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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써둔 것을 찾아 다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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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글은 2017년에 쓴 난삽한 미완의 글임을 알려드립니다.)
忠恕ㅡ1
(글을 써 놓고 계속 수정보완을 하다보니 일목요연하질 못하고, 글 흐름이 뒤죽박죽된 느낌입니다. 이걸 고쳐 잡아 일관되게 새로 쓰려니 꽤나 귀찮을 듯싶어 흠집이 있는 대로 내보이니 읽는 이에게 죄송한 마음입니다. 온전함이란 인간사에서 있을 수 없다는 진리를 핑계삼습니다.)
공자가 거칠 것 없는 큰 우주라면 맹자는 맹랑하다. 맹자를 추긴 신유학도 마찬가지다. 도가, 불가와 싸우고 북쪽 오랑케를 무찌르려니 맹자처럼 강팍해질 수 밖에 없었을지도 모르겠다는 느낌이다. 그저 소박한 충서忠恕와 인仁으로 거칠 것 없이 나갈 수 있었을 것같은데.
핵심부터 간단히 말해두는게 좋을거 같다.
충서忠恕의 전통적 해석은 진기심盡己心(제 마음을 다한다)과
추기推己(자기를 미루어 남을 헤아린다)다. 일단 이것들을 괄호 속에 넣어 에포케(판단중지)하자. 그렇지 않으면 워낙 대단한 위세라서 그에 사로잡혀 그밖으로는 한발자국도 나가지 못할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일단 이것을 우상으로 보고 제쳐두자는 얘기다.
a를 미루어 b를 헤아리는 것이 타당하려면, a와 b가 어느 측면에선 같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 전제를 충족시키는 것이 바로 忠恕다. 中心으로서의 忠(감추워진 한가운데 마음)은 남들(汝=女)에게 있어서도 같은(如) 마음(心) 즉 서恕라는 것이다. 이것이 확보되고 나서야 비로소 나로부터 남에게로 미루어나갈(推) 가능성이 열린다. 그리고 이 推의 추동력으로서 어질음(仁)이 요청된다.
忠은 中心으로 한 가운데 깊이 숨어 들어 있어 겉으로 들어나지 않는, 다시 말해 의식에 떠오르지 않는, 그러면서도 변화무쌍하게 늘 일어나는 마음들을 빠짐없이 챙겨 조견照見하고 주관하고 다스리는, 이 마음들을 주관화시키고 동시에 객관화시키는 그러면서 자신은 결코 주관화되거나 객관화되지 않는, 그리고 쉼없이(無息) 언제나 깨어있는 '텅빈 하나의 큰 마음자리'다. 여기에 진기심盡己心(마음을 다한다)이라는 알다가도 모를 소리가 자리할 곳이 없다. 진기심이 자기 마음을 다한다는, 그래서 정성을 다한다는 의미로 쓰이건 또는 위 사람 모심에 온 마음을 다하기 위한 전단계로 충성 충과 관련된 의미로 쓰이건, 이것 또한 숨은 마음이 관리하는 한 조각 마음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변화무쌍한 마음들은 제각기 다 다르나 이를 주관하는 숨은 마음은, 사람구실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똑같이 지니고 있다. 이게 남(汝 女)과 같은(如) 마음(心) 즉 서恕다. 성상근性相近의 논리다. 변화무쌍한 마음 모습들은 습상원習相遠에 딸린 것이겠다.
한마디로 한가운데 숨어 있는 마음은 누구나 다 같다는게 忠恕다. 이렇게 된 후에야 恕의 전통적 해석인 남에게로 미루어 나가는(推) 작용이 비로소 가능하다. 그리고 남에게 받은 대로가 아니라 어질게 미루는 추동력이 어질음(仁)이다. 자기가 당한 대로 혹은 격은 대로 남에게 되갚는 되값픔 마음씨(자극S-반응R 심리학)가 아니라 자기 아픔을 헤아려 남에게는 그런 아픔을 주지 않으려는 어질은 마음씨(仁)이어야 한다는 얘기다. 미루어 남을 헤아려 주려는 어진 마음씨(仁)는 유가 주장대로 본성에 있을지도 모르지만 또한 요청되어야 한다. 사람은 어질은 것이 아니라 모름지기 어질어야 한다. 맹자로부터 시작되는 맹랑하나 이젠 진부하기 짝이없는 성선설이나 사단얘기도 괄호로 쳐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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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의 얘기가 핵심이다. 자연히 논리비약이나 문맥의 거침과 복잡함이 있다. 뭉뚱그려 결론을 한꺼번에 얘기하려니 그리 되었다. 이제 사정 하나 하나를 풀어 얘기해보도록 한다.
