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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아름다웠던 여름
요즘 낮 기온은 봄이 아닌 듯 높았고 둔터니 주변엔 찔레꽃이 한창이면서 또 밤낮없이 뻐꾹새도 울어 대는 등, 계절의 변화 기운이 역력했다.
그렇지만 그런 시절의 변화를 몸으로는 느끼면서도 '절기'에 따라 계절을 규정짓는 시골생활의 초보자였던 기로는 확신을 가질 수 없었기에,
'이제 여름이 오는 것인가? 아니면, 지금이 여름인가......' 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렇게, 어느덧... 여름이 된 듯 싶었는데, 그리고 그 계절이 너무 아름다웠는데...
기로가 그 게 아름다웠다고 느끼게 된 건 몇 년의 세월이 흐른 뒤였다.
가, '일상'이랄 수 없을 나날들
기로가 둔터니로 이사온지 석 달이 넘어가고 있었다.
물론 이제는 그 생활에 완전히 적응이 된 상태이기도 했지만, 그런 만큼 일상이 복잡하고도 다양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 즈음의 나날들은 그저 '일상'으로 치기엔 너무나도 특별하고 아름다웠기에, 안정감 속에서도 뭔가 짜릿한 묘미는 느껴고 있었다.
a, 이미 시작된 여름
b, 뱀 사건
c, 호수이야기
a, 이미 시작된 여름
아침 일찍 기로는 '막은댐'에 나가 전주행 버스를 탔다.
우편물을 보낼 일이 있어서 우체국에 가는 길에, 겸사겸사 몇 가지 필수품도 사올 생각으로.
요즘 날이 더워지면서 파리가 부쩍 많아져 파리채가 필요했고, 웬일인지 격이 몸을 자주 긁는 게 눈에 띄어(벼룩이 있을지도 몰라서)... 킬라를 사다 품어주고 싶었고, 또, 요사이 근방에 뱀이 눈에 자주 띄기에... 집 근처에 뿌릴 '백반'도 필요해서였다.
그런 것들만 봐도 분명 여름 같기는 했는데......
전주 '남문 시장' 에 도착하자마자 기로는 바삐 움직여, 후딱 그 근처 한 바퀴를 돌고는... 마치, 도망쳐오기라도 하듯 서둘러 돌아오는 버스에 올랐다.
그렇게 전주에 머문 시간이 채 한 시간도 안 될 것 같았다.
기로는 버스 차창을 우두커니 내다 보고 있었는데, 바깥 풍경이 매우 건조해 보였다.
제법 오래 전부터 비가 오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며칠 째 큰 비라도 올 듯 하늘엔 구름이 잔뜩 껴 있었는데, 올 듯 올 듯하다가... 시들시들 비도 뿌리지 않고 개기를 반복하자, 키큰 아저씨는,
"이거, 가물 징존디......" 라고 했었는데,
'그 말이 정말 맞아 들어가는 것 같네......' 하는 생각도 하도 있었다.
그렇게 '夢想?'에 돌아와서도 보니, 마당엔 풀들이 신경질적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비가 오면 땅이 무른 틈을 이용해 뽑아버리려고 내버려 뒀던 것인데, 이렇게 가물다 보니... 마치 사람 살지 않는 집처럼 마당은 을씨년스런 모습으로 변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니,
'풀들은 가뭄과는 상관없는 듯, 잘만 자라네!' 하다간, '아이, '마당 너른 집'에서 한 번 살아보려고, 공간을 널찍하게 남겨 두었던 것이... 흉물로 남아가는 것 같네......' 하면서도,
그렇다고 일일이 그 풀들을 뽑아낼 엄두도 나지 않았다. 이미 질려버렸던 것이다.
사실 기로는 며칠 전부터 마당 한 쪽에서부터 조금씩 풀을 뽑아보기도 했는데, 정말 뒤돌아 보면 어느새 그 보다 작은 풀들이 다시 올라오는 모습에 질려... '내가 풀한테 지고 말 건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풀과의 전쟁'이 시작된 기분이었다.
