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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 9:1-15
찬송가 586장 “어느 민족 누구게나”
에스라가 남자 1,500여 명, 여자와 아이들까지 합하면 합하면 대략 5,000명 정도의 사람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4만 명 이상이 귀환한 1차 귀환에 비해 그 수가 매우 적고 초라합니다. 1차 귀환이 이루어지고도 대략 80년 이후에 2차 귀환이 이루어지다보니 본향으로 돌아가겠다고 마음먹기가 더더욱 어려웠으리라는 건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의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 평생을 수고하여 기반을 마련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겠다고 결단할 때 은혜가 있습니다. 어디에나 계시지만 하나님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겠다고 한 예루살렘에 돌아갈 기회가 생겼다면, 돌아가는 것이 맞습니다. 누구에게나 결단의 순간이 있습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들을 선택해 나갈 때,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가 끊이지 않고, 참된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1-2) 이 일 후에 방백들이 내게 나아와 이르되 이스라엘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이 땅 백성들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가나안 사람들과 헷 사람들과 브리스 사람들과 여부스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과 모압 사람들과 애굽 사람들과 아모리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행하여 그들의 딸을 맞이하여 아내와 며느리로 삼아 거룩한 자손이 그 지방 사람들과 서로 섞이게 하는데 방백들과 고관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 하는지라
에스라가 페르시아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보니 그간의 수고로 성전은 완공되었으나 먼저 돌아온 이들의 삶에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에스라가 전해 들은 소식은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과 결혼하는 일을 아무렇지 않게 행한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본문에서는, “이스라엘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가증한 일을 행한다고 명시하여 제사장과 성전에서 사역하는 레위인들도 여기에 가담했음을 고발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방인들에게 자녀들을 주지 말라고 하셨습니까? 이스라엘이 아무런 주관 없이, 옳고 그름에 대한 분별 없이 그저 되는 대로 살면서 이방인들과 통혼하게 되면, 오히려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버리고, 이방인들의 관습과 신앙을 따라 이방화될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혈통상 순혈주의를 지켜나가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꼭 같은 유대인들끼리만 결혼하라는 말은 더더욱 아닙니다. 이방인이라고 해도 하나님을 향한 신앙고백이 있다면, 그 누구와도 결혼할 수 있습니다. 여리고의 기생 라합과 모압 여인 룻이 그 예입니다.
그러나 방백들이 에스라에게 고발한 이 경우는 달랐습니다. 통혼한 상대였던 이방인들은 여전히 이방신을 섬기고 있었고,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일을 아무렇지 않게 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자기 주님으로 모실 생각 자체가 없는 사람들이었고,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들의 우상을 섬기는 일에 동참시키고 있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4장에서 밝히고 있듯 결혼은 남편과 아내가 서로 돕고, 태어난 자손을 통해 인류를 번성하게 하며, 거룩한 자손을 통해 교회를 흥왕하게 하고, 음행을 피하기 위해 제정되었습니다. 결혼은 하나님께서 주신, 신적 기원을 갖는 제도로 누구도 이 결혼을 그 자체로 목적으로 대해야 하지 수단으로 대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이런 결혼조차도 자기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삼습니다. 통혼한 백성들이 이방인들과의 결혼을 통해 조금이라도 나은 지위를 누리려고 하고, 안정된 삶의 기반을 가지려고 했다면, 결혼을 수단화한 것입니다. 썩어질 것을 위해 결혼을 오용한 것입니다. 목적이 그러하니 이미 그들의 신앙이 타락했다는 것은 확인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동안 세상을 바라보던 시각이 송두리째 변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창조와 타락, 구속으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대해 눈이 열리고, 우리 주님께서 다시 오실 날을 기다리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삶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내가 믿는 삼위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삶이 어떤 삶인지 알 뿐만 아니라 말씀을 통해 무엇이 중요한지,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 비로소 깨닫는 과정입니다. 괜히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고후6:14)고 말씀하셨겠습니까?
결혼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주셨으나 하나님을 모르니 원래 주신 뜻도 잊어버리고 사람의 생각과 뜻대로 오용합니다. 외로워서 결혼하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을 혼자서는 사명을 이루기에 부족해 보였기 때문에 돕는 베필을 주신 것입니다. 결혼을 통해 믿음의 자손을 낳아 주님 오실 때까지 교회가 존속할 수 있도록 하셨고, 성적 방종으로 세상이 타락하지 않도록 만드셨습니다. 결혼 또한 주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한 방편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에스라가 이 소식을 듣고 기가 막혀 합니다.
