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부 장려상
불효 심청
한밭고등학교 2학년 9반 40번 하보영
「아무에게도 내보이지 않았었던 나의 짠 눈물이 척척히 젖은 중학교 교복을, 마음 저 깊이 꽁꽁 감춰 놓았다가 이따금씩 먼지 털어 다시 넣어두는 옛 옷장 속 제일 낡고 애틋한 그 교복을, 다시 꺼내 수줍게 햇빛과 바람을 마주한다.」
저의 중학교 교복은 어머니와 같이 제가 배정된 중학교에 가서 졸업한 선배님들이 물려주신 교복 중에 대충 제 몸에 맞는 것을 골라서 3년 내내 입고 다닌 것입니다. 어머니께서는 미안하다시며 고등학교 때는 꼭 교복을 사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래도 중학교 교복은 소중한 저만의 추억입니다.
저희 가족은 아버지, 어머니, 오빠 그리고 저 이렇게 네 식구입니다. 아버지는 시각장애인이십니다. 아버지는 제 어린 시절 모습의 기억으로 저를 보십니다. 오빠가 어렸을 때 같이 게임도 했다고 어머니께 들었습니다. 그만큼 시력도 좋으셨고 자상하시고 아이들을 좋아하시는 아빠입니다. 그리고 제가 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어머니. 정말 무어라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소중하고 사랑하는 어머니. 어머니란 이름만으로도 마음이 온통 분홍색으로 번져 따스해지기도 하고, 가슴이 북받쳐 올라 나의 눈시울을 뜨겁게 만드시는 분입니다. 사랑으로 저를 먹이시고 온유함으로 저를 키우시고 진심으로 저를 대하셔서 감히 절대 그 진심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최근에 철이 조금 든 것 같은 오빠는 저와 7살 터울로 한 번도 저와 싸움 난 적이 없을 만큼 사이가 좋았고 저는 온 가족의 사랑으로 자랐습니다. 흐르고 넘치는 이 사랑이 심장부터 모세혈관까지 속속들이 스며들어 저를 이루었습니다. 2005년 3월 초등학교 6학년 때까지는…….
제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오빠는 대학교 입학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술에 취한 아버지는 오빠의 대학 등록금과 학비를 술에 부었고 일주일도 채 안되어 어머니의 마지막 희미한 빛인 나머지 돈마저 술에 담그는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그 날 어머니와 저는 우리에게 불어 닥친 따가운 바람에 못 이겨 여름밤 태풍이 몰아치는 것처럼 비를 쏟아냈습니다. 눈물에 얼굴이 젖고 배신감에 가슴이 찢겨 그 자리에 앉아 황혼이 올 때까지…….
남은 세 민들레 꽃씨는 원룸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살림의 반을 버리고 얼굴도 반쪽이 되었습니다. 가슴 속이 너덜너덜해 바람에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 같았습니다. 우리 세 가족은 살기 위해 안간힘을 썼습니다. 저희 어머니의 어깨에는 날개 대신 철로 된 바위가 얹혀져 자꾸만 어머니의 키를 작게 만들었습니다.
어머니는 아침부터 세탁물 걷는 일을 하셨습니다. 무릎에 관절염이 있는데도 아파트 맨 꼭대기 층부터 일 층까지 계단 손잡이에 의지하며 한 칸, 한 칸 힘겹게 내려오셨습니다. 후에 들은 이야기로는 어머니께서 어느 날에는 정말 주저앉아 울고 싶을 만큼 무릎이 너무 아픈 적도 몇 번 있었지만 오빠와 저를 생각하시며 다시 일어섰다고 하셨습니다. 그 일이 끝나면 열 두 시간을 꼬박 식당에서 일하시고 신문지들을 모아서 퇴근하시면 그것들을 정리하셨습니다. 열 네 살인 제가 도와주겠다며 신문지를 집어 들었을 때 어머니께서 너는 이런 거 하지 말라고 하시며 저를 한사코 방으로 밀어 넣으셨습니다. 그리고 미닫이문을 완강히 닫으셨습니다. 2평 남짓한 주방과 연결된 문은 미닫이 문이었는데 그 이유는 너무 좁아서 여닫이문을 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께서는 제가 알레르기성 비염이 있어 좁은 공간에서 신문지를 뒤적거리면 먼지가 너무 많이 날려서 비염이 더 심해질까 염려하셨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알레르기성 비염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자랐습니다.