그러면서 또 밭을 한 바퀴 도니,
토마토 모종도 비를 맞아야 할 것 같았고, 다른 채소들도 비를 기다리는데... 게다가 '코스모스'며 '나팔꽃' 그리고 김선생님 댁에서 뽑아 옮겨 심은 '구철초'도 말라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하늘은 오늘도 어제와 별다름이 없어 보였고,
더구나 인터넷의 일기예보로도, '당분간은 비소식이 없다'고 하니... 걱정이었다.
'이런 게, 농부의 마음 아닐까?' 하고 고개까지 끄덕이면서.
점심 무렵에 옆집 할머니 댁에 가서 잠깐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김 선생님으로부터 핸드폰이 왔다.
대화 끝에, 김 선생님께서는 '어젯밤에 손님이 와서 술을 마셨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재미있으셨겠네요?" 하고 기로가 물으니,
"재미는 무슨 재미... 손님이 왔으니 같이 한 거지..." 하면서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그러면서 기로가 생각해 보니,
선생님은 다른 사람들과의 술자리가 벌어지면, 이따금 기로에게 전화를 하신다는 게 상기되었다.
그렇지만 기로 자신이나 김선생님은 (차가 없어)아예 운전 자체를 못하기 때문에,
바로 오라고 할 수도 없고, 또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다 보니... 거리 상으론 그리 멀지 않았음에도 서로가 그리워할 뿐... 생각 같이, 잦은 왕래를 할 수는 없는 처지였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기로는,
'아, 이 나이에 차도 없이 살아가는 나. 차가 있을 수조차 없는 나. 운전면허만 따 놓았지, 10 년 정도 운전을 하지 않았으니, 운전을 할 줄이나 아나...... 그러고 보면, 내가 살아가는 모습도 참 어줍잖은 것 같다.' 하고, 이것 역시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니라고 못박고도 있었다.
낮에는 여름 같았는데, 밤바람은 약간 스산했다.
저녁을 먹고 안방의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가, 그래도 답답해서 기로는 방문을 열어놓고 하모니카를 불기 시작했다.
그만큼 밤 기온도 쾌적했던 것인데,
갑자기 격이 으르렁 댔다.
그래도 기로는 하모니카를 계속 불고 있었는데, 웬 사람이 걸어가다가 하모니카를 불고 있던 기로를 빤히 쳐다보는 것이었다. 그러니 두 눈이 마주칠 수밖에.
물론 그는 잠시 멈칫 했다. 마치 무슨 말이라도 할 자세인 것 같았다.
기로도 순간적으로,
'그만 불까?' 했지만, 하모니카를 멈추지는 않았다.
그러자 그는 민망한지 힐끗힐끗 돌아보며 축대 아래로 자신의 모습을 감추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다시 고개를 내밀더니... 이내 사라져 버렸다.
기로는 계속 하모니카만 불었는데,
그러면서도,
'그 사람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안개가 자욱한 아침이었다.
새벽부터 격이 낑낑댔지만, 여섯 시가 조금 넘어서 인야가 밖으로 나가니 몸을 이리저리 돌리며 난리였다.
다른 날처럼 기로는 개를 데리고 호숫가로 나갔다.
그런데 개는 오늘 따라 용변이 급한지 인야를 질질 끌고 늘 가는 호숫가로 인도하는 것이었다. 둔덕에 닿자마자 인야가 개 줄을 풀어주니, 개는 밭쪽으로 뛰어 올라가 오줌을 누었다. 꽤나 오랜 시간 같은 자세의 모습이어서,
'어? 되게 오줌이 마려웠던가 보구나!' 하고 있었는데,
어제 오후에(다른 때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낑낑대기에 데리고 나가 용변을 보게 했었고, 평소처럼 저녁을 먹고 나서는 격이 인야의 눈치를 보며 나가자고 하는데도, 냉정하게 끊어버렸었다.
그러고 보니, 그 긴 시간을 참아내느라 꽤나 힘들었던가 보았다.
'그러니, 너도... 하루에 두 번 나가는 걸로 길들여져야 한다. 아침 저녁으로 널 데리고 나가는 것도 나에겐 쉽지만은 않은 일이니, 너도 익숙해져야 한다는 거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 보니, 안개 속에서도 찔레꽃은 정말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예닐곱 개씩의 꽃송이가 뭉쳐 한 덩어리의 꽃처럼 피는 찔레나무들은 여기저기서 둥그런 모습으로 자리를 잡고 절정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 향기도 짙었다.
