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광주시 답사(2024. 5. 21) 안내 자료
광주시(廣州市)는 경기도 중남부에 자리 잡아 시로. 동쪽은 여주시, 서쪽은 성남시, 남쪽은 용인시·이천시, 북쪽은 하남시와 한강을 경계로 남양주시와 접하고 있다. 광주시의 동쪽 끝은 곤지암읍, 서쪽 끝은 오포읍, 남쪽 끝은 도척면, 북쪽 끝은 남종면이며, 동서 길이는 27.88㎞, 남북 길이는 30.26㎞이다. 면적은 430.99㎢로 경기도 전체 면적의 4.2%를 차지하여 도내 31개 시·군 가운데 13번째에 해당한다. 인구는 2024년 3월을 기준으로 하여 40만 5천여 명으로 경기도 전체 인구의 4.2%를 차지하여 31개 시·군 가운데 15번째에 해당한다. 시를 상징하는 꽃은 개나리, 나무는 은행나무, 새는 제비 그리고 동물은 소이다. 남한산성 :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남한산성로 731 *이동 거리 및 시간 : 반월당→ 남한산성 264km. 2시간 56분간
남한산성은 병자호란과 관련이 많은 유서 깊은 곳이다. 1636년(인조 14) 12월부터 이듬해 1월에 청나라가 조선에 대한 제2차 침입으로 일어난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 병자호란이다. 청나라의 숭덕제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이전에 배후의 안전을 확보할 목적으로 조선을 침공하였고, 인조와 조정이 남한산성에서 45일간 항전하였다. 그러나 청의 포위로 인한 굶주림과 추위, 왕실이 피난한 강화도의 함락, 남한산성의 포위를 풀기 위한 근왕병의 작전 실패 등으로 말미암아 항복하였다. 동아시아 역사에서는 명청교체기를 상징하는 중요한 사건이며, 조선으로서는 짧은 전쟁 기간에도 불구하고 전쟁 포로로 수십 만의 백성이 청나라으로 끌려가 그 사회적 피해가 유례없이 막심하였다.
그래서 남한산성은 그때부터 역사의 중심에 있었고 우리 귀에 익은 곳이다. 조선 시대에 서울과 남한산성을 이어 주던 나루인 삼전도(三田渡)의 굴욕을 다룬 소설과 영화를 통해서도 익히 알려져 있던 곳이라 이번 답사는 그 의미가 깊다고 하겠다. 남한산성은 조선 시대의 산성으로 기원은 통일신라 문무왕 때 쌓은 주장성(672)의 옛터를 활용하여 만일의 사태를 위해 조선 인조 4년(1626)에 대대적으로 구축하였다. 서울의 중심부에서 동남쪽으로 25km 떨어진 곳에 있는 남한산성은 지형적으로 평균 고도 해발 480m 이상의 험준한 산세를 이용하여 방어력을 극대화한 곳으로, 둘레가 12km에 이르며, 산위에 도시가 있을 수 있을 만큼 넓은 분지이므로 전쟁 시 임금과 조정이 대피할 수 있는 조선 왕실의 보장처(保障處)였다. 또 남한산성은 성곽을 쌓는 축성술 면에서 16세기에서 18세기까지 계속된 전쟁을 통해 동아시아의 한국(조선), 일본(아즈치·모모야마 시대), 중국(명나라, 청나라) 사이에 광범위한 상호 교류가 이루어진 결과이다. 이 기간에 유럽의 영향을 받은 화포의 도입과 무기 체계의 발달이 남한산성의 성곽 축성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남한산성 험한 지형을 활용하여 성곽과 방어시설을 구축함으로써 7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는 축성술의 시대별 발달단계를 잘 나타낸 남한산성은 총 12.4km에 달하는 성곽이 잘 보존되어 있다. 성곽을 유심히 살펴보면 돌의 종류나 성곽을 쌓은 모습이 제각기 다르다. 이걸 보아 남한산성이 어느 한 시대에 생긴 것이 아니라 기록상 통일신라시대에 쌓았던 주장성을 기초로 하여 조금씩 증축되어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는 증거이다. 또 병자호란 등의 국제 전쟁을 통해 동아시아 무기 발달과 축성술이 상호 교류한 탁월한 증거이자 7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는 성곽축성기술의 모습들을 발달단계별로 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수어장대(守禦將臺) 남한산성은 다른 산성들과는 달리 산성 내에 마을과 종묘·사직을 갖추었다. 전쟁이나 나라에 비상사태가 있을 때, 임금은 한양도성에서 나와 남한산성 행궁에 머무르고, 종묘에 있는 역대 선조의 신주(神主)를 옮길 수 있는 좌전을 마련하여 조선의 임시수도로서 역할을 담당할 수 있었다. 백제의 시조 온조왕과 산성축성 이서 장군의 사당 또 남한산성은 자연 지세, 건축구조, 도시 계획적 측면에서 모두 진정성을 확보하고 있고, 성곽과 산성 도시는 진정성의 측면에서 볼 때 충분한 역사적인 사료가 뒷받침되고 있다. 진정성을 충족하기 위한 속성인 형태와 디자인, 자재와 구성 물질, 용도와 기능, 전통 기술 관리체계, 입지와 주변 환경, 비물질적 전통, 정신과 감성 등의 측면에서 남한산성에는 다양한 기록유산과 연구물이 존재하고 있다.
