 어교를 만드는데, 비린내가 지독하여 동네에서 쫓겨나는 줄 알았다. 나중에 냄새를 제거하는 방법을 알았다. 방법은 아주 쉬웠다. 어떤 아줌마에게 여쭈니 생강즙을 넣어보라고 했다. 그것을 섞어서 끊였더니 냄새도 안 나고 접착력도 좋았다. 감동의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2,3년의 연구 끝에 얻어진 것이었다. 아시는 분들이 그 방법을 공개했더라면 이러한 고생은 안했을 것이다. 지금 은니의 재료사용에 대하여 고민 중이다. 은니는 공기가 노출되면 색이 변한다. 대만에서 금강경에 관련된 자료를 구해다가 작품을 했다. 금니로 금강경 원문을 쓰고, 그에 대한 해석을 한글로 쓰고, 변상도를 그렸다. 세로 32센티 가로 48미터의 대작이다. 2년 3개월 걸렸다. 옛날에는 이러한 작품형식을 한 것이 없었다. 새로운 시도의 시작이다.
* 사경할 때의 마음가짐과 신앙체험 : 저녁 9시 이전에 자고 새벽 3시 반에 일어난다. 일어나 목욕재계를 하고 108배를 한다. 작품을 하기 전에 부처님께 예의를 표한다. 9번 절하고 작품을 한다. 초저녁에는 글씨를 안 쓴다. 그때는 기력이 쇠진해진다. 큰 붓을 가지고 서예작품을 하다보면 마음이 붕 뜰 때가 많다. 남에게 잘 보이려고 하니 글씨를 꾸미게 되고 가식이 붙기 때문이다. 사경을 접하면, 오로지 부처님 말씀 내용에 따라 진심과 신심으로 쓰게 된다. 한 획 한 자를 쓸 때마다 환희심이 일어난다. 몇 달 몇 년이 걸려 쓴 사경은 법희(法喜)를 느끼게 한다. 사경을 쓸 때는 필이 기분 좋게 움직인다. TV를 안 본다. 주로 뉴스만 보는데, 그것도 제대로 안 본다. 꿈을 잘 꾸지 않는다. 사경을 하다보면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된다. 재료가 떨어지면 그것을 구할 만큼 돈이 들어온다. 더 이상 들어오는 법은 없다.
* 사경과 심신건강 : 5시쯤에 부모산에 오른다. 2시간 동안 산에서 운동을 하고 7시에 내려온다. 사경을 하려면 체력이 유지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주로 손과 눈 운동을 한다. 초록빛을 한 풀, 나뭇잎을 보면서 상하좌우로 눈 운동을 한다. 눈이 맑아진다. 평상시 안경 쓰고 신문을 못 볼 정도로 눈이 안 좋다. 금방 눈물이 나온다. 사경을 할 때는 6시간을 써도 눈이 피로하지 않고, 더 맑아지는 느낌을 받는다. 정말 신비스럽다. 원융스님은 토굴에서 13년 동안 60만자에 가까운 화엄경 전문을 쓰셨다. 그는 사경을 하다가 한때 눈이 멀었다. 포기했다가 몇 개월 후에 눈이 다시 살아났다. 안경을 쓰지 않고 필사를 했다. 그분께서는 얼마 전 예술의 전당에서 전시를 가지셨다. 사경을 한 후 가족들로부터 집안이 더 편해졌다는 말을 듣는다. 술도 적게 마신다. 그리고, 제자들로부터 전보다 얼굴에 윤기(潤氣)가 있어 보이고 빛이 난다는 말을 듣는다.
* 사경을 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 : 후학에게 사경하는 방법을 전달하고 싶다. 나 혼자 알고 뭍고 가면 안 된다는 생각에서. 뼈가 가루되더라도 후학에게 주고가고 싶다. 앞으로 죽기 전에 화엄경 80권을 포함해서 다 쓰는 것이 원이다.
3. 이윤용 선생과의 인터뷰 일시 : 2006년 8월 24일
장소 : 대전 태평동 삼부아파트 논자의 자택
* 사경을 하게 된 동기 :
절에 다니면서 평소에 글씨를 쓰는 사람으로서의 원이 있었다. 관세음보살보문품과 반야심경 변상도를 금으로 그리고, 금으로 쓰면 얼마나 좋을까를 생각했다. 그 후 80년대 후반에 대전에 있는 절에서 부처님 복장을 한다고 하여 금강경을 써주었다. 93년 큰아이 결혼에 함을 보낼 때, 관세음보살 보문품을 제작하여 그것을 오동나무 상자에 예복(절할 때 입는 홍치마와 파란 저고리)과 함께 보냈다.
