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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 . 梁山甫의 소쇄원(瀟灑園)을 찾아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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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제 304호>
*소재지 : 전남 담양군 남면 지곡리 123
자연과 더불어 살았던 선비의 학문과 사상이 담겨있는 대나무고장 담양 소쇄원(瀟灑園), 광주서 화순가는 길 옆에 개울물이 졸졸졸 흐르는 소쇄원 입구에는 환상적인 대나무 숲이 하늘 높이 찌른다. 굳이 고산윤선도의 오우가가 아니라도 곧고 절개 있는 푸른 대나무가 그냥 좋다.
瀟灑園은 양산보(梁山甫,1503∼1557)가 은사인 정암 조광조(趙光祖,1482∼1519)선생이 기묘사화로 능주로 유배되어 세상을 떠나게 되자 출세의 뜻을 버리고 자연속에 숨어 살기 위하여 꾸민 별서정원(別墅庭園)이다. 住居의 관계에서 볼때에는 하나의 후원(後園)이며, 공간구성과 기능면에서 볼 때에는 입구에 전개된 전원(前園)과 계류를 중심으로 하는 계원(溪園), 그리고 내당(內堂)인 제월당(霽月堂)을 중심으로 하는 내원(內園)으로 되어 있다. 소쇄원은 1530년(중종 25년)에 양산보가 꾸민 조선시대 대표적 정원의 하나로 제월당(霽月堂), 광풍각 (光風閣), 애양단(愛陽壇), 대봉대(待鳳臺)등 10여개의 건물로 이루어졌으나 지금은 몇개만 남아 있다.
별서(別墅)란, 선비들이 세속을 떠나 자연에 귀의하여 은거생활을 하기 위한 곳으로 살림집에서 그리 멀지않은 경치 좋은 곳에 마련된 주거공간을 말하며 이곳에 정자와 더불어 조성된 정원을 별서정원이라 한다. 곧, 전원생활과 문화생활을 함께 한 공간, 상주하는 주택이 아니므로 간소하고 한시적 체류를 위한 구조로 지어졌으며 남자들만의 전유공간으로 이루어진니다. 정자건물은 가운데 방을 두고 주변에 마루를 개방한 형식을 취하고, 온돌방과 마루가 공존함으로써 기숙과 휴양을 같이 할 수 있는 일상 생활터가 될 수 있는 곳이 특색이다.
초입 좌우의 대나무숲 사이로 난 이 길은 약간의 경사로로 되어 있는 오솔길로 뭔가 새로운 세계로 인도되고 이끌려가면서 그곳에는 무엇이 있을까 하는 궁금함과 막연한 기대감을 갖게 된다. 대문없이 담장으로 경계를 지워 내 외를 개방적으로, 흙과 돌로 쌓여진 ㄷ자형의 담장 위에 기와가 덮여 전통적인 양반 집의 담장 형식을 하고 있으며, 그 높이가 다소 낮아 방어를 위한 폐쇄적 기능을 하는 것이 아니라 골바람을 막아주고 영역의 한계를 지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일설에 瀟灑園 의 형국이 지네형국이기 때문에 담장을 쌓아 지네의 강한 氣를 눌렀다는 얘기도 있고, 한편으로는 지네와 대응하여 소쇄원 반대편 마을 이름을 닭뫼라 부른다고 전한다.
전원(前園)은 대봉대(待鳳臺)와 상하지(上下池), 물레방아, 그리고 애양단(愛陽壇)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계원(溪園)은 오곡문(五曲門)곁의 담 아래에 뚫린 유입구로부터 오곡암 폭포 그리고 계류를 중심으로 여기에 광풍각(光風閣)을 곁들이고 있다. 광풍각의 대하(臺下)에는 석가산(石假山)이 있었다. 이 계류구역은 유락공간으로서의 기능을 지니고 있다. 내원(內園)구역은 제월당(霽月堂)을 중심으로 하는 공간으로서 당(堂)과 오곡문(五曲門) 사이에는 두 계단으로 된 매대(梅臺)가 있으며 여기에는 매화, 동백, 산수유 등의 나무와 기타 꽃나무가 심어졌을 것으로 생각되며, 오곡문(五曲門) 옆의 오암(鼇岩)은 자라바위라는 이름이 붙여지고 있다.
待鳳臺를 지나 안으로 들어가는 동쪽 담에 `애양단(愛陽壇)`이라고 새겨진 판이 박혀있는데, 겨울철 북풍을 막기 위하여 세운 담으로 이 부근은 유난히 볕이 바르기 때문에 부모님의 따뜻한 정을 느끼게 하는 孝의 공간의 상징으로 보여 진다.