(3-5) 내가 이 일을 듣고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앉으니 이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떠는 자가 사로잡혔던 이 사람들의 죄 때문에 다 내게로 모여오더라 내가 저녁 제사 드릴 때까지 기가 막혀 앉았더니 저녁 제사를 드릴 때에 내가 근심 중에 일어나서 속옷과 겉옷을 찢은 채 무릎을 꿇고 나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손을 들고
극에 달한 분노와 애통함으로 에스라가 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고, 앉아 있습니다. 그렇게 하염 없이 앉아 있으니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떠는 자들이 에스라에게 나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지키려는 생각을 가진 경건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경건하게 살았고, 백성들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기는 했으나 이를 나서서 바로잡을 만큼의 능력과 의지는 없었던 무리들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이런 일들 주동자들이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녁 제사를 드릴 때까지 황망하게 있던 에스라가 손을 들고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6) 말하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끄럽고 낯이 뜨거워서 감히 나의 하나님을 향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오니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
엄밀히 말하면, 에스라 자신이 지은 죄도 아니었고, 연대 책임을 질 만한 요소가 하나도 없습니다. 이미 80년 전에, 1차 귀환 때 와서 터를 잡고 살던 사람들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같은 민족이라는 것 외에 에스라와 삶의 자리를 공유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이들의 죄였습니다. 그럼에도 에스라는 동족의 죄를 애통하게 여겼습니다.
에스라가 하나님께 부끄럽고 낯이 뜨겁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민족이 지은 죄가 너무 커서입니다. 얼마나 큰지 정수리에 넘치고, 하늘에 닿을 정도라고 합니다. 비가 온 뒤, 계곡물이 급속도로 불어나 사람을 집어삼킬 정도의 탁류가 되는 것처럼 만연한 죄가 민족을 삼킬 만큼 흉포해졌고, 하늘에 닿을 정도라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1차로 귀환했던 그들은 하나님께로 돌아올 마음이 없는 이방인들과 통혼한 것이 이렇게 엄청난 죄인지 몰랐을 것입니다. 알았다고 해도 짐짓 모른 체하고 다른 사람들이 다 그러고 사니까 나만 유별나게 굴 게 있겠냐며 합리화했을 겁니다.
그저 조금 더 안정적인 기반 가운데서 많은 것들을 누리고 살기 위한 고육책이었다고 항변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키지 않고, 무분별하게 주변 나라의 풍습과 문화, 그들의 신앙을 받아들여 결국 멸망으로 치달았던 과거가 불과 몇 대 전인데, 어떻게 이렇게 급속도로 타락할 수 있었는지 의문입니다. 신앙인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목숨을 잃는 일이 있어도 차마 하지 못하는 일이 있습니다. 이런 선을 분명하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거칠게 우리에게 다가오는 세속화의 물결에서 우리를 지킬 수 없습니다.
(7) 우리 조상들의 때로부터 오늘까지 우리의 죄가 심하매 우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우리와 우리 왕들과 우리 제사장들을 여러 나라 왕들의 손에 넘기사 칼에 죽으며 사로잡히며 노략을 당하며 얼굴을 부끄럽게 하심이 오늘날과 같으니이다
우리 조상들의 때로부터는 이스라엘의 역사 전체를 가리킵니다. 사울이 왕으로 세워지기 전에, 가나안 땅을 주시기 전에, 애굽의 압제 아래에서 신음하던 민족을 출애굽시킨 때보다 전에, 족장들과 함께하시는 때부터를 의미합니다. 그때부터 오늘까지 면면히 이어져 온 죄악으로 민족이 고초를 겪어 오늘에 이르렀다고 고백합니다. 왕이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베푸신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백성다운 삶을 이어가지 못했으니 어려움을 당한 것이 오늘까지라고 고백합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은혜 베풀기를 주저하지 않으셨습니다. 약속된 기한이 되자 포로에서 놓여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인도해주셨습니다. 그래서 돌아온 자신들을 8절에, ‘거룩한 처소에 박힌 못’과 같이 되게 하셨다고 고백하며, 페르시아 왕들에게 긍휼히 여김을 입고 기사회생하여 성전을 다시 세우고, 무너진 곳을 보수할 뿐만 아니라 울타리를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에스라와 포로 귀환 공동체가 처한 현실이었습니다. 도저히 자신들로서는 기대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은혜로 돌아온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시편 126편 1절에,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 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라고 고백합니다.