* 사경의 방법 : 사경을 한번 시작하면 8시간 정도했다. 낮에는 사경을 하고, 밤에는 참선을 했다. 오랫동안 서예를 했으므로 사경을 하는 데는 별로 어려움이 없었다. 한국의 전통사경에서는 주로 해서사경이 전해져온다. 그러나, 본인은 그동안 익혔던 한문 전서, 예서, 해서, 행서, 초서와 한글 고체, 궁체를 모두 사경에 활용해보았다. 종이 또한 제약을 받지 않고 전통적으로 사경에 쓰여졌던 종이와 사경에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종이를 최대한 다양하게 활용하려고 했다. 한편으로는 고법을 따르면서 또 한편으로는 옛것에 의존하지 않고 창조적인 방법을 택했다. 예를 들어, 무구정광대다라니경에 있어서는 규격과 전체적인 양식에 있어 대부분 원본을 따랐지만, 종이의 색깔과 서풍을 달리하여 보았다. 그리고 묵서를 따르지 않고 금니로 썼다. 대방광불화엄경입부사의해탈경계보현행원품게송의 변상도는 도상을 따르되, 의습과 문양과 서체를 완전히 전통기법과 다르게 표현하였다.
* 사경할 때의 마음가짐과 신앙체험 : 절보다는 참선을 주로 했다. 하루에 2시간 정도를 잔 것 같다. 사경을 하다보면 온 정신이 글씨에 간다. 저녁에는 불빛 때문에 못하기 때문에 참선을 했다. 의식은 온통 감사합니다로 가득 찼고, 모든 것에 감사했다. 풀포기, 먼지, 돌멩이 하나까지 감사하지 않은 게 없었다. 설거지를 하면서, 밥 먹으면서, 글씨 쓰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울었다. 금니로 지장경을 쓸 때는 눈물이 종위위에 떨어져서 여러 장을 버렸다. 감사한 생각이 온몸을 애워싸고 있었다. 호흡하고 살아있다는 것에 대한 감사, 글 쓰고 있는 것에 대한 감사, 부처경전 쓰는 것에 대한 감사함을 표현했다. 2시간 잤다. 부처님께서 잠을 안 재우시는 구나라고 생각했다. 밤에는 기도 참선을 했다. 정신이 맑고 피곤함이 없었다. 가스가 차서 몸이 붕 뜬 상태 같았다. 아주 기분 좋은 상태이고, 몸이 가벼웠다. 누가 얹잖은 소리해도 웃음으로 지나친다. 즐거웠다. 일어날 때, 경구절을 암송하며 일어났다. 그리고, 그 구절을 찾아 사경을 했다. 깨어있는 상태였다. 이렇게 좋은걸 하고 있구나. 더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지장경의 ‘득대안락(得大安樂)’을 쓰면서 전시장에 찾아온 모든 사람들에게 안락함을 누리도록 하여 주십시오 라고 염원했다. 부처님과 같이 사는 삶 이었다. 부처님 오늘은 이렇게 했다고 고했다. 오늘을 안 되겠어서 음식을 이렇게 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좋아하실 일만 해야겠구나. 관세음보살은 몸 안에 있는 분. 마음, 행동, 말을 함부로 할 수 없다. 소중한 관세음보살을 모시고 다닌다. 사경자체, 기도와 참선. 몸을 닦으면서 그 자체가 신비를 일으킨다. 사경을 한번 시작하면 8시간 정도했다. 사경할 때는 출가하려는 마음이 생겼다. 평소에 기도를 많이 한다. 기복이 아니다. 경을 암송하면서 일어날 때도 있었다. 경중의 어느 구절이 닿을 때가 있다. 보름 열흘 동안 눈물을 흘렸다. 천수경을 쓸 때는 눈물이 나서 사람들조차 대하기가 힘들었다. 동국대학교 대학원 불교학과를 졸업한 후, 개인전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동안 공부한 것을 회향하고 다시 공부를 시작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백악예원에서 전시를 했는데, 1층에 사경을 2층에는 서예작품을 진열하였다. 그때 기이한 일이 발생했다. 사경을 보면서 우는 분들이 많았다. 나에게 다가와 절하는 사람도 있었고 합장하는 스님도 있었다. 어느 기독교인은 “눈과 마음을 다 씻고 간다”고 했다.
