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이 복입니다. 시편1:1~6절, 이상갑목사
복은?
1) 땅의 복과 하늘의 복
2) 육적인 복과 영적인 복
1편 1-6절 이 지혜 시편은 기본적으로 전체 시편의 서론 기능을 합니다. 이 시편의 주제는 인간의 여러 갈래 길과 궁극적 운명을 말하기 때문에 전체 성경의 주제와도 연결이 됩니다.
시편 1편은 대조를 이루는 의인과 악인이 등장합니다. 영적으로 서로 다른 길, 다른 최종 운명입니다.
* 복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시1:1)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 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 ‘복’이란?
1) 개인적 관점에서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깊은 내면의 기쁨과 만족입니다.
2) 신앙공동체적 입장에서는 구속의 은혜를 말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3가지를 가지치기를 합니다.
“ 악인의 꾀, 죄인들의 길, 오만한 자들의 자리”
가지치기가 능력입니다.
학생은 게임, 만화, 음악, 놀이....가지치기가 능력
독버섯과 식용버섯
독버섯: 겉이 화려합니다. 그런데 독을 품고 있습니다.
식용 버섯은 겉이 투박합니다. 그런데 먹으면 영양가가 높습니다.
인생의 독버섯과 식용버섯
- 우리도 가지치기를 잘해야 열매를 맺는 인생이 됩니다.
- 겉으로 좋아 보여도 3가지에 해당하면 가지치기해야 삽니다.
* 어떻게 가지치기를 합니까? (시1:2)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주야로 묵상하는 것은 읽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지켜 행하는 것으로 연결하고 적용해야 합니다. 이것이 접붙이기의 기술입니다.
우린 말씀에 접붙이기해야 최상품의 열매를 거둡니다.
접붙이기는 적용과 실천입니다. 머리에만 멤도는 것이 아니라 손과 발로 이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말씀의 꽃이 피어납니다.
이것은 말씀을 생활화하고 체질화 하라는 것입니다.
수 1:8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말씀 묵상의 참 된 의미는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는 것입니다. 지켜 행하는데서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시 119:1 행위가 온전하여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음이여
복 있는 사람의 특징은 말씀을 삶으로 연결하고 적용하고 소화 시키는 사람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켜 행하는 것입니다. 그때 복이 있다고 합니다.
복 있는 사람이 되자 여기에서 멈추면 안 됩니다.
* 복 있는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실제적이어야 합니다. 실천적이어야 합니다.
1) 복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성경을 읽겠다고 끝나면 안 됩니다. 큐티를 하겠다로 끝나면 안 됩니다. => 이번 주간에 내 시간을 하나님의 말씀 묵상하는데 최소한 30분을 사용한다. 출퇴근 하면서 성경을 듣는다. 시편을 이번 주간에 1독 한다.
2) 복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착하게 살자가 아닙니다.
-> 예를 들면 제자 가운데 하나님이 덤으로 주신 선물이 있을 때마다 개척교회나 선교사님을 돕는 제자가 있습니다. 착하게 살자를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섬김으로 흘러 보내는 것이 말씀을 지키는 데까지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이 일어납니다.
* 말씀을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실전에서 지켜 행하기를 지속 반복 할 때 경험하는 은혜는 무엇입니까? (시1:3) “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 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시냇가에 ‘심은’ 이 말은 문자적으로 시냇가로 ‘옮겨 심어진’이란 의미입니다. 나무를 시냇가로 심은 것처럼 성도는 생수의 강가에 하나님께서 옮겨서 심겨진 인생입니다.
육체의 정욕을 따라 살던 우리들이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스스로의 선택과 결정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입니다.
은혜가 인생을 지배해야 인생이 철을 따라서 열매를 맺습니다. 그가 하는 일이 형통합니다.
렘 17:8 그는 물 가에 심어진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하지 아니 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
이스라엘은 광야가 대부분이어서 그 기후조건 때문에 싱싱한 나무는 구약에서 축복의 상징으로 사용됩니다. 아무리 광야여도 물가에 심기운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풍성합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에서도 동일한 맥락의 말씀이 있습니다.
마 7:13-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 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라
마 7:23-24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 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니
진짜 복은 좁은 문, 좁은 길입니다. 그리고 나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입니다. 그 길 끝에는 영광의 주님이 계십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습니다. 그리고 실천하고자 하는 복있는 사람입니다.
말씀 묵상이야말로 최고의 복입니다. 누구에게나 주어진 복입니다. 묵상을 통해 실천하면 복이 넝쿨 째 굴러들어 옵니다.
말씀 묵상이야 말로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게 하는 표지판입니다.
그 표지판은 영광의 주님께로 향합니다.
2023년 신약 1독을 구체적으로 해 보십시오. 시편 1독이라도 1월에 해 보십시오. 그리고 말씀을 따라서 삶을 정리정돈해 보십시오.
