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간첩>은 우리를 가혹한 80년대로 안내한다. 동시에 역사적 사건들(이수근 간첩사건, 인혁당 사건 등)을 애써 다시 기억하게 만든다. 잊혀진 과거의 역사를 살려내는 것은 우리의 피할 수 없는 과제임에도 ‘거역할 수 없는 프로젝트’라는 문구에 한발 다가서면 이 영화의 발언들은 끔찍할 정도로 시대착오라고 선언하게 만든다. 역사를 다듬으려는 <이중간첩>의 시도는 재해석의 틈을 열기보다는 모든 것을 고정시킨다. 끔찍한 80년대 이야기(배경)를 80년대 영화스타일로 본다는 것은 너무 당혹스러운 일이다. 바로 이 순간! 너무 늦게 도착한 <이중간첩>이 우리를 어떻게 배신하는가에 대해 자문할 수밖에 없다. 어찌된 일인지...나의 엉뚱한 상상력은 림병호(한석규)의 “정윤희가 그리워서 내려왔습니다!”라는 외침 속을 떠다닌다. 그리고 가상의 공간에서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 대안적 남성판타지를 그리워한다.
민족, 그 깨어지지 않는 판타지
<이중간첩>은 ‘상상의 공동체’인 민족(국가)이 우리사회의 깨지지 않는 ‘최상의 판타지’라는 것을 재차 확인시키는 텍스트다. 영화는 하나의 민족, 두 개의 체제를 <쉬리>의 뒤집기 버전처럼 보여주지만, 리얼한 폭력과 시대의 엄숙함 속에서 민족(주의)에 대해 모호한 자세를 유지한다. 귀순한 림병호가 정윤희(남과 북을 연결하는 소통의 코드)를 이야기하는 순간 민족 판타지에 자본주의와 여성성(여배우의 성적 판타지)이 기입되는 것은 ‘콕’ 찍어 볼만하다. 이것은 마치 에서 오경필(송강호)이 초코파이의 유혹에 끌리는 것과 유사하다. 자본주의의 산물 초코파이는 마케팅의 제안대로 ‘情’을 상징/유발하고 이것은 영화에서 민족성(민족됨)의 판타지를 생산하는 매개체이다. 초코파이의 꼬심이 유연하게 더 확장되면 故 김광석(국민가수)을 그리워하며 남한의 대중가요/민중의식(공유되고 이완된 민족의 시간)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중간첩>은 똑같은 코드를 불러오면서도 관객과의 소통에서 실패하며, 민족의 판타지를 비판하거나 다른 대안으로 정의하지 못한다.
벤치마킹^^ 하듯 <공동경비구역 JSA>의 치밀한 전략을 ‘재독해’해보자. 그 전유의 공간에는 밤마다 비밀스런 남성공동체가 만들어진다. 은밀한 남성판타지의 에너지가 달빛 아래서 생성된다! 즉 계급과 신분을 초월한 형재애(군인애) 혹은 동성애적 상상력이 이 안에 소환된다. 이 상상의 공간에는 게이 공동체(문화)의 욕망이 은밀하게 흐른다. 남북한의 병사들은 조국의 ‘역사적 화해’에 앞서 서로를 사랑한다. 때로는 스크린에 피어나는 가상의 화해가 현실을 앞서기도 한다! 영화는 강력한 민족의식을 도마 위에 드러내지만 더불어 그것을 뛰어넘는 대안으로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금지’되는 성 정체성을 동반한다. 반면 <이중간첩>은 한석규라는 'the one'의 이미지(스타성)에 의존함으로써 ‘훈육된 육체’ 림병호 외에 다른 대안을 선택하기란 처음부터 어려워 보인다. 림병호와 백승철(천호진)이 만들어낸 우정/대결에는 장르 영화적인 색채가 첨가되었음에도 가족주의와 남성성에 강한 집착만이 징후적으로 남아있다. 두 사람의 관계에는 왠지 모를 강박증과 결함의 축이 도사리고 있다. 이런 징후적인 불편함은 영화 안에 국가(이데올로기)와 가부장제 권력의 입김이 슬그머니 숨어있기 때문이다. 실체를 드러내지 않는 림병호의 ‘당’과 백승철의 ‘안기부’는 끊임없이 속삭이고 명령한다. 부재하는 아버지의 이미지, 민족주의의 망령은 두 사람에게 그림자처럼 붙어있다. 이들은 배다른 형제 혹은 투정부리는 연인처럼 자신의 아버지를 위해 뛰어다니지만, 이것은 영화적 현실에 비판적 틈을 내기 위함이 아니다. 여기에는 은밀하게 상상된 전복의 시간이란 없으며, 오히려 보이지 않는 아버지(민족)의 힘만이 강화된다.