* 사경과 심신건강 : 사경을 할 때는 온몸이 깨어있다. 충만하게 살아있음을 느낀다. 8시간 이상 사경을 하고나면 물론 피곤하다. 그러나, 하룻밤을 자고나면 피곤이 씻은 듯이 풀린다. 잠은 2시간 자는데, 정신이 맑고 피곤하지 않다. 붓만 들으면 정신이 칼, 송곳 같았다. 밥을 먹는 데에도 되도록 시간을 단축하려고 했다. 그러면서도 머리는 잘 돌아갔다.
* 사경을 안 한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 : 현대는 문명의 발달로 많은 공해를 낳았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삶이 편리하고 좋은 점도 많지만, 잃은 것도 많다. 컴퓨터 버튼만 누르면 모든 게 가능해진 세상에서 산다. 앉아서 뭐든지 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는 정신질환 환자가 늘고 있고,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데도 더 많은 것을 필요로 한다. 사경은 마음의 중심과 마음의 여유를 찾는데 있어 치료약의 역할을 한다. 사경을 하면 마음의 순화가 되어 옆에서 싸움을 걸어도, 전화가 잘못와도 그냥 평온하게 받아주게 된다. 사경은 어쩌면 현대문명과 담을 싼 구시대의 것이다. 그러나, 현대에 가장 필요하다. 현대인들은 앞만 보고 산다. 옆길을 안보고 정신적으로 쫓긴다. 그래서 마음이 허하다. 사경은 남을 용서하고 이해하고 감사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가져다준다. 사경은 마음의 보약이다. 사경에 붓는 정성은 잃어버린 자기를 찾는 좋은 방법이 되어줄 것이다.
4. 이근태 선생과의 인터뷰 일시 : 2006년 9월 22일
장소 : 보은 학림교회
동행자 : 원광대학교 동양학대학원 정용남 학생
* 사경을 하게 된 동기 : 86년 양로원을 경영하다가 망했다. 후유증으로 불면증에 시달렸다. 한 시간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늘 항상 눈이 벌게져 있었다. 의사를 찾으니 실명직전이라고 했다. 얼굴의 시신경 마비가 되었던 것이다. 육교를 올라갔는데 내려올 힘이 없었다. 친구의 권유로 붓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돈이 없어 최대한 작은 글씨를 쓸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사경을 하게 된 동기이다.
* 사경의 방법 : 한글서예는 배운 적이 없이 그냥 썼다. 한문서예는 구양순, 원현준묘지명, 장맹룡비를 썼다. 주로 한문사경을 더 많이 했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국한문혼용작품을 쓰기도 했다. 종이는 주로 화선지를 쓰는데, 파피루스 종이를 구해다가 쓰기도 했다. 화선지에 비해 아주 비싼 종이이다. 20년 동안 주로 성경을 소재로 한글과 한문사경을 했다. 분량 상으로 본다면 한문사경이 더 많다. 그중에서 가장 큰 대작 사경으로는 모세오경인데, 1㎝ 크기의 글씨로 폭 40㎝ 길이 80여 미터를 썼다. 그 다음으로 창세기는 20여 미터에 달한다. 언제 시작했는지 언제 끝을 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시간을 잃어버리고 제작을 한 것 같다.