論語 4편 里仁 15章
子曰 參乎
吾道一以貫之
曾子曰 唯
子出
門人問曰 何謂也
曾子曰 夫子之道忠恕而已矣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삼(증자 이름)아, 나의 도는 온갖 것을 하나로 꿰뚫었다."
그러자 여러 제자 가운데서 오로지 증자가 조용히 읊조리듯 "예에"라고 대답하였다.
공자께서 나가시자, 말뜻을 못 알아들은 증자 제자들이 긍금하여 증자에게 "무슨 말씀이지요?"라고 물었다.
증자가 "선생님의 도는 충서뿐이니라." 라고 일렀다.
충서가 중요하구나 하는 느낌을 받은 것은 인자하신 고 김 태길 선생님의 대학 3한년 때 강의이었지만, 충서가 무엇인지를 남에게 일러줄만하게 깨닫지 못한 채 오십 여 년이 흘렸다.
(論語 里仁 15章에 대한 도올의 문헌학적 비판은 훌륭하다. 도올은 이 시대 가장 훌륭한 학자다. 단 한가지 흠이 없다면 더 훌륭할텐데. 뭣 때문인지 지나친 성정에서 자기自欺하는 기미가 있는데, 이를 싹뜩 잘라내고 그저 진솔해진다면, 얼마나 더 커다란 영향을 뿌려댈까! 참으로 아쉽다. 하기사 그러한 성정은 스스로 내노라하는 대학자에겐 대체로 예외가 없는 듯하다. 어떻든 여기서는 이 시대의 최고 학자 도올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문헌의 주해를 모두 괄호속에 넣는다. 도올 논어 3권 첫쪽에 나오는 "신참내기는 떠들지마라"는 好學自訟(호학자송이라, 참 도올답구나! 참고ㅡ논어 5篇 公冶長 26章 自訟章이 있음)도 훌륭하나 지나치고 반쪽 얘기에 불과하다. 인간이기에 그러하다. 주해도 일종의 선입관, 선판단으로 작용하기 마련이다. 충서에 대해 도올은 문헌비판과 엉뚱하게 신유학이 저질은 것에 걸래질만 하다 만 듯한 느낌이다. 제잘난 맛이다. 정작 충서 얘기는 한마디도 않한거나 진배없다.)
오늘(17. 9. 8) 오전 우암산을 오르다 大學章句 10章 治國平天下 2節을 봤다. 동양고전DB를 통해 이 광호 교수가 하는 번역을 들으면서 퍼뜩 "아!" 하는 느낌이 들었다. 忠을 글자 그대로 中心이라 말하고 이것을 다시 "속 마음"이라 말해, "속 마음!" 참 신기한 말이라고 느꼈다. 그래 되새겨 보는 순간 "속 마음" "가운데 마음" "숨은 마음" "드러나지 않는 마음" 이 연상되어 "아!" 하는 놀람 소리가 절로 나왔다. 신유학적 전통에서 풀이하던 "자기 마음을 다한다"는 진기심에 대한 의혹이 순간 싹 가시는 듯했다. 마음을 다한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되었다. 진기심은 충의 본래 뜻인 한 가운데 깊이 들어 있는 마음과 아무 상관이 없다. 진기심에 긍정적인 의미도 있겠으나, 반면에 마음을 다 해 받들어 모신다는 충성 충과의 의미연관에서 볼 때, 그것은 부정적 의미로 고질화되고 병폐가 된 유교의 잔재이면서 또 유교를 그 모양으로 만들어 간 단서가 되기도 한다. 마음을 다한다는 것은 마음을 다 받친다는 것이다. 왕에게다. 어쩌면 충이 충성 충으로 전락하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대학장구 10장 2절 본문을 실른다.