병호와 수미, 체제 내 소외된 연인으로서의 섹슈얼리티
게다가 림병호와 윤수미(고소영)의 관계도 크게 나을 것이 없다. 이 타자들은 자본주의 체제의 가족주의가 만들어낸 소외된 연인이 된다. 사실 철저한 사상으로 무장한 림병호가 윤수미를 위해 자신의 아버지(당)을 버린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거칠지만 프로이드 식으로 발언한다면 이 놀라운 연인(?)의 관계는 ‘남성은 거세 불안으로 고통받고, 여성은 남근선망으로 고통을 겪는다.’는 공식에 어울린다. 림병호는 당(민족)에 의해 제거되지 않으려고 애쓰고, 민족에 대한 충성심이 부족(시원적 결핍상태)한 윤수미는 림병호의 존재가 반드시 필요하다. 이들에게 민족은 상징적 남근의 동의어가 아닐까. 따라서 민족을 버리고 제3세계를 택한 행위, 더욱이 아버지의 동의 없이 새 가족을 만든 방탕함에 대한 처벌은 당연히 뒤따른다.
<이중간첩>은 상업적 유혹을 뒤로 한 채 냉혹한 현실을 더듬으려 하지만, 검열과 보수성이 만들어 놓은 창작의 틀을 고수하기에 한순간도 자유롭지 못하다. 한민족이라는 신화의 틀을 차용해 만들어 낸 영화적 구조는 탄탄해 보이지만, 권력의 허상을 유지시키고 현실을 숨겨 버린다는 점에서 여전히 위험하다. <이중간첩>은 결국 아무 것도 결정하지 못하고 상투적인 멜로의 법칙으로 이야기를 겨우 봉합한다. 그래서 남는 것은 림병호의 슬픈 운명이 아니라 <비트>에서 정우성을 기다리던 고소영의 이미지(CF여왕의 눈부신 자태)이다. 사실 <이중간첩>의 자학적인 마무리가 병적으로 우울하게 느껴지는 것은 텍스트 내부만의 문제가 아니다. 아이러니하게 <이중간첩>이 드러내는 것은 한국영화의 고갈된 상상력과 역사의식만이 아니라 거세된 상상력만을 스크린 안에 유입시키고 안심하는 우리들의 보수성이다. 불행하게도 <이중간첩>은 낡고 식상한 결말을 우리에게 내민다. 림병호가 제3세계를 택하는 것에 호응하듯 관객 역시 아버지의 명령에 흠집을 낼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굳이 자문하지 않는다.(차라리 무게를 빼고 제대로 된 오락영화를 만들어야 했다고 날카롭게 꼬집을 뿐이다)
한국문화를 지배하는 민족성은 언제나 섬뜩할 정도로 비장하고 엄숙하다. 내가 상정하는 남성판타지란 <야인시대>의 주먹 패를 통해 상상하는 ‘폼생폼사’나 단순히 일상성에 도망가고 싶은 이탈이 아니다.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거대 판타지를 흠집 내는 것, 즉 고정된 남성성의 해체와 성 정체성의 전환(성의 정치학)을 통해 지배이데올로기에 도전하고 싶은 욕망이다. 그러나 뿌리깊은 경직성을 깨뜨리고 현실에 긍정적인 에너지를 도출하는 판타지의 시간은 지연되고 만다. <이중간첩>은 림병호의 시신 앞에서 남성공동체를 위한 애도의 향을 피울 뿐이다.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이하고도 지난 세기의 이데올로기적 대립을 해소하지 못한 우리 사회에서 분단의 의미를 인식하기 위한 작업이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다. 분단의 의미를 살피는 작업 자체가 불온시의 대상이 되었던 억압의 현대사가 이러한 작업이 늦어진 배경일 터이다. 80년대라는 역사상 가장 불온한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는 점에서 <이중간첩>은 영화 <박하사탕>처럼 개인사를 통해 사회구조 혹은 체제와 개인사의 얽힘, 즉 분단의 역사가 개인을 좌절시키는 과정에 대해 그리고 있는 영화라 할 수 있다. 80년대는 21세기에도 남한의 우리가 여전히 말하고 싶어하는 의미의 덩어리, 해독되지 않은 경험의 창고인 것이다.
그런데 왜 80년대 의미, 역사의 무게와 시대의 아픔에 관한 서사는 남성의 이야기가 되는가? 현대사의 질곡을 개인사로 축소하여 형상화하고 있는 텍스트들 속에서 개인은 항상 남성으로 대표된다. 그러한 서사들 속에서 여성이 역사를 경험하는 방식은 피상적이고 남성과의 관계 속에서만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이중간첩>은 남성 중심의 서사가 얼마나 여성 인물을 주변화시키면서 남성 본위로 평면화시키는지를 솔직하게 보여주는 영화다.
자유라는 루머
1980년 독일 베를린을 탈출하여 귀순한 림병호(한석규)는 남한 국가안전기획부 취조실에서 귀순 목적에 대하여 취조 받는다. 물고문과 전기 고문을 당하며 왜 내려왔냐고 묻는 고문관들에게 ‘자유를 찾아서’라는 인민군 소좌 출신의 림병호의 뻔한(!) 대답은 고문실로 대변되는 80년대 남한의 정치적 현실과 ‘자유 민주주의’라는 이념의 허구성을 선명하게 부각시킬 뿐이다. 반공 이데올로기의 바로 그 산실인 안기부에서 ‘자유’라는 루머는 통용되지 않았다. 그들에게 자유란 그 자체로 허구였기에 림병호의 진실성은 의심받게 된다.