* 사경을 할 때의 마음가짐과 신앙체험 : 옛날에 유태인 서기관이 성경을 쓸 때 목욕재계하고, 흰옷을 입고, 새 붓을 썼으며, 여인을 멀리하였다. 경문을 쓰는 과정은 매우 엄격했다. 경문을 쓰다가 하나님이라는 글자가 나오면 하나님께 절하고 목욕재계하고 다시 돌아와 하나님을 썼다고 기록되어 있다. 유태인들은 환난 속에서도 경문을 베꼈다. 동굴 속에서 써가지고 그것을 항아리 속에 묻는다. 그래서 100% 상하지 않았다. 경은 함부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사경을 할 때는 목욕재계하고 옷을 깨끗하게 입는다. 주로 한복을 입고 쓰는데, 개량한복이 아니라 전통한복을 입고 쓴다. 책상에는 아무것도 없어야 한다. 글쓰기 전에는 꼭 묵상을 한다. 아침에 격한 소리하거나, 안 좋은 일 있으면 붓을 안 잡는다. 사경 할 때는 공식적인 모임을 다 끊는다. 부득이한 경우에만 참여한다. 어느 날 사경하는데 전화로 말다툼을 한 적이 있다. 전화를 끊고서 붓을 들으니 붓이 춤을 추었다. 그 후부터 사경할 때는 집사람이 전화를 받는다. 지금 사는 이곳에 1000평을 사서 3년 동안 정원을 가꾸었다. 사경을 위해서는 심경이 되어야 하고 심경이 닦이려면 환경이 정돈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건물 짓고, 화장실 만들고, 벽돌 쌓고, 페인트 칠 하고, 바위 나르고, 소나무심고, 연못파고 하는 일을 다 본인이 했다. 15년간 건축업을 한 것이 큰 힘으로 작용했다. 대한민국에서 제일 좋은 집을 짓겠다고 생각했다. 기독교와 사경은 같다. 정성. 몸가짐. 심경. 명예욕이 있어서는 안 된다. 내 마음의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다. 사경을 쓰면 신앙심이 박힌다.
* 사경과 심신건강 : 걸음을 걷지 못할 정도로 몸이 쇠약해져 있었고, 1시간도 잘 수 없을 정도로 불면증에 시달렸는데, 사경을 하고부터 병이 나아지기 시작했다. 수맥을 하는 사람이 온 적이 있는데, 작품에서 참 기운이 나온다고 했다. 큰 글씨보다 작은 글씨에서 더 뚜렷이 나타난다고 했다. 나는 부적을 이해한다. 부적이란 스님이 불제자가 질병에 걸렸을 때 질병을 낳게 해 달라고 하고 꼭 이루어야할 소망이 있을시 그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며 정성을 다해 써 주었기 때문에 글자 한자 한자에 기가 박히게 된다. 이 부적을 가슴속이나 베게 밑에 넣어 세미한 기를 느끼게 된다. 불제자 또한 스님에 대한 믿음이 있어 그 병이 낫고, 소망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에서도 기도 시 병이 낫는 것은 서로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 사경을 안 한 사람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 : 30년 전 무교회주의자인 우찌무라강조를 알게 되었다. 내 마음에 신이 있다. 무소부재(無所不在)를 믿는다. 예배당에서 예배로, 교회당에서 교회로 되어야 한다. 교회에 작품으로 온통 진열했다. 좋아서 한 것이다. 교회에 진열된 작품 중에서 아가서를 특히 좋아한다. 성경에 나체사진을 넣은 것 같은 내용의 글이다. 백합꽃은 가만히 있을 땐 향기가 나지 않고 바람에 흔들릴 때 향기가 나며 찢어 졌을 때 가장 짙은 향기를 낸다. 이것은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 온몸이 찢겨져 그 기운이 전 세계에 퍼짐과 같은 의미이다. 시는 옥중에서 쓴 시가 가장 훌륭하다고 말하듯이 서예도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을 때 제대로 된 작품이 나온다. 사경은 기독교와 같이 명예욕이 있어서는 안 된다. 돈벌이가 된다고 써서는 안 된다. 사경은 신앙의 접근방법이며, 하나님과 만나는 통로이다.
5. 허 락 선생과의 인터뷰 일시 : 2006년 10월 22일
장소 : 경북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에 여의주 사경원
동행자 : 운문사 명법스님, 사경전문가 이윤용 정진경, 원광대학교 동양학대학원 정용남 학생
* 사경을 하게 된 동기 : 사경을 시작한지는 10년이 되었다. 부산 동래 전화국 앞에 있는 사무실에 갔는데, 가금(假金)으로 검은 종이에 쓰여 있는 글씨를 보고 금으로 쓰는 것이 좋아 보여 ‘나도 금으로 글씨를 써 봐야 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사경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곳 여의주 사경원((如意珠寫經院)에서 본격적으로 사경을 시작한 것은 양산 통도사의 700년 전에 경운스님이 사경한 법화경을 본 다음부터이다.