所惡於上 毋以使下 所惡於下 毋以事上 所惡於前 毋以先後
所惡於後 毋以從前 所惡於右
毋以交於左 所惡於左 毋以交於右
此之謂絜矩之道
윗 사람에게서 싫었던 것으로써 아랫 사람을 부리지 말고, 아랫 사람에게서 싫었던 것으로써 윗 사람을 모시지 말라.
앞 사람에게서 싫었던 것으로써 뒷 사람 앞에서 하지 말고, 뒷 사람에게서 싫었던 것으로써 앞 사람을 따라가며 하지 말라.
오른 쪽에게서 싫었던 것으로써 왼 쪽을 사귀지 말고, 왼 쪽에게서 싫었던 것으로써 바른 쪽을 사귀지 말라. 이는 혈구지도絜矩之道 즉 기준(자,척도矩)을 헤아려(絜) 삼는 방도를 말한 것이다.
그리고 주소註疏 말미에서 이렇게 이른다.
所操者約 而所及者廣 此平天下之要道也
잡은 것은 따라야 할 기준(約)뿐이지만, 이것이 미치는 바는 한량없이 넓다. 이것이 바로 천하를 공평히 다스리는 요체가 되는 방도다.
이 광호교수가 기준(矩)과 잡은 것(約)을 忠이라 풀며 충을 속마음이라 말하고, 널리 미치는 소이가 恕라 말한다.
한마디로 己所不欲 勿施於人(내가 바라지 않는 것은 남도 바라지 않으니 남에게 시키지 말어라)이다. (論語 12篇 顔淵 2章)
이제 느낀 바를 일러 공자님 앞에서 문자를 좀 쓰려고 한다. 보통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들 알고 있으나, 가만히 생각해보니 꼭 그런 것도 아닌 듯싶다. 이미 다 알고 있는 이에게는 내 것이 된지 오래 되었기에 진부하여 새삼 끄적거릴만한 감흥이 없다. 그러나 고심고심하다가 이제 겨우 힘들여 깨달은 이에게는 그 감흥이 "유레카!" 라고 소리칠만큼 진하다. 그러니 이 놀라운 느낌을 살려 얼른 적어놓아야지, 그렇지 아니하면 감탄의 정은 사그라지고 시들기 마련이어서 쓸만한 게 이윽고 사라져버리고 만다. 이런 마음을 헤아려 공자님 앞에서 문자쓰는 짓을 너그러운 미소로 보아주시길 바란다.
각설하고, 내가 싫어하는 것은 남도 싫어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까? 나의 마음을 알고 이를 미루어 남의 마음을 헤아린다고 하는데, 이게 어떻게 가능할까? 이것이 가능하려면 한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사람의 마음은 다 똑같다는 것이다. 그래야 내 마음을 미루어 남의 마음을 알 수 있는 길이 열린다.
그런데 알다가도 모르는게 내마음이라고 하는데, 하물며 어찌 남의 마음을 알아 같으니 다르니 따진단 말인가? 기실 내마음만 해도 수시로 바뀐다. 기뻣다가 노여워웠다가 슬펐다가 침울했다가 즐겁다가 ~~ 늘 변화무쌍하다. 이러니 내마음이란게 어디 하나로 고정해 잡을 수 있단 말인가. 내마음을 미루고 자시고 할 여지도 없는거 같다.
그래 忠이다. 충의 본래 뜻인 "한 가운데 마음" 말이다. 한 가운데가 뭔가를 잠시 헤아려보자. 마음을 삼차원의 둥근 구로 보자. 구 밖의 가상자리는 다섯가지 감각을 느껴 아는 마음 자리다. 찔려 아프다는 느낌 마음, 맛나다는 느낌 마음, 색깔이 찬란하다는, 소리가 아름답다는, 등등의 느끼는 마음들이 자리 잡은 곳이다. 또 외부와의 관계 즉 분위기와의 연관에서 생겨나는 슬픈 마음, 즐거운 마음, 화나는 마음도 ~~ 둥근 구 내부의 가장자리 안쪽 마음자리일 것 같다. 이러한 마음들은 제각기 다 다를 뿐만 아니라 한 사람에게 있어서도 늘 달라진다.
