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위홍 제3시조집, 『갈잎의 노래』, 土房, 2008.
裵渭泓 1995년 11월 25일 발행
□ 1919년 12월 24일 경북 안동 예안(禮安)에서 태어남. 3남 5녀 중 장녀.
대구에서 성장, 경북여자고등학교 졸업(1936년)
시조집 『江가에서』(‘88년), 『조각보와 가을꽃』1995), 태극선의 푸른 바람■, 『갈잎의 노래』(2008) 등이 있음
영암시조문학 회원
<시인의 말> (전문)
편편 낙수(落穗)줍듯…
잃어버린 날들을 찾듯이, 살아온 날들의 감동과 늦깎이 시조에의 향수 같은 정감을 놓지 못한 채 발싸심을 하다 보니 어느덧 스무 해를 넘겼습니다.
올해로 나이가 아흔에 닿고 보니 참으로 감회가 무겁습니다.
지나온 삶의 기억이며 추억들을 하나하나 새김질하듯 시를 썼습니다. 시는 내가 살아가는 날의 큰 힘이 되어 주었습니다.
한국 고유의 정형시를 외곬으로 고집해보지만, 그 고고한 성정은 늘 다가가기가 어렵다는 생각뿐입니다. 그러나 어려운 만큼 사는 날의 소람이기도 했습니다.
시집을 낼 때마다 항상 앞서는 두려움에 혼자 얼굴을 붉히기고 합니다. 그러나 생의 終焉이듯, 편편 낙수(落穗)줍듯 또 이렇게 한자리에 묶어 보았습니다.
장정을 맡아 수고해준 장손(長孫) 은수가 고맙고, 출판을 맡아주신 김영희(金映希) 시인께도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가까운 친지들과 가족들의 마음 씀씀이도 참으로 고마웠습니다.
2008, 입동절(立冬節)
裵渭泓
갈잎의 노래
한 잎 두 잎 낙엽 지듯
그렇게 세월은 지고
슬퍼서 감미로운
이별의 아리아처럼
그 노래
바람 따라 가버린
젊은 날의 내 사랑.
여일(餘日)
재 보면 한 뼘 길이 인생
절도(絶島)인양 서럽다가
서둘러 세월 보내고
낙수(落穗)줍는 여일인데
가슴엔 고절(苦節)의 반세기가
또렷이 새겨져 있는 채.
창(窓)
여유 없는 가슴을
붙안고 살 때도
내 생활의 수틀 속엔
시절 따라 변하는 경관
마지막 잎새처럼 지는
꿈과 낭만 있습니다.
달성공원(達城公園)에서
달성(達城)을 들었다 놨다
가을 운동회 열기가
여느 잔칫날같이
진탕 먹고 뛰고 놀던
그 함성 여운으로 남아
귀를 여는 바람소리.
버티던 터주대감
신사(神社)도 흔적 없고
성(城)은 예대로인데
여린 꿈은 오간 데 없네
옛 터전 외로 지키는
북루(北樓) 밖은 아파트 천지.
로키에 들어서서
새벽
느릿느릿 꿈틀꿈틀 새벽잠 터는 로키
반사경의 빛보라 같은 차창 밖 등꽃 노을
탄성을 안으로 접고 외려 눈을 감았다.
해넘이
구름이 찢어지듯 열리는 그 사이로
용광로 쇳물이 쏟아져 발광하는 저 장엄
그 경이(驚異) 말로만 듣던 오로라가 펼쳐진 듯.
세비야의 플라맹고
슬픔의 저항인가
저 손뼉 드센 발동작
그 리듬 녹아든 정서
피땀에 절은 진수(眞髓)
승화된 집시의 한이
불꽃보다 뜨겁다.
여행
나라밖을 떠돌며
생세지락(生世之樂) 누빌 적에
쉼 없이 설렌 가슴
밟고 가는 고비마다
별천지
놀라운 경관
고생문도 드나든다.
파티마의 고행
추적이는 봄비 속에 십자가가의 고행 같은
고통도 은혜로워 젖어 걷는 무릎걸음
하늘문
열리는 기적 시험하는 통로인가.
성전에 타는 촛불 망설임 없는 목숨이듯
사무엘의 기도는 아룸다운 그 안에서
넘침도
덜함도 없이 고루 내리는 사랑이리.
□ 파티마 : 포르투갈의 성지(聖地)
길 위에서
1.
아이들 야단치지 마라 거쳐 온 길이거늘
늙었다 웃지 마라 가야할 길이거늘
아무리 발버둥쳐도
면죄부 없는 여정(旅程)이다.
2.
귀한 생명 받아 태어남은 분명코
하나의 약속이기에 주어진 업(業) 섬기련만
원(願)이야 고비 늙은 오늘도
어제처럼만 하기를.