(10-12, 새번역) 우리의 하나님, 주님께서 이렇게까지 하여 주시는데, 주님의 계명을 저버렸으니, 이제 우리가 무슨 말씀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일찍이, 주님의 종 예언자들을 시키셔서, 우리가 들어가서 차지할 땅은, 이방 백성이 살면서 더럽힌 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거기에서 사는 자들이 역겨운 일을 하여서, 땅의 구석구석까지 더러워지지 않은 곳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딸을 그들의 아들에게 시집 보내지도 말고, 그들의 딸을 며느리로 맞아들이지도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강해져서, 그 땅에서 나는 좋은 것을 먹으며, 그 땅을 우리 자손에게 영원한 유산으로 물려주려면, 그 땅에 있는 백성이 번영하거나 성공할 틈을 조금도 주지 말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에스라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선물로 주신 까닭을 잘 압니다. 그 땅을 차지하고 있었던 원주민들이 더럽고 역겨운 일을 행하여, 땅을 더럽혔기 때문에 그들이 그 땅에서 더 이상 성공하고 번영하지 못하도록 통혼하지 말 것을 말씀하셨다는 것을 언급합니다. 하나님께서 악으로 규정하신 것을, 우리가 선하다고 말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그렇다면 통혼을 금지하면서까지 악으로 규정하셨던 가나안 민족들은 오늘날로 말하면 무엇이겠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경,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기독교가 당시 고대 근동의 여러 종교들과 뚜렷하게 달랐던 차별점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삶, 곧 말씀을 따르는 삶이 최고 수준의 윤리적 삶으로 귀결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제외한 이들은 자기가 만든 신에게 자기 욕망을 투사하고,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으며 그 욕망을 이루는 데 집중했기 때문에, 억압과 착취가 당연하게 여겨지는 암울한 세상을 만들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왕이 되셔서 각기 먹고살 수 있는 기반, 곧 팔지 못하는 토지를 나눠주셔서 부유하든 가난하든 최소한의 인간적 삶이 가능하도록 토대를 만들어 주셨고, 그 위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치는 윤리적 삶,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도록 인도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절대로 통혼할 수 없는 가나안 원주민들을 오늘날로 말하면 자기 욕망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들이며, 다른 이들의 생명을 하찮게 여기는 이들이며, 가진 힘을 불의하게 사용하는 이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에서 몰아내시고자 했던 이들과 오히려 결혼하며, 그 체제 아래에서 기생하려고 했던 것이 먼저 포로에서 돌아온 이들의 패착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싸움은 에스라 시대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싸움의 양상이 변화할지언정 본질은 변하지 않아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불의한 권력이 없었던 때는 한시도 없습니다. 법과 시스템을 통해 자기를 지키고 높일 뿐만 아니라 손에 틀어 쥔 기득권을 독점하려는 시도는 오고오는 세대 가운데 언제나 있었습니다. 합법이라는 테두리 아래에서 자행되는 수많은 야만적인 결정들이 우리나라와 세계 도처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들로서 세상의 이런 시도를 분별할 줄 아는 지혜와, 거부하는 용기와, 믿음을 지킨 사람에게 둘째 사망의 해를 주시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말씀 앞으로 인도해주시는 까닭입니다.
어떤 순간에서도 타협하지 말아야 하는 선이 있습니다. 명확한 기준을 가지고 맞으면 맞다, 아니면 아니다라고 말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2세기 카르타고에서 살았던 교부 테르툴리아누스에게 우상을 만들던 직업을 가진 성도들이 찾아와 호소했습니다. “우리는 이 일 말고는 먹고살 길이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때 교부가 했던 말이 참으로 인상적입니다. 테르툴리아누스 교부가 단호하게 “여러분은 왜 꼭 살아야만 합니까?”
지극히 작은 일이라서, 먹고사는 일에 매인 문제라서, 다른 기타 이유 등등으로 너무 쉽게 타협합니다. 그러나 그럴 일이 아닙니다.
결단의 순간이 있습니다. 그 순간에 하나님과 말씀 앞에 부끄럽지 않은 결정을 할 수 있는 믿음이 우리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현실을 분별하지 못하고, 그저 남들이 다하니까 문제의식 없이 따라했던 길에서 돌이켜 이 모든 행태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실는지에 대해 성찰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걸었던 길이 이스라엘의 조상들과 같아서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킬 만한 것이었다면, 인정하고 돌이킬 줄 아는 믿음이 있기를 바랍니다. 공중의 새도 먹이시고(마6:26), 들풀도 입히시는 하나님(마6:30)께서 우리 인생을 책임지시고,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기도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 에스라가 포로에서 돌아온 이들의 무분별한 삶의 행태에 분노하고, 슬퍼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했던 것을 보면서 많은 것들을 깨닫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또한 이 세상 가운데 살지만 세상을 이기시고, 사망에게 사망을 선포하신 주님을 따라 참된 제자의 삶을 살아가도록 힘을 주시옵소서. 어떤 경우에도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에 놓고 오늘을 살아가도록 인도해주시옵소서. 주님의 은혜를 간구하며, 주실 평화를 기대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에스라가 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기도하게 만들었던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1-2)
2.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유다와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한 데 대해 감사하면서 자신들을 무엇이라고 표현합니까? (8)
3.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원주민들과 통혼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까닭은 무엇입니까? (11)
4. “땅을 더럽혔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관점으로 재해석하면 어떤 삶의 양태가 되겠습니까?
(작성: 이창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