자! 둥근 구 한 가운데는 어떤 마음일까? 표피에서 일어나는 찔려 아프다는 느낌을 객관화시켜 알고 판단해 다스리고 주관하는 마음자리다. 이 자리는 아픈 느낌에 좌지우지되지 않는 마음자리다. 심한 충격일 때는 이 마음자리도 잠시나마 충격에 휩싸일 수도 있으나 곧 회복된다. 도올처럼 어려운 말을 한번 써 보자. 데칼트의 코기토요, 칸트의 선험적(초월적) 주관 혹은 선험적 통각 마음 자리다. 나는 어려운 이런 철학적인 말들을 싫어한다. 이런 말 자체가 생겨난 소이가 좀 구린 구석이 있기에 그러하다. 이런 말을 쓰기 시작하면 지도 모르는 소리를 지껄려대는 자기自欺의 길로 들어서기 마련이다. 탄생경로가 그러하듯이.
한 가운데 깊이 숨어 있는 이 마음 자리는 결코 대상화될 수 없다. 그래 숨어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조금도 쉼이 없다(無息). 늘 살아 있어서 변화무쌍한 모든 마음들을 훤히 본다(照見). 이 마음 자리는 천근 만근의 무게 중심을 잡도록 훈련을 쌓아야 한다. 맹자의 호연지기浩然之氣 기르기도 이 마음자리 氣를 기르는 것으로 보면 딱이다. 그래야 아무리 큰 충격이 닥쳐도 조금도 흔들림 없이 뱃심 좋게 떡 버텨 무게 중심을 잡고 제 자리를 지켜낼 수 있다. 그래야 사리판단이 바르게 될 소지가 마련된다.
忠은 말 그대로 가장 깊은 한 가운데 마음으로 탕탕비어 숨어 있다. 여기는 아픈 마음과 같은 어떤 마음이 있는 곳이 아니고 가상자리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마음들을 헤아리고 다스리는 마음자리다. 다른 사람도, 적어도 사람구실을 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텅빈 마음 자리를 지니고 있다. 아무 마음이 없는 마음자리니만큼 텅빈 이 마음 자리는, 이것이 텅 비어있기에, 모든 사람들에게서 다 똑 같다.
그래서 如心, 如如心이요, 恕다. 같은 마음이다.
이렇게 해서 누구나 헤아리고 다스리는 똑같은 마음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제 나를 미루어 남에게로 가는 길이 마련된다. 仁이 등장할 차례다. 남들도 나와 똑같은 인간이니 나처럼 대우해 줘야(仁) 화평해진다.
그래 平天下다.
한가운데 마음과 이것이 주관하는 모든 마음들의 관계를 人心道心의 문제와 연결시켜 보는 것도 재미가 솔솔할 것같다. 유가에서 도심은 성선설에 기인되는 것같다. 도심이건 善心이건 인심이건, 이들이 의식에 떠오르는 마음이라면, 이들 또한 한가운데 마음이 주관하는 마음영역에 속하는 마음들일 뿐이다.
주희의 중용장구 서ㅡ4에서 心之虛靈知覺一而已矣
마음의 비어 있는 신령한 측면과 물질과의 접촉에서 생기는 지각과 감각의 측면은 본래 하나일 뿐이다.
주자어류 권5
心之全體湛然虛明, 萬理具足, 無一毫私欲之間, 其流行該徧, 貫乎動靜, 而妙用又無不存焉. 故以其마未發而全體者言之, 則性也, 以其已發而妙用者言之, 則情也. 然心統性情
마음 전체는 맑고 비어 밝다. 그래서 만 가지 온갖 이치가 다 구비되어 있다. 한 터럭의 사욕도 끼어 있지 않다. 마음이 유행할 때 두루두루 다 갖추어 있어, 동정을 관통하고 또 그 묘한 쓰임이 미치지 아니 하는 곳이 없다. 그런고로 그 미발의 전체를 두고 말하면 성이고, 그 기발의 묘한 씀을 두고 말하면 정이다. 그러하나 마음은 성정을 하나로 묶어 다스린다.
주희의 그럴 듯한 말들에 대한 해석은 뒤로 미룬다.
10월 24일 또 하나 놀라움을 맛봤다. 경희대 휴머니타스 칼리지 객원교수 민 승기라는 분의 "슬라보예 지젝 ㅡ 라깡과 헤겔 '사이' "라는 두 시간 짜리 동영상을 봤다. 처음에는 무슨 얘긴가 하고 영 감을 잡기 어려웠다. 동영상에 비친 어린 대학생들의 눈동자들이 영민하게 빛났지만, 저걸 알아들을 수 있을까 의심스러웠다. 어렴프시 아! 그런거로구나 하는 느낌이 와, 틈틈이 사이를 두고 봤다.
