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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와 20세기 사이, 그리고 미래 오감도 시 제1호 이상 |
13인의아해兒孩가도로로질주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4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5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6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7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8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9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0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1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소.
(다른사청은 없는것이 차라리 나았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운 이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출처《이상전집 1: 시》(2013) 첫 발표 「조선중앙일보」(1934.7)
이상李箱 (1910~1937)
서울 출생. 본명은 김해경(金海卿)이다. <이상한가역반응>(1931), <이런 시>(1933) 등의 시, <날개><지주회시>(1936) 등의 단편소설, <권태>(1937) 등의 수필을 발표하였다. (1936).
| 이런 시는 이제 그만
이상. 사직동(당시 공식 주소명은 통인동 154번지)에서 출생한 서울 토박이. 1929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의 전신인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졸업하고 식민지 조선총독부 건축기사가 됨. 직업인으로 평범하게 또는 여기(餘技) 정도로 미술과 문학 활동을 하며 살았을 수도 있었던 존재. 1931년 일본어로 <이상한 가역반응>이라는 텍스트를 쓰면서 어딘가 이상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본명이 김해경(卿)이던 인물. 1932년에는 익명으로 <지도의 암실>이란 또 다른 이상한 텍스트를 발표, 급기야 이름뿐만 아니라 성씨(姓氏)마저 버리고 뜻 모를 가명(假名) 이상(李箱)이란 필명으로 <건축무한육면각체>라는 텍스트를 씀. 1933년 각혈(血). 건축기사직을 포기. 1934년 이제는 한국어로, '이게 무슨 개수작이냐? 대체 어쩌자는 시냐?'라는 소동을 일으킨 〈오감도(烏瞰圖)〉연작을 1934년 「조선중앙일보」에 처음 발표. 그리하여 조선 문단에 전대미문의 스캔들을 일으킨 존재. '너무나 답답하다'며 조선을 떠나야겠다고 반발. 드디어 1937년 일제의 수도 동경에 도착했으나 불행히도 ‘이유없이 방황하는 불령선인(不逞鮮人)'이라는 죄명으로 일본 경찰에 피검. 수감 생활을 하다 동경제국대학부속병원에서 1937년 4월 17일, 만 26년 7개월에 비명(非命)에 간 비극적인 식민지 지식인. 사후, '가장 우수한 최후의 모더니스트'라는 찬사를 받기 시작하더니 해방 이후에는 청년 지식인들의 아이콘으로 추앙받게 된 존재. 드디어는 한국 근현대문학사에서 불멸의 신화의 주인공이자 넘을 수 없는 거봉(巨峯)이 된 인물(임종국 편, 1966, '이상 약력' 재구성).
이러한 숱한 일화와 기행은 그저 단순한 가십거리가 아니다. 이는 이상 문학의 내용이자 형식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이 점에 이상 문학의 특수성이 존재한다. 이를 무시하고는 이상 문학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런데 이상이 처음부터 이상(異常)한 시만을 쓰려 했던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다음 두 개의 텍스트를 비교해 보자.
A.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B. 내가 그다지 사랑하던 그대여 내 한평생에 차마 그대를 잊을 수 없소이다. 내 차례에 못 올 사랑인 줄은 알면서도 나 혼자는 꾸준히 생각하리다. 자 그러면 내내 어여쁘소서.
A와 B 모두 아름답고 울림이 있다. 또한 동일한 사람의 글 같기도 하다. 그러나 사실은 필자가 다르다. A는 황동규의 <즐거운 편지>(1957, 고등학교 재학 중 발표작)의 일부이고 B는 이상의 <이런 시>(1933)의 일부이다. 발췌한 부분을 보면 이상이 우리에게 익숙한 시를 쓸 수 없었던 것은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한 그가 왜 <오감도>와 같은 텍스트를 쓰게 된 것일까? 이를 알아보기 전에 우선 <이런 시> 전체를 다시 살펴보자.
역사를하노라고 땅을파다가 커다란돌을하나 끄집어내어놓고보니 도무지어디서인가 본듯한생각이들게 모양이생겼는데 목도들이 그것을메고나가더니 어디다갖다버리고온모양이길래 쫓아나가보니 위험(危險)하기짝이없는 큰길가더라.