썩 좋다고만은 할 수 없었지만, 뭔가... 확실히 짙고 끈끈한 냄새였다.
'근데, 우리나라에 웬 찔레나무가 이리 많을까?' 하다가, '오늘 낮에는 그 것을 한 번... 그려볼까?' 생각했었는데,
그냥 지내 버렸다.
점심을 서둘러 해 먹고 기로가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상범의 처가 큰 아들내미 '학부형 모임'의 여자들 몇을 데리고 '夢想?'에 왔다.
그들은 산장집에 가서 밥을 먹겠다고 했는데, 미안해선지... 기로더러 함께 가자는 것이었다.
'내가 왜?' 하면서, 그 자리에는 가고 싶은 생각 자체가 없었기 때문에,
"제가 그런 자리에 왜 끼겠습니까?" 하고 정중히 거절을 했지만, 만약 갔다고 해도...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일 게 뻔했던 것이다. 그래서,
"저는, 이미 식사를 한 뒤인 데다가, 민물고기는 입에 대지도 않는 사람이라......" 하면서, 게다가 그대로 집에 머물러 있어봤자 그들을 불편하게 할 것 같기도 해서... 그들이 산장에 가는 길에 나와,
기로는 배를 타고 호수로 나갔다. 그러면서는,
'야, 여인들의 옷차림이... 이제, 완전 여름이로구나!' 하고도 있었다.
그런데 기로가 그들과 함께 집을 나갈 땐, 얌전하게 누워있던 격이,
기로가 호수로 나가 배를 타고 나가자, 낑낑 대며 짖어대는 소리가... 호수까지 들려오는 것이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다시 돌아와 격을 데리고 배를 탔다.
어쩌면 여인네 들이 산장집 '원두막'에서 밥을 먹으면서 자신을 관찰할 것 같아, 기로는 가급적 서둘러 호수 건너편으로 노를 저어갔다.
그렇게 금세 기슭에 가까워지고 있었는데, 격은 배 난간에 앞발을 나란히 올려놓고는... 밖을 열심히 바라보고 있는 것이었다. 순간 기로는,
'날도 더운데, 격에게 수영이나 시켜볼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잠시 배를 멈추고는,
"격, 너 수영해라!" 하면서 격을 물에 밀어 넣으려고 하자,
개는 깜짝 놀라더니, 겁이 나는지... 몸을 배 안으로 납작 엎드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뭍까지의 거리를 보니, 약간은 먼 것도 같아... 한 10 미터 쯤 더 간 다음에, 이제는 아예 개를 들어,
"너, 겁먹지 마! 이 정도는 괜찮을 거야!" 하면서 강제로 물에다 넣어버렸다.
'설사, 만약... 무슨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이 정도로는... 큰 일이라고 볼 수 없을 거야. 그리고 니가 이런 것도 못한다면, 진돗개도 아닐 거고......' 하는 생각에서 했던 행동이었다.
물론 갑작스런 상황이라 격은 당황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영을 곧잘 했다.
머리만 물 밖으로 내민 상태로 수영을 하면서, 배를 따라왔던 것이다.
그렇지만 기로는 일단, 개의 눈을 주시했다.
약간은 겁을 먹은 듯했지만, 생각보다는 평온했고... 수영도 제법 잘하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개가 선천적으로 수영을 할 수 있다는 동물이라는 사실이 부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개는 배를 따라오다가, 지 스스로 조금 짧은 거리임을 판단했는지... 방향을 바꿔, 다른 쪽으로 가더니 뭍에 닿는 것이었다.
그것마저도 신기했는데,
그리고 그 때부터는 신이 나서, 물이며 땅이며를... 뛰어 다니기 시작했다.
마치, 지 스스로도 자긍심을 느끼는 것처럼......
기로가 보기에도, 충분히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우리 사람도,, 선뜻 물에 들어가기가 꺼려져서 그렇지, 일단 한 번 들어가면... 그 시원함과 상쾌함에 너무나도 쉽게 기분전환이 되는 것처럼......