운이 좋은날에는 아는 부동산에서 입주청소 일거리를 주셔서 낮에 제가 청소할 집의 열쇠를 받아와 어머니께서 밤 열 시에 식당일을 마치고 오시면 둘이서 같이 청소하러 갔습니다. 축시쯤에 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올 때면 장대비가 내리는 날도 있었지만 골목길에는 한두 명의 사람만이 지나가고 청소할 때 젖었던 양말이 눈보라가 쳐서 발이 꽁꽁 얼었습니다. 그렇지만 오는 길에 마음은 따뜻했습니다. 포근한 집에 들어와서 물에 젖은 듯한 축 늘어진 무거운 몸을 눕혀 저도 모르게 잠들곤 했습니다. 입주 청소 일거리가 없는 날이면 저는 밤에 어머니가 일 끝나고 오시기만을 기다리다가 어머니와 둘이 집 앞 계단에 앉아 빌라 건물 사이사이로 보이는 달과 별들을 보며 어머니의 어릴 적 이야기도 듣고 같이 줄넘기도 하고 집 앞 가로등 어두운 불빛 밑에서 배드민턴도 하며 행복에 가까이 가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같이 얼굴을 마주보며 담소를 나누는 것도 얼마 가지 못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오빠와 저의 학비를 마련하는데 너무 벅차서 밤에 식당일을 하나 더 구하셨습니다. 그러나 집안 사정은 점점 더 안 좋아지고 하루는 쌀통에 쌀이 한 톨도 없고, 하루는 천 원 한 장이 없어 삶이 무기력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 마다 어머니의 마음은 쿵쿵 내려앉아 숨을 쉬면 한숨이 나오고 가만히 있을 때면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저는 어떻게든 제가 짐이 아닌 힘이 되어드리려고 한 번의 웃음이라도 좋으니 어머니께 행복을 드리고 싶어 빗방울이 창문에 부딪치던 어느 날, 앞으로 공부를 더 열심히 하겠다는 편지를 써서 머리맡에 놓아두고 자는 척을 하면서 어머니가 오시기를 기다렸습니다. 어머니께서는 편지를 읽으시더니 제가 바라던 웃음은 보이시지도 않고 오히려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저는 그대로 자는 척을 하며 소리 없이 따라 눈물만 흘렸습니다.
제가 중학교 3학년이던 어느 날, 어머니께서 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시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하셨습니다. 한 달을 병원에서 지내셨고 다행히 그 때가 방학이어서 제가 병원에서 살다시피 하며 어머니를 간호했습니다. 낮에 잠깐 집에 생필품을 가지고 오려고 혼자 지하철을 탔습니다. 바쁜 사람들 속에 묻혀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멍하니 깜깜한 벽들이 빠르게 지나가는 창문을 보곤 했습니다. 가끔씩 어머니의 옆 침대가 빌 때면 그 자리에 누워 잠들었습니다. 어머니의 침대와 제가 누운 침대는 거칠고 두꺼운 손과 부드럽고 작은 손으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손을 꼭 잡고 잠들어서일까요? 그날 밤 꿈은 정말 행복했습니다.
제가 어머니를 따라 밤에 청소하러 다닐 때 친구들은 공부하거나 학원을 갔습니다. 친구들이 학교에서 돌아와 쉴 때, 저는 설거지와 방청소 그리고 마른 빨래를 개는 집안일들을 도맡아 해야 했습니다. 저는 이 모든 것이 아버지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솔직히 아버지를 마음에서 밀어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절 낳아주시고 절 키워주신 분이시니까 실망 같은 것 하면 안 되는 줄 알지만 제 이성이 감정과 합치되지 않아 눈덩이를 굴리면 더욱더 커지듯이 상처받은 제 마음도 그렇게 커져만 갔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어머니께서는 저에게 그러면 안 되는 거라고 그래도 아빠니까 용서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거라고 하시면서 불효한 저를 타이르셨습니다.