* 사경을 쓰는 방법 : 전통적인 방법을 고수 하며 사경을 한다. 고려시대에는 고려 자체가 불교이고, 불교가 곧 사경이라고 말 할 수 있을 정도로 사경을 중시 하였다. 해인사 대장경의 경우 사경사만 2,500명이 참여하였고, 각(刻) 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모두 참여하였다. 각을 한 사람은 군수도 있고 현감도 있다. 각 자체가 나라를 위하는 것이며 효도이고 공덕을 쌓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사경할 때 왜 비싼 금분을 사용하는가? 그것은 경전 자체가 부처님이기 때문이다. 사경은 불상과 같은 것이다. 전통적 사경법에 대해서는 선조로부터 전해오는 자료가 거의 없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연구를 해야 한다. 사경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내습성(耐濕性), 접착제, 발색(發色)이다. 접착제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기 때문에 나름의 개발과 연구가 필요하다. 사경하는 사람마다 다른 접착제를 사용하고 있다. 물 아교, 우지, 수지, 찹쌀풀등을 사용하고 있는데 물 아교는 잘 써지긴 하지만, 습기와 물기에 약하기 때문에 써서 배접 하지 못하고, 배접 한 후 써야 한다. 10년 이상을 넘기지 못하고, 다 떨어져 버린다. 우지는 일정 온도를 유지해야하기 때문에 항상 일정한 열을 가해야한다. 수지는 엄나무 껍질을 잘 고아서 조청처럼 만들어 물에 타서 쓴다. 찹쌀 풀은 만들기가 비교적 수월하다. 찹쌀 풀을 썩혀서 사용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글씨가 허예진다. 마르면 위를 상아로 닦아 윤을 낸다. 중국 원나라의 사경이나 일본의 국보급 사경들 중 고려 사경을 수입한 것이 많은데, 그 이유는 닥종이와 발색 기술이다. 먼저 닥종이는 화엄경의 경우 얇은 감지로 닥종이 양쪽을 배접했는데, 그 닥종이가 엄청나게 보드랍고, 뽀얗고, 하얗기가 마치 밀가루 같다. 다음은 발색이다. 금은 이중, 삼중의 색깔이 나기 때문에 고른 발색이 되기 어렵다. 고려 사경은 금이 감지 위에 말갛게 올라앉은 글씨이다. 이런 기술이 없으면 얼룩덜룩 해 진다. 고려사경에는 발색의 특별한 기술이 있다. 먹과 달리 금가루는 종이에 두툼하게 묻어야 발색이 되며 시간이 지나면 접착제 효과가 떨어져 가루가 되기 쉽다. 붓과 한지, 접착제를 따로 만들어야했다. 2년간 금자경 연구가를 만나고, 운필법을 궁리하면서 5,400자 금강경을 20차례, 법화경7만자를 세 차례나 썼다. 그제야 금가루와 접착제의 적절한 배합과 운필법을 터득할 수 있었다. 2002년 1월부터 장경 사경작업을 시작해 4년 동안 하루에 13시간씩 매달려 세로 1.1㎝의 글자로 화엄경 81권(60만자), 금강경 1권, 지장경 2권, 법화경 7권(7만자) 등 91권의 경전을 썼다. 매일같이 1천800~1천900자를 썼다. 글자 수로 따지면 모두 69만 여자에 달하며 글자와 함께 경전 한 권, 한 권을 한 장의 그림으로 요약한 변상도(變相圖) 91점도 금으로 다시 그려졌다. 길이가 850여m이고, 금가루는 4㎏이 들어갔다. 금가루 값(1g에 3만2500원) 1억3000여만 원을 포함, 한지 등 재료값만 2억 원이 넘었다. 사경 뒤 교정을 본 뒤 오. 탈자는 2만자에 1자 정도였다. 고증을 통해 금 사경을 담는 그릇과 보자기도 만들었다.