그런데 요즘, 여름 냄새가 풍기면서... 어느덧 잠자리가 모습을 나타낸 듯싶었는데, 오늘 따라... 그 수가 적지 않았다.
그래선지 격은 호수 위를 나르는 잠자리를 물겠답시고, 물을 첨벙거리며 이리 뛰고 저리 허부적대며... 자유를 만끽하는 것이었다.
그제야 기로는,
'그래, 합격이다! 내 개로는......' 하면서,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천천히 하모니카를 꺼내 불기 시작했다.
# 권태(?)
요즘 나는, 배를 타는 것도 시큰둥해 하고 있습니다.
오늘, 배를 며칠 만에 타보았는데, 하모니카를 불어도 별 느낌이 없었습니다. 아니, 그런 행위 자체가 싱겁기만 하드라구요.
그런 내 모습에, 나도 깜짝 놀라고 말았답니다.
처음 배를 타기 시작할 때의 행복했던 마음은 어디로 가버렸을까? 하모니카를 불면서 후련하게 가슴이 뚫리던 기분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놀람 그 자체를 떠나, 어쩌면 충격이기도 했답니다.
어느새 내가 그런, 무감각한 사람이 되어있다니......
이 아름다운 경치, 호수위로 그림처럼 노를 저어 가는 모습, 그 안에서 불어대는 하모니카... 그런 것들마저도 이제는 왜이리 무의미한지......
날씨 때문일까요?
아닌 것 같습니다. 날씨가 내내 뿌옇게 건조해서 지겹긴 하지만, 그래도 여기는 서울하고는 너무나 다른 환경 아닙니까? 누가 보더라도 아름다운 풍경에 시원함까지 갖춘, 여름을 보내기엔 어쩌면 이상적인 곳일 수도 있는 곳인데......
처음, 바뀐 환경에 쉬 감동하고 마음이 움직이던 상황에서, 이제 일상으로 자리 잡아설까요?
글쎄요, 그럴 수도 있을 것 같긴 한데요......
일상이 되어버린다는 것. 그 것은 사람의 감흥마저 무감각하게 만드는 걸까요?
그럴 수도 있기는 하겠는데요......
근데, 근본적인 원인은 그 게 아닌 것 같습니다.
내가 요즘 이상해져가고 있는 것 같거든요......
그 대표적인 현상으로는, 요즘... 통, 내 작업을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즘, 밤마다 몇 시간씩 일을 한답시고 앉아 있으면서도, 그림을 전혀 못하고 있거든요?
하품만 해대고 졸립고... 그러다 픽 쓰러지는......
이런저런 불안한 상황이기는 하지만, 그걸 부정하지는 못하지만, 언제는 뭐... 얼마나 안정된 생활을 했던가요, 내가?
나에게 벌어지고 또, 하루하루 다가오는(이미 지났을 수도 있는... 다만, 독촉이 없을 뿐.) '빚'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초조해 하다가, 그 불안감마저 다시 일상이 된 것 같은데... 그게 또,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무뎌지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체념해 가면서 뻔뻔해지고......
그러는 사이, 마음마저 피폐해진 걸까요?
아, 그런가 봅니다.
어느새 내가 이렇게 무감각한(멍청한) 사람이 되어 있다니......
이럴 땐, 술이 약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근데요,
술 마실 기분도 들지 않는 건 또 무슨 일이랍니까?
그저 마음만,
아, 날씨만큼이나 우중충하고 탁하게 답답합니다.
그런데 빚 생각을 하면, 멍청하게 오던 잠마저 싹 달아나 버리는데... 그러면, 그 걸 잊어버리고 싶고... 그러다가는 정말 멍청하게 잊기도 하는......
어느 장단에 춤을 추어야하는 건지,
나도 참, 걱정입니다.
5 . 22
그렇지만 기로 자신은 모르고 있었다. 그게 일종의 ‘우울증세’라는 걸......
다만,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있었기에, 그에 따른... ‘일상의 권태’ 정도로만 여기고 있을 뿐이었다.
허긴, 기로는 '우울증'이라는 단어조차도 모르고 있었다.