3.
온 길 가야 할 길 우리들의 숙명의 길
되돌아 갈 수 없는 인생이며 세월인데
가슴엔 꼬창모 심듯
아린 바람 간절타.
□고비 늙음 : 한도가 차도록 늙음.
□꼬창모 : 가뭄에 굳은 논바닥에 꼬챙이로 뚫어가며 심는 모.
늦은 깨달음
집착에서 벗어나니
더없이 홀가분하다
진작 왜 못 깨쳤던가
놓을 줄을 몰랐던가
삶이란 빛과 그림자
들고나는 연습인 것을.
졸수(卒壽)에
스물이 엊그제 같은데 아흔이라 실소하네
세월이 꿈결이란다면 나는 어디를 헤맸던고
황혼 빛 살펴가라며 아슴프레 챙겨준다.
귀밑머리 서리 칠 때 이순(耳順)도 숨차더니
여든에 꺾인 허리가 마디마디 옹이 박히고
강산이 또 한 번 변해 무릎 아래 삭풍 분다.
땅 끝에 선 심정
‘까보따로까’ 땅 끝 마을
유럽의 끝자리에서
여수(旅愁)는 대서양에
출렁출렁 심어두고
무거운 목숨을 부리듯
표석(標石) 앞에 앉아본다.
천파만파 몰려와서
단애(斷崖)를 물어뜯는
남빛 시린 그 품에
느닷없이 안기고 싶다
노을도 오금이 저려
까치발로 자늑이는데.
저승 이야기
그곳이 얼마나 좋길래
한 번 가면 아니 오는가
뉘는 천당으로 가고
뉘는 극락으로 가고
어딘들
이 시정(市井)보다
살기는 편한가 봐.
청계천 복원
-내 아들의 10년 공들인 프로젝트가 빛날 때
천지인(天地人)이 하합하면
세기(世紀)의 걸작을 낳는가
막혔던 숨통을 트고
청계천이 살아난다
그 위업(偉業)
빛나는 청류(淸流)
굽이쳐 갈 영겁을 향해.
불고염치(不顧廉恥)
나이는 먹을 만큼 먹고
허리는 굽을 대로 굽고
해는 서산을 넘고
갈 길은 아득한데
꿈만은
깨지 말자며
타일러도 봅니다.
보지기의 정리(定理)
싸서 들면 크나 작으나 속절없는 삶의 청산(淸算)
놓고 풀면 어김없는 새 출발의 당찬 전개(展開)
보자긴 포용의 능수 조선의 어머니 상(像).
더러는 사랑의 약속 보장하는 신물이어도
어느 땐 눈물이 밴 슬픈 아낙의 길동무
상황당 넘는 보따린 일생의 서사시(敍事詩)라네.
무당굿 보자기는 이 저승 가르는 경계 보
가난한 밥보자기는 죽어 얼굴 덮은 영생(永生)보
환원에 능한 보자긴 초능력의 소유물.
소망
생활 속의 작은 지혜와 사랑의 기쁨으로
조그마한 베풂이라도 말없이 실행하며
언제나 웃음꽃 피는
일상이면 참 좋겠다.
희망사항
할 일 있어 늘 바쁘고
사랑하는 사람 있고
희망을 품을 것이
가슴 속에 있다면
당신은 가장 행복한 인생을 사는 거다.
인생
1.
너와 나는 다르다는 이분법도 별 수 없이
넘나든 세월 속에 전설 하나 남긴 셈 치자
삶이란 고해(苦海)에 펼친 광대의 굿판이거니.
2.
뜨지도 잠기지도 않을 한 평생을 살아
좋고 하찮은 것 없이 체념에 실었다만
가슴 속 응어리 하나 풀리지 않는 인과관계.
3.
너무 슬퍼서 아름답다했는가
넘나든 구비마다 소설(小說) 엮듯 정을 두고
예대로 여년(餘年) 묵은 심사(心事) 맷돌처럼 무겁다.
혀[舌]
생각 한 번 잘못하고 함부로 놀렸다간
낭패 망신 다 시키고 치욕을 안기느니
뉘우쳐
발버둥 쳐도 어찌 못할 요물인 거.
한 번만 잘 놀리면 천 냥 빚도 갚는다는데
달래고 구슬려서 잘만 다스린다면
명리와
복락을 낳는 실로 값진 보물인 거.
삶의 끝자락에서
짧은가 하다보면
긴 것이 세월이고
약한가 싶다가도
강한 것이 젊음이라
무거운 짐을 지도도
내려놓을 줄 몰랐어라.
☞ 이 작품은 이 번 시집의 제일 마지막에 실린 작품이다. 별도 해설은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