가지치기 할 것은 가지치기를 하고, 접붙이기 할 것은 접붙이기를 하십시오. 그러면 가장 풍성한 열매를 맺는 해가 될 것입니다. 가장 복 있는 해가 될 것입니다. 말씀 묵상이야말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복이기 때문입니다.
종종 결혼한 유부남 유부녀와 사랑에 빠졌다는 상담을 하면 참 난감합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가요? 묻는 그 청년들에게 이미 답은 주어져 있습니다. 그러면 간통이나 간음을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간음을 어떻게 볼 것인가?
질문 하겠습니다. <여러분 우리나라에서 간통이 죄입니까? 아닙니까?> 성경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간통을 죄라고 답합니다. 결혼한 가정을 둔 사람이 배우자 외의 사람과 성적인 깊은 관계를 가질 때 그것을 간통, 간음이라 합니다. 성경은 분명 죄로 봅니다. 그러나 형법을 중시하는 사람들는 죄가 아니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2015년 2월 26일 헌법재판소에서 2대 7로 위헌결정이 내려졌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간통죄는 제정 62년 만에 폐지되었습니다. 그래서 형법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간통을 죄가 아니라고 합니다. 만일 간통을 죄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시대에 뒤떨어진 구닥다리다. 꼰대다.> 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간통죄가 우리나라에서 왜 사라진 것일까요? 간통이 줄어들어서일가요?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죄로 처벌하기도 힘들만큼 너무 흔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간통을 해도 처벌을 하기가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간음에 대한 세상의 생각과 성경의 말씀을 비교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은 간음을 어떻게 볼까요? 자신의 선택으로 상호 합의해서 했다면 죄로 처벌하지 않습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미화하기까지 합니다. 세상은 성을 도구화 합니다. 상품화 합니다. 광고를 듣거나 보면 성적으로 매력을 주려면 섹시해야 하고 섹시하려면 계속 다어어트를 하여 날씬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각인 시킵니다. 그리고 숱한 다이어트 상품을 판매합니다. 여기에는 인격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성을 상품화하여 판매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쾌락을 즐기라고 합니다. 결혼하지 않고 얼마든지 성을 즐기라고 합니다. 심지어는 결혼하고도 이성친구를 두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는 시대도 있었습니다. 여전히 성인들이 묻지마 관광을 하면서 성욕을 채우는 일들이 벌어집니다.
그러면 성경은 간음에 대해 뭐라고 합니까? 분명 7계명은 간음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 곳곳에서 감음을 죄로 규정합니다. 성경 인물 가운데 예레미야, 호세아, 욥은 간음에 대해 아주 강력하게 경고합니다. <간음을 피 흘리는 일이다. 간음은 가정을 파괴하는 것이다. 간음은 가족의 삶에 어둠을 만드는 일이다. 간음은 사회 질서를 무너뜨리는 일이다. 간음은 영적 타락의 표지이다.> 그렇습니다. 원래 성이란 하나님께서 부부의 친밀함을 위해 주신 선물입니다. 그런데 부부가 아닌 다른 대상과 성적 친밀함을 나눈다면 그 관계는 찢어진 관계가 됩니다. 문제는 부부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자녀들이 부모들의 문제로 고통을 당합니다. 평생 동안 마음에 고통으로 남고 일그러진 남성상, 여성상, 결혼관을 가지게 됩기도 합니다. 심지어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 때문에 이성에 대한 혐오감을 갖게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부부간의 친밀함 연합을 위해 성을 사용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렇다면 간음에 대한 예수님의 관점은 어떠합니까? 예수님은 간음하다가 잡혀 온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처럼 도로 쳐서 죽여야 한다고 비난하고 정죄하는 태도로 접근하지 않으셨습니다. 간음한 여인도 회복되어야 할 상처입은 영혼으로 보셨습니다. 먼저 상처 입은 그 마음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를 <죄가 아니다.> 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간음에 대해서 선명하게 죄라고 인식시켜주셨기에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고 말씀 하신 것입니다.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은 잠시 멈추어 서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표지판을 봐야 하는가? 성경이란 표지판인가? 우리는 여기에서 성경과 세상 사이에서 분별을 해야 합니다. 기준은 세상이 아니라 성경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간음이 죄가 아니라고 하는 세상 속에서 성경적 나침반을 따라가고 성경의 표지판을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혹시라도 7계명을 범했다면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때입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이혼까지 가지 않아도 이미 간통까지 갔다면 삶을 불태우는심각한 화제입니다. 그런 거짓된 사랑 육신의 정욕적 사랑은 가정을 불태우고 아내나 남편 자녀까지 불태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답은 아실 것입니다. 유부남이든 유부녀든 배우자가 있는 사람과 교제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죄일 것입니다.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가정까지도 상처를 입히는 행위입니다. 저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관계는 빨리 청산하는 것이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