남한산성행궁 성곽의 완전성의 측면에서 보면, 남한산성의 경관 요소를 군사·통치·민속 요소로 구분하면 각각의 경관 요소들은 남한산성의 전체적인 가치를 표현하는데 적절하게 구성되어 있다. 특히 군사적 경관 요소를 보면, 1925년 대홍수에 의해 유실된 동문의 일부 구간을 제외하고는 성벽과 장대, 대문, 승영사터 등이 온전히 남아 있고, 가능한 지속적인 보수와 개축이 이루어져 왔다. 남한산성 순회코스가 몇 곳이 있으나 짧은 일정 상 그렇게까지는 할 수 없다. 통치 경관 요소로서 좌전, 우실, 행궁, 좌승당, 인화관터 등의 읍치 시설도 재건되거나, 복원, 수리되어 민속 경관 요소에 해당하는 제례, 불교 의식, 전통 음식과 가양주, 비석, 누정 등은 주민들이 대대로 전승하여 오는 등 전체적으로 보호책을 마련하고 있다. 사적 제57호인 남한산성은 경기도 광주, 하남, 성남시와 접한 공간에 있다. 서울 근교에 있어 접근성도 좋다. 2014년에는 우리나라에서 11번째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다.
꿀팁자료ㅡ1 치욕의 삼전도(三田渡) 이야기 치욕의 심전도(三田渡)를 흔히 남한산성에 있는 지명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으나, 실제로는 서울특별시 송파구 삼전동에 있었던 나루로 삼밭나루라고도 불렸다. 한강 상류의 남안에 위치하여 서울과 부리도(浮里島, 또는 잠실도蠶室島)인 현재의 잠실지역을 연결하는 나루터로서 교통의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였다. 1439년(세종 21) 신설되었는데, 이는 한강에 설치된 최초의 나루터 중 하나였다. 그래서 삼전도는 서울에서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南漢山城)에 이르는 길목에 있었고, 영남로(嶺南路)를 지나는 사람 중에서 특히 상인들이 주로 이용하던 교통의 요지였다. 주로 사람과 말이 건너던 곳이었고 우마(牛馬)의 집결지였으며, 판교(板橋)와 연결되는 상업도로로의 기능도 수행하였다. 처음에는 나루터를 관리하는 도승(渡丞 : 나루터를 관장하는 종9품 벼슬)이 한 명 배치되었으나, 그후에 별장(別將 : 정7품 관리)으로 승격하여 관리토록 하였으며, 조선시대 왕실(王室)을 호위하고 대궐을 지키는 일을 맡아 보던 관청인 어영청(御營廳)이 관장하였다. 한말(韓末)에 이르러 도진회사(渡津會社)가 설립되어 담당하게 되었다. 이에 속하였던 선박은 최고 여섯 척까지 운영되었으나, 보통 세 척의 관선(官船)이 배치되었으며, 도진회사가 담당할 때는 두 척으로 감소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인조는 도성 주위의 요세인 남한산성에 피신했다. 그러나 주화파(최명길 일파)와 주전파(김상헌 일파) 대신들의 구국론에 휩싸였다. 주전파의 거두 청음 김상헌이 보였던 비분강개가 자못 흥미로웠다. 병자호란 때에 청음은 예조판서였고, 최명길(1586~1647)은 호조판서였다. 둘은 전혀 다른 방책을 각각 주장했다. 청음은 선전후화론(先戰後和論)을 강력히 주장한 주전파였던 반면 최명길은 청나라 진영을 오가며 화의에 앞장선 주화파였기 때문이다. 죽음을 무릅쓰고 온갖 수모를 겪으며 난국을 화의로 건지려 했던 최명길은 눈물을 뿌리며 항복문서를 썼고, 청음 김상헌은 이를 찢어버린다.