그날밤에 한소나기하였으니 필시(必是)그돌이깨끗이씻겼을터인데 그이튿날가보니까 변괴(變怪)로다 간데온데없더라. 어떤돌이와서 그돌을업어갔을까 나는참이런처(凄)량한생각에서아래와같은작문(作文)을지었도다.
「내가 그다지 사랑하던 그대여 내한평생에 차마 그대를 잊을수없소이다. 내차례에 못올사랑인줄은 알면서도 나혼자는 꾸준히생각하리다. 자그러면 내내어 여쁘소서」
어떤돌이 내얼굴을 물끄러미 치어다보는것만같아서 이런시(詩)는그만찢어버리고싶더라.
놀랍게도 〈이런 시>의 전체 맥락에서 볼 때, 앞서 제시된 B는 아름답고 울림있는 시가 아니라 '처량한 생각에서' 지은 작문에 불과하다. 그리고 또 '어떤 돌이 내 얼굴을 물끄러미 치어다보는 것만 같아서' '그만 찢어버리고 싶'은 작문이다. <이런 시>를 '잃어버린 애인에 대한 그리움을 알레고리로 표현한 것’(이승훈 편, 1992: 189)이라 해석한다 할지라도, 이러한 정서는 이상에게 처량한 것일 뿐이었다. 이상은 이런 처량한 정서를 표현하고 싶지 않았다. 무언가 다른 것을 말하고 싶었다. 그렇다면 그가 말하고 싶어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책으로서는 이상 문학 최초의 실체라고 할 수 있는 《이상선집》(1949)을 직접 편집, 출간해 준 존재. 이상이 대형(大兄)이라 부른 존재. 김기림은 구인회(九人會) 멤버 중에서도 이상이 유독 자신의 문학적 고백을 송두리째 하고 싶어 했던 대상이었다(김윤식, 2010, 157-193). 그가 「모더니즘의 역사적 위치」(1939)에서 했던 말을 살펴보자.
조선에서 '시에 있어서의 19세기의 문학적 성격이 폭로되어 주로 문학적 입장에서 배격되기 시작한 것은 30년대에 들어선 뒤의 일이다. 모더니즘은 두 개의 부정을 준비했다. 하나는 로맨티시즘과 세기말 문학의 말류인 센티멘탈 로맨티시즘을 위해서고 다른 하나는 당시의 편내용주의의 경향을 위해서였다. (…)조선에서는 모더니스트들에 이르러 비로소 '20세기의 문학'은 의식적으로 추구되었다고 나는 본다. (…) 그러나 모더니즘은 30년대의 중쯤에 와서 한 위기에 다닥쳤다. (...) 이에 시를 기교주의적 말초화에서 다시 끌어내고 또 문명에 대한 시적 감수感)에서 비판에로 태도를 바로잡아야 했다. (...) 그러나 그 길은 어려운 길이었다. 시인들은 그 길을 스스로 버렸고 또 버릴 밖에 없다. 가장 우수한 최후의 모더니스트 이상(李箱)은 모더니즘의 초극이라는 이 심각한 운명을 한몸에 구현한 비극의 담당자였다. (김유중 편저, 1996: 119-122)
김기림의 고찰이 맞다면, 이상은 19세기에서 20세기로 탈출하려 했다. 그는 낡은 것, 처량한 것이 싫었다. 19세기의 낡고 처량한 것은 20세기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처량한 <이런 시>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19세기에 대해 얼마나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는지, 직접 그의 말을 통해 확인해 보자.
다음은 <오감도>를 30편 연작으로 계획했다가, 빗발치는 독자들의 항의에 연재를 중단한 직후 발표한 <오감도 작자의 말> (1934)의 일부이다.