고문 내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대중 가요, 그 중에서도 혜은이의 제 3 한강교를 즐겨듣는 고문관으로부터 림병호는 동물적 직감으로 깨달은 것일까? ‘솔직히 말하면 살려 주실래요?’ 조금은 반항기가 묻어나는 그에게 날아온 발길질, 점잖은 양복 차림의 냉혹한 사내에게 그는 ‘정윤희 한 번 보러 내려왔습니다’라고 조용히 말한다. 그것으로 고문은 끝나고 림병호는 귀순용사가 되어 순회 연설을 다니게 된다.
왜 정윤희인가?
농담인 듯 진담인 듯 내뱉은 ‘정윤희’라는 암호는 그들을 안심시켰다. 첨예한 냉전 시대의 대립 긴장을 부드럽게 잠식시키는 그들 사이의 공감대는 단지 대중 우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고안된 80년대 3S(Screen, Sport, Sex) 정책의 이데올로기적 성과만은 아닐 것이다. 여기에는 사랑과 그리움이라는 탈이데올로기의 얼굴을 한 그들 남성들 사이의 공통된 은밀한 욕망이 자리잡고 있다. 항상 그 자리에서 자신만을 바라보면서 한 없이 기다려줄 것 같은 여린 여성, 남성들의 신파적 감수성을 자극하는 ‘백치미’의 대명사 정윤희는 이 영화에서 가장 개연성도 없고 설명도 되지 않는 인물 윤수미(고소영)의 캐릭터를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고전음악 라디오 DJ인 윤수미는 한 겨울을 북파 공작원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림병호의 삭막한 가슴에 크리스마스의 낭만과 외로움을 일깨우며 어딘가에서 자신을 생각해줄지도 모를 사람이 있다는 것을 위안으로 삼으라고 속삭인다. 남한에서 자라 북으로 건너간 아버지를 원망하다가 ‘아버지는 우리 딸이 자랑스럽다’는 편지 한 통에 고정간첩으로 활동하게 된 기이한(?) 이력의 윤수미는 림병호에게 북측 지령을 전달하는 연락책이다. 윤수미는 빨갱이 여자의 전형화된 이미지인 인민군 여장교의 냉혹하고 무성적인 이미지도, 혹은 교활하고 술수에 능한 가면술의 천재와 같은 여자 간첩의 이미지도 아니다. 그녀는 순수하고 여린 누이같은 이미지다. 이러한 이미지는 남북 화해 무드가 조성되면서 북한 여성의 순박한 이미지가 부각되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대동강변에서 기타를 치는 북한 여성의 순수미’를 예찬하고 연변 처녀의 때묻지 않은 소박함이 드라마로 만들어지는 풍토에서 여자 고정 간첩의 이미지가 이렇듯 청초하게 그려질 수도 있는 것이다.
남성중심적 감상주의
접선의 용이함을 위한 수미의 의도대로 정보부장 백승철(천호진)의 소개로 교회에서 만나게 된 병호와 수미는 표면적으로 연애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 위장 연애를 연기하는 그들이 어느 순간 어떤 계기로 서로 사랑하게 되는지는 모호하다. 아버지가 손바닥만한 사진 속에는 담을 수 없는 것이 너무 많아서 사진을 찍지 않는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하고는 사진을 찍지 않는다는 그녀를 림병호는 잠시 망설이다가 불러세워 사진 한 장을 찍는다. 채 인화되기 전에 문질러 버린 사진처럼 그들의 사랑은 불분명하다.
윤수미의 아버지 같은 존재인 남파 공작원의 우두머리인 송경만(송재호)이 윤수미를 먼저 피신시키고 자신만이 잡히게 되면서 위기에 처한 윤수미는 림병호에게 달려가 사랑을 고백한다. 아버지에게서 연인으로 넘겨지는 신부처럼 새로운 보호자로서 림병호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받아들인다. 이 영화의 보수성은 윤수미의 독자적인 내면성을 허용하지 않으면서 남자와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하는 여성의 이미지를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정치적 신념도 없이 아버지에 대한 정으로 고정 간첩으로 활동하는 윤수미라는 인물의 허구성은 단지 형상화의 실패나 배우의 미숙한 연기 탓만은 아니다. 이 영화 자체가 림병호를 서사 주체로 전제하면서 그녀의 고유한 역사와 감정은 삭제되고 림병호의 절제된 외양의 내면에서 울리는 불안한 목소리를 발화하는 복화술의 대변자로서 기능할 뿐이다.
병호의 죽음을 모른 채 그를 기다리는 발 벗은 아내의 무구한 발 장난은 전해 주지 못하고 차 안에 놓여 있는 한 켤레의 샌들이 상장하는 안타까운 남편의 사랑을 드러내기 위해서일 뿐이다. 그녀는 피그말리온이다. 남성의 욕망이 만들어 낸 ‘여성’이라는 추상명사의 화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