‘선비’의 도리가 아니라는 청음 김상헌의 일갈에 최명길은 찢어진 종이를 허리를 굽혀 주워 맞추었다. “대감은 찢으나, 나는 주워 맞추리다.” 결국 화친을 택해 45일 만에 청나라에 항복하게 된다. 인조는 세자와 신하 500여 명을 이끌고 삼전도에 나와 청나라의 황제 앞에 '三跪九叩頭(삼궤구고두)' 또는 '三拜九叩頭(삼배구고두')를 올리고 굴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삼궤구고두는 청 태종이 병자호란의 화의(和議)를 하는 조건으로 인조에게 강요한 치욕적인 항복 조인 의식이다.
치욕의 삼전도비
인조는 청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한번 절하고는 이마를 세 번씩 땅바닥에 조아리기를 하였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9번을 반복하여 조아리며 명백한 항복 의사를 표시함으로써 청나라와 ‘군신 관계’를 맺었다. 청나라 황제는 인조의 항복을 받고 자신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조선에 삼전도비를 세우게 하였다. 그러나 굴욕적인 비문을 쓰고자 하는 신하가 없었는데, 인조의 간곡한 부탁으로 도승지 겸 예문관 제학 이경석이 글을 짓고, 홍문관 수찬(정6품) 오준이 비문의 글씨를 썼다. 이후 오준은 그 치욕을 참지 못해 자신의 오른손을 돌로 짓이겨 못 쓰게 만들고 다시는 오른손으로 글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이 지역은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의 함락으로 인조가 청군(淸軍)에게 항복을 한 곳으로, 풍우에 시달려 비문조차 읽을 수 없는 청나라의 전승비(戰勝碑)인 삼전도비(1963년 사적으로 지정)가 있다. 또 이곳은 강물이 많아서 1950년대 말까지 나룻배가 다녔다. 지금은 잠실교가 놓이고 주변 농촌이 주거지화 되면서 나루터로나 상업도로의 요충지로의 기능은 완전히 상실하였다. 이번 답사에는 탐방할 기회는 없으나 남한산성과 가까운 역사적 유명한 곳이라 자료를 안내코자 탑재하였으니 뜻 있는 회원들은 참고하기 바란다.
화담숲 : 경기 광주시 도척면 도척윗로 278-1 *이동 거리 및 시간 : 남한산성→화담숲 29km. 40분간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서 꼭 한번 가 보고 싶은 곳으로 용인시에 있는 삼성 에버랜드(everland)와 광주시에 있는 LG상록수목원(화담숲과 화담채)라고 한다. 즉, 화담숲은 LG상록재단이 설립하여 운영하는 수목원이다. 서울에서 40분 거리로, 경기도 광주에 있는 생태수목원으로 LG상록재단이 우리 숲의 생태계를 복원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약 5만 평의 대지에 4천3백여 종의 국내외 자생 및 도입식물을 16개의 테마원으로 조성했다. ‘화담(和談)’이란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다’는 의미로 LG그룹 구본무 회장의 아호를 따 만든 명칭으로. 인간과 자연이 교감할 수 있는 생태 공간을 지향한다. 우리 숲의 생태를 최대한 보존하고, 자연을 사랑하는 누구나 편히 찾을 수 있도록 친환경적인 생태 공간으로 꾸몄다. 경기도 광주 화담숲 2006년 4월에 수목원 조성 승인을 받고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2010년 임시 개장하였다가 휴지기에 들어갔고, 약 16만 3,600㎡ 부지에 1차 조성을 마치고 2013년 6월 정식 개장하였다. 2015년 현재 단풍나무원, 철쭉· 진달래원, 수국원, 수련원, 이끼원, 반딧불이원, 암석원 등 17개의 다양한 주제 정원과 숲속 산책길이 조성되어 있고, 자생식물 및 도입식물 4,300여 종을 보유하고 있다.