왜 미쳤다고들 그러는지 대체 우리는 남보다 수십 년씩 떨어져도 마음 놓고 지낼 작정이냐. 모르는 것은 내 제주도 모자라겠지만 게을러빠지게 놀고만 지내던 일도 좀 뉘우쳐 보아야 아니 하느냐. (김윤식 편, 1993:353)
여기서 알 수 있듯 이상은 당시 조선 문단이 '남보다 수십 년'은 뒤떨어져 있음에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고 보았다. 외려 그 후진성에서 벗어나 어떻게든 세계적 수준을 따라가 보려는 자신을 비난할 줄만 아는 한심함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조선은 세계를 의식하지 못하는 우물 안 개구리였다. 《시와 소설》(1936) 속표지 첫 장에 쓰인 이상의 유명한 아포리즘 “어느 시대에도 그 현대인은 절망한다. 절망이 기교를 낳고 기교 때문에 또 절망한다.”(김윤식 편, 1993: 360)를 고려한다면 현대인은 절망에 의한 기교, 기교에 의한 절망의 변증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이상이 보기에 당시 조선 문단은 절망에 기초한 기교를, 또는 기교를 넘어서려는 절망을 하지 않은 채 “게을러빠지게 놀고만 지내”는 상태였다. 아직도 '이런 시'를 쓰고 있느냐는 따가운 시선을 의식하지 못하는, '이런 시'를 과감히 찢어 버릴 줄 모르는, 게으름 속에 있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이상의 판단이 옳았든 아니든 그는 조급증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조선이 하루 빨리 후진성에서 탈피하여 세계성을 획득하길 바랐으며 스스로가 그 주역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병세는 악화되었고, 그에게 글을 쓰는 일은 '공포(恐怖)의 기록'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 '공포의 기록'이라는 표제는 실상 <오감도>와 맞닿아 있었다(김윤식 편, 1991: 204).
| 불안한 청년 지식인의 아이콘
건축학도 김해경, 행인지 불행인지 그는 건축학을 전공하였다. 그에게 건축학이란 무엇이었을까? 근대 과학기술과 예술사조를 모두 접할 수 있는 융합 분야로서, 식민지 조선의 후진성과 근대화된 서구의 각종 첨단성을 동시에 접할 수 있는 영역이었을 것이다. 건축학은 가치중립적 관점 즉 과학기술의 관점에서는 조선의 후진성을 깨닫게 했으며, 오감(五感)의 관점 즉 미래파니 표현주의 니 초현실주의니 하는 서구 근대예술의 관점에서는 조선인의 감각이 남루함을 깨닫게 했다. 그래서 그는 김해경이고 싶지 않았고 새로운 세계에서 새로운 자아로 살고 싶었을 것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김해경은 이상(李箱)이 되었다. 실존적 인물인 건축학도 김해경과 이로부터 분열되어 나온 이상의 관계는 곧 조감도(鳥瞰圖)와 오감도(烏瞰圖)의 차이, 즉 '鳥’와 ‘烏’의 절묘한 한 획 차이를 낳았다(김백영, 2018).
이 후진성 콤플렉스는 이상으로 하여금 평범한 글쓰기를 거부하고 각종 숫자와 기호, 도식으로 구성된 텍스트를 작도하듯 쓰게 만들었다. 이 작도된 텍스트의 의미가 무엇이냐는 중요하지 않았음은 해방 직후 분단된 조국의 청년 지식인들에게 이상이 열광과 추앙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로도 알 수 있다. 해방 직후 이상의 문학에 대한 공식적 반응 중 첫머리에 놓일 수 있는 조연현의 <근대정신의 해체: 고(故) 이상의 문학사적 의의>(1949)를 보자.
이것(<오감도 시 제1호>)을 읽고 이 작품이 독자에게 전달하려는 혹은 이 작품이 표현하고 있는 의미와 내용이 무엇인가를 정확히 해득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드물 것이다. 그러나 이런 투로만 쓰인 <오감도>라는 이름 아래 발표된 15편의 시가 1930년대의 조선 청년들에게는 기묘한 흥분과 호기심으로서 대환영을 받았던 것이다.
