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4년 항일 독립운동 단체인 권업회(勸業會)를 중심으로 하여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수립한 임시 정부. 같은 해 9월 권업회가 해산당하자 더 이상 활동을 지속하지 못하고 해체되었다.
이상설
1911년 항일독립운동을 하기 위하여 조직된 권업회는 이상설을 초대 의장으로 추대하고, 광복군 사관을 양성하기 위하여 1913년 사관학교 대전학교(大甸學校)를 설립·운영하였다. 또한, 러시아의 극동지역 총독과 교섭하여 광복군이 사용할 군영지를 조차하고, 광복군 병사의 양성을 위하여 양군호(養軍號)와 해도호(海島號)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그 결과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시베리아 전역에서 훈련받은 무장 병력 약 3만 명을 확보하게 되었다.
권업회의 이상설·이동휘(李東輝)·이종호(李鍾浩)·정재관(鄭在寬) 등은 시베리아와 만주 및 미주 지역에 흩어져 있는 무장 독립운동단체를 모아 효과적인 독립전쟁을 전개하기 위한 조직을 갖추기로 하였다. 이들은 러일전쟁 10주년을 맞아 러시아에서 반일 감정이 한창 고조되어 있었고, 또한 한국인의 시베리아 이민 50주년이 되는 때에 맞추어 1914년 대한광복군 정부를 수립하고 대통령에 이상설, 부통령에 이동휘를 선출하였다.
대한광복군정부 산하에 편성된 광복군의 규모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일본군경에 압수당한 독립운동 관계문서에 따르면, 1914년 당시 이상설 주관하에 있던 3만 명의 시베리아 병력을 제외하고도 만주에서 수만 명, 미국에서 855명의 한인이 훈련받고 있었다고 한다. 광복군 정부는 이들을 중심으로 국외의 모든 독립운동을 주도하면서 본격적인 독립전쟁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1914년 8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러시아 정부는 일본과 공동방위체제를 갖추고 한국인의 정치·사회활동을 금지하여 그 여파가 모든 한국인 단체에 미치게 되었다. 이어 같은 해 9월 대한광복군정부의 건립 모체가 된 권업회가 해산당하자 대한광복군정부도 크게 타격받고 더 이상 활동을 지속할 수 없어 해체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대한광복군정부 [大韓光復軍政府]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