* 사경을 할 때의 마음가짐과 신앙체험 : 사경은 예술차원을 넘어서 특이한 것이다.사경은 취미나 문화가 아니라 생활이고 이념이며 이상이다. 미술의 한 장르나, 서예의 한 장르가 아니라 나 자신이며, 나 자신이 바로 불교인 것이다. 제일 중요한 것은 사경의 정신적인 측면이다. 잘 쓰고, 예쁘게 쓰고 등의 것은 차후의 것이다. 어떤 것을 몇 번 썼느냐 하는 ‘공덕’용 사경을 중요시 하는데 그것은 그냥 두어도 ‘공덕’이 되는 것을 ‘공덕’이라 이름 하면서 ‘공덕’을 깎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사경을 하면서 내가 발전하거나 업그레이드된다고 생각하지 마라. 모든 것은 명이 끝나고 날 때 변화가 생긴다. 내가 살아서 불보살의 가피를 입을 것이라 생각마라. 살아서 가피를 입는 것이 아니라 죽어서 공덕을 남기는 것이다. 잘 될 생각 안 아플 생각 말라 윤회에 의해서 내가 사경할 프로그램이 입력되어 있는 것이다.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30퍼센트이고 인연이고 업장이다. ‘성불을 해야겠다.’ 생각하지 마라. 다 알고 계시니 잘못 하면 공염불이 되는 것이고 잘하면 공덕이 되는 것이다. 어느 기간을 정해서 하지 말고, 고려인들처럼 ‘생활사경’을 해야 한다. 내가 극락을 갈 지 지옥을 갈지 생각지 마라. 내가 명을 다 할 때 그 모습 그대로, 대나무의 마디 모양처럼 과거, 현재, 미래는 별도의 도막이 아니라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는 천분의 일초도 끊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숨을 놓을 때 까지 사경을 하면 다음 생에서도 똑 같이 그렇게 된다. 사경은 하나도 정성, 둘도 정성, 셋도 정성이다. 정성 이하도 이상도 없다. 한 자 한 자를 쓰면서 그 한자가 바로 부처님을 모시는 것이라 생각한다. 식사시간, 사경하는 시간, 휴식 시간을 정해 놓고 완벽히 지킨다. 1~2시 까지 오수 시간을 갖고 밤에는 5시간을 잔다. 단전에 힘을 주고 사경을 한다. 사경과 호흡을 일치 시킨다. 사경을 하는 동안에는 서울에 있는 가족을 일 년에 두세 번만 만나고 작업에 몰두한다. 무념무상의 상태에서 오로지 불심 하나만으로 버틴다. 글 쓰는 것뿐 아니라 한지를 잇고 책으로 만드는 일도 만만치 않은 일이다. 한 치 오차 없이 경전을 이어나가고 접어야 한다. 사경을 하면서 수행 한다는 생각이 든 것은 경의 내용을 알아가면서 부터인데 사경 시작한지 5년 정도 되면서 부터이다. 눈물이 나오기 시작했는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이 눈물에서 단맛이 느껴졌고, 부처님이 이 말씀을 위해 그랬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금강경을 쓸 때 차제(次第)라는 말을 쓸 때 그것이 모두 평등이라는 뜻을 깨우치면서 눈물이 났다. 사경은 부처님의 원뜻을 생각하며 써야지 그냥 뜻을 모르고 써서는 안 된다. 5,400자 금강경을 20여 차례 쓰면서 쓸 때마다 느낌이 다른데 이것이 곧 발전이라 생각한다.
* 사경과 심신건강 : 허리와 팔의 통증에 시달리지만 불심을 일으키기 위한 작업이니 한 글자라도 허투루 할 수는 없다. 고도의 집중력이 없으면 오자나 탈자가 나서 애써 써놓은 사경을 버려야 할 때가 많으니 부동심 없이는 불가능하다. 특별한 건강관리법은 없는데, 사경을 하면서 건강은 더 좋아졌다. 음식에 대한 생각도 사경 전후가 많이 바뀌었다. 아무리 조악한 음식이라도 감사하는 마음이 생겼다. 하찮은 음식이라도 부처님 덕이라 생각하여 버릴 수 없게 되고 입맛이 좋아졌다. 60세인데 어린아이 같은 감사의 마음이 생기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봐도 너그러워진다. 예전의 잘못을 생각하면 지금의 내가 고맙다. 이것이 바로 사경의 힘이며 불보살의 가피이다. 보살 생활을 하면 마음이 순수해 진다.
* 사경을 안 한 사람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 : 사경을 하면 든든한 백이 생기는 것이다. 사경을 하면서 나쁜 기운이 빠져 나쁜 인연은 빠지고 좋은 인연을 만나서 좋은 일이 생기게 된다. 사경의 보급을 위해 내년 봄이나, 후년 가을에 전시회를 할 계획이다.