누구도 해득할 도리가 없는 기묘하고 난해한 이상의 이러한 시편이 1930년대의 조선 청년들에게 특이한 환영을 받게 된 이유는 바로 심리적인 원인에서였다. (…) 그들의 과거에의 경멸과 새로운 것에의 조급한 욕구 속에서 발생된 지적 '딜레마'가 이상의 시와 같은 정체를 파악할 길이 없는 일종의 관념의 도본 (圖本)에 간신히 자위와 자독(自瀆)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 그러므로 이상의 해체된 주체의 분신들은 서구적인 의미에서의 근대정신이 이를 영도해 나아갈 민족적인 주체가 붕괴된 것을 말하는 것이며 이러한 붕괴는 우리의 근대정신의 최초의 해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상이라는 하나의 완전한 시인도 작가도 못되는 일개의 특이한 에세이스트가 가진 문학사적인 의의는 바로 이러한 곳에 있었던 것이다. (김윤식 편저, 1995:20-27)
조연현에 의하면 이상은 문학적 완성도 면에서 '일개의 특이한 에세이스트'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나 조연현이 말하는 '1930년대의 조선 청년들'에게 이상의 텍스트는 문학적 완성도로써 호소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근대정신의 민족적 주체의 붕괴와 분열을 상징하는 것이었고, 그 붕괴와 분열은 곧 ‘이미 식민지화된 조선에서' 태어난 청년 지식인들의 내면과 시대 환경 자체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해득할 수 없는 텍스트는 사실 이상의 텍스트가 아니라 '식민지 근대의 외형을 띤 조선'이라는 텍스트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이상의 텍스트를 향해 '이것도 시냐! 시는 장난이 아니다!'라고 퍼붓는 기성세대의 비난은 조선의 청년 지식인들에게 도리어 무책임한 소리, 즉 젊은 청년들에게 비극적 시대를 떠안겨 준 사태에 대한 무책임한 소리로만 들렸을지 모를 일이었다.
이 근대정신의 민족적 주체의 붕괴는 해방 전까지도 지속되었다. 해방 직후에야 '1930년대 식민지 조선 청년 지식인들이 한국 문단에서 본격적으로 발언의 기회를 얻게 되면서, 이상만이 당시의 시대고(時代苦)를 잊게 할 '유일한 식민지 시대의 정신적 유산'으로 공식화된다. 해방 직후부터 전후시대까지 한국문단에서 실존주의와 정신분석학이 홍성하면서는 이상 문학 연구가 더욱 활기를 띠게 된다(김주현, 2009). 1956년 임종국이 편찬한 《이상전집>이 출판되자 이상이 발표한 문학작품 수보다도 더 많은 작가론이 발표되었음은 물론, 출판계에서는 각종 전집류 출판 붐이 일어났다(임종국 편, 1966: 4). 이런 현상은 비단문학 연구나 출판 분야에만 국한하지 않았다. 《이상전집》 초판이 출판되기 직전, 전후 모더니스트 시인 박인환은 <죽은 아포롱: 이상 그가 떠난 날에>(1956)에서 이상에 대한 전후세대의 신격화 현상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당신은 나에게 / 환상과 흥분과 / 열병과 착각을 알려 주고/ 그 빈사의 구렁텅이에서 / 우리 문학에 / 따뜻한 손을 빌려 준 / 정신의 황제. // 무한한 수면(睡眠)/ 반역과 영광 / 임종의 눈물을 흘리며 결코 / 당신은 하나의 증명을 갖고 있었다/ '이상(李箱)'이라고. (엄동섭· 염철 편, 2015: 225)
이렇게 이상은 식민지 조선 청년에서부터 전후 청년 지식인들에게까지 열광과 흥분을 일으키는 아이콘이 되었으며, 이는 현재에도 그러하다. 앞으로도 이상은 새로이 등장할 청년들에게 열광과 흥분을 일으킬 정신적 상징물이 될 것이다.
난해(難解)? 난, 해!
