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산류씨와 우리 가문은 풍산의 이웃에 세거하면서 오랫동안 혼인관계를 가져 왔다.
족보상에 처음 혼인은 4세 연자 성자 할아버지(김연성)의 부인이 풍산류씨 류대령의 따님으로 되어 있다.
이 할아버지가 고려사에 등장하는 고려말기 급제자인 김연성이라는 분과 동일한 인물인지는 알길이 없다. 다만 이 할아버지가 처음으로 풍산석릉촌으로 이거하였다고 우리는 알고 있을 뿐이다.
5세 할아버지(김합)의 부인이 또 풍산류씨이고 친정 아버지는 은사로 급제한 柳伯이라는 분이다. 이 류백이라는 분은 풍산류씨 하회문중 류중영의 증조부가 된다. 우리 족보와 일치하는 점은 은사급제라는 단어이다. 풍산류씨 가문이 중앙으로 진출하게 된 첫 계기가 바로 류백이라는 분에 의해서 이다.
대체로 우리 가문은 당시에 계성이나 서울을 기반으로 하는 경반으로 생각되나 풍산류씨와의 혼인관계로 보았을 때는 풍산의 토반으로 볼 수도 있다. 또 4세 할아버지가 풍산류씨와 결혼을 한 것을 놓고 여러 가지로 가정해 본다면
첫째, 4세 할아버지가 풍산류씨와 결혼을 한 것으로 보아 4세할아버지 이전 부터 풍산지역과의 어떤 인연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둘째, 4세 할아버지가 결혼 후 처가 동네인 풍산지역으로 내려와 별서를 두었을 가능성이 있다.
아무튼 5세 할아버지가 풍산류씨 할머니와 결혼 한 것으로 보아서는 분명히 고려조에 풍산에 어느 정도의 정착 기반이 마련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경북대학교 설석규의 논문 일부를 옮겨 둔다.
柳雲龍의 字는 而得, 應見이며 號는 謙菴으로 本貫은 豊山이다. 그의 가문의 원래 본관은 文化로 보여지지만 현재 이에 관해 전래하는 문서가 없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가문이 언제부터 풍산에 移居하게 되었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다만 풍산 류씨의 호적 등 가계기록에 고려시대 조상들이 戶長職을 세습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점에 비추어, 그의 가문이 일찍부터 풍산의 土豪로서 성장의 기반을 갖추고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그의 가문은 9대조인 柳伯이 고려 忠烈王 당시 恩賜及第로 중앙정계에 진출하게 되면서 비로소 현달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의 가문은 6대조 柳從惠가 조선왕조에 들어와 工曺典書를 지낸 이래 仕宦을 계속하게 됨으로써, 實職士族으로서의 위상과 함께 풍산의 土姓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하게 굳히게 되었다. 屛山書院의 전신인 豊岳書堂이 명종 18년 豊山縣內에 건립되어 學田과 書冊을 하사받았다는 기록을 통해서 보아도, 그의 가문이 일찍부터 풍산의 대표적 名家로 자리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류종혜가 말년에 豊山縣內에서 河回로 移居한 뒤로, 그의 아들 柳洪이 경제력을 배경으로 家勢를 크게 확대한 것을 계기로 이곳이 이후 그의 가문의 世居地가 되었다. 풍산 류씨가 하회에 정착하여 토대를 구축하는 과정에 대해 류성룡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 바가 있다.
公(柳從惠)은 처음 풍산현 내에서 살았다. 뒤에 현의 서쪽 10여 리의 花山 아래 河回村으로 옮겨와 살게 되었다. 이곳은 산수의 경치가 좋았다. 이 때 공의 친구인 典書 裵尙恭이 또한 늙어서 고향으로 돌아오자 공이 맞이하여 함께 살면서 田地와 農幕을 나누어주었다... 裵公의 아들 吏曺正郞 素와 그의 사위 權雍도 이곳에서 계속하여 살았다. 우리 高祖(柳沼)가 또 권옹의 사위가 되어 다시 돌아와 살았다. 류씨 자손이 이로 인하여 지금에 이르렀다. 풍산의 舊居에는 公의 孫婿 金三友가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