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초원, 저물어가는 해, 잔잔한 바다. 눈 덮힌 산봉우리를 보고서 평온하고 아름답다는 강한 느낌이 밀려드는 것을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없으리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의 인식작용에 불과한 것일까. 아니면 인식과는 별개로 존재하는 것일까?
좋은 옷을 입는 것, 겉모습을 조화있게 꾸미는 것, 품위있게 처신하는 것, 조용히 이야기하는 것, 자세를 올바로 가지는 것 등은 모두 아름다움에 이바지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런 것은 시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듯 내면적인 상태를 외부적으로 표현하는 것에 불과하다.
여러분은 강물에 비치는 푸른 초원을 보고도 아무런 느낌을 경험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쳐 버릴 수도 있다. 물 위로 낮게 날아다니는 제비에 대해서 만일 여러분이 어부처럼 그것을 매일 본다면, 아마도 거의 아무것도 아닌 일로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그러한 것의 특별한 아름다움을 깨닫고 있다면 여러분 내부에서 무슨 일인가가 일어나 "너무 아름답구나!"라고 외치게 만들지 않겠는가? 이렇게 내면적으로 아름다움을 느끼도록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외부적 형식에서 오는 아름다움이 있다. 멋있는 옷, 훌륭한 그림, 매혹적인 가구, 혹은 아무런 가구도 놓여 있지 않은 번듯한 방, 짜임새가 완전한 창 등이 그것이다.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은 그 외부적 아름다움 뿐만 아니라 그 내면의 아름다움을 이루는 것이 무엇일까에 대해서이다. 그러한 내면의 아름다움을 갖기 위해서는 완전한 포기가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아무런 속박도, 아무런 부족함도, 아무런 저항도 느끼지 않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 그런 포기는 검소함이 함께 하지 않는다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는 검소하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적은 것에 만족하고 <더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는 것일까?
이처럼 깊은 내면적 검소함과 함께 포기가 있어야만 한다. 그 검소함은 마음이 무엇을 얻으려 하지 않게 하며, 욕심을 가지 않으며, <더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 극도의 소박함을 의미한다. 창조적인 아름다움을 가져다 주는 것은 포기와 검소함에서 우러나오는 소박함이다. 그러나 만일 사랑이 없다면 소박할 수도 검소할 수도 없다.
여러분은 검소함과 소박함을 말로는 할 수 있겠지만 사랑이 없다면 그것들은 단순한 강제의 한 형태에 지나지 않으며, 포기는 전혀 있을 수 없게 된다. 스스로를 포기하고, 스스로를 완전히 잊어버리는 사람이 사랑을 가지고 있을 때에만, 창조적인 아름다움의 상태는 이룩되는 것이다.
아름다움에는 외형적인 아름다움도 포함됨은 당연하다. 그러나 내면의 아름다움이 없다면, 외형적 아름다움에 대한 단순한 인식 작용은 타락과 붕괴라는 결과를 낳는다. 내면의 아름다움은 오직 사람들과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해 참된 애정을 느낄 때에만 존재한다. 그리고 그러한 애정이 있으면, 타인에 대한 배려, 신중성, 인내라는 중대한 인식이 생겨난다. 가수나 시인으로서 완벽한 능력을 갖고 있어도 그림을 잘 그리거나 말을 잘한다 해도 내면에 그러한 창조적 아름다움이 없다면 그 재능은 거의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불행히도 우리들 대부분은 단순한 기능인이 되어가고 있다. 우리는 생활방편을 얻기 위해 시험을 치르고 이런저런 기능을 익힌다. 그러나 내면 상태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채, 기능을 익히거나 능력을 기른다는 것은 세상을 추하고 혼란스럽게 만들 뿐이다.
만일 우리가 내면적으로 창조적 아름다움을 일깨운다면, 그 아름다움이 저절로 밖으로 우러나와 질서가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기능을 익히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스스로를 완전히 포기하는 것, 그리고 공포, 속박, 저항, 부족감 등을 전혀 느끼지 않게 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훌륭한 내면적 소박함이라는 의미에서의 검소함 없이는 스스로를 포기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겉으로는 소박해질 수도 있으며, 옷도 거의 갖지 않고 하루 한끼 식사로 만족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검소함은 아니다. 정신이 무한의 경험을 할 수 있어야만 -- 정신이 그러한 경험을 한 뒤에도 아주 소박해야만 -- 검소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상태는 오직 정신 <더 많은 것>을 바라지 아니하고, 소유를 원하지 아니하고, 나중에 대단한 존재가 되려고 하지 않아야만 가능하다.
내가 하는 말이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그것은 정말로 중요한 것이다. 기능인은 창조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세상에는 점점 더 많은 기능인 생겨나고 무엇을 어떻게 하면 되는지 잘 아는 사람들도 늘어가지만 그들이 창조자는 아니다. 계산기로 사람이 하루 열 시간씩 백 년을 고생해야 풀 수 수학문제를 단 몇 분만에 풀어 낼 수 있다. 이러한 놀라운 기계는 점점 발달하고 있다. 그러나 기계는 결코 창조자는 될 수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점점 더 기계처럼 되어가고 있다. 설령 그들이 반항을 한다해도 그 반항은 기계의 한계 내에서 이루어지므로 전혀 반항이라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창조적인 사람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포기 없이는 결코 창조적인 사람이 될 수 없다. 죽지 않을까, 무엇을 못 얻지 않을까, 어디에 못가지 않을까에 대해 전혀 두려워하지 않으며, 전혀 강요되지 않은 포기가 있어야만 한다. 그런 후에야 지극한 검소함과 소박함과 사랑이 존재하게 된다. 그 전체가 사랑이요, 창조적인 상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