청년을 위한 문학교육
<오감도 시 제1호>에 대한 해석과 감상에 앞서 새로울 것도 없는, 그러나 이상 문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알아야 할 이야기를 이렇게 짧지도 않게 진술한 까닭은 다음 명제의 정립 가능성 때문이다. 이상의 <오감도 시 제1호>로부터 도출되는 명제 즉, (그의 문학에 대해서는) 이런 해석도 적당하고 저런 해석도 적당할 수 있다는 명제. 이상의 텍스트는 어떤 고정적 의미를 통사적이고 정격적인 방식으로 표현하려던 텍스트가 아닐 수 있다. 오히려 '놀이적 언어 행위'라는 새로운 방식으로 의미를 암시하려던 텍스트일 수 있다. 이처럼 새로운 방식의 '놀이적 언어 행위'에 해당할 이상의 텍스트에 대해 고정적 의미를 발견하려 한다는 것은 그 접근 자체가 부적절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교육에서 이상의 텍스트는 수필 <권태>의 교재화 이후 <거울>, <가정> 등 몇 편만을 선별적으로 소개(최현식, 2016)하면서도 정전화하여 왔다. 아울러, 특정한 해석의 틀을 고정화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이상의 텍스트는 원전 확정마저 미완성 상태이다(김주현·최유희, 2001; 김주현, 2019). 또한 고정적 해석도 불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석의 틀을 고정화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가? 예를 들어, 〈오감도 시 제1호>에서 ‘13인의 아해'에 대해서도 '최후의 만찬에 합석한 기독 이하 13인'이라는 해석에서부터 '기계문명 속에서 개성을 상실해 가는 현대인의 모습'이라는 해석 등 수없이 많은 해석들이 누적되어 왔다(김주현, 2019; 김현숙, 2009). 문학뿐만 아니라 미술 등 각종 분야에서도 다양한 해석들이 시도되어 왔다(이고은·김준교, 2012).이처럼 수많은 시도들에도 불구하고 텍스트의 의미는 더욱 묘연할 따름이다. 그저 '불안과 공포, 자아분열'이라는 틀에서 맴돌 뿐이다. 이러한 틀에서 벗어나려는 최근의 새로운 시도로서 이상의 정치적 무의식을 규명하기 위해 역사적·정치적 관점의 접근이 시도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접근은 오히려 실증적 차원을 무시한 채 또 다른 관점에서의 신화화를 낳는다는 비판(박현수, 2020)을 받기도 한다.
이처럼 이상 문학 텍스트에 대한 해석은 불확정적이며, 원전마저 불확정적이다. 이런 상황을 고려할 때, 이상 문학에 대한 교육은 엄숙하고 엄격한 관점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오히려 난해의 장막을 벗겨 내겠다는 관점으로 보지 말고, 평범한 삶과 가정, 사회를 꿈꾸던 한 청년의 소박한 바람을 애써 표현한 스케치로 볼 필요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오감도 시 제1호>는 '아해'의 단순하고도 절실한 호소를 들어주려는 청자의 존재 여부를 문제화하고 있는 텍스트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금껏 우리는 '아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피해치려 하면서도 정작 <오감도 시 제1호> 전체를 구성하는 청자를 주목하지 않았다. "무섭다고그리오"라는 반복 표현은, 일차적으로 '아해'의 호소를 들어주고 있는 청자의 존재를 암시한다. 그러나 그 청자가 과연 '아해'의 공포와 불안을 해소시켜 주는, 만족할 만한 존재인지는 알 수 없다. '무섭다'는 말은 너무나 절실한 호소이다. 그것을 들어주고 그 공포로부터 해방시켜 주려는 사람이 없다면, 이 아해의 삶은 평탄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아해'가 누구이며 무슨 의미의 기호인가가 아니라, 그 아해의 단순하고 절실한 호소를 들어주는 청자가 과연 우리 사회에 있느냐라는 문제이다. <오감도 시 제1호>는 바로 이 문제를 당대의 관점에서 제기하는 텍스트라 하겠다. 즉, 1930년대의 공포와 불안에서 수많은 아해들을 해방시켜 줄 수 있는 존재가 있는가? 이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것이다.