꽃과 잎의 색이 화려한 5개 속(屬)의 식물(단풍나무속· 진달래속· 수국속· 벚나무속· 수련속)을 중심으로 특성화한 수목원으로, 단풍나무는 국내에서 가장 많은 종류를 보유하고 있다. 또 계곡과 어우러져 있는 30여 종의 이끼(솔이끼, 들솔이끼 등)를 볼 수 있는 점도 특징적이다. 그밖에 다양한 계절초화·양치식물·덩굴식물·고산식물·수중식물·자생식물들이 갖추어져 있다.
화담숲 연못
천연산림으로는 산벚나무림· 참나무류림· 일본잎갈나무림· 잣나무림· 소나무림이, 자생식물로는 백합과·미나리아재비과·천남성과 등의 170여 종류 식물이 생육하고 있으며, 이끼는 서쪽과 동쪽 계곡(주로 서쪽 계곡)에 자생하고 있다. 서식 동물로는 멧돼지·고라니·다람쥐 등의 포유류와 뻐꾸기·박새 등 25종류의 조류가 관찰되며, 특히 원앙(천연기념물 제327호)과 멸종위기 야생생물 2급으로 지정된 토종 거북이인 남생이(천연기념물 제453호)가 서식하고 있다. 반딧불도 이곳에 조성되어 시식하고 있다.
화담숲 자작나무 군락지 주요 테마원으로는 국내 최대 규모의 ‘이끼원’을 비롯해 1,000여 그루의 하얀 자작나무가 펼쳐진 ‘자작나무 숲, 소망 돌탑’, 명품 분재 250점을 전시하고 있는 ‘분재원’ 등이 있으며, 국내 최다 품종인 480여 종의 단풍나무를 비롯해 우리 숲에서 만나볼 수 있는 아름다운 꽃과 나무를 만나볼 수 있다. 화담숲 분재원 또 화담숲은 생물종 복원 사업의 일환으로 국립공원공단과 함께 국내에 자생하는 멸종 위기종인 반딧불이, 원앙이 등의 생태복원을 위한 서식환경을 연구 조성하고 있다. 이러한 생태복원 노력 덕분에 화담숲 곳곳에서는 우리에게 친근한 도롱뇽, 고슴도치, 다람쥐 등을 쉽게 마주칠 수 있다. 그 밖에 민물고기 생태관과 곤충체험관 등을 운영하고 있다.
관람을 도와주는 모로레일 화담숲은 쾌적하고 여유로운 관람을 위해 시간대별 입장 정원에 따른 100% 온라인 사전예약제를 시행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거동이 불편한 노약자나 아이도 함께 편히 관람할 수 있는 모노레일 탑승은 모두 온라인 사전예약제로 운영되고 있어 편리하게 관람할 수 있다. 또 자연의 지형과 식생(植生)을 최대한 보존하여 조성된 덕분에, 노고봉의 계곡과 능선을 따라 자연스럽게 자리 잡은 수목들의 다양한 모습을 볼 수 있다. 평소 산책을 하고 싶어도 몸이 불편해 트레킹 할 수 없는 장애인이나 노약자, 어린이 등을 위해 유모차나 휠체어를 타고 편안히 자연을 감상하여 힐링할 수 있도록 5km의 숲속 산책길 전 구간을 경사가 완만한 길로 조성하여 가족 단위 관람객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다. 그러나 화담숲은 모로레일을 탑승하지 않고는 종일 돌아다녀도 절반도 감상하기 힘든 곳으로 유명하다. 화담숲과 화담채는 온라인 사전예약제로 현장발매는 불가하며, 화담숲의 입장료는 경로 9천원, 성인 12천원, 모로레일 탑승권(선택사항) 순화코스는 9천원, 화담채의 입장료는 선택사항으로 경로 5천원, 성인 7천원이며, 문의 및 안내 031-8026-6666이다. 화담채 화담숲은 화담채과 두 문화공간으로 조성되어 있다. 그러나 이번 답사에는 화담채는 빠져 아쉬움이 짙다. 그래도 안내 자료로 올렸으니 참여회원은 눈요기라도 참고하길 희망하다. 화담채는 전통 건축에서 대문의 가장 가까이에 위치하는 독립된 건물로, 외부에서 오신 손님들을 맞이하는 문화의 공간이다. 화담채는 화담숲의 ‘첫번째 테마원’으로 LG상록재단의 철학을 담은 이곳은 일년 내내 담소가 끊이지 않는 곳이 될 것이며, 화담숲을 보다 다채롭게 경험할 수 있도록, 화담숲의 이야기를 새로운 시선으로 풀어낸 화담숲의 복합 문화공간이다.