아주 간단히 핵심을 집으면, 철학이라는 사건에서 '사이'는 비어 있음이란다. 사이는 사유할 수 없는 것인데, 이 사유불가능을 사유해야 한다는 것이 지잭의 사이 존재론이란다. 데카르트를 빌어 표현하면, 기표로서 객관화된 생각하는 놈res cogitans이 아니라 단순히 그저 생각함Cogito이다. 칸트를 빌면 모든 기표에 따라붙는 그러나 자신은 결코 기표되지 않는 '나는 생각한다'이다. 선험적(선천적) 자아 내지 통각이라고나 할까? 달리 말하면 어떤 기표를 기표로서 완성시키는 '공집합'으로서 주체이란다. 그러면서 또한 그 기표체계를 열린 것으로 그래서 온전하지 못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근원적으로 볼 때, 그것 자신이 상징계나 상상계를 만들어냈을 실재이지만 결코 이런 두 세계에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 보일 수 없는 비여있음으로서 주체이란다. 엄격히는 주체라고 해도 안 된다. 왜냐하면 주체라고 하는 순간, 그것은 기표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것을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주체란 말과 같은 뜻으로 보면 안 된다. 어떤 말로도 표시될 수 없는 것이지만, 텅 빈 이것만이 진짜 있는 것(실재)이고, 이것이 마주하는 온갓 것들 모두는 상징계이거나 상상계이다.
정신분석학은 우리의 현실에서 보이는 온갖 도착된 주체에서 정상적 주체 가능성을 도모한다.
여기 서양철학적 언급에서 말하는 진짜 주체가 바로 앞에서 충서와 관련해서 말한 '숨어 감추어진 빈 마음자리'로서 忠을 두고 말하는것으로 해석해도 큰 무리가 없을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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忠恕ㅡ2시작
비튜겐슈타인 논리철학논고 머릿말에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고,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서 (6.54) "나를 (진정으로) 이해한 사람은 나의 명제들을 무의미한 것으로 인식한다" 라고 말한다. (철학과 현실, 2017 가을 114호 210-211쪽 재인용) 이제야 비튜겐슈타인 말이 이해된다. (2017. 11. 30. 새벽)
비튜겐슈탄인은 스승 버트란드 럿셀조차도 트락타투스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미루어보건데, 럿셀은 바로 "생각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을 그냥 지나쳤다는 얘기일 것이다. "생각할 수 없는 것"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생각할 수 있다. 딱 하나를 제외하고. 이 하나가 무엇일까? 생각의 주체이다. 이 주체는 결코 생각의 대상으로 잡아낼 수가 없다. 예컨데, 내가 '나'를 생각해 보자. 그리고 또 '나를 생각하는 나'를 생각해 보자. 이렇게 무한히 뒤로 되돌아 갈 수 있겠다. 그래도 여전히 또한 생각하는 나는 뒤로 물러나 있어 생각하는 내용 속에 포함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바로 이런 나를 두고 여기서 빈공간, 빈자리라고 말한다. 비어 있다는 것은 그것을 언어나 관념으로 혹은 기표로 표시할 수가 전혀 없으니 텅 비어 있다는 말이다. 여기서 생각되는 나를 경험적 자아라고 부른다면, 언제나 이미 있지만 아직은 있지 않은(always already and not yet) 즉 언제나 뒤로 물러나는 자아를 초월적 자아라고도 부룰 수 있겠다. 또는 칸트처럼 이렇게 말해볼 수도 있다. 내가 '나' 라는 관념을 떠올릴 때, '나' 라는 관념에는 "내는 생각한다"라는 쓸 데없는 나머지가 항상 이면에 따라붙는다. (마치 엘리언처럼)
이처럼 생각대상이 될 수 없이 항상 되로 물러나 숨어있는 생각주체가 마치 여분의excess 빈자리로 실재하고 있다. 이 빈자리가 행위결단의 주체로 윤리적 주체요, 종교적 주체가 된다. 이렇게 보면 소위 사이 혹은 틈 윤리학은 언표대상이 될 수 없음이 밝혀진다. (17.12. 3일 아침)
주체, 빈공간, 탈구된 것out of join, 실재 따위는 모두 "존재의 연쇄"(great chain of being)로부터 벗어난 틈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존재론적으로 또는 눈리적으로 이 탈구가 먼저라는 것이다. 제 삼의 공간이 먼저다. 그런데 주체는 비여있음의 허전함, 심연의 불안함을 못 이겨 스스로 의미, 구조, 기표가 되려한다. 그래서 실재는 스스로 기표로 소외된다. 그러나 이렇게 기표로 소외된 주체(실재), 전도된 주체는 그저 일시적 봉합일 뿐이다. 진짜 주체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잠시 억압된 것이기에 다시 진째 주체로 되돌아온다. 이것이 반복이다. 노자 도덕경에서 도가도 비상도라 한다. 간단히 도를 기표하면 도가 아니다. 도덕경 첫문구가 이처럼 쉽게 풀린다니!!!