3년 동안 아버지와 협의해서 같이 살았다가 따로 사는 것을 세 번쯤 반복하다 보니 이사를 네 번 정도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돈은 더 사라지고 마음에 상처를 받아서 이제 그러지 않기로 어머니와 저는 약속했습니다. 그 사이 오빠는 군대를 제대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7개월 전 아버지와 어머니의 갈등을 말리려다 오빠가 넘어졌는데 운이 안 좋았는지 유리병을 짚어 유리병이 깨졌습니다. 유리 조각들이 산산이 부서지고 유리 조각에는 핏방울이 묻어있었습니다. 오른쪽 바지가 피에 젖어 흥건해 지고 손 주변은 온통 피바다가 되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저에게 선물 해 주신 곰 인형도 피에 젖었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오빠는 병원으로 실려 갔고 어머니께서는 놀란 가슴을 추스르려 애쓰시며 오빠의 옷을 챙기셨습니다. 저는 어머니께 괜찮을 거라고 위로 같지 않은 위로를 하고는 집에 혼자 남아 유리조각과 피를 치웠습니다. 그 피만큼 저의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날 새벽에 집으로 돌아오신 어머니와 함께 잠시 눈을 붙이고 다음날 같이 병원에 갔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 아들의 병실에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분간 제가 오빠의 간호를 하기로 하고 어머니는 친구 집에서 지내기로 하였습니다. 그 날 아침 어머니와 저는 여러 가지 이유가 뭉쳐진 눈물을 참기 위해 서로 아무 말도 없이 김밥을 먹었지만 헤어질 때는 쏟아지는 눈물을 감출 수 없어 길에서 부둥켜안고 울었습니다. 정말 간신히 헤어지고 저는 병원으로 돌아갔습니다. 다섯 시간의 긴 수술 시간 내내 수술실 앞 벽에 기대어 저의 의지와 상관없이 눈물을 흘리며 수술실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수술은 무사히 끝났지만 오빠는 손을 다쳐 일을 할 수가 없어서 경제적 부담은 더 심해졌습니다. 그럴수록 정말 효도할 길은 제가 건강하고 후에 좋은 직업을 가져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호강시켜드리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요즘에는 우리 남매가 공부를 열심히 하기에 어머니께서 더 힘이 난다고 하십니다.
솔직히 속으로 처한 상황에 대해 원망도 했습니다. ‘다른 애들은 돈 걱정 없이 편하게 어머니께 돈 받아서 쓰고 다니는데…….’ 라고 생각하거나 친구의 아버지를 보며 부러워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결론은 항상 공부를 더 열심히 하는게 어머니를 기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때는 친구들과 얘기할 때 아빠와 같이 사는 것처럼 거짓말을 할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거짓말을 하고나면 어머니께 왠지 죄송하고 잘못한 느낌이 들어 혼자 집에서 울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의 보살핌과 사랑을 받는 것보다 바다처럼 깊고 하늘처럼 넓은 어머니의 사랑을 받으며 자란 제가 더 행복한 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다짐합니다. 물속에 빠졌을 때 중간 깊이에서 물 위로 올라오는 것보다 발에 모래가 닿으면 그 땅을 힘차게 딛고 수면 위로 올라오는 일이 더 쉬운 것처럼 그 아이들의 부모님보다 저희 어머니가 혼자 힘들게 키우셨지만, 더 큰 자신감과 더 자랑하고 싶게끔 훌륭한 제가 될 것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사랑합니다.
절 낳아주시고 이만큼까지 키워주신, 저에게 있어서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제일 크고 영원히 제 편이신 어머니께 바칩니다. 5년째 어머니께서는 정말 못난 우리 남매를 믿어주시고 오직 저희만을 바라보고 키워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고 그 사랑에 부응할 수 있도록 열심히 살겠습니다. 어머니, 힘든 순간에도 저희에게 그릇된 행동을 보이시지 않고 저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감사함과 죄송스러움을 낱낱이 적기엔 저의 글 솜씨가 너무나 모자랍니다. 우리 세 민들레 꽃씨가 아직 피지 않았지만 앞으로 우리가 봄을 찾아 활짝 피어 홀로 계신 아버지께도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봄의 향기를 전해 줄 수 있도록 모두 힘냈으면 좋겠습니다. 어머니 진심으로 사랑하고 존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