愛陽壇을 지나면서 담은 ㄱ자로 꺾이면서 `五曲門`이라는 판이 새긴 담이 있다. 돌을 섞어 흙담을 쌓고 기와를 얹으며 죽 이어오다가 이곳에 이르자 넓적한 바위를 걸쳐 다리를 놓은 후 그 위에 담을 올린 것이다.
한편, 五曲門 주변의 돌담은 제주에서 온 일꾼들이 음양의 조화를 맞춰가며 쌓은 것이라고 전해진다. 그 때문에 瀟灑園이 있는 마을을 지석리(支石里), 즉 관돌마을이라 불렀다. 五曲門에서 제월당(霽月堂)에 이르는 직선통로의 위쪽에 높이 1m, 폭 1.5m정도의 축단에 매화나무를 중심으로 난초가 심어져 있고 이 같은 단(花階)은 보통 비탈의 침식을 막을 겸 쌓아서 바라보고 즐길 수 있도록 꽃나무를 심어 꾸미는데, 소쇄원에서는 여기에 매화를 심고 매대(梅臺)라고 했다.
매대에서 위쪽으로 올라가면 霽月堂이 있고 아래쪽으로 가면 한복판의 커다란 너럭바위가 있어 선비들이 바둑을 두고 차를 마시고 거문고를 타는 등 앉아서 즐겼다고 한다.
上池와 下池를 지나 수차를 돌리며 떨어지는 물의 약동을 감상하기에 좋은 곳이고, 유락공간(遊樂空間)이요 한적할 때는 사색의 공간이 될 만한 곳인데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으로 중앙 1칸만 온돌방이고 빙 둘러가며 마루로 구성되어 있으며, 온돌방은 한면만 벽, 나머지는 삼분합문(들쇄로 들어올리면 완벽한 공간 환원을 이룸)이며, 불을 넣는 아궁이가 뒤편에 있어서 그곳 마루가 다른 것보다 한단 높게 달려있는 점이 색달라 보인다. 온돌방의 따뜻함과 협소함, 마루의 시원함과 넓음, 작지만 당차고 아담한 공간의 핵심으로 모든 것이 모이고 확산되는 정점이 되는 곳이라 할 수 있다.
梁山甫는 도연명을 좋아했을 뿐 아니라 자기 스승 조광조를 따라서 주돈이를 존경했는데 송나라 명필인 황정견이 주돈이의 인물됨을 얘기할 때 " 가슴에 품은 뜻의 맑고 밝음이 마치 비 갠 뒤 해가 뜨며 푸른 청량한 바람과도 같고 비 개인 하늘의 상쾌한 달빛과도 같다(胸懷灑落 如光風霽月) " 라고 한 데서 `光風閣`과 `霽月堂`의 이름도 따온 것이고. 光風閣과 霽月堂의 현판 글씨는 이 지역 대부분의 현판 글씨와 마찬가지로 우암 宋時烈이 쓴 것이다. 霽月堂은 몇 개의 단을 올라 위치하고 있으며, 매대의 담장을 따라 ㄷ자 마당을 지나 고개를 숙여야만 지날 수 있는 조그마한 대문으로 이어지는데,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으로 왼쪽에 치우쳐서 한칸방이 있고, 나머지 두칸은 마루로 트여있으며, 마루 뒷벽에 활짝 열 수 있는 문이 달려있다.
霽月堂에는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가 쓴`소쇄원사십팔영시 (瀟灑園四十八詠詩)`(1548)가 있으며, 1755년(영조 31) 목판에 새긴 `소쇄원도(瀟灑園圖)`가 남아 있어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있게 한다. 瀟灑園은 1528년 처음 기사가 나온 것으로 보아 1530년 전후에 착공한 것으로 보여 진다.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가 화순으로 공부하러 갈때 소쇄원에서 꼭 쉬어갔다는 기록이 있고 1528년 `소쇄정즉사(瀟灑亭卽事`에는 간접적인 기사가 있다.
넓지 않은 토방과 좁고 긴 마당이 있으며 앞뜰은 거의 空地로 남겨져 있지만 모퉁이에는 이국적 정취가 물씬 풍기는 파초가 심어져 있다. 또한 매화나무로 운치를 더했는데 이는 방안, 대청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위치에 맞추어 관상용으로 심어 놓았다. 소쇄원을 조성할 때 언덕, 골짜기, 돌, 풀 한포기에 까지 신경을 썼으며 "瀟灑園을 팔지도 말고 어리석은 후손에게 물려주지 말라"고 유언을 했다니 梁山甫의 소쇄원에 대한 정성과 사랑과 애착은 가히 짐작하고도 남을 만 하다.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겸손과 자연의 조화를 기반으로 적당한 위치에 배치되어 있는 亭子에서 옛 선비들은 세상이치에 高談峻論 했을 것이라 생각하니 그들의 高踏에 그리움이 솟구친다. -태극풍수지리학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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