주체는 헐벗은 빈것으로 심연에 대한 불안을 느낀다. 반면에 두려움은 기표나 대상에 대한 것이다. 주체는 그래서 불안을 없애고자 기표가 되려고 한다. 또한 오직 진짜 주체만이 이런 기표에 저항할 수 있다.
텅 비어있음에 불안해 그럴듯한 기표를 얻고, 옷을 입고, 명함을 만들려고 한다. 스스로 자기로부터 소외되려 한다. 이른바 자발적 소외다. 그래서 도착된 주체로 전락한다. 온 우주와의 대적할 수 있음을 스스로 포기한다. 현실의 일부로, 재현구조로 전락하고 만다.
(주체를 알려면 죽을 줄 알면서그대로 가는 자 예컨데 을사보호조약 후 스스로 목숨을 끊은 매헌을 생각해보라)
데카르트는 코기토 즉 주체를 주체할 수 없어 실체 즉 레스 코기탄스로 바꾼다. 기독교에서 실체(신)가 주체(인간)로 즉 예수로 바뀌며 이것이 신의 사랑이다. 헤겔도 이 비슷하다.
제 삼의 빈공간은 헤겔이 좋아하는 이른바 '사라지는 매개자'다. 매개자가 사라지면 이제 남는 것은 1과 2의 분리 대립된 두 공간뿐이다. 변화 측면에서 보면 1도 사라지고 남는 것은 제 2 공간만 남는다. 제 이공간은 제 삼 공간요소들을 먼저 사라지게 한다. 그러나 사라짐은 죽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억압될 뿐이요, 다시 되돌아온다. (반복)
라캉의 판타지 공식은, 결핍된 주체와 결핍된 타자가 만나는 상황에서 도달할 수 없는 욕망체계를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이 욕망체계는 마른모꼴로 표시되며, 이는 무한히 연기됨을 상징한다. 말하면 칸트에서 이 욕망체계는 도달될 수 없는 규제적 예지계로서 작동한다.
타자의 매개가 없으면 나는 나일 수 없다ㅡ헤겔
데리다가 보기에, 현존의 형이상학은 대립구조다. 여기서 주체의 주체할 수 없음을 달래고자 주체에게 그럴듯한 한 자리를 마련해주고저 한다. 이것이 주체의 현존화, 재현화, 의미부여, 기표화이다. 예컨데 학장, 총장 명함을 세기고 이것을 자기라고 착각하며 산다.
칸트에서 자유는 진정 제 삼의 것으로 확인하고서도, 이를 끝까지 몰고 나가지 못하고 만다. 그래서 주체하기 어려운 제 삼을 방기하고, 제 이의 예지계로 되돌아가고 만다. 이렇게 되어 제 삼의 회복을 위한 매개자로서 헤겔이 필요하게 된다.
빈공간 즉 나머지는 의미화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의미는 나머지 없이 딱 떨어질 수 있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여분의 것으로 배설물이요, 쓰레기 같은 것이기에 누구도 욕망하지 않는다.
첫댓글 안녕하세요 ~
교수님!
잘 읽었습니다.
[忠恕]
忠恕는
仁을 행하는 방법이고
克己福禮입니다.
己所不欲 勿施於人
는 한마디로
恕를 말씀 하시는 걸로 이해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