화담숲 입구에서 본 화담채 특히 화담채는 화담숲의 이야기와 철학을 새로운 방식으로 소개하는 복합 문화 공간으로. 전체 면적 약 530평에 미디어아트관인 ‘별채’와 메인 건물인 ‘본채’ 그리고 지형의 고저차를 매끄럽게 연결시켜 주는 ‘오브제 계단’, ‘뜰(COURTYARD)’과 ‘옥상정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고객 여정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매표소를 거쳐 오브제 계단을 오르며 소나무 언덕을 감상하는 전이 공간을 거쳐 미디어관인 별채에 도달하게 됩니다. 미디어아트를 감상한 후 메인 건물인 ‘본채’로 입장하여 작품을 감상하고 옥상정원을 조망한 후 화담숲을 입장하게 되는 여정입니다. 관람 동선은 오브제 계단 → 별채 → 뜰 → 본채 → 옥상정원 → 화담숲으로 연결된다. 화담채는 화담숲 입구에 있는 복합문화공간으로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공존'이라는 화담숲의 철학과 이야기를 공감할 공간으로 구현하고려 노력하였다. 화담숲 입구에 위치해 손님들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사랑채로서, 예술 감상과 담소, 사유를 통해 화담숲을 깊이 있게 즐길 수 있도록 구성했다. 화담채 문화공간 사람과 자연을 향한 따뜻한 마음을 나누고 예술가의 시선으로 바라본 숲의 내밀한 이야기들을 다양한 작품을 통해 만나보며, 숲의 아름다운 여정이 시작되는 이곳에서 자연과 예술로 호흡하며 정답게 이야기를 나눌 문화공간이다. 화담채 본관의 ‘사랑’ 화담채는 한옥의 짜임새와 소재, 기술을 적용해 화담숲의 자연과 공간이 어우러지도록 했다. 공간은 1752㎡(약 530평) 면적으로, 오브제 계단, 미디어아트관 '별채', 본채, 뜰, 옥상공원 등을 갖췄다. 본채에서는 한국 전통가옥 고유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마당, 곳간, 사랑 등 한옥에서 따온 명칭, 콩기름을 바른 온돌장판, 대청마루 등을 통해서다. 서까래는 황새의 날개를 형상화했다. 황새는 환경부 멸종위기 야생생물 1급종이자 LG상록재단이 복원에 힘써온 종으로 의미를 더한다.
이석 작가의 인터렉티브 미디어아트 화담채 곳곳에서는 자연과 숲을 예술적으로 풀어낸 작품을 만날 수 있다. 별채에서는 생성형 AI를 활용한 미디어아트 등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공존’이라는 화담숲의 철학과 이야기를 새로운 방식으로 풀어낸 작품을 선보인다.