Ⅴ. 맺는말
문헌에 기록된 사경의 역사와 제작정신은 사경의 가치를 재인식하게 한다. 본 논문에서는 『대방광불화엄경』 발원문에 나오는 내용을 분석하면서 사경의 행위가 일반적인 서예와 엄연히 구분되는 독특한 정신세계가 있음을 밝혔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경의 제작과정과 관련된 자료는 전하는 것이 아주 드물기 때문에 사경전문가들과 인터뷰를 하면서 사경이 갖는 가치와 의미를 보완했다. 인터뷰를 통해 문헌에서 제시되지 않은 사경의 정신세계를 좀 더 세부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인터뷰 대상자는 일이십년 간 사경을 하였으며, 대부분 사경을 시작하기 전에 오랜 기간 동안 서예를 접한 경험이 있는 분들이다.
살펴본 바와 같이 사경을 하게 된 동기는 각각 다르다. 사경을 신앙행위와 다를 것이 없다고 확신하고 사경을 시작한 김종우, 세속적인 서예를 벗어나기 위해서 사경의 길을 걸은 김시운, 서예인으로서 부처님을 그리고 글씨를 쓰기를 원했는데 어느 날 스님의 부탁을 받아 금강경을 사경하게 되었다는 이윤용, 사업 실패의 후유증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친구의 권유로 사경을 시작한 이근태, 금니 글씨에 신기함을 느껴 사경을 하게 되었다는 허 락, 이들 모두는 비록 사경을 하게 된 동기는 다를지라도 사경을 시작한 이후로 속(俗)의 세계에서 성(聖)의 세계로 이동하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인 체험을 하고 있다.
위의 사경전문가들은 전통적으로 전승되어오던 전통 사경의 중단으로 인해 사경 재료의 활용법에 대해 대부분 잘 모르는 상태에서 출발했으므로 재료 다루는 방법에 대해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스스로 개발을 해야만 했다. 이와 같은 어려움 속에서도 이들 모두는 그 어려움을 의연하게 극복하고 있다. 이것은 사경의 행위가 지닌 특수성에서 제시될 수 있다고 본다. 이들은 사경을 하면서 누가 가르쳐주거나 지시하지 않았는데도 자발적으로 엄격한 재계와 자신을 단련하는 수행의 세계로 진입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일반적인 서예에서 경험하기 어려운 점들이다.
사경하기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몇 십 분 경전을 읽는다는 김종우, 새벽에 일어나 목욕재계를 하고 108배를 한다는 김시운, 사경하는 시간외에 늘 참선을 한다는 이윤용, 사경하기 전 목욕재계를 하고 전통한복을 입고 묵상을 한다는 이근태, 한 자 한 자를 쓰면서 그 한 자가 바로 부처님을 모시는 것이라 생각하며 사경을 한다는 허 락. 이와 같은 행위는 사경을 할 때 나타나는 행위로서, 신앙의 행위와 다를바가 없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또한 사경을 하면서 세상에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고, 자기도 모르게 참회의 눈물이 나온다고 한 진술은 사경행위가 단순한 글쓰기의 행위와 구분되는 차원의 세계임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들은 대부분 사경을 하면서 건강이 좋아졌다고 말한다. 특히 이근태의 경우 걸음을 걷지 못할 정도로 몸이 쇠약해져 있었고, 1시간도 잘 수 없을 정도로 불면증에 시달렸는데, 사경을 하고부터 병이 나아지기 시작했다고 했다. 이것은 사경의 심신수양적인 차원을 넘어서 치료적인 효과를 증명하는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고 본다.
위에서 제시된 역사적인 사경자료와 인터뷰 논증자료는 사경의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하게 하는 것으로 붓을 다루는 서예인 뿐만 아니라, 동시대를 사는 모든 사람들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거울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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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妙法蓮華經』 法師功德品 第十九.
『妙法蓮華經』 普賢菩薩卷發品 第二十八.
『妙法蓮華經』 若王菩薩本事品 第二十三.
『金剛經』 持經功德分第十五.
『地藏王菩薩本願經』如來讚歎品 第六.
첫댓글 사경의 중요함을 되새기게 하는 글입니다. 서예의 의미를 새삼 곱씹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