<오감도 시 제1호>를 <오감도 시 제2호>와 연결 지어 보면 더욱 놀라운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나의아버지가나의곁에서조을적에나는나의아버지가되고또나는나의아버지의아버지가되고그런데도나의아버지는나의아버지대로나의아버지인데어쩌자고나는자꾸나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가되느냐나는왜나의아버지를껑충뛰어넘어야하는지나는왜드디어나와나의아버지와나의아버지의아버지와 나의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노릇을 한꺼번에하면서살아야하는것이냐
이 텍스트를 '나'와 '조상' 간의 대립 또는 19세기적 봉건의식과 20세기적 근대의식 간의 대립 또는 김해경의 개인적 삶 중에서 큰아버지의 양자로 입양된 후의 삶과 연관 지어 해석(이승훈 편, 1992: 22)하곤 하였다. 그러나 이 '나'를, <오감도 시 제1호>의 청자라고 생각해 보자. 다시 말해 '나'를, '아해'의 단순하고도 절실한 호소를 들어줄 뿐만 아니라 노쇠해져 버린 아버지의 호소마저 들어주려는 청자라고 생각해 보자. 그러하면 <오감도 시 제1호>에서, 길이 막혀있는 뚫려 있는 고려하지 않고 도로를 질주하는 '아해'의 행동은, 자신의 불안과 공포를 해소해 줄 존재의 부재를 인식한 데에서 비롯된 행동이라 해석할 수 있다. 또한 '무서운아해라도좋'고 '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다는 해탈은, 도저한 절망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란 <오감도 시 제2호>에서처럼 스스로 새로운 아버지가 되는 것뿐임을 인식한 데서 비롯된 태도라 해석할 수 있다. 요컨대 1930년대 조선에서는 '아해'의 호소를 들어줄 신뢰할 만한 존재가 부재하다는 이 도저한 절망감이, 스스로를 새로운 아버지로 만들어야겠다는 정신적 기교를 낳은 것이다. 이처럼 <오감도 시 제1호〉를 비롯한 <오감도> 연작은 ‘아해'로 하여금 새로운 아버지가 되겠다는 결단을 강제하는 시대에 대한 풍자이자 해탈의 텍스트이다.
지금 이 시대의 청년들은 어떠한가? 세월의 풍파로 삭아진 부모를 보면서, 만만하지 않은 사회의 문턱을 보면서, 어떤 때는 어른스럽게도 〈오감도>의 청자가 되었다가 또 어쩔 수 없이 스스로 '아해'가 되기도 할 것이다. 이 복잡미묘한 내면을 지닌 존재들이 이 시대의 청년들이지 않을까? 그들도 이 시대를 꿈 많은 건축가처럼 조감(鳥瞰)하지 못하고 이상처럼 오감(烏瞰)하고 있지 않을까?
따라서 〈오감도〉에 대한 문학교육은 학습자로 하여금 난해의 장막을 벗겨내게끔 하는 과제를 줄 것이 아니다. 스스로의 불안과 공포를 어떤 식으로든 표현하게 해 주면서, 그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호소를 들어줄 존재가 우리 시대에 존재함을 조금이라도 확신하게 하면서, '난 할 수 있어!'라는 자신감을 키울기회를 주어야 한다. 이상의 수필 <권태>(1937)나 <이 아해들에게 장난감을 주라> 속 표현들, “아-조물주여 이들을 위하여 풍경과 완구를 주소서"(김윤식 편, 1993: 151) 또는 "오호라. 이 아해들에게 가지고 놀 것을 주라."(김윤식 편, 1993:118)를 패러디하자면 "아-문학교사들이여 청년 학생들을 위하여 이상의 텍스트를 놀이적 언어로 주라." 그리하여 시대의 권태를 이겨낼 흥분과 열정을 느끼게 하라! |남민우
참고문헌
권영민 편 (2013). 《이상전집 1: 시》, 태학사.
김기림(1939), 「모더니즘의 역사적 위치」, 김유중 편저 (1996), 『김기림』, 문학세계사.
김기림 편(1949), <이상선집》, 백양당. (복간본, 42 MEDIA CONTENTS, 2016)
김백영 (2018), 「<오감도 시 제1호〉와 이상(李箱)이라는 페르소나의 이중성: 식민지 근대 시공간의 다차원적 조감도로서 이상 시 읽기」, 『민족문학사연구』 67, 민족문학사학회 · 민족문학사연구소, 133-169.
김윤식(2010), 『기하학을 위해 죽은 이상의 글쓰기론』, 역락.
김윤식 편(1991), 《이상문학전집 2: 소설》, 문학사상사.
김윤식 편(1993), 《이상문학전집 3: 수필》, 문학사상사.
김윤식 편저 (1995), 《이상문학전집 4: 李箱 연구에 관한 대표적 논문 모음》, 문학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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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평론 교육 총서 19 『문학 교육을 위한 현대시작품론』
2024. 6. 17.
맹태영 옮겨 적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