프랑스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이희원 작가는 <플라워>를 선보인다. 그는 화담숲 내 꽃들의 자생 과정을 수백 시간에 걸친 타입랩스로 촬영해 몰입감 높은 미디어아트로 완성했다. LG의 생성형 AI '엑사원 아틀리에'는 저작권 문제가 없는 3억5000장의 데이터와 화담숲의 이미지 6700장을 학습해 자신만의 화풍으로 화담숲의 사계절 풍경을 선보인다. 화담채 뜰에 설치된 최병훈 작가의 <물의 명상> 아트퍼니처의 거장 최병훈 작가의 <물의 명상>은 휴식과 성찰의 시간을 선사한다. 이밖에도 이태수, 이석, 정우원, 전아현 작가의 작품을 통해 화담숲의 자연과 첨단 기술의 조화를 느낄 수 있다. 겨울 휴장을 마치고 문을 연 화담숲은 4월까지 봄 수선화 축제를 진행한다. 10만 송이의 수선화가 화담숲과 곤지암 리조트 광장 일대를 화사한 노란 빛으로 물결을 이루는데 우리 카페에서는 5월의 예정지라 그 장관을 볼 수 없어 유감이다. 꿀팀 자료ㅡ2
신익희 선생 생가 :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서하리 160-2 이번의 꿀팁 자료ㅡ2는 해공 신익희 선생 생가를 소개할까 한다. 경기도 광주는 한양과 가까워 예로부터 역사적 위인들이 많이 안장(安葬)된 곳으로 유명하다. 조선 초기 세조 때 영의정을 역임한 최항 선생 묘, 조선 초기의 명재상 고불 맹사성 선생 묘, 조선 중기 때 명신 신흠 선생 묘, 임란 때 신립 장군 묘, 한성부판윤을 지낸 이극증 묘, 고려 말과 조선 초의 절신(節臣) 상촌 김지수 선생 묘, 허난설헌 묘, 의안대군 방석 묘 등 그밖에 여러 위인들의 묘역이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 근대의 정치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정치가이며 독립운동가인 해공 신익희(申翼熙, 1894~1956) 선생의 생가도 있다. 이번 우리의 답사코스인 남한산성에서 화담숲으로 이동하는 중간에 있어 접근성도 뛰어난다. 그러나 이번 답사에 제외되었지만 군대사의 위인 신익희의 가옥은 안채와 바깥채로 구성되어 있는데, 원래 지금 있는 자리에서 동남쪽으로 약 200m 떨어진 곳에 있었다고 한다. 고종 2년(1865) 대홍수로 집이 파손되어 옮긴 건물은, 전체적으로 20세기 초에 크게 고쳐 지은 것으로 짐작한다. 해공 신익희 선생 안채는 T자형 평면을 이루는데 가운데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안방을 두고 왼쪽에 건넌방을 두었고 안방 앞으로는 부엌을 두었다. 바깥채는 ㄱ자형 평면으로 가운데에 대문을 두고 왼쪽에 2칸 사랑방을 두었다. 이 집은 전통 한옥의 외관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20세기 초 경기지역 중 소지주 계층의 가옥 형태를 취하고 있다. 신익희 선생 생가 신익희 선생은 1894년 6월 9일 경기도 광주 초월면 서하리 사마루(社村)의 소론계 명문가 출신으로 태어났으며, 본관은 평산(平山), 호는 해공(海公)이다. 신익희는 세종 때 좌의정(정1품) 문희공 신개(申槩)의 후손으로 자헌대부(정2품) 장례원경(정2품)을 지낸 아버지 신단(申檀)과 그의 넷째 부인 동래 정씨 정경랑(鄭敬娘)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해공 신익희 선생 동상 아버지 신단은 판서와 장례원경을 지낸 인물로 고향에서는 모두 신 판서로 불렸다. 해공 신익희는 독립운동, 상해 임시정부 및 해방 전후의 활약상도 많았으며, 1946년 국민대학교 전신인 국민대학관을 설립하여 교육운동도 하였다. 1956년 제3대 대통령 야당 후보로 선출되었으나, 1956년 5월 5일 새벽 5시경, 부통령 후보 장면과 함께 호남선 열차를 타고 자유당의 이승만과 맞서 호남지방으로 유세를 위해 전북 이리로 향하던 중 열차 안에서 뇌일혈로 졸도했다. 신익희 선생 친필 비석군 수행원들이 인공호흡을 시도하며 기차 안에서 의사를 찾았지만, 한 사람도 없었다. 결국 신익희가 졸도한 후 45분 만에 열차는 이리역에 도착하여 역에서 가까운 호남병원으로 달렸지만 끝내 숨졌다. 신익희의 정확한 사망 장소는 불상이나 이리역과 함열역을 지날 무렵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로 인해 국민은 큰 충격에 빠지기고 비탄에 젖기도 하였다.▣
*귀가길(반월당) ㅡ이동 거리 및 시간 : 화담숲 → 반월당 